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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 덜밑 집단총살사건②

자수자가 되어서도

  • 입력 2018.07.12 16:21
  • 수정 2018.07.23 16:24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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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자수자가 되어서도

임병순이 체포된 오룡 외딴집이 있던 곳

그렇게 하여 오룡의 빈집에서 체포된 임병순도 자수자가 되어 집으로 돌아가 감시를 받으며 매일을 살아가게 되었다.

요즈음의 유식한 법률용어로 말한다면 보호관찰이다.

그러나 전시인 당시의 좌익자수자에 대한 감시는 개인의 자유란 단어는 전혀 의미가 없고 그저 생존 그 자체가 삶의 의미로서 풀리기 전까지는 육체와 정신모두를 출장소에 저당 잡힌 체 나날을 살아 갈 수밖에 없었다.

그들이 지서에 묶여 있는 동안 매일 하는 일은 일반적인 출장소의 잡일은 물론 자수자들을 통솔하기 위해 임명한 사람(대장)의 인솔아래 산의 주인여하를 막론하고 통나무를 베어다가 장작으로 패서 팔아 경비로 충당하는 일을 했고 앞서도 말했듯이 김귀동 씨의 산판에 동원된 것은 오히려 바라는 일에 해당되는 경우이며 개인의 능력과 지서장의 신임에 따라 아예 소사로 일을 하기도 하고 한청대원과 함께 토벌대의 일원으로 선발되기도 하였다.

물론 진정한 자수자로 인정을 받은 사람이라야 가능하며 그들은 좌익에 휩쓸리지 않은 사람들과 다름없이 야간매복 작전에 동원되는 등 출장소에서 지휘하는 일원으로 인정받고 살 수 있었다. 그래서 무지하게 휩쓸린 것을 후회하여 하산(자수)한 자들은 스스로의 생존을 보장받을 목적으로 야간매복이나 토벌작전에 앞장서서 적극적이고 용맹하게 모범을 보이려고 애를 썼다.

그러나 A급으로 점 찍힌 사람이 인정받기란 아무리 노력을 해도 쉬운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가족의 노력과 주변의 도움으로 자수자가 되었다 해도 계속해서 생존을 보장 받는다는 것은 우선 서류를 만들어준 출장소장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그 다음은 부모의 몫이 중요하였다. 만약 출장소장이 바뀐다 해도 인계가 되는 사항이므로 직접서류를 꾸며준 사람과는 차이가 있을지 모르나 출장소장의 성격이나 여건에 따라 적절히 완화 되었다고 판단이 되거나 가족(부모)에게 미칠 화를 무릅쓰고 피신을 해버리기 전까지는 생명을 구걸하기 위한 아부는 계속되어야 했다.

그래서 체포자(자수자) 들의 생존을 위한 부모의 노력은 처절할 수밖에 없었다.

출장소생활을 하는 한 보름 동안에도 병우부모는 사흘이 멀다 하고 출장소에 상을 들여 아들의 목에 달린 고삐를 풀어내려고 안간 힘을 다 썼다. 그것만이 오직 장남을 살리는 길로 알고 세 번째 상을 차렸을 때 귀댕이 짐샌은 병우아버지를 보고 너무 이렇게 하지 않아도 되니 힘들게 이러지 말라고 했다. 그러나 그 말이 무슨 뜻이 포함되어 있는지를 모르는 그는 뭐 이까짓 것을 가지고 그러느냐고 출장소장을 향해 더욱 공손하게 허리를 굽히는 것으로 충심을 전달하고자 했다.

이 모습을 바라보는 후원회장의 얼굴에는 답답하다는 표정이 스쳐지나갔다.

하는 수 없다고 결심을 했는지 출장소를 나가는 길에 병우아버지를 불러 자수로 만들려면 소장도 경비가 많이 난께 좀 도와 줘야 할 것이요. 하고 세상물정을 그렇게도 모르니 하도 답답해 내나 되니까 가르쳐 준다는 듯이 은근하면서도 힐책하는 말투로 일깨웠다.

아차! 하고 스스로 머리를 쥐어박으며 안타까운 눈빛이 되어 짐샌 턱 앞으로 다가서며 그럼 도대체 얼매나 어떻게 해야 좋겠느냐고 어색하게 물었다.

그런 건 이녁이 알아서 하는 것이라고 하자 우리는 아무것도 모르지만 교제를 하는 짐샌은 잘 알 것 인께 제발 좀 가르쳐 달라는 매달림이 골목을 애타게 했다.

병우네 집에서 출장소까지는 직선거리로 80여 미터 골목길을 돌아서도 백 미터가 조금 넘는다. 그러므로 며칠 만에 이제 집으로 와 자유의 몸이 됐다 해도 아직은 잠만 집에서 잘뿐이지 날이 밝으면 어김없이 파출소로 출근을 해야 하는 한마장의 고삐만 늘여준 외박의 자유를 얻었을 뿐이므로 온 가족이 죽어나기를 무릅쓰고 도망을 가지 않는다면 더욱 조심스럽게 행동을 하여 신임을 얻음으로서 한 발짝 한 발짝 길어진 목줄을 마저 풀어버리는 날을 기다려야 할 것이다.

설 이전부터 겨울 내내 자수자들은 대장인 덕동 사람 김연화의 인솔로 매일 장작나무를 하고 출장소에서 시키는 일을 하다가 봄이 되어서는 어느 정도 신임도 얻고 농사철이 되어 집안의 농사일을 하다가 부르면 즉시 가고 이런 상황이 되어 눈코 뜰 사이 없이 짐승처럼 일을 하는 나날을 보내고 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부모의 출장소에 잘 보이려는 노력은 계속 되었다.

처음 붙잡혀 왔을 때와는 달리 어느 정도 활동의 자유가 주어 졌지만 그것은 집안에 묶인 자유에 불과 하였고 병순의 머리에는 불안한 마음이 늘 맴돌았다.

이 무렵 자수자들이나 주목을 받는 사람들 중에 광주 여수 등 도회에 인척이나 연고가 있는 사람들은 피신을 하여 떠나버리는 사람들이 많았다.

병순도 이제 어지간히 활동이 자유로워졌으므로 이제는 더 이상 고리를 끊고 동네를 떠나야 살 수 있겠다는 생각에 아버지에게 여비를 부탁해 보았으나 아버지는 이점 저점 미루고 돈을 만들어 주지 않는 사이에 38선이 터졌다는 소문이 들렸고 느닷없이 예비검속이라 하여 논을 매고 있다가 잡혀가 버린 것이다.

 

예비검속령

임병순이 체포된 오룡마을

그러니까 병순이가 채포되었을 때는 여순사건이 나고 두 번째 겨울이 왔을 때다 당시는 녹음기에 깊은 산속의 봉기군들을 토벌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므로 낙엽이 지고 난 동절기라야 작전이 가능했다. 그러니 겨울의 문턱인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이 실패로 돌아가 지리산 권으로 숨어버린 봉기군들을 토벌하려 해도 당장 다가온 그 겨울에는 우리군경의 토벌조직이 제대로 틀을 갖추지 못해 작전에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그리고는 이어서 봄이 지나고 녹음기가 닥쳐왔으며 계속해서 입산자가 늘어날 때 병순이도 조계산으로 입산을 하여 수백 명의 입산자들이 점거를 하고 야간이면 산간마을을 아예 그들의 세상으로 활개를 치며 드나들던 때였다.

그러나 1949년 두 번째 겨울을 맞으면서 본격적인 토벌작전에 돌입하자 점차 수세에 몰리면서 자수자들도 늘어가게 되는데 그런 때에 병순이가 체포되어 자수자로서 감시를 받으며 농사를 짓고 있을 때 삼팔선이 터졌다는 소문과 함께 예비검속 령이 내려져 대상자의 체포가 시작되었으나 그런 사정을 알 길이 없는 병순은 영문도 모른 체 논에서 일을 하다 마을의 다섯 동무들과 함께 붙들려가 벌교경찰서유치장에 갇히고 만 것이다.

순식간에 병순을 붙들어가 고혼으로 만들어 버린 예비검속 령이란 6. 25가 발발하자 보도연맹대상자 즉 좌익요시찰 인물 중에 위험분자들의 후방대응 활동을 차단할 목적으로 이들을 미리 검거하여 조치하라는 일종의 처단명령이었다.

이 예비검속령에 의해 당시 남한 특히 제주와 전라도 일대에서 남로당관련자뿐만 아니라 억울하게 좌익으로 몰린 민간인들까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한 많은 불귀의 객이 되었는지 모른다. 이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사상전쟁에서는 나타날 수밖에 없는 피할 수 없는 귀결이기도 하지만 제주의 4.3사건과 여순사건은 두 지역에서 좌익과 관련지어 공권력이 무차별 살상에 개입된 처참한 역사적사건이다.

병순이 벌교 유치장에 도착을 하여 보니 이미 순천과 별양 고흥 보성 등에서 잡혀온 젊은 사람들로 가득했고 계속해서 붙잡혀 오고 있었으며 어수선한 속에서도 불려나가 조사를 받는 사람도 있었다.

밤이 되면 유치인들 사이에는 부산으로 후퇴를 한다느니 어떻게 된다느니 불안하고 흉흉한 말들을 주고받는 사람들이 있었지만 병순은 이미 자수를 한 몸 무슨 일이 있으려나 싶으면서도 불길한 생각에 마음을 졸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예비검속 령이 떨어져 검속이 시작되고 있을 때는 이미 읍내 등의 알만 한 사람들은 대부분 사태를 알아채고 있었고 부산으로 후퇴를 한다는 것도 그저 소문이 아니었다.

사실 하달된 예비검속 령은 그 자체가 지휘관의 판단 하에 반드시 알아서 처단조치 하라는 무한의 권한이 위임된 명령이므로 이미 학살은 예고되어 있는 상황이었다.

그래서 경찰관들은 숨 가쁘게 움직였다. 잡아들이기에 바쁜 것은 물론 모두를 죽일 수는 없으므로 죽일 자와 살려둘 사람을 구별하기 위하여 ABC로 급수를 메기는 선별작업도 함께 했다.

다시 말해서 A급은 즉시 처단 BC는 상황에 따라 조취를 취할 대상으로 구분을 하는 것이다. 이는 글자 한자와 말 한마디에 따라 사람의 목숨이 생사로 갈리게 되는 어처구니없는 순간이었다. 이러한 상황을 알게 된 가족 친지들은 살려내기 위해서 돈 지연 학연 어떤 힘을 빌어서라도 경찰서에 줄을 대려고 안간힘들을 썼다.

벌교경찰서에는 붙잡혀온 사람들의 가족들과 친지들의 발걸음이 분주하였다.

사회유지 급들은 경찰서장이나 토벌대장 과장 등을 만나기 위함이요. 그러지 못한 사람은 귓전으로 들은 소문에 애타는 마음으로 안전을 확인하고 어찌 구명할 길이 없을까하여 무작정 찾아와 문밖에서 기웃거리다가 혹시나 아는 경찰이나 토벌대원이 보이면 붙들고 매달려보는 사람도 있었다. 

병순이 부모는 그런 상황을 아는지 모르는지, 보는 사람들이 다 안타까웠다. 하지만 그들도 그토록 세상물정에 귀가 막힌 방안퉁소가 아닌 이상 느낌마저도 없는 무량태수는 아니었다. 사실은 어떻게 손을 좀 써보라고 귀띔을 해주는 사람도 있었지만 이빨을 앙다물며 고개를 돌리고 만 것이다. 이미 자수자로 만드느라고 소 팔고 논 팔고 없애버린 살림 때문이었을까? 아니면 동원해볼만한 사돈에 팔촌도 없었기 때문이었을까? 그도 아니라면 그동안 빨갱이로 몰려 천둥 앞에 눌려버린 주눅이 분노의 자포자기로 무릎을 꺾어 버렸을런지도 모른다.

벌교로 실려 온지 일주일쯤이 지난 7월 20일 오전부터 벌교경찰서는 어수선하기 짝이 없었다. 수감자들을 빨리 조치하고 부산으로 후퇴를 해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렇지만 대부분의 경찰관이나 경찰부대가 조직적인 후퇴를 할 상황이 되지 못해 개인적으로 이동을 하여 부산에서 다시모여 피난살이 경찰생활을 하여야 했으므로 술렁이며 서두루지 않을 수 없었다.

정오가 가까워 올 무렵 순경 한사람이 명단을 들고 호명을 하기 시작했다. 불려 나온 사람들은 손이 묶여 포장이 씌워진 큰 트럭에 실렸다.

표정들은 이미 넋을 잃은 꼴이었다. 차에 오르기 전에 살펴보니 함께 붙들려 왔던 한마을의 박판석 최병탁 등 네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혼자뿐이었다.

사람들을 다 태운 차는 총을 멘 경찰들이 탄 쓰리코타의 호위를 받으며 석거리재를 향하여 뒤뚱뒤뚱 덜컹거리며 숨 막히는 시간을 달려 나갔다.

끝없는 불안의 침묵이 흔들리는 동안 병순의 머리에는 만감이 교차하였다. 차가 힘든 걸음으로 고개를 넘어 오룡을 부근을 지나갈 때는 붙잡히기 직전 총을 맞고 외마디소리와 함께 쓰러지던 동지가 간절하게 내미는 손이 다가와 반가움에 붙잡으려고 손을 뻗어 보았으나 닿을 듯 말 듯 안타까운 거리에서 손짓으로 변해 미소를 지으며 서서히 멀어져 갔다. 그러고 나서 한 시간 쯤 뒤에 덜밑에서는 비극의 총성세례가 천지를 뒤흔들어 가슴을 쥐어뜯는 통곡의 현장으로 변하고 만 것이다.

 

아부지 병순이 찾으러 안 가봐야 쓰겄소?

주암댐 수계의 죽산 덜밑

덜밑에서 총을 볶아댄 것은 경찰이 벌교로 잡아간 사람들을 차로 실어다가 모두 쏴 죽여 버린 것이라는 소문이 입에서 입으로 소곤소곤 퍼져 나갔다

다음날 오후에는 이읍에도 이 소문이 온 동네로 퍼져 집집마다 불안과 두려움으로 잡혀간 이웃에 대한 걱정 속에서도 감히 현장에 달려가 확인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고 눈치를 살피며 숨을 죽였다.

병우 네 식구들에게는 억장이 무너지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자수한 사람을 잡아 간지 얼마 되지도 안아 느닷없이 죽여 버리다니 도저히 믿기지가 않았다.

아버지는 방문을 닫고 들어앉았고 어머니 역시 넋을 일은 사람 모양 말을 잃어 버렸다.

함께 잡혀간 다른 사람들의 식구들도 청천벽력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다섯 가족들 모두가 당장 현장으로 뛰어가고 싶은 생각에 속이 끓는 것은 마찬가지였으나 부모들은 모두 분노와 하늘을 향한 원망으로 이미 마음의 빗장을 채워 버렸고 가족들 역시 마음 뿐 선뜻 나서지 못하고 날이 저물어 안타까운 밤을 보내면서 자포자기심정에도 마음한구석에서 일어나는 현장의 모습에 눈빛이 어두운 천장에 멈춰버리는 순간이 많았다.

다음날 오전 내내 서로 눈치만 보고 망설일 때 병우 큰누나가 용기를 내어 앞장섰다.

아부지 병순이 찾으로 가봐야 안 쓰것소?

“그런 놈 찾아다 뭤에다 쓸라고!” 새벽부터 방안에서 줄 곰방대를 두들겨 대던 아버지의 어기찬 목소리가 딸이 아닌 세상을 향해 울부짖는 함성으로 울려 퍼졌다.

이때 동생 병우는 국민학교를 막 졸업한 열여섯이었다.

겁이 없어서 그랬는지 어제 오후 늦은 시간이지만 당장 덜밑으로 뛰어가고 싶었으나 아무도 나서는 사람이 없자 곧 날이 저물어 그런 것으로 알고 날이 새면 찾아갈 형님생각에 밤새도록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다. 날이 밝자 늦었다고 생각하고 마당으로 나가 보았으나 어머니는 평소처럼 부엌에서 밥을 하고 있을 뿐 아무런 내색도 없었다.

아침을 먹고 나서는 당연히 가겠지 하였으나 아버지는 꿈쩍할 생각도 않았고 어머니 역시 아무 말 없이 식구들과 눈을 맞추지 않으니 어린 병우로서는 아무리 세상이 무섭다고 해도 이해가 되지 않고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잠시 후에 친척들과 마을 사람들이 여럿 찾아오기는 하였으나 정작 나서려는 사람은 없고 모두가 어디서 들었는지 어떤 사람들 몇 명을 왜 죽였다는 등의 이야기와 형님도 아마 실려 갔을 것 같다는 말을 주고받으며 아버지의 눈치만 살필 뿐이었다. 그것은 당사자인 부모가 앞장서야 그중 몇 사람이라도 따라나서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시간이 흘러가도 끝내 아버지가 꿈쩍하지 않자 사람들은 하나 둘 돌아가고 결국 점심때가 가까워서야 누님이 가자! 하고 손위 언니를 재촉하며 앞장섰고 병우도 함께 뒤따라 나섰다.

물론 애태우던 다른 네 사람의 가족들도 함께 앞서거니 뒤서거니 덜밑을 향해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삼십 여분을 걸어 덜밑이 보이는 무등쟁이를 돌아서니 언제 왔는지 멀리서 사람들의 꿈지럭거리는 모습이 눈에 띄자 마음이 조급하여 걸음은 더욱 빨라져 더위에 숨 가쁜 것도 잊어버리고 모두가 뜀박질을 하고 있었다. 턱턱 막힌 숨을 몰아쉬며 가까이 다가가자 차마 눈을 뜨고는 볼 수 없는 처참한 상황 앞에 통곡의 아수라장이 펼쳐져 있었다.

도로변에서 삼십여 미터 벗어난 곳에 두 세구의 시체가 몇 미터 간격으로 쓰러져 있더니 경사가 시작되는 산비탈 언저리에는 몇 구씩 서로 붙들어 안 듯 엉킨 얼핏 보아도 사십 구는 되어 보이는 시체가 널리고 쌓여 있었다.

먼저 와서 시체를 찾은 사람들은 붙들고 통곡을 했고 아직 찾지 못한 사람들은 한 여름이라 이미 부패가 진행된 시체들을 하나하나 뒤적이며 찾느라고 제정신들이 아니었다.

뒤늦게 도착한 마을에서 함께 간 사람들도 각각 흩어져 시신을 찾기 시작하였다.

시체들의 앞에 도착한 병우는 똑바로 바라보지도 못하고 멈춰 선체 형님의 시체를 찾을 생각은 어디가고 눈앞이 깜깜하며 두려움이 왈칵 솟구쳤다.

그러나 누님은 달랐다 냄새나는 시체의 얼굴을 뒤집으며 찾아나갔다.

잠시 망설였던 병우도 작은형과 함께 누님을 뒤따라가며 확인을 해 나갔다.

그런 병우에게 이해가 잘 안 되는 놀라운 모습이 눈에 들어왔다.

한꺼번에 쓰러져 있는 시체들의 손목이 여자들의 달비로 꼰 줄로 묶이고 삼 줄로 몇 사람씩 엮여 있었고 여자들 시체도 여럿 있었다.

“사람을 묶으려면 새끼줄로라도 묶어야지 아무리 줄이 없다고…”

시골에서 자란 병우로서는 달비를 꼬아 사람을 묶은 것이 도저히 이해가 되지 않았다.

아 아! 그래서 사람들이 한꺼번에 와글와글 쓰러졌구나!

엉켜 있는 사람들을 모두 확인하고 주변에 흩어져 있는 시체들을 모두 살펴보았으나 형님은 보이지가 않았다.

그러자 확인 했던 시체들을 다시 한 번 살펴보면서 누님과 눈이 마주치자 죽지는 않았을 것이라는 기대와 애원의 눈빛이 교차하였고 같이 온 마을사람들 역시 병우와 같은 생각들을 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기대는 희망에 지나지 않은 현실로 눈앞에 나타나고 말았다.

집단총살이 이뤄진 곳의 모든 시신들을 거듭 살펴보았으나 이읍 사람의 시신이 없자 산비탈 쪽과 도로변의 두 세구의 시체가 있었던 아래쪽을 두 패로 갈라져서 마지막 수색을 시작 했다. 주변이 환히 보여서 인지 이미 안도의 숨을 돌려서 인지 건성으로 살피며 우물 쭈물거리는 사람도 있었다. 병우가 산비탈 쪽을 기웃거리고 있을 때 “여기 있네!” 하고 왜치는 소리가 들리자 사람들이 우르르 달려들었다.

가슴이 덜컥하여 비틀걸음으로 달려가 보니 형님은 총에 맞아 피를 흘린 체 쓰러져 있고 누님은 기가 막혀서인지 차마 바라볼 수가 없어서인지 몸을 돌리고 쭈그리고 앉아 머리를 파묻은 체 어께만 들썩이고 있었다.

오히려 동네 아주머니들이 작은형과 나를 붙들며 엉엉 소리 내어울었다.

병우도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그러니까 형님은 다른 사람들의 시체가 있는 곳에서 40m가량 떨러진 곳에 따로 죽어 있어 있는 것이 이상했으나 알 수 없었다.

뒷날 사람들을 죽일 때 건너편에서 그 광경을 보았다는 봉천 아주머니가 차에서 사람들을 끌고 갈 때 다리를 붙드는 사람이 있었는데 옆으로 끌고 가 쏴 죽여 버리고 다른 사람들은 산비탈 쪽으로 더 끌고 가더니 한꺼번에 죽였다는 말을 듣고 그것이 형님이었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병우는 울고 있을 시간도 없이 집으로 달려가 아버지에게 알리고 어떻게 할 것인지 응답을 기다렸다. 집으로 옮겨와 선산에다 장사를 지낼 것인가를 물은 것이다.

“끌고 오기는 뭐 할라고 끌고 와! 집구석 망쳐 묵고 죽을라고 환장한 놈이여.”

마음과 달리 분노를 내 뱉고는 뒷짐을 진체 골목을 돌아 휑하니 나가버렸다.

어머니는 참았던 눈물을 쏟아 냈고 소식을 듣고 모여든 친척들은 어머니를 달래며 함께 눈물을 찍어 냈다.

병우가 친척 몇 사람과 농기구를 들고 달려왔을 때에는 기다리던 사람들이 선산으로 옮길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미 아버지에 의해 선산불입 결정은 난 것이다.

그래도 차마 그 자리에다 묻어 버릴 수는 없어 선산과 가까운 봉천 쪽으로 옮겨 언덕에다 조그맣게 묘를 쓰고 돌아 왔다.

처음 도착했을 때 먼저 와서 시신을 찾던 사람들은 벌교와 가까운 고흥 별양 보성 등지에서 소문을 듣고 달려온 사람들이었다.

시체를 찾은 사람들은 동네에 가서 괭이 삽 등을 빌려와 가까운 바닥에다 깊이 파지도 못하고 바닥의 흙을 긁어모아 봉분의 흉내를 내어 묻어 주고는 세상이 바뀌면 선산으로 옮겨 후히 장사지내 주마고 거듭 허리 굽혀 합장을 하며 마지막 애통의 심정으로 말뚝을 박기도 하고 큼직한 바위 돌을 굴려다 올려 표식을 해 두었고 그래도 염려가 되는지 앞산의 봉우리나 건너편 바위 노송 등 자신만의 눈썰미로 방위를 측정해 두고 나서 텅 비어 버린 세상을 향해 허망한 걸음을 비틀거렸다.

새까맣게 속을 태우며 달려 왔으나 시신을 보지 못한 사람들은 우선의 다행감에서 안도 하는 눈빛을 통곡하는 사람들에게 눈치 채일 까봐 한숨으로 감추며 위로의 말을 건네고는 지친 몸에도 다소 가벼운 걸음이 되어 돌아가고 있었다.

물론 이후로도 시체를 찾으려는 유족들의 발걸음이 드문드문 꼬리를 잇 기는 하였지만 시신이 부패하는 속도와 비례하여 하나 둘 멀어졌고 이후 부모형제의 마지막손을 붙잡지 못하고 널려있는 시신들은 이웃 마을 사람들에 의해 흙으로 덮은 것처럼 여기저기 묻혀 후회와 원망을 털어버리지 못한 원귀로 맴돌아 덜밑은 사람들이 입에 올리기도 주저하는 험하고 궂은 산모퉁이가 되어 이웃주민들의 발길마저 돌리는 곳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당숙을 포함해서 병순을 마지막 보내는 일을 마치고 돌아온 사람들에게 어머니가 준비해 두었던지 덕석을 펴고 막걸리를 내 놓았다.

그때까지도 아버지는 사람들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람들은 그저 묵묵부답으로 막걸리 잔을 비울뿐 서로의 시선을 피하려고 했다.

그러다 술기운이 오른 좌중에서 듣지도 않는 아버지를 위로한답시고 그 사람이 이렇게 비참하게 된 것은 지난해 선배들에게 휩쓸려 조계산으로 입산했던 철없는 행동이 원인이라고 나무라 듯 말하자 옆에서도 덩달아 한마디씩 하려하므로 당숙이 입을 막고 자리를 파해 모두 집으로 돌려보냄으로서 병우의 형님 병순의 24년 젊은 생애는 부모와 가족의 가슴에 한을 남긴 채 비극으로 마감을 하여 그 이후로는 이웃 친지들뿐만 아니라 부모형제들도 입에 담아서는 안 될 금기의 이름이 되어 세월 속에 묻혀 마을 사람들의 뇌리에서 가물가물 잊혀가는 사람이 되어야만 했다.

평상시 같았으면 모든 마을사람들로 눈물바다를 이룰 일이지만 친척여자들 몇과 함께 잡혀가 시체를 확인하러간 가족 몇 사람만 살짝 다녀갔을 뿐 큰 골목까지 나온 사람들도 서로 눈치를 보는지 병우 집 대문이 있는 작은 골목으로는 들어오지를 않았다.

흉상 중에도 흉상 이상으로 사람들의 발길을 막아야 할 그 무엇이 존재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다음날 오후에 병순이와 함께 잡혀갔던 병탁이 등 네 사람이 출장소로 넘어 왔다.

그들은 모두 B C급으로 분류되어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를 논의하다가 각각의 지서로 보내 처단하도록 한다는 결정을 내리고 보낸 것이었다.

그것은 어떠한 형태로든지 이읍 출장소장이 반드시 알아서 책임지고 처리하라는 무한의 권한임과 동시에 결단하기 어려운 책임의 전가였다.

이때의 출장소장은 성질이 좋기로 알려진 보성사람 박 경사였다.

그러나 이 무렵 군경들은 부산으로 후퇴를 서둘러야 했기 때문에 어수선한 때였다.

이읍에 있던 군인들이 벌교에 갇혀 있던 좌익들이 출장소로 넘어온 왔다는 것을 어떻게 알았는지 자기들이 데려가겠다고 찾아왔다. 그러자 박 소장은 그들을 막아서며 우선 조사를 하고 대낮의 사살은 곤란하니 어두워지면 자신이 책임지고 조치를 한 다음 출장소를 정리하고 따라나설 터이니 먼저가라고 하여 돌려보냈다.

사실 그것은 이 사람들을 어떻게 해야 할지는 모르겠으나 당장 죽게 할 수는 없어 우선 둘러댄 핑계였다. 일단 군인들은 돌려보냈지만 고민은 계속되었다.

그렇지만 죽일 수는 없다는 결론을 내리고 저녁이 되자 그들을 향해 내가 사람들 보는 앞에서 일부러 풀어줄 수는 없으니 완전히 어두워지면 각자가 알아서 하라고 도주를 묵인하여 살려줌으로서 이 사실이 수복 후에 주민들 사이에 입에서 입을 건너 알려지게 되었다. 그 결과는 주민들을 괴롭혔던 다른 소장들이 지탄의 여론에 따라 고난을 받은 것과는 달리 그는 주민들로부터 많은 칭송을 받은 사람으로 기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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