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배바위 밑의 영안소①

나란히 누워 있는 시체들

  • 입력 2018.07.19 10:36
  • 수정 2018.07.23 16:20
  • 기자명 김배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계산의 동쪽 큰 골짜기 깊숙한 곳 선암사의 입구 괴목마을 사람들은 밤낮으로 바뀌는 총뿌리 주인의 눈치를 살피느라 마음 졸여야 했던 기막힌 시절의 주인공들이었다.

만약 제정신으로 살았다면 배고픔의 고통 이전에 모두가 미쳐버리고 말았을지도 모른다.

그토록 지긋지긋한 고난의 나날로 인해 총구의 두려움마저도 무뎌지게 하였던 동족상잔의 6.25전쟁과 조계산의 빨갱이토벌이 끝난지도 어느새 3년이란 시간이 지나고 있었다.

조상대대로 순박하게 어우러져 살아왔던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없는 말들을 앞세워 거칠게 좌우로 흔들어 대는 날카로운 양날 창칼에 비켜설 생각을 해볼 겨를도 없이 휩싸여 들어야만 했다.

그로 인해 무수히 찔려 누더기처럼 해진 상처의 타래가 엉키고 엉켜, 이웃 간에 마주쳐도 증오의 눈초리로 흘기거나 침묵으로 비켜가면서 살아야 하는 고통의 후유증에서 한발작도 벗어나지 못하는 세월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나마도 멈춰준 총성을 다행으로 여기며 새로운 세상에 대한 기대로 살아야만 하였기에, 그들은 그 험난했던 나날을 고스란히 겪는 동안 안타깝게 바라만 보아야 했던 생존의 땅 조계산으로 이제 겨우 발을 들여 놓을 수 있는 자유를 돌려받았지만, 아직 두려움이 깔려 있는 그곳으로 괴목 마을의 31세 최선용 청년은 아침밥숟갈을 놓자마자 지게를 짊어지고 이 산에 의지하여 평생을 살아온 김 영감님을 따라, 숯 가마니를 만들 산죽(조릿대)을 찌러 산중 가을의 서늘한 기운을 느끼며 배바위를 향해 올라가고 있었다.

서부도전 길로 들어가서 은적암터를 지나 작은 굴목재 밑의 비로암 길과 만나기 직전 가파른 길 중앙에 서있는 400년이 넘은 *¹유상각 나무아래 지게를 받치고 선 김 영감님이, 오늘은 저쪽으로 가서 비어 보세, 하며 작은 굴목재에서 내려오는 골짜기 좌측건너편을 가리켰다. 그럽시다, 하고 잠시 숨을 돌리고 나서 두 사람은 골짜기로 내려가 굴목재 능선을 향해 올라가는 골짜기 입구에다 지게를 벗어 두고 작은 굴목재 방향을 반으로 나누어 박 영감은 우측 선용이 청년은 좌측 산비탈을 헤쳐 가며 산죽을 찌기 시작했다.

배바위 밑 은신처 앞 길가운데 있던 400년 유상각 나무가 2007년 태풍 나리로 뽑힘

산비탈이 산죽으로 가득 차 있기는 하지만 용도에 알맞은 굵은 놈만 골라서 쪄(베)야하기 때문에 처음에는 한 자리에서 시작을 하였으나, 시간이 지남에 따라 조금씩 거리가 벌어져 서로가 보이지 않게 되자 가끔씩 서로를 불러 확인해 가며 쪄 올라갔다. 두어 시간이 거의 다되었을 때 김 영감님이 최 청년을 부르더니

“이보게 인자 살살 끄집어내려 놓고 더 허든가 허세!” 하고 중간 마무리를 하자고 했다.

예~에 그럽시다, 하며 낫을 거두고는 작은 바위에 엉덩이를 걸치고 앉아 온몸에 묻은 먼지와 신발을 벗어 털고는 쌈지속의 가루담배를 꺼내 곰방대에다 재워 한 대 피우고 나서 지금까지 베어 중간중간 한 뭉치씩 눕혀둔 산죽을 거두어 모으기 시작했다.

우선 위쪽에 있는 산죽 한 아름을 모아, 골짜기로 끌어내리려고 낭떠러지 같은 언덕 위를 돌아내려가려는데 밑의 평평한 바닥에 이상한 물체들이 눈에 띄었다.

끌고 내려가던 산죽 아름을 내려놓고 다가가던 최선용 청년은 그만 혼비백산하고 말았다.

그래서 산죽이고 뭐고 볼 것 없이 다 팽개치고 김 영감을 소리쳐 부르며 엎어지기를 반복하면서 뛰어 내달렸다.

최 청년의 다급한 소리를 들은 김 영감이 혹시 짐승을 만난 것 아닌가 싶어 허겁지겁 돌아오고 있었다. 지게를 벗어둔 골짜기 입구에서 사색이 다된 최 청년을 만난 김 영감님이 무슨 일이냐고 물었다.

숨이 턱에까지 찬 최 청년은 얼른 말이 나오지 않았다.

“저기 저, 시시 시체들이…”

“무신 시체들이 있단 말이여? 아 더듬지 말고 알아듣게 말을 해보아”

“아! 저 그가 시체들이 늘비했단 말이요” 

하면서 손가락질을 했다.

“먼 놈의 시체들이 늘비했다고?”

믿기지 않는다는 듯 중얼거리며 어디 한번 가봐, 하고 가리키는 곳을 향해 앞장을 섰다.

배바위 밑 은신처 입구

영감님이 앞장서자 두려움에서 깨어났는지, 선용이 청년도 더듬더듬 뒤따라 올라가 보니, 작은 마당크기의 평지 뒤편에는 작은 통나무들로 얽어 만든 거처의 나무들은 뼈대만 남아 처져있고, 바닥에는 지붕을 덮고 사방을 가렸던 엮은 산죽이 무더기무더기 썩어가는 앞마당에는 옷을 입은 채 썩어 있는 시체 여덟 구가 나란히 누워 있었다.

“그놈들이 여그서 숨어 살았구먼! 참 등잔 밑이 어둡다더니 질에서 이렇게 가까운 디가 반란군들이 숨어 살았다니.…”

김 영감도 말은 태연하게 하지만 속으로는 적잖이 놀라고 있었다.

시체들은 이미 뼈만 남아 두골만 밖으로 내놓고 있는 상태로, 대부분 옷을 입은 채로 썩어, 갈비뼈가 보이는 것은 두 세구에 불과하였으며 허리띠와 고무신도 본래의 위치에 있는 것이 있었고 백철 솥과 주전자, 사기그릇들은 물론 괭이, 삽 등 그들이 사용했던 농기구들이 그대로 남아있었다.

“좋은 것들은 다 요리 갖다 놨네!”

상상하지도 못했던 곳에 이토록 많은 시체들이 누워 있는 것에 놀라기도 하였지만, 길에서 이곳까지는 직선거리로 백여 미터밖에 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선암사에서 장박골로 가기에는 가장 가깝고 안전한 길이었으므로, 토벌대들이 이 서부도전 길을 조계산의 순찰 길로 수없이 오르내렸던 이런 곳에 공비들의 아지트가 있었다는 사실에 입이 다물어지지 않고 어처구니가 없기까지 하였다.

“오늘은 그만 허고 내려가세!”

두 사람은 서둘러 산죽을 거둬 짊어지고 마을로 내려갔다.

“어이~ 요 말을 아무한테나 허지 말소. 지서 이런데서 알면 귀찮게 헐지 모른께.”

“예~에 알았어라.”

하지만 곧 동네 젊은이들 사이에 시체들이 있다는 소문이 하나 둘 퍼져나갔다.

그래서 호기심 많은 젊은이들 중에는 최 청년에게 그곳에 한번 가보자고 조르기도 했으나, 은근히 걱정도 되고 무서운 생각도 들어, 모른다고 고개를 흔들어 잡아떼어 버렸다.

그렇지만 며칠이 지나자 대략의 위치를 알게 된 젊은이들은 호기심을 참지 못하고 일부러 그곳으로 산죽을 찌러 와서는 현장을 찾아내고 말잔치를 벌였다.

유: 와~ 독 헌 놈들이네~에.

김: 여그서 살았는디도 깜쪽같이 몰라부렀구만~이잉.

박: 그놈들이 여그서 올라댕긴 것을 훤허니 내래다 봄서 살았을거 아니라고, 요런디가 숨었는지 누가 알았을 것이여.

서: 요놈들이 그냥 기습을 해 부렀드라먼 꼼짝 없이 다 죽을 뻔 봤네 그려.

김: 이 사람아 즈그덜이 수가 작은께 몇이 죽이드라도 여그가 탄로 나불먼 안 된께 오래 숨어 있을라고 그런 것이제~에.

하고 나름대로 작전에 대한 목소리를 높이기도 하였다.

이미 이곳의 상황을 어느 정도 알고 왔기 때문에 처음 보고도 그다지 놀라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약간은 찝찝한 기분을 감추기 위해서도 이야기들을 부산하게 주고받고 있었지만 그런 와중에도 그들의 눈동자는 이곳에 있는 물건들을 더듬고 있었다.

-: 어이! 저그 저 꼭괭이가 성식이 즈그 것 아니라고?

-: 맞구만! 산지 얼마 안 됐는디 자리를 본께 알것네.

-: 삽도 새것이구만. 그놈들은 꼭 존(좋은) 것만 안 뺏어 간다고~오.

하면서, 곡괭이는 성식이 집에 갔다 줘야 쓰겄네, 하고 자루가 조금 썩은 곡괭이를 집어 들었다.

그러자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이 농기구와 솥 등 큰 물건들을 하나씩 챙겼다.

그래도 원체 곤궁하고 물자가 귀한 시절이라 시체에 있는 옷이나 혁대 고무신 등에 까지 손을 대고 싶은 생각이 있었지만, 그래도 체면이 있어 그날은 그대로 내려왔다.

 

그러나 며칠이 지나지 않아 그곳에 있던 쓸 만한 물건들은 어디로 갔는지 모두 없어지고 말았고 시체에 관한 이야기는 곧 온 마을 사람들에게 알려졌다.

그렇게 되자 이장과 유지들이 모여 의논을 하여 그냥 치워버리자는 사람도 있었으나, 그래도 지서에 보고는 해야 한다고 하여, 이장이 지서에 보고를 하면서 숫자는 제대로 말을 하면서도 모두가 썩어 버려 알아볼 수도 없다고 하자, 마을 사람들이 가서 조치를 하라고 하여 젊은이들을 인솔하여 군데군데 묻어주고 말았던 것이다.

묻어주고 내려오는 길에도 저마다 한마디씩 했다.

A: 여그 산죽은 인자 볼 것도 없이 잘되어 불 것구만.

B: 그러먼 그쪽은 자네가 딱 맞촤 놔 불소.

C: 그런께 요쪽에서 총 맞은 놈들을 전부다 요리 대꼬 와부렀던 거 아니라고.

D: 그러고 본께 그 자리가 바로 앞에 물도 나고 그 놈들한테는 명당자리 였그만.

E: 그래 밨자 다 죽어부렀는디 명당자리는 무슨 명당자리여~어?

이렇게 두런두런 내려오는 그들의 머릿속엔 그토록 공포 속에 보냈던 당시의 나날들과 불쌍하고 비참하게 죽어 갔을 그 사람들에 대한 동정심이 교차하고 있었다.

그 이후부터 괴목마을 사람들은 그곳을 배바위 밑에(의) 아지트라고 불렀다.

물론 그곳에서부터 배바위까지는 상당한 거리가 있지만 마을에서 바라보면 바로 밑으로 보이기 때문이었다.

배바위 밑 은신처 지점

조계산의 빨치산토벌도 거의 막바지에 다다른 1952년 이른 봄, 세 명의 검은 그림자가 축 늘어진 사람하나를 교대로 업으며 차가운 밤바람을 헤치고 ‘배바위 밑 아지트’에 도착하였다.

“장 동무! 장 동무! 죽으면 안돼요. 끝까지 살아서 승리의 그 날을 봐야 돼요.”

낙안이 고향인 김종렬이 바닥으로 눕히는 장종석의 어께를 흔들며 정신을 차리라고 애타게 불렀다. 그러나 삼베로 칭칭 감은 허벅다리는 붉은 피로 범벅이 되어 있고 이미 정신을 잃은 것처럼 보였다.

“위원장 동무 고맙소. 나는 이제 틀렸은께 걱정 마시시오.”

정신이 희미한 상태에서 소리를 듣고 있었는지 버리지 않고 여기까지 데리고 온 동지애를 느끼고 있었는지 눈을 감은 채 기어들어간 목소리로 대답을 하였다.

“무슨 용기 없는 말이요. 힘을 내시오.”

둘러서있는 5~6명의 동지들이 용기를 북돋기 위하여 한마디씩 하고는 있지만 속으로는 이미 가망이 없다는 생각에 자신들의 최후를 그려보고 있는지도 몰랐다.

 

돌무더기 묘

전날 오후 해가 기울 무렵에 이 사람들을 이끌고 있는 김종렬이 아무렇게나 누워 있는 동지들에게,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보급투쟁을 성공해야 해야 되겠소, 하고 부상이 있어 보초로 남을 두 사람에게 기다리는 동안에 하여야 할일과 만약 늦어질 경우에 취해야 할 행동에 대하여 지시를 하고 다섯 명을 인솔하여 굴목재 능선을 따라 조심조심 내려갔다.

그것은 선암사 아랫마을로 가기 위해서 은신처에 대한 안전을 생각하여, 서부도전 길로 직접 내려가지 않고 멀리 돌아 남쪽 줄기를 타고 내려가기 위함이었다.

물론 은신처가 어느 한 곳으로 고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에 따라 수시로 옮겨 다니기는 하지만, 며칠 사이에는 이곳을 은신처로 하고 있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굴목재 몬당에서 남암(대승암) 줄기를 따라 내려가 남암골의 중간인 묘목장 근처에 도착한 그들은, 잠시 기다렸다가 날이 어두워진 뒤에 내려갈 요량으로 총을 어께에 멘 채로 바위에 기대고 앉아 시간을 기다렸다.

얼마 간을 기다려 어둠이 완전히 내리자, 동무들 이제 출발 합시다, 하고 김종렬이 지시를 하자 남암을 향해 오십여 미터를 내려갔을 때, 따~당! 한 발의 총소리와 함께 기관총이 콩을 볶듯이 발사되고 총알이 빗발치듯 날라왔다.

김종렬은 아차 하는 생각과 함께, 동무들 뛰어, 하고서는 구르듯 돌아서 기듯 엎드리며 내달았다. 그런데 이십여 미터를 뛰었을까. 아~악! 하며 넘어지는 소리가 들렸다.

휙 뒤돌아 다가가며 살펴보니 뒤따라오던, 상사에서 온 최현수가 총을 맞고 쓰러졌다.

급하게 쫓아가서 최 동무를 일으켜 세우려고 당기니 몸이 축 처져 있었다.

총알이 머리에 맞아 그 자리에서 죽어버린 것이다. 하는 수 없이 총과 총알만을 거두려 하는데 도망가던 세 사람이 엎드려서 다가오려고 하였다.

오지 말라고 낮은 소리를 버럭 지르고 땅에 떨어진 총과 실탄을 벗겨 급하게 몇 발짝을 뛰었을 때 또다시 억! 소리와 함께 누군가가 쓰러졌다가 벌떡 몸을 일으키더니 휘청하고 엎드려 세 발로 기는 것이 보였다.

옆에 가던 동무들이 붙잡아 세우는데 장종석이였다.

한 모퉁이를 살짝 돌아 비탈 쪽으로 붙어서며 돌아다보니 총소리는 계속 그 자리에서 나고 총알은 앞쪽으로 계속 날아갔지만 추격해 오는 것 갖지는 않았다.

날은 완전히 어두워졌지만 하늘이 맑아 발끝은 어슴푸레 보일 정도였다.

묘목장 끝에서 옛 남암터 쪽으로 방향을 바꾸어 50여 미터를 들어가 개울물이 흐르는 곳에서 멈춘 다음, 우선주변을 살핀 뒤에 장종석을 눕히고 신음하는 입을 가리며 물을 떠다 먹이고 다리를 더듬어 지혈을 하였다.

그런 중에도 한사람을 묘목장 끝단의 중간지점에 세워 토벌대가 올라오는지 감시하는 것을 잊지 않았다. 한참이 지나서야 총소리가 멈추자 더욱더 촉각을 곤두세워 발자국 소리를 감지하려고 했지만 저 아래서 가끔씩 들리던 사람들의 소리마저 잠잠해져 버렸다.

이제는 어느 정도 안심을 해도 된다는 판단이 섰다.

토벌대들이 야간에는 산으로 추적해 오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확실히 내려갔다는 것을 확인하고는 바위 밑에 조그맣게 불을 밝히고 바깥쪽을 가린 상태에서 지혈하고 있던 장종석의 허벅다리 총 맞은 곳을 비상용으로 가지고 다니던 삼베를 잘라 싸매기 시작했다. 비상용 삼베란 산속에 사는 빨치산들의 필수품이었다.

의복으로 사용하는 천으로서가 아니라 음식을 싸는 보자기나 물건을 묶는 줄 등 사용처가 다양할 뿐만 아니라, 무엇보다도 동료들이 죽었을 때 장의를 위해서는 반드시 삼베가 없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양말 신발 혹은 각반 대용으로 삼베를 이용하여 발과 다리를 감을 때 일부러 많이 감아 바닥이 닳으면 풀어내려 다시 감아 쓰기도 하고 다른 용도가 생기면 잘라서 쓰기 위한 비상용의 성격이었으며 몸이나 배낭 속에도 비상용으로 넣어가지고 다니는 것을 필수로 하였다.

토벌대들이 물러간 것은 확실하지만 김종렬 자신이 이십여 미터 앞장서 척후를 살피며 아지트로 돌아가기 위해 선암사를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을 때는 이미 열한시가 다된 시간이었다.

최 동무가 쓰러진 위치에 거의 다 와서는 걸음을 멈추고 시체를 찾으려고 하였으나 잘 보이지를 않아 한 발짝씩 나가면서 자세히 살펴 겨우 찾았을 때, 장종석을 업은 동무들이 따라 붙었다.

“거기 잠깐 거기 눕히시오. 최 동무를 이대로 두고 가면 안 되니 묻어주고 갑시다.”

신속하게 남은 삼베를 꺼내 몸을 감은 다음 주변의 돌들을 모아 시체 위로 쌓아 올려 조그만 돌무더기 묘를 만든 다음, 그 앞에서 결의를 다지고 나서 장 동무를 교대로 업고 삼밭등 개천을 건너, 아지트를 향해 올라갔다.

 

해가 서쪽으로 기울 무렵 남암골로 반란군이 내려오고 있다는 신고를 접수한 쌍암지서에서는 경찰관 5명과 의경 그리고 괴목마을 잠복대를 포함하여 모두 15명 가량을 차석이 인솔하여 기관총을 앞세우고 남암골로 향했다.

그중에는 반란군으로 조계산에 입산하였다가 자수하여 의경이 된 강점수도 끼어 있어 그들의 행동사항을 잘 알고 있었다.

“차석님 그놈들이 너 댓 명 된다고 그러는디, 틀림없이 어두워지면 내려와서 동네를 털어 갈라고 숨어 있을 것인께, 얼른 가서 입구에 잠복을 허고 있다가 나타나는 것을 보고 지져 대붑시다.”

그리하여 어둠이 내리는 해거름에 남암(대승암)에 도착하여 골짜기를 향해 사십 미터가량 들어간 지점에 기관총을 걸어 놓고 잠복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얼마 있지 않아 어둠이 내리자 나무들 사이로 조심조심 내려오는 그림자들이 보였다.

그런데 일렬로 내려오던 그들이 50여 미터 전방에서 멈춰 서는가 싶더니 기관총 뒤에 서있는 차석을 향해 돌이 하나 날아 왔다.

“아차! 이놈들이 눈치를 채고 말았구나!”

지나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몽땅 사살을 하려고 하였으나 탄로가 났다고 생각하고 일제사격을 시작한 것이다.

 

사실은 잠복대가 있다는 낌새를 채고 돌을 던진 것이 아니라 의심스러운 곳을 지나려고 할 때 미리 돌을 던져 확인하는 일종의 작전의 하나로 앞장서 가던 김종렬이 던진 돌이 용케도 차석이 있는 곳에 떨어지자 발각되어버렸다고 생각한 것이었다.

살아있는 놈들이 멀리 도망가 버렸다고 판단이 되자, 사격을 멈추고 전과를 확인하기 위하여 조금 전 총에 맞은 사람의 비명소리가 들렸던 곳 주변을 살피기 시작했다.

한사람이 쓰러져 있을 뿐 더 이상 죽은 사람이나 부상자는 찾을 수 없었다.

그래서 다음날 밝을 때 와서 샅샅이 수색을 하기로 하고 시체를 향해 한발을 쏘고 나서 모두가 무사하게 전과를 올렸다고 철수를 하여 마을로 내려 왔다.

다음날 그곳으로 확인을 하러 와서 보니, 어느 틈에 어제 죽인 반란군의 돌무더기 묘가 만들어져 있고 피를 흘린 흔적이 있으므로, 부상자가 한명 더 있었다는 것을 확인한 뒤 이빨을 갈며 돌무더기를 낱낱이 흩어 버리고 내려갔는데, 며칠 후에 와서 보니 언제 왔었는지 또다시 돌무더기 묘를 만들어놓고 갔었다.

경찰관들은 반란군들이 이처럼 죽은 동지들의 묘를 만들어 놓은 것을 보면, 이 빨갱이 새끼들, 하면서 이를 갈고 철저하게 흩으려 버리고 아예 시체를 훼손하고 치워버린다. 이는 그들에 대한 적개심도 적개심이지만 그와 같은 행동을 동지애를 유발시켜 정신적 결속을 강화하려는 빨갱이들의 전술전략중의 하나라고 믿기 때문에 더욱더 분개하는 보복적 행동반응을 보인 것이다.

그러나 최악의 수세상황에서도 맹목적 사상에 사로잡혀 승리의 날이 올 것을 굳게 믿고 최후까지 기다리며 은신투쟁을 해야 할 그들로서는 죽음을 넘어서는 동지애만이 신념을 붙들어 주는 유일한 보루였기에, 그처럼 험난한 위험을 무릅쓰고서도 동지의 죽음에 대한 예우를 표하였고 투쟁을 하기 위해서는 무기가 목숨보다 더 소중했음으로 동료가 죽어 넘어진 그 순간에도 총은 반드시 가져갔던 것이다.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