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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 청년 6일간의 조계산 입산체험
입산자가 되기까지
  • 2018.07.26 10:38

1949년 늦여름 자정을 앞둔 시간, 상이읍 마을의 스물네 살 김두봉 청년은 초저녁부터 일찍 눈을 좀 붙이려고 누웠으나 좀처럼 잠이 들지 않아 계속 뒤척이다 더 이상 누워 있지를 못하고 일어났다.

이후 아예 옷을 주워 입고 두 다리를 뻗은 채 비스듬히 벽을 기대고 앉아, 불도 켜지 않고 큰방의 동정에 귀를 기울이며 한 살 아래 사촌동생 학규와의 약속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자정 무렵, 두봉 청년은 소리나지 않게 방문을 들어 밀고 마당으로 내려가 방안의 동정을 살피며 잠시 머뭇거리더니, 사립 밖으로 나가 부모님이 주무시는 큰방을 향해 두 손을 모으고 나서 곧장 마을 뒤편의 약속장소 모개나무거리로 달려갔다.

두봉, 학렬 두 청년이 만나 입산한 상이읍 모개나무거리

삼사 분 거리의 모개나무거리에 도착하니, 미리 나와서 해송 뒤에 몸을 붙이고 내려다보고 있던 학규의 검은 몸이 옆으로 사라지더니 빠른 걸음으로 앞장섰다. 20분가량이 걸렸을까. 둔배에 도착한 이들은 걸음을 멈추었다.

마을에서 약 8백미터 거리에 있는 둔배의 본래 이름은 둔병곡(屯兵谷)으로 옛날 이곳에 병사들이 주둔하여 유래된 이름이라 전해진다. 이곳은 조계산으로 올라가는 경계이다.

지금까지는 하늘이 열려 있고 별빛이 있어 희미하나마 길눈이 어둡지 않았으나, 막상숲속으로 들어가려하니 앞이 캄캄하여 걸음이 더욱 망설여졌다.

김두봉 청년이 입산한 둔병곡(둔배)

그래서인지 숲속으로 오르기 전 둘은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언덕에 나란히 앉았다.

조용히 마을을 빠져나오는데 몰두하느라 다른 생각을 할 여지가 없었으나 막상 골짜기 숲의 입구에 도착하니 자신들의 판단에 대한 옳고 그름을 돌이켜,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는지 순간 심각한 모습이 되어 있었다.

말없이 마을의 방향을 응시하고 있던 두봉이 입을 열었다.

“우리가 잘 가는가 모르겄네!”

학규가 받았다.

“인자 나와 부렀는디 어쩔 것이요. 이미 엎질러진 물이 아닌가.”

한 살 위지만 친척간이라 존댓말을 하였다.

두 사람의 대화는 불안감으로 인한 자포자기처럼 들렸다.

이 시간에 두 사람이 조계산으로 입산을 하게 된 동기를 앞으로 거슬러 올라가 보자.

지난해, 그러니까 1948년 10월 19일 발발한 여순사건이 3일 천하로 끝나고 여기서 쫓긴 봉기군과 이에 합세한 청년들이 지리산 권으로 입산을 하는 도중 일부가 가까운 조계산으로 숨어들어 은신 투쟁을 전개했다.

이때 일제강점기부터 마르크스 레닌사상에 심취하여 공산주의를 지지하던, 소위 지식인이라는 사람들이 우익에 맞서 본격적으로 활동하면서 무지한 청년들까지 선동에 휘말려 사상전에 뛰어들었다.

사상적 혼란기인 이 시기에 조계산권에는 좌익 활동의 중심마을인 낙안면의 하송과 금산 주암면의 오산과 송광면의 이읍, 외서면의 금성에서 공산주의가 확산되어 인접마을의 젊은이들과 반신반의하는 우매한 청년들을 현혹하여 강제로 입산시켜 수많은 젊은이가 하루아침에 빨갱이의 덫에 걸리고 있었다.

김두봉 청년이 살고 있는 이읍리는, 큰 마을인 하이읍에 광복 이전부터 마르크스 레닌사상에 깊이 빠져 공산주의를 신봉하던 지식인들이 있었는데 그중에도 거물에 해당하는 보성전문 출신 이기표 선생의 영향과 광주, 서울 등 도회지로 유학나간 부유한 집 자제들로 인해 일찍부터 좌익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는 청년들 몇몇이 모습을 감추고 있었다.

그러던 중 여순사건 봉기군 일부가 조계산으로 숨어들자, 지금까지 사회주의사상을 신봉하고 은신해 있던 사람들이 그들과 함께 투쟁을 하기 위하여 전면으로 나섰다. 이들은 청년들에게 머지않아 북에서 남쪽인민을 해방시키러 올 것이라고 부추기고 인솔하여 본격적인 입산활동에 앞장서기 시작했다.

이읍리에서 첫 번째로 대량의 강제입산사건이 발생한 것은 여순사건이 난 이듬해인 1949년 여름이었다. 여순사건이 발발하자 이들을 잡아들일 목적으로 대한청년단(한청)을 구성하여 임재선(48세) 단장에게 이읍 국민학교에서 기수별로 훈련을 시키도록 했다.

훈련이 끝나던 날 이미 훈련에 참가한 단원들 80여명(78명으로 기억) 내부로 침투하여 계획을 세우고 있던 그들이 구실을 붙여 집단으로 강제입산 시킨 것을 신호로, 인근마을 청년들을 회유하고 협박하여 계속해서 입산을 시키게 된다.

이때 앞장 서 지휘한 사람은 인민군점령 시 송광면 당위원장을 했던 상이읍 마을의 박장호와 일명 동부육군사령관으로 통한 장안마을의 김형수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이무렵 두봉 청년이 사는 상이읍 마을에서 조계산으로 강제입산한 사람들의 수가 30명이 넘었으니 마을 젊은이들의 거의 전부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한다.

여기에서 이 모든 사람들에 대해 자진입산이냐, 강제입산이냐 하는 외부적 판단이 지금까지도 계속 부딪히고 있다.

그러나 6.25 전쟁이후 우익이 승리한 남한에서는 사상적 이분법으로 입산자 모두를 그저 입산자로만 지칭하여 자진입산의 범주에 두었을 뿐 시대적 상황에 휩쓸려 입산을 피할 수 없었거나 실제로 강제입산 당한 사람들을 구분하여 억울한 희생을 풀어주기 위한 노력은 한 차례도 없었기에, 진정 억울한 사람들도 반세기가 넘도록 한마디의 변명도 못해 보고 죽어갔으며 그의 가족들도 죄인 아닌 죄인으로서 입을 굳게 다문 채 살 수밖에 없었다.

이때의 상황을 두고 상이읍 마을에서는, 엄격하게 따지면 좌익사상에 앞장서 자진입산 한 사람은 박장호 박추환 구구선 세 사람에 불과하고 나머지는 모두 억울한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다.

하지만 이는 보는 사람의 시각에 따라서 판단의 차이가 있을 수 있으므로 당시의 상황에 비추어 인본적인 중립적 시각의 판단이 필요할 것이며 두봉 청년의 6일간의 입산이야기도 그중의 하나일 것이다.

 

김두봉 청년은 이읍국민학교에서 마지막 한청훈련이 끝나고 마을 청년들이 몽땅 잡혀가기 전까지 도롱굴의 백학선과 방기원 최병호와 함께 네 사람이 벌교경찰서에서 훈련을 받고 한청훈련조교로 일했다. 그러나 그날은 교대근무라 나가지 않았다.

오후에 이미 박장호 박추환 등과 함께 입산활동을 하고 있던 구구선이 5,6명의 동료와 함께 산에서 내려와 마을의 아랫집부터 각단지게 들어 다니면서 회관으로 모이라고 하여 청년들이 거의 다 모이자, 운구재 방향을 가리키며 할 일이 조금 있으니 잠시마치고 내려오면 된다고 모두 데리고 가더니 영영오지 않고 끌려가 버렸으며 아래 동네도 이와 마찬가지였다.

이날 두봉 청년도 모이라는 말을 듣고 나가다가 이상하게도 불안한 마음이 들고 내키지 않아 살며시 돌아서버렸는데 그때 나가지 않은 젊은이들도 여럿이 있었다.

이때 피한 사람들은 모두 평상시 부모님들로부터 입산에 대해 적극적으로 경계를 받은 사람들이다.

저녁이 되어도 한 사람도 돌아오지를 않자 두봉 청년은, 그러면 그렇지 안가기를 잘했구나, 하고 속으로 안도의 숨을 쉬었다.

그러나 그날 이후로 입산에 대한 회유와 협박이 본격적으로 계속되었다.

그중에서도 일정시대 일본군으로 징용되어 남양군도에 갔다가 귀국하여 좌익사상에 깊이 빠진 장안의 김형수는 마을을 돌아다니면서 청년들을 상대로 직접 인민해방에 대한 설명으로 선동에 앞장을 섰다.

이때 김형수가 김두봉 청년의 아버지를 찾아와 아들을 내놓으라고 하자 "남의 아들 데려가서 어떻게 해버리고 날보고 내놓으라 한다” 면서 모른척 시침을 떼어 보낸 적도 있었으나, 다음에 김두봉 청년을 직접 불러서 왜 빠져나갔느냐고 협박을 하다가 단도를 꺼내주면서 9월 며칠까지 해방군이 오지 않으면 이 칼로 내 목을 찔러 죽이라고 날짜까지 명시를 하며 협박을 겸해 선동한 적도 있었다.

한편 이미 입산한, 형제간이나 다름없는 마을청년들의 의기양양한 행동에 차츰 불안하고 마음이 흔들린 것도 사실이었다.

여기서 일반인들이 생각하는 강제입산이라는 개념이 총을 들이대고 억지로 끌고 가는 것만을 연상하기 때문에 강제입산에 대한 모호성에 판단을 돕기 위해 설명을 덧붙이자면, 총을 들이대고 끌고 가는 경우를 현지인들은 납치 또는 잡아갔다고 표현한다.

 

그런데 조계산주변에서 애초에 자진 입산한 봉기군과 좌익신봉자들이 젊은이들을 데려갈 때와 이후 한두 사람씩 잡아 갔다고 하는 경우 총을 들고 인솔하여 갔다 할지라도 순수 납치와는 차이가 있는 속임수와 협박 그리고 회유가 공존하고 있다.

그리고 나머지는 협박과 회유도 있었지만 사회적 분위기에 편승하여 망설이다가 스스로 휩쓸려 버린 경우와 입산자의 가족이나 친지들이 모진 시달림에 따른 불안감에 피신의 수단으로 입산을 택한 사람들도 적지 않다.

그러므로 자진 입산과 강제입산에는 애매한 경계가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태까지 이 모든 사람들을 그저 입산자라 하여 자진입산자의 범주에 두고 일방적 시각으로 바라보는 눈총 때문에 그들과 작은 연관이라도 있는 모든 사람들까지 분위기에 휩쓸려 기 한번 펴지 못하고 평생을 움츠리며 살아 왔던 것이다.

그러나 내면을 들여다보려 하지 않고, 단순 언어 즉 문자의 뜻으로만 풀이를 하려 든다면 자진입산이라는 해석을 내놓을 수 있을런지 몰라도, 그것은 인간의 본성은 거들떠보지도 않고 개개인 혹은 무리의 이해관계나 대중의 성향에 떠밀린 결과라고 할 것이다.

이처럼 매번 유혹과 강요를 당하던 중에, 김두봉 청년도 사촌동생 학규와 함께 결국 그들을 따라 약속 장소로 가게 되었다. 아니, 갈 수밖에 없게 되었다.

조계산의 천자암 바로아래 깊은 산골마을인 상이읍은 밤과 저녁이 따로 없이 해가 떨어지는가 싶으면 금세 어둠이 밀려들어, 밤이 두려운 사람들은 저녁 숟가락을 놓자마자 이내 자리를 펴고 눕기에 바빠 초저녁부터 동네가 죽은 듯이 조용하다.

그러나 지난 여름까지만 해도 마을이 평안하고 청년들이 많아, 낮에 힘들게 일을 하고도 밤이 이슥할 때까지 모여서 놀다가 헤어지는, 전형적인 산골의 제법 큰 마을이었다.

그러던 것이 6.25전쟁의 전초 신호인 여순사건이 터지고 이에 실패한 봉기군들이 조계산으로 입산을 하자, 조용했던 산골마을도 험악한 전쟁의 분위기에 휩싸여 밤이면 불을 켤 수 없게 되고 만 것이다.

 

 제1일 불타는 면당아지트

둔배에서 한참을 앉아 수많은 생각을 떠올리던 두 사람은, 인자는 나와 부렀는디 어쩔 것이냐,는 학규의 말대로 어두운 산길로 더듬더듬 접어들었다.

생에 처음으로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있는 두봉 청년은 발길이 잘 떨어지지 않았지만 이미 약속해버린 이상 돌아갔다가 경찰들에게 당할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다.

조심조심 두려운 마음을 억누르며 어둠을 헤치고 20분가량을 올라가다 천자암으로 돌아가는 중허리 길이 있는 삼거리에서 다시 멈췄다. 두봉 청년은 산으로 들어 올 때의 주의 사항을 되새기며 마음을 가다듬었다.

만약 산사람들이 암호를 물으면, 모른다고 엎드리거나 도망가지 말고 손을 들고 서서 상이읍에서 온 누구라고 하고 기다리라던 말을 다시 한 번 떠올린 것이다.

운구재에서 천자암으로 가는 길의 마당재에 올라서니 효령봉(연산봉) 방향의 하늘이 나뭇가지 사이로 무겁게 열려 보였다. 집과 부모가 있는 마을을 완전히 넘어서는 순간이었다.

크게 한번 숨을 몰아쉬고 마당재를 넘어 계속해서 송광사 방향의 이천장골로 내려갔다.

이 길은 만날 나무를 하러 다니는 길이기에 눈을 감고도 찾아 갈 수 있을 정도였다.

바위와 돌길인 골짜기를 거의 다 내려와 그들이 말해준 용소를 조금 못 미친 지점의 왼쪽 봉대미골로 돌아가는 길에 도착했다.

보초를 서고 있었는지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는지 이광범이가 서 있었다.

이 골짜기는 봉대미골 몬당을 향하고 있는 깊지 않은 이천장골과 봉대미골 사이의 조금은 작은 골짜기이다. 그러므로 남쪽으로 둥진 봉대미골몬당 앞에 부딪힌 북향의 깊고 음침한 곳이다.

그곳으로 따라 올라가니 한동네 박양환이 땅바닥에 걸린 솥에 불을 때고 있는데 어디서 훔쳐 왔는지 아침밥을 하느라고 보리쌀을 삶고 있었다.

그런데 바로 위에서 누군가가 “인자 오느냐?” 하는 소리가 들리기에 고개를 들어보니 같이 간 학규의 친형이고 나하고는 사촌간인 학열이 형이 내려다보고 하는 말이었다.

두 사람이 동시에 예~에! 하고 대답을 하니, 올라 가그라, 그러기에 반가운 마음으로 올라가니 거기에는 이연환 송회준 등 우리 동네서 데려간 사람들과 아래 이읍 사람들도 보였다.

그런데 그곳에는 다리통만한 나무들을 베어다 건너질러 오두막정자처럼 만들어 놓은 바닥에는 평상이 있고 그 위에는 어디서 훔쳐다 놓았는지 밥상하나가 달랑 놓여 있는데 서너 사람이 앉아있었다.

약간 어리둥절한 마음으로 잠시 서성거리고 있으려니까 조금 전에 박양환이 삶은 보리쌀을 아침밥으로 갖다 주었다.

반찬은 따로 없고 소금이 담긴 사발과 무김치 한 투가리를 놓아두니 밥을 받은 사람들이 소금 반 숟갈정도와 김치 한쪽씩을 들고 여기저기 흩어져 앉아 먹기에 두봉 청년과 학규도 그들을 따라서 했다. 밥을 다 먹고 나서 뒤처리를 하고 있는 박양환에게 밥을 먹는 동안에 궁금했던 몇 가지를 살며시 물어 보았다.

여기가 어디요?”

“여기를 면당이라고 생각하면 되지만 금방 바뀌니까 지나보면 알아”

“ 비상으로 챙겨가지고 있어야 할 것이 있소?”

밥을 먹으면서 반찬으로 주는 소금을 생각하고 묻는 말이었다.

“약 같은 것이나 여러 가지가 있지마는 살면서 동지들한테서 자연히 알게 될 것이다.”

기대했던 것처럼 자세한 대답을 해주지 않았다.

박양환은 스물여덟 살 먹은 동네 형님뻘 되는 사람으로 일찍부터 좌익사상에 깊이 물들어 있던 박추환의 동생이었으나, 형님과는 달리 사상에는 관심 없이 살다가 마을 사람들과 함께 입산당한 사람이다.

이곳이 면당에 해당한다는 말을 듣고 속으로는 크게 실망이 되었다.

밖에서 생각할 때는 면당 정도면 집과 막사도 있고 부대처럼 무엇인가를 갖추고 있을 줄 알았는데 천막하나도 없는 것을 보고 실망이 들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렇게 입산을 하고 시작한 첫날은 아침밥을 얻어먹은 다음 낮으로 이어졌다.

보리쌀 삶은 것을 먹고 나서 무슨 일을 어떻게 할지 몰라 눈치만 보고 앉아 있으려니까 골짜기 아래서 베게만한 크기의 비료포대하나를 가져오더니, 학규하고 둘이서 굴등이(국골) 저 안쪽 어느 곳으로 들어가면 사람들이 있으니 그곳에다 가져다주면 된다,고 하였다.

아마도 군당이나 도당이겠구나 생각을 하면서 무엇이 들어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였지만 일단 일을 시켜주니 오히려 반갑고 기분이 풀렸다.

그래서 그놈을 가볍게 걸머지고 탈래탈래 내려가 막 코재 방향으로 돌아가려는데 갑자기 총소리가 나면서 양쪽방향에서 자기들을 보고 볶아대는 것처럼 들렸다.

얼마나 놀랐는지 두 사람은 그까짓 비료포대고 뭐고 내던져버리고 아지트가 있던 곳으로 정신없이 뛰어 올라갔다.

그곳으로 올라가서 보니 다른 사람들도 모두 짐들을 챙겨 도망가기 시작했다.

그들을 무작정 따라 한참 더 올라가 좌측 산비탈을 넘어 이천장골을 향해 도망가는데 밑에서는 토벌대가 양쪽 능선을 따라 총을 쏘면서 아지트를 향해 올려붙였다.

모두 산비탈을 돌아 이천장골을 가로질러 아지트와는 대략 800m쯤 떨어진 두 번째 능선을 넘자 어느 정도 안전 권에 들었다고 판단이 되었는지 모두 흩어져서 엎드리라고 하였다.

이천장골로 넘어가는 천자암길의 마당재

그곳은 이천장골과 건너편의 아지트를 가리고 있는 능선이 한 눈에 보이는 곳이었다.

그러면서 나와 학규에게 귀와 입을 막으라고 하더니 동정을 살피며 숨어서 기다렸다.

우리에게 귀와 입을 막으라고 한 것은 처음당하는 상황에서 총소리가 크게 들리면 놀라게 되고 놀라서 소리를 지르거나 기침을 하여 발각되는 것을 막기 위함에서였다.

그렇게 엎드려 있자니 건너편에서는 아지트를 불태우는지 연기가 피어오르고 정오 무렵 이 되자 마당재에 도착한 군인들이 이천장골을 구석구석을 훑어 내리기 시작하였다.

고개를 드는 것은 물론 숨도 제대로 못 쉬고 엎드려 있는데 턱 턱 턱 돌길을 밟는 군화 소리와 털거덕 털거덕 M1총 부딪히는 소리가 그치지 않고 오르내려, 나중에는 오금이 조여 오는 것을 참느라 제정신이 아니었으나, 눈앞에서 벌어지는 숨 막히는 긴장에 어떻게 시간이 가는 줄도 몰랐다.

오전부터 그렇게 엎드려있자니 해가 넘실넘실해지자 겨우 조용해진 것이 경찰토벌대와 군인들이 모두 송광사로 내려간 모양이었다.

조금 더 기다려 주위가 어둑해지자, 모두 내려가자는 지시에 따라 면당 아지트에 도착을 해보니 역시 그 자리는 모두 불질러버리고 아무것도 없었다.

다시 아지트를 복구하는가했더니 그냥 앉아서 쉴 뿐 아무런 말이 없었다.

지금까지는 곁에 누가 있는지도 몰랐으나 아침에 보았던 여기서는 지휘관 격인 학렬이 형과 몇몇은 보이지 않았다.

 

김두봉 청년은 생전처음 당하는 일이라 넋이 나갈 지경이었으나 이미 한 그물에 든 고기가 되어 다른 생각이 날 여유가 없으니 그들을 따라 하는 수밖에 없었다.

쉬는 동안 아침에 보초를 섰던 연환이가 토벌대를 발견하게 된 이야기를 하니 그 판에도 불행 중 다행이라며 웃는 사람이 있었으니 알 수 없는 것이 사람의 심리였다.

보초를 섰던 이연환의 설명은 다음과 같다.

골짜기 입구가 내려다보이는 언덕위에서 보초를 서고 있는데 개울에서 바가지모자 같은 것이 언뜻 보이기에 저게 도대체 뭐냐 하고 돌을 하나 주워서 던졌더니 돌에 맞은 바가지 모자가 쑥 올라오면서 하늘에다 대고 총을 마구 갈겨대는 바람에 탄로가 나 모두 살게 되었다고, 약간 자랑 섞인 투로 말을 하였다.

만약 그때 보지 못했거나 그냥 지나가도록 놔뒀더라면 이미 토벌대가 봉대미 등줄기로도 올라오는 중이어서 몽땅 포위가 되어 전멸을 당하고 말았을 텐데 다행스럽게 발각을 하여 모두 살아나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보초이야기가 끝나자 아침부터 내내 궁금하게 여기던 비료포대에 담겨 있던 것이 무엇이었냐고 물어보았다.

“그것도 몰라? 비료포대에 담겼으니까 비료지, 질소 비료야 질소.”

군당이나 도당으로 갖다주면 폭탄을 만드는 원료로 사용하므로 면당에서는 그런 보급도 해주고 소도 잡아다 주는 일을 한다고 연환이가 설명해 주었다.

한동안 쉬고 나서 산속이 깜깜하게 변하자 아침부터 그곳으로 달려든 것은 누가 아지트로 신고를 한 것이 틀림없다면서 내일이라도 다시 수색을 나올지 모르므로 다른 곳으로 떠나야 한다고 일어섰다.

어디로 가는지 도무지 모르겠는데, 뒤만 따라오라, 그러기에 놓치지 않으려고 앞사람의 뒤에 바짝 붙어서 따라 갔다.

한참을 따라가다 길이 눈에 익어, 코재가 아니냐,고 물었더니 그렇다고 했다.

코재를 내려가 토다리 앞 개천이 나와 길눈이 잡혔다.

토다리를 건너 왼쪽으로 돌아 올라가면 홍골이고 곧바로 올라가면 국골인 것을 알고 있는데 곧바로 가기에 국골로 들어가는가 보다하고 짐작이 갔다.

국골로 가면 장박골이 나온다.

국골 군당입구 보초 굴

모두가 국골을 향해 올라가는가싶더니 얼마 가지 않아 김두봉 청년하고 학규에게, 이 길로 쭈욱 올라가면 사람들이 있을 것이니 계속 올라가라,고 하고서는 둘만 놔두고 모두가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그 자리에서 갈려버렸다. 도대체 무엇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 수가 없었다.

캄캄한 밤 첩첩산중에 버려진 두 사람은 어미 잃은 병아리처럼 막막하고 불안한 심정이 되어 동료들이 모두 사라진 뒤에도 빠끔히 열린 하늘빛에 의지하여 서로의 얼굴을 확인하려는 듯 한동안 서 있었다.

낮 동안 그토록 공포에 시달리다가 이제는 동료들이 의지가 되어 겨우 안정 아닌 안정을 찾는가했더니 이토록 또 다른 외로운 불안을 맞이하니 두 사람은 더욱 하나가 될 뿐이었다.

“이러고 있어서는 안 될 것인께, 시킨대로 일단 올라가자”

하고서는 조심조심 걸음을 옮겼다.

얼마쯤 올라갔을까 갑자기 앞에서 철커덕 하는 소리가 나더니,

“누구얏 꼼짝 마라!”

하는 낮지만 야무진 목소리가 들려 왔다.

캄캄한 산중 갑작스런 소리에 간이 콩알만큼 놀래어 두 손을 바짝 들고 서 있으니 앞으로 총을 겨누며 다가오는 사람이 어딘지 눈에 익어 보였다.

바짝 다가서는 데 보니 같은 마을의 송회준이라 속으로 와락 반가운 생각이 들었다.

“회준이도 우리를 알아보았는지 왔는가?” 

하고 먼저 인사를 건넸다.

그렇게 됐네, 라고 대답을 하고 있을 때는 어느새 두 사람의 손은 이미 내려와 있었다.

왔는가, 라고 묻는 회준이나 그렇게 됐네, 라고 답하는 두봉 청년의 짧은 대답 속에는 만리장성보다 더 긴 그들의 심정이 담겨 있었을 것이다.

“위로 올라가소” 하기에, 부대는 위에 있고 혼자 앞으로 나와 보초를 서는 중이라는 것을 알고 올라가보니 평평하고 넓은 곳이 나오는데 글쎄 한 이십여 명이 여기저기풀밭에 자빠져서 얼굴만 가리고 잠들어있었다.

“군당이라도 되면 천막 하나는 있어야지!”

또 한 차례의 실망이 후회와 뒤섞여 기가 막혔다.

그래도 하는 수 없이 그들과 약간의 거리를 두고 학규와 나란히 누웠으나 잠이 들지 않았다.

학규의 귀에 대고 “동생, 우리가 죽을라고 여기로 왔는가보네”했더니

“예, 그래부렀는 갑소. 그래도 와부렀는디 어쩐당가, 전(견)딘대로 전뎌 봐야지“ 

하고 속삭이는 사이에 그토록 엄청나게 길었던 하루를 보내고 첫날밤은 군당인 국골에서 잠이 들었다.

 

김배선  <조계산에서 만나는 이야기>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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