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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덜밑 집단총살사건①

주암호에 잠겨버린 덜밑의 영혼들

  • 입력 2018.07.09 12:28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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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천벽력같이 날아든 소식

반란군들 등쌀에 치어 숨소리조차 제대로 내지 못하고 눈치만 살핀지도 어느덧 일 년 반이 지나 삼팔선이 터졌다고 소문이 돌아 온 동네가 뒤숭숭한 가운데 시절은 본격적인 여름으로 접어들고 있을 때였다.

들판에는 나락이 온통 푸름으로 기지개를 펴고 있으니 전쟁은 전쟁이고 먹고 살아야 하는 농부들은 들판으로 나갈 수밖에 없었던 한낮의 더위가 한참 어우러지는 7월 20일(음력 6. 6) 벌교 쪽에서 달려온 국방색 포장을 씌운 검은 경찰트럭 한 대와 쓰리코다가 아랫배골 횟돌바구를 지나 죽산 무등쟁이를 향해 꽁무니에 먼지를 가득 날리며 달려갔다.

죽산 무등쟁이 들

이읍 감남쟁이 들논에서 피를 뽑던 병우 아버지는 허리를 펴고 도락구 꽁무니가 뿌옇게 흩어놓고 간 흙먼지를 바라보며 무덤덤한 얼굴로 “오늘도 몇 놈 죽어 나가 것구만!” 하고 중얼거렸다. 밥 먹듯이 계속되는 토벌작전이 머릿속에 배어서 나오는 입에 붙은 소리다.

트럭이 무등쟁이 들을 가로질러갈 때는 덕동 죽산 사람들은 물론 건너편 여운녈 들에서 논을 매던 사람들도 먼발치서 달려가는 차 소리에 관심이 끌려 허리를 펴고 바라보기는 하여도 늘상 있는 일이라 대수롭잖게 여길 뿐, 잠시 후에 일어날 비극의 총소리는 짐작조차 못한 채, 눈을 힐끗 하늘로 들어 올려 살풋 느껴지는 허기를 해높이와 한차례 견줘 보고서, 이내 머리를 나락뿌리에 파묻고, 두 손을 물속에 담가 포기 사이를 휘저어 나가기에 바빴다. 무등쟁이 동네를 지나 간지 한참이 되었을 때, 덜밑에서 하늘을 쪼개는 듯 숨가쁜 총소리가 한동안 골짜기를 뒤덮고 가라앉더니, 트럭들은 다시 먼지를 날리며 왔던 길을 유유히 되돌아가 버리고 말았다.

이것이 죽산마을 옆 덜밑 집단총살사건이 있던 날의 상황이다.

“벌교경찰서에서 빨갱이들을 한 차나 실어다가 덜밑에서 몽땅 쏴죽였다네에.”

다음날부터 이런 소문이 마을 마을로 소리 없이 퍼져나갔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마을사람들은 트럭이 내려가는 것만 보았지, 현장을 가까이서 직접 목격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다만 그때 덜밑이 건너다보이는 봉천 쪽 들에서 논일을 하던 몇몇 사람이 이 광경을 보았으나 너무도 어마어마한 사건이었으므로 입을 잘못 놀렸다가는 목숨이 남아나지 못한다는 두려움에 눈을 질끈 감을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몸에 밴 '쉬쉬'라고는 하지만, 너무도 엄청난 사건이기에 더욱 조용히 입에서 입을 건넜다.

여순사건이후 토벌이네, 색출이네, 하루도 총소리가 그쳐본 날이 없으니 총 든 사람만 보면 오금이 저리고, 자칫 잡혀가는 날에는 죽는 줄로만 알았고 그래서 이쪽이나 저쪽이나 총 들고 다니는 놈들 곁에는 쌀가마니를 준다고 불러도 사촌에게 양보한다는 때였으므로 그런데는 지나갈 일이 있어도 멀리 돌아서 갔고, 아는 체를 했다가는 어느 쪽에서 뒤통수를 맞을지 몰라 아예 처음부터 경계심으로 멀리 하니 아무리 호기심이 일어도 현장에 다가가볼 생각을 하는 사람은 있을 수가 없었다.

총살현장이 가깝기로 말한다면 덜밑 동네인 죽산과 무등쟁이에서는 거리가 삼사백여 미터에 불과하지만 튀어나온 산줄기가 한 모퉁이를 이루고 있는 그곳은 바위돌이 너덜을 이룬 후미지고 음침한 산비탈 밑이어서 귀신에 관한 이야기도 많아 날이 궂거나 어두워지면 마을사람들이 다니기를 꺼려할 정도로 거리감이 있는 곳이다.

그보다는 오히려 거리는 멀어도 하천 건너 봉천에서는 덜밑이 바로 보이므로, 시각적으로는 오히려 가깝게 느껴지는 곳이다.

당시의 상황도 멀리서나마 건너편 봉천 쪽 들에서 목격한 사람에 의해 소문이 나기 시작하였고, 시간이 흐름에 따라 추측과 과장이 더해 공포 속에 퍼져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소문만 숨어돌 뿐, 어느 누구도 그곳에 가서 확인해 보려는 사람은 없었다.

그 이유는 빨갱이를 죽인 현장에 가서 어슬렁거린다는 것은 ‘아-나 나도 잡아 가거라’하고 목숨을 내놓는 것이나 다름없기 때문이다.

소문은 입에서 입을 타고 옆마을로 퍼져 갔다.

곡천교와 죽산 덜밑

“한낮에 도락구가 두 대나 내려갈 때부터 무슨 일이 날 것 같더라고.”

이렇게 수군거리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대부분은 입을 다물고 남의 일처럼 모른 체 무표정해 보이려 하지만 속마음에 있는 기색까지 감추지는 못하였다.

큰마을인 이읍에도 벌교경찰서로 잡혀갔던 자수자들이 덜밑으로 실려가 죽었다는 소문이 돌았다. 소문은 큰아들 병순이가 조계산으로 끌려가 자수하여 살던 중에 느닷없이 잡혀가 애태우고 있던 아버지의 귀에도 들어갔다.

그러니까 일주일 전엔가, 모랭이 논에서 아버지와 병순이, 병우 형제가 함께 논에서 피를 뽑고 있을 때 출장소 직원이 와서 병순이를 가자고 불렀다.

보통 때 같았으면 미리 모이는 날을 정해주거나 갑자기 소집을 해도 소사를 시키는데, 직원이 직접 들에까지 와서 가자는 것은 분명 이상한 일이었으나, 그때는 미처 생각할 겨를도 없이 행여 비위를 거슬릴까봐 물어보지도 못하고 딸려 보내기에 바빴고, 결국 출장소에 모인 이읍 마을의 자수자 다섯 명은 그날로 벌교경찰서로 실려 가고 말았다.

이 갑작스러운 일은 6. 25가 발발하여 이승만정부가 내린 예비검속령에 의해 앞으로 다가올 처참한 집단학살의 준비단계였지만, 이 사실을 모르는 병순이 부모는 불안하기만 할 뿐 어찌 해볼 방법이 없으니, 하늘만 바라보며 애타는 나날을 보내던 중에 도저히 믿고 싶지 않은 청천벽력 같은 소문이 날아든 것이다.

 

빨갱이가 되어 붙잡힌 병순이

이읍마을의 순박한 시골청년 임병순이 여순사건이 발발한 직후에 공산사상에 솔깃한 마음이 들어 마을청년들과 한데 휩쓸려 조계산으로 입산을 하였다가 지리산에까지 간지 몇 개월 만에 붙들려 자수자가 된 경위는 다음과 같다.

1925년 송광사의 남쪽을 감싸고 있는 조계산줄기너머 이읍 마을 임씨 집안의 장남으로 태어난 병순은 입학연령이 되자 지름길로도 이십 리가 넘는 거리에 있는 면소재지 낙수의 송광국민학교를 다녔다.

일제강점기인 당시에는 형편이 어려워 학교를 다니는 어린이들이 몇 안 되었다.

그러나 이읍은 시골임에도 전통적으로 학문을 하는 집안이 많았을 뿐만 아니라 송광사의 영향으로 개화가 빨라 일찍부터 서울과 일본으로 유학을 보낸 사람이 여럿 있었을 정도로 넉넉하고 깨어 있는 어른들이 이끌어 가는 마을이었다.

부자는 아니어도 잡곡밥이나마 끼니는 굶지 않을 정도의 가세인 병순은 총명하여 입학 전에 마을에서 얼마간의 기초한문을 깨우치기도 했지만 소학교 상급생일 때는 영어가 섞인 책을 볼 정도로 향학열이 있었고 집안에는 책이 기름궤짝으로 가득 차게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형편상 순천의 중학교에 진학은 못하고 집에서 농사를 짓고 살게 되었다.

그런데 해방이 되고난 어느 날부턴가 서울에서 직장생활을 한다던 한 골목에 살던 박종렬이가 고향으로 내려오더니 날마다 병순이를 불러내어 속삭이는 시간이 많았다.

그때는 부모님이나 열다섯 살 동생 병우도 무슨 얘기를 하는지 모르고 재미있는 서울 얘기를 하는가보다 했다.

그는 그 박종렬이와의 속삭임이 빨갱이로 몰리는 시초였을 줄은 꿈에도 몰랐다.

박종렬이는 병순의 집과 한 골목에 사는 선배로, 어릴 때부터 야학에서 선생이 한번 불러주기만 하면 척척 외워서 천재소리를 들을 정도로 머리가 좋았다.

그래서인지 중등학교도 마치지 않고 서울로 올라간 그는 문교부에 취직을 하여 그가 아주 실력이 좋다는 소문을 들은 마을사람들은 다음에 그가 문교부장관 한자리 해먹을 것이라고 자랑삼기도 했다.

그런데 서울에 있으면서 일정 때부터 만주에서 국제공산당일원으로 독립운동을 하면서 김일성과도 편지를 주고받았다는 병순이는, 동네 이읍의 하천 건너 조포막 도갓집 아들 김길만의 좌익선동에 넘어가, 해방이 되자 고향으로 가서 공산운동을 하는 것이 조국의 장래를 위한 일이라는 설명에 동조한 종렬이가 직장을 그만두고 향리에 내려와 청년들에게 공산사상을 주입시키느라 날마다 병순에게 사회주의 사상을 속삭였는데, 학문에 목말라 하던 병순의 귀에는 새로운 세상이 번쩍 열리는 소리로 들려 현혹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라는 사실을 동생 병우는 뒤늦게 알게 되었다.

여순사건이 터지자, 다음해 7월 한청훈련을 마치던 날을 디데이로, 이미 입산해 있던 봉기군과 좌익청년들이 상하 이읍과 장안마을 등의 젊은이들 80여명을 강제로 입산시켜 버리는 어마어마한 일이 발생하였다. 이때 한청 훈련조교로 있었던 임병순도 입산을 하게 된다.

이 사건의 뒤에는 일정 때 서울의 대학으로 유학을 가 공산주의사상에 심취하여 활동에 앞장섰던 이기표 선생이 있었고, 그의 지휘를 받고 행동에 앞장 선 상이읍의 박장호 박추환 장안의 김형수 등이 사전계획에 의해 거사되었다. 평화롭던 마을에 청년들의 씨를 말리고 빨갱이 소굴이라는 오명의 굴레를 씌워버린 커다란 사건이었다.

물론 당시 내부에 일부조력자가 있었으나, 비밀유지를 위해 박장호 등과 가까운 일부 몇 사람만 동조자로 포섭이 되어 있었으므로 임병순이 동조자였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렇게 조계산으로 휩쓸려 들어가 지리산에까지 갔다가 6~7개월이 지난 한겨울 정월 무렵에 황전을 거쳐 조계산으로 넘어와 보성 노리산으로 가기 위해 자기 집이 바라다 보이는 산비탈을 지나쳐 남쪽 오룡마을 외딴빈집에 보성의 동료 한사람과 같이 숨어 밤을 지냈다. 그러다 새벽에 밥을 지으려고 불을 피우고 있을 때 마침 족제비 덫을 보려고 이곳을 지나던 그 마을 조기문이 발견하고 반란군이 숨어 있다고 출장소에 신고를 해버리고 말았다. 새벽에 긴급출동한 출장소 경찰들이 날이 밝아올 무렵 현장 가까이 도착을 하였다. 그들은 빈집이 백여 미터 쯤 가까워졌을 때 허리 높이의 논 언덕에 몸을 구부리고 집을 향해 일제히 집중사격을 가했다.

그렇게 멀리서부터 총을 쏘아대는 것은 누가 보아도 이상하게 보였다.

그러나 이곳을 지나면 집이 있는 곳까지는 무릎 높이의 계단식 논둑만 일정간격으로 줄줄이 있어 엎드려도 자칫 몸이 노출되는 지형이므로, 우선 멀리 안전한 곳에서 먼저 총을 쏘아 몰아내려는 일종의 타초경사(打草警蛇)의 작전이었다.

그러나 그것이 당시 토벌대의 작전이라고는 하나 이미 신고를 받고 적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나 다름없는 일방적 상황에서 그렇게 총을 쏘는 것을 한심하게 여기는 사람들도 많았다. 그렇지만 당시 한청토벌대로 참가했던 한 노인은 “당신 같으면 안 그랬을 줄 아느냐"고 말한다.

인력,장비, 모든 것이 열악한 경찰토벌대들로서는 숨어서 기습하는 적들에게서 몸을 지키기 위해서는 적의 사살이나 체포는 둘째로 치는 피동적 본능이 습관화되어 버린 결과였다. 그래서 독안에 든 쥐를 놓쳐버리는 경우를 다반사로 보는 보조원들이나 민간인들 사이에는 두고두고 어처구니없어 하는 웃음의 이야깃거리로 전해 내려오기도 한다.

갑자기 기습을 받은 두 사람은 후다닥 튀어나와 마을 옆 산비탈에 있는 대밭을 향하여 몸을 낮추며 구르듯 내달렸으나, 병순은 뒤따라오던 동료가 쓰러지는 고함을 들었을 뿐 어찌 해보지도 못하고 홀로 대밭에 다다라 피신을 하는 데는 성공하였다.

그렇지만 거기까지였다. 결국 포위가 되어 손을 들고 나옴으로써 검거되고 말았다.

다시 말하면 빨갱이를 생포한 것이다.

이미 체포된 순간부터 목숨을 포기해 버리고 만 병순이지만 잡히는 순간부터 욕설과 발길질을 당하며 시오리 남짓한 길을 끌려 이읍출장소 유치장으로 밀어 넣어졌다.

이 시기 경찰들은 빨갱이라면 조상을 죽인 철천지원수를 대하듯 했으므로, 누가 체포되었다 하면 가족은 말할 것도 없고 친구나 인척관계로 연줄이 조금이라도 닿은 사람이라면 언제 무슨 불똥이 튈지 몰라 눈치를 보며 전전긍긍하던 때였다.

그러므로 병순이가 잡혀온 것을 안 사람들은 너나 할 것 없이 쉬쉬하고 눈길을 피하며 어찌 되는가 눈치만 볼 뿐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속마음은 달랐다.

경찰들과 달리 이웃들은 입산자들에 대해 측은과 동정심이 가득 차 있을 때였다.

그 이유는 사상에 대해 무지할 뿐만 아니라 여태껏 순하고 착하게만 살아왔던 이웃의 젊은이들이 하루아침에 산사람이 되기는 했어도, 어쩌다가 뭣모르고 휩쓸린 것이지 그들을 빨갱이는 애초부터 모르는 순한 형제일가친척 중의 하나로 믿었기 때문이었다.

 

짐샌, 우리 큰놈 좀 살려 주시요

병순이 가족들은 목이 타 발을 동동 굴렸다.

물론 어머니와 아이들은 직접 나설 수가 없지만 바람 앞의 등불 같은 장남의 목숨을 두고 아버지는 앉아서 보고만 있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허겁지겁 집밖으로 뛰쳐 나갔다. 그가 찾아 간 곳은 마을의 유지 김귀동 씨 집이었다.

“귀댕이 짐샌, 우리 큰놈 좀 살려 주씨요.”

허리춤을 붙들고 매달리는 병우아버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이미 무슨 일인지 훤히 짐작을 하면서도 "아이고 뭔 일인디 이러시요?" 하고 태연하게 되물었다.

“아이고. 지금 우리 병순이가 잽혀 왔는디 짐샌이 가서 자수 한 걸로 좀해서 살려 주시야 쓰겄소. 은혜는 절대 안 잊어불 것 구만이라.”

이미 체면이고 뭐고 다 버린 울상 뿐이었다.

김 씨는 “아~먼 그렇게 해봐야 쓰겄지라. 그렇다고 인자 막 잡혀왔는데 바로 가서야 쓰겄소. 내가 알아서 낼 오후에나 가 볼라“ 하고 여유 있는 목소리로 말했다.

병순이 아버지의 애간장이 타는 마음은 알지만 입산자들이 잡혀오면 처음부터 혹독하게 다루는 절차를 알고 있기 때문에 혼이 좀 나봐야 한다는 생각에 일부러 그런 것이다.

그런대로 고맙게 생각하고 집으로 돌아온 병순이 아버지는 뜬눈으로 밤을 새우고 다음날 일찍부터 귀동이 짐샌 집 앞 큰길에 나가 그가 출장소로 가기만을 기다렸다.

그렇지만 귀동이 짐샌은 어디를 다녀왔는지 세 시가 다 되서야 출장소를 향해 나섰다. 앞으로 달려가서 꾸벅 절부터 하고 태산 같은 무게로 움직이는 귀동 씨의 그림자를 비켜서며 잔뜩 움츠린 어깨로 뒤를 따르는 병우아버지의 얼굴에는, 막연하나마 안도의 빛이 스쳐가기도 했다. 그것은 귀동이 짐샌의 능력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당시 김귀동 씨는 사십대 이읍마을의 부자인 우익인사 중의 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다른 온건한 우익 지식인 서해선생(성기현), 최원명 교장, 춘광스님 같은 분들과는 달리, 그는 출장소(지서)후원회장을 자처할 정도로 적극적으로 우익활동에 앞장 선, 혼란기에 경찰 권력을 최대한으로 활용한 사람이었다.

그가 해방직후 마을 뒤편 조계산의 소나무산판을 하게 되면서 허름한 두 개의 교실과 조그만 교무실 한 칸의 이읍국민학교 마당에 발동기제재소를 차려놓고 학교를 새로 지은 것이 사업의 시작으로, 이후 수완을 발휘하여 마을입구 물방앗간 위 천변에다 GMC 머리(엔진)로 제재소를 확장하여 본격적인 산판사업을 하던 중에 여순사건이 터졌고, 전시나 다름없는 이 혼란기에 그의 수완과 재능은 아낌없이 발휘되어, 그의 재력은 이읍과 주변마을 사람들의 목숨을 쥐락펴락 할 정도로 출장소(지서)에 절대적인 영향력을 행사했다.

다리 건너 창고건물이 옛 이읍지서위치

당시는 입산자들에게 국가에서 자수를 적극 권장했던 기간으로, 이 과정에서 자수로 인정하는 판정은 출장소장의 절대 권한이었으므로, 자수냐 신고냐, 검거냐 체포냐 이런 과정이 문제가 아니라 서류상으로 어떻게 꾸미느냐가 최종 자수로 결정이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후원회장인 김귀동 씨의 역할이 결정을 좌우하였기에 누구라도 제일 먼저 귀동이 짐샌을 찾아갈 수밖에 없이 된 것이다.

차석과 순경이 구타와 고문으로 임병순을 다루고 있을 때 김귀동 씨가 출장소 사무실 문을 열고는 목소리를 높여 “수고들 하십니다” 하고 들어섰다.

인사말 속에는 약간의 거드름이 묻어나는 듯했다.

사무실 바닥에 무릎을 꿇리고 앉아 빨갱이 다룸을 받아온 임병순은 이미 초죽음이 된 거나 다름없었다.

행동을 멈추고 공손히 인사를 받는 직원들과 병순을 향해 누구에게랄 것도 없이 김 씨는

“저~어 혼 좀 나도 괜찮아! 쓸데없는 놈들하고는 뭣 때문에 어울려가지고서는” 하고서 책상 위에다 군홧발을 올린 채 비스듬히 앉아 있다가, 후원회장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무슨 말을 할지 알겠다는 듯, 자세를 바꾼 소장에게 한 걸음 다가가며, 저 사람 본래 아무것도 모르고 착실한 놈이요. 반성하고 나라에 충성할 기회를 주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하고는 자신이 보장하겠다는 말까지 덧붙이고 나서 소장과 계속 대화를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당일 풀려날 일은 아니었다.

그다음부터 고문과 구타는 완화되었으나, 조사는 계속되었고 질문 내용은 대부분의 입산자들에게 하는 것과 다름없이 입산경위 산속생활과 주동자들의 행동에 관한 내용이었으나, 가끔씩 박종렬 김길만의 이름이 나오기도 하는 것으로 봐서, 어느 정도 주모자 급으로 취급하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때면 김귀동 씨는 무식하여 아무것도 모르면서 휩쓸린 것이라고 대변을 하였고 어느 정도 소장과의 대화가 끝나자 출장소를 나가면서 밖에서 사색이 되어 움츠리고 있는 병순이 부친에게 자수자로 받아주게 하였으니, 염려 말고 집으로 가라는 말과 함께 소장님께 감사하라는 말을 덧붙였다.

귀댕이 짐샌이 나섰으니 잘 될 것이라 믿으면서도 혹시나 하고 마음 졸이던 병순이 부모는 코가 땅에 닿도록 허리를 굽실거렸고 이미 자수로 받아만 준다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장손을 살려야한다는 마음밖에 없었으니 다른 자수자의 부모들이 자식을 살리기 위해 출장소에 매달리는 노력을 보아 왔는지라 병순이 부친도 빨리 실천으로 옮겨야 안심이 될 것만 같은 조바심에 지서 주위를 맴도는 안사람에게 뭐하고 있느냐고 재촉하고 뒤따라 집으로 돌아 왔다.

아들이 자수자가 되었다 해도 당장 집으로 보내주지는 않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산골의 저녁은 해가지고 나면 곧 밤중이 된다. 더군다나 세상이 어수선하니 날이 어두워지기만 하면 이중 돌담으로 토치카를 쌓고 외곽으로 대발을 둘러친 마을 입구의 출장소를 반란군으로부터 지키는 보초와 서치라이트만 눈을 부릅뜨고 있을 뿐 마을은 적막강산으로 변하고 만다. 밤으로 살아 움직이는 사람이라고는 산에 숨어 어둠의 천지를 자기들의 세상으로 활개 치는 빨갱이들이거나 그들의 습격을 지키기 위해 숨죽이며 외곽을 지키는 매복조들의 눈동자 뿐 그 사이에 목숨을 내놓고 밤 골목을 배회할 양민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일이다.

병우 아버지도 일찍 자리에 들어 방안은 깜깜 했지만 병순이 생각에 잠을 이룰 수가 없어 뒤척였다. 눈을 붙였는지 말았는지 첫닭 우는 소리에 눈이 뜨여 식구들의 잠을 깨우지 않으려고 조심스럽게 이불속을 빠져 나오려고 할 때

“멋땀시 벌써 일어날라 그러시오.” 하고 안사람 역시 잠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음을 알렸다.

“질눈 틔면 얼릉 벌교 장에 댕게와야 쓰겄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듣지만 너무 이른 시간이므로 “밖이 아직 어둡소. 한숨 더 붙이고 일어나서 가시시오.” 그랬지만 이왕 떠버린 눈 마루로 나와 대통담배를 피워 물고 시간을 보내다가 먼동이 희미하게 터오자마자 새벽걸음에 지게를 지고 벌교시장으로 달려갔다.

다음날도 병순은 오전부터 닦달을 당하며 다시 말하면 예비자수라로서의 출장소 유치생활이 시작되었다. 이때의 출장소장은 경상도 사람인 오 소장이었다.

초장에 벌교에 도착해 먼저 어물전으로 가서 도리방석만한 누런 참가오리를 한 마리 산 다음에 꼬막을 사서 조래기에 담아 얹고 돌아 나오는 길에 애저(새끼돼지) 한 마리와 이것저것 장보기를 속히 마친 다음 되짚어 잰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정오를 한식경나마 비낀 시간에 문밖에 도착한 아버지의 약간 숨찬 목소리가 집안을 울렸다. 

“뭣하고 있는가 언능 받아서 장만 안하고오.”

애저를 삶고 참가오리를 조각내어 회무침을 하고 고막을 삶고 전을 붙이고 나물을 무치고, 이렇게 장만한 음식들은 해가 말거리재 위에 서 발 남았을 때 출장소로 날라졌다. 김귀동 씨를 통해서 미리 시간을 잡아 놓은 것은 물론이다.

온 식구가 나서서 두세 차례를 오가며 출장소 문 앞으로 나른 음식들은 다시 토치카 이중 담 안으로 옮겨져, 사무실에는 소장과 후원회장이 앉는 상과  차석과 직원들이 앉을 상이 따로 한쪽에 차려졌다. 병순이 모친은 상을 차려놓기가 바쁘게 종종걸음으로 나갔고 소장 상의 식사 수발은 부친이 들었다.

소장과 후원회장이 상에 마주 앉자, 하늘아래 죄인이 된 병순이 아버지는 허리를 펴지도 못한 채 막걸리 한 잔 씩을 따라 올리면서, 변변치 못해 죄송하지만 널리 양해 바란다,고 더욱 허리를 굽히자 소장이, 아니 이러지 않아도 되는데, 하며 같이 식사를 하자고 했으나 그는, 무슨 말씀이냐,고 손사래를 치며, 식기 전에 어서 드시라,고 뒷걸음질을 쳐 나왔다.

사실은, 제발 자식 놈을 좀 살려달라,는 말을 하고 싶었으나 목구멍 밖으로는, 그럼 많이 드시라,는 말로 바뀌어 나오고 말았다.

안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대부분 귀댕이 짐샌의 목소리이고 가끔씩은 들으라는 듯 병순이를 편드는 소리를 하기도 했다.

병순이가 체포되어 자수자가 되기는 하였으나, 그는 출장소 밖을 나가지 못하고 죄인으로 지서의 머슴 생활을 한지 보름 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가족들은 안도와 기쁨으로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런 병순이를 보고 아버지는, 니가 맘 한번 잘못 묵어서 그 고생 아니냐? 이제 딴 생각 말고 죽은 듯이 농사나 짓고 살 거라. 그것이 우리 집안을 살리는 길이다,라며 달래고 위로를 했다.

그렇지만 병순이는 아무런 대답 없이 자기 방으로 들어가 털썩 쓰러지듯 몸을 눕혀 흐려진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다 눈을 질끈 감아 버렸다.

우리가 노동자 농민의 새 세상을 만들어야 한다는 존경하는 선배의 말에 가슴이 부풀어 있던 중에 한꺼번에 끌려가기는 했지만, 작년에 조계산으로 입산을 하여 지리산까지 갔다가 고향 가까운 곳으로 와서 투쟁을 계속하려다가 붙들리자, 처음에는 잡혀가서 부모님까지 고통을 받게 하느니 차라리 그 자리에서 목숨을 끊어버리려고도 했지만, 모진 목숨 때문이었을까 부모님과 가족을 볼모로 코뚜레를 찬 초라한 자수자가 되었다고 생각하니, 동료들이 나약한 못난이라고 손가락질 하는 것 같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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