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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두봉 청년 6일간의 조계산 입산체험③

제4일 - 낙수마을 불바다작전

  • 입력 2018.08.02 10:12
  • 수정 2018.08.06 19:13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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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마루에 도착하여 아까 올 때와 달리 절 좌측의 골짜기를 따라 내려갔다. 한참을 내려가자 집이 나타나 한 집으로 들어가며 거기서 쉬어 간다고 짐을 내렸다. 캄캄한 밤이지만 이웃에 집이 더 있는 것으로 보였다. 어디냐고 물어보니 아는 사람이 지계골이라 했다.

주인이 나와 잔뜩 겁먹은 듯 굽실거리는 것이 제발 살려만 달라는 것으로 보였다.

지휘자가 잠시 쉬어 갈 테니 걱정들을 말라,고 하자 알았다고 허리를 굽히며 들어가는데 이때도 동태를 감시하는 보초 한 사람이 꼭 있었다.

그리고는 우리 식구(동료)가 소여물 끓이는 가마솥에다 물을 가득 붓고 불을 때기 시작했는데, 알고 봤더니 짚 가마니를 짊어진 사람이 닭을 한 가마니 잡아넣어 지고 온 것이었다.

장작불에 금방 물이 끓으니 닭들을 마구 집어넣어 튀긴 다음에 삶아냈다. 모두 한꺼번에 달려들어 눈 깜짝할 사이에 한 마리씩을 뜯어먹어 해치워버렸다.

그런데 그때 나는 비린 고기를 못 먹을 때였으므로 아예 닭고기는 먹을 생각을 않고 멀찌감치 앉아 있으니 신출내기라 체면을 차리고 있는 줄 알았는지 옆 사람이(오래되어 누군지 기억하지 못함) 한 마리 들고 와서 뭐하냐고 빨리 먹으라고 주기에 고기를 못 먹는다고 하자 좋아라고 그것마저 홀딱 먹어치웠다.

잠시 후 밥이 다 되었다고 김치와 함께 부엌에서 날라 왔다. 고기는 못 먹었지만 밥은 한 그릇 뚝딱 해치웠다.

밥을 다 먹고 토방이고 어디고 아무렇게나 앉아 있는데 날이 훤히 밝아 왔다.

다시 이동명령이 떨어져 짐들을 챙기는데 짐이 없는 사람은 조금씩 골라(나눠)서 짊어지고 출발을 한 것이 제4일째 아침이었다.

골짜기를 따라 올라오는데 사실은 그제 밤에 내려온 골짜기였지만 어디가 어딘지 하나도 알 수가 없었다.

비가 많이 쏟아질 때는 바위 밑에서 잠간 피하기도 하면서 잿몬당을 넘어 서더니 또 거기서 밥을 해먹고 간다고 무슨 샘 근처에 자리를 잡았다. 그 샘은 장박골몬당 북쪽 꼭대기 부근의 접치마을로 돌아 내려가는 길가에 있는 선암사에서는 조계천(曹溪泉)이라 부르고 일반인들은 참샘이라 부르는 이름난 샘이고 쉼터이다.

4일째 - 빗속에서 밥을 해먹은 장박골몬당 인근의 조계천(참샘)

비가 쏟아지는 장마 통에 솥단지를 걸더니 젓가락 하나 없는데도 어디서 나무를 해오고 불쏘시개를 구해 와서 불을 피우는 것을 보니 탄성이 절로 나왔다.

보리쌀을 삶아가지고 밥은 해놓았는데 반찬을 찾으니 아무것도 없었으나 마침 단지를 하나 짊어지고 온 사람이 여기 된장 있다고 내어 놓아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경험자들이 확실히 다르구나 하면서 한 가지를 깨달아 알게 되었다.

그러면서도 뭐 찍어 먹을 것이 없는가 하고 생각하던 중에 주위를 살펴보니 잼피나무가 불긋불긋 보이길래 혹시 산초가 아닌가하고 다가가서 보니 잼피가 맞았다.

내가 지고 온 고추를 꺼내 잼피 잎싹하고 함께 된장에다가 찍어 맛있게 먹으니 너나 할 것 없이 마른고추를 한 주먹씩 집어가고 잼피 잎을 또 훑어다가 그 빗속에서 보리쌀 삶은 밥을 맛있게들 먹었다.

그러니까 산속에서는 때가 따로 없으니 있으면 먹고 없으면 굶는 것이라 아침도 아니고 점심도 아닌 밥을 먹고 나서 장박골 등을 타고 넘어와 절터가 있는 골짜기로 내려가 그저께 저녁에 출발했던 국골 아지트가 있는 곳으로 다시 되돌아왔다.

도착하니 비는 그쳤는데 그날 저녁에 송광사로 다 모이라는 전달이 왔다고 삼밭등으로 내려가야 된다고 했다.

시간 여유가 있어서 가지고 온 짐들을 정리해 놓고 아무렇게나 퍼질러 앉아서 한동안 쉬었다. 학규와 서로 붙어 언덕을 기대고 앉으니 어느새 눈이 감기는데 부모형제의 얼굴이 떠오르고 나 혼자 이렇게 산에 들어와 도대체 무슨 짓인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송광사로 내려간다는 신호에 따라 모두 출발을 하였다.

학규하고 둘이는 무기고 뭐고 아무것도 든 것 없이 그저 따라만 갔다.

내려가는 중간의 묵은 숯구덩이가 있는 절터 같은 곳에 환자들 7~8명이 팔다리에 총을 맞아가지고 사람 죽는다고 소리를 버럭버럭 지르고 있었지만 몸이 성한 우리도 무얼 어떻게 해볼 도리가 없어 그저 지나갈 수밖에 없으니 전쟁도 아니고 무슨 이런 놈의 세상이 있는가 하여 차라리 빨리 지나가버리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국골 군당 환자터

그곳은 군당의 환자 터라고 하는 곳으로 환자들은 잘 보살펴야 하기에 밥은 없어도 무엇이든지 먹을 것은 준다고 했다.

환자 터로 들어가니 삶은 소고기를 한 뭉치씩 나누어 주었는지 뜯어 먹고들 있는데 많이 아픈 사람은 먹지도 못하고 나에게도 먹어보라고 하였지만 닭고기도 못 먹는 사람이 소고기는 더 냄새가 나서 고개를 흔들었다.

 

어둑어둑해서 송광사 삼밭등(채마밭)에 도착했다. 물가에 있는 넓은 밭이 산사람들로 발을 딛고 돌아설 틈이 없이 꽉 찼는데 공마당을 지나 절로 들어가니 절에도 사람들이 가득하여 순천군내 사람들은 모두 모인 것 같았다.

도대체 무슨 작전을 하려고 이렇게 다 집합을 시켰을까? 은근히 겁이 나기도 했다.

내가 무슨 일을 하느라 조금 늦게 갔더니 그때까지는 절에 스님들이 다 안 나가고 있던 때라 저녁밥을 절에다 시켰는지 모두 밥을 다 먹은 뒤였다.

혼자서 공양간으로 들어가니 우리 동네 용봉스님이 자네도 왔는가? 그러기에 그렇게 됐습니다. 그러니까 밥을 그릇 채로 하나 가득 고봉으로 담고 해우(김) 말려서 무친 것을 반찬으로 주면서 많이 묵(먹)소! 그러는데 얼마나 고마운지 목이 메려고 하였지만 밥을 굶어 놓았으니 반찬이고 뭐고 단숨에 먹어 버렸다.

밥을 먹고 나갔더니 학렬이 양환이 형님 연호랑 우리 동네 사람들이 많이 보였다.

날이 어두워지자 밭에 모인 사람들이 차례차례 출발했다. 그때 재신이가 나에게로 오더니 엠왕(M1)총 한자루와 총알 여덟 발이 들어있는 탄창 하나를 주면서, 자네가 요놈을 들고 가소, 그랬다. 그때까지 나는 총을 쏴본 적이 없어서, 왜 나한테 총을 주는가?, 그런께, 이 총 들고 간 사람이 아파서 못 들고 가게 돼 버렸네, 그러고는 학생 모자를 쓴 어린 사람하고 셋이 한실(지서)로 가라고 했다.

 

절을 출발하여 신작로 양쪽으로 총 멘 사람하고 맨손으로 간 사람들이 섞여 두 줄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이제 온 놈이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고 학규와 나란히 줄만 따라서 가는데 무슨 일을 벌이러 가는구나 싶어 궁금하기도 했지만 행렬을 보니 든든한 생각도 들었다.

환한 달빛아래 외송 앞을 지나는데 줄은 끝이 안보이고 중간중간에 모자를 쓰고 총을 멘 사람이 하나씩 서서 걸어갔다.

그때 줄에서 들리는 소리가 오늘은 낙수를 완전 소탕해 버릴 것인데 재빠르게 움직이고 꼭 불을 질러버리고 나와야 한다는 소리가 들려, 아~ 선암사에서처럼 동네를 터는데 이 많은 사람들이 들이닥치는 것을 보니 아주 작살을 내려는 모양이구나, 하는 짐작을 했다.

사실 낙수는 일정 때부터 면소재지에다 학교 지서가 있던 300호가 넘는 송광면에서는 제일 큰 동네다. 그래서 본보기로 총동원을 하여 마음먹고 공격을 하는 작전이었던 것이다.

출발지점에서 약 2.5km 거리인 평촌 동네 앞 다리거리에 도착했다. 여기서는 낙수, 고대, 평촌 동네로 들어가 멧두재를 넘어 덕동 봉천으로 가는 사거리이다.

 

행렬은 모두 큰길을 따라 낙수로 가는 원굴재를 오르는데 우리 세 사람은 옆으로 빠져 송광사에서 내려오는 하천 변의 고대로 내려가는 샛길로 들어섰다.

지서가 있는 한실(대곡)로 무찔러 가기 위해서다. 이때는 낙수지서가 방화로 인해 한실로 옮겨있던 시기다.

고대를 지나 지서가 보이는 한실에 도착을 하니 전망대에서 비치는 불(써치라이트)이 우리가 가고 있는 신작로를 이리저리 환하게 비추면서 돌렸다.

길가로 엎드려서 불이 한번 지나고 나면 달리고 또 지나고 나면 달려서 지서가 있는 곳과 가까운 신작로 가에 커다란 감나무가 있는 그늘에 엎드렸다.

그러자 학도병인솔자가 신호를 하면 두발씩 쏘라고 하더니 라이트가 지나가자 신호를 해서 둘이는 총을 쐈다.

그런데 내가 방아쇠를 당기자 와르르 다 나가 버리고 털걱하는 소리가 났다.

총을 단발로 쏠 줄을 모르고 그냥 당기고 있으니까 다 나가버린 것이다.

그래놓고 우리는 엎드려 기듯이 정신없이 고대(낙수)쪽으로 달렸다.

조금 지나자 지서 서치라이트가 더 빨리 움직이며 총을 마구 갈겨대기 시작했다.

우리들이 총을 쐈던 신작로 쪽을 향해 마구잡이로 쏴 대는 것이 분명했다.

내가 겁을 먹고 허둥대는 것을 눈치 챘는지 모자를 쓴 학도병이, 겁나서 못 쫒아 올 것이니 걱정마,라고 안심시켰다. 뒤에 생각하니 지서 경찰들을 꼼짝 못하게 묶어 두려고 우리들을 보낸 작전이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숨이 찰 정도로 달려 낙수다리를 건너기 전 삼거리에 도착하니 길 언덕위의 미영(목화)밭에 총을 메고 서있던 보초들이 우리를 세웠다. 다가가서 보니 재신이가 학규와 함께 있었다.

그래서 두봉 청년도 학규와 함께 거기서 기다리기로 했다.

아마도 우리들이 올 것을 짐작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실 지서에서 경찰이 올까봐 미리 보초를 세운 것으로 보였다. 무조건 따라 올 때는 몰랐는데 미리 다 작전을 세워서 공격을 하였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우리가 지서로 가서 혼란작전을 하는 동안 본대는 계획대로 낙수를 공격하고 있었으므로 강 건너 동네(낙수)에서는 불길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사이 원굴재를 넘어 낙수 삼거리에 도착한 본대는 전열을 가다듬은 다음 의기양양하게 강(보성강)에 놓인 다리를 건넜다. 다리라 그래봐야 삼거리(고대)쪽 물이 깊은 곳에만 제일 높은 곳이 약2m에서 점점 낮아져 평소에는 자갈밭이 드러나 있는 강의 중간지점에서부터는 다리가 땅으로 붙어버린다. 그러고 나서 마지막으로 송광(낙수)초등학교 언덕 옆으로 흐르는 봇물 구간 10여m에 차가 교행 할 수 없는 폭의 다리가 놓여 있다.

강을 건너간 공격대들은 학교 앞과 강을 막아 생겨난 장작물(연못)을 지나 굵은 집들이 있고 길가에는 점방들이 여럿 있는 광천으로 가는 큰길 낙수의 중심가에 도착했다.

이때는 입산자들의 세력이 왕성한 때의 야간공격인지라 저항 없는 무혈입성이었다.

끼리끼리 패를 지어 큰길거리 점방들을 모조리 털고 모두가 온 동네로 흩어져 집집마다 들어가 닥치는 대로 털어가지고 나오면서 그들의 방식대로 불을 질러 동네는 온통 불바다가 되었다.

잠깐 사이에 작전이 끝났다는 호각이 울리더니 인솔대별로 미리 약속한 신호에 따라 사람들이 순식간에 썰물처럼 빠져 나갔다.

이후 작전을 끝낸 사람들이 강을 건너오더니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게 다 사라져 버리는데 정말 무엇에 홀린 것처럼 신기하였다.

그러나 나나 학규처럼 아무것도 모른 사람 눈에 그렇게 보인 것이지 그것은 대규모 작전일 뿐, 특별히 치밀한 계획에 의한 작전이 아니라 작전이 끝나면 각각 인솔자를 따라 은신처를 찾아 가게 되어 있다는 당연한 사실을 몰랐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작전이 끝나고서는 모두가 다리를 건너서 넘어 온 것이 아니라 그 자리에서 모후산이나 조계산 어느 곳이던지 자기들의 목적지를 향해 안전한 길로 흩어졌으므로 순식간에 사라진 것처럼 보였던 것이다.

 

제5일 - 절름발이가 되어 다시 군당 국골로

학규와 같이 기다리고 있었으나 작전을 끝내고 건너온 사람 중 우리 동네 사람이나 지금까지 같이 다녔던 사람은 모두 어디로 가버렸는지 한 사람도 보이지 않았다.

일부러 떼어 버리고 갔는지 우리가 놓쳐버렸는지 막막하여 두려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하는 수 없이 송광사 길로 가는 학생 같은 모자를 쓰고 총을 멘 지도자가 인솔하는 십여 명을 따라가는 수밖에 없었다.

저녁에 내려왔던 평촌으로 넘어와 송광사로 가는 줄 알았더니 갑자기 동네 좌측 산비탈을 돌아 맷두재로 넘어갔다.

아마도 처음에 출발했던 곳으로 다시 돌아가지 않으려는 전술일 것이라고 짐작을 했다.

맷두재를 넘어서니 토벌대들이 창가(군가)를 부르면서 올라오는 소리가 들렸다.

그 순간에도 저런 바보 같은 놈들 저렇게 큰소리를 치고 올라오면 다 도망가 버리지 어떤 놈이 잡히겠어! 하는 생각을 했으나 사실은 그렇게 하는 것은 자기들이 살려고 일부러 알리려는 것이라는 하나는 알고 둘은 모르는 생각이었다는 것을 후에 알게 되었다.

 

그래서인지 봉천 봇도랑에 도착해가지고는 큰길로 가지 않고 산척으로 돌아 붙였다.

그런데 그때부터 발이 아파 오기 시작했다.

왜 그러나 했더니 지까다비를 신고 헝겊으로 칭칭 감아가지고 다니는데 밤에 개울이고 어디고 가리지 않고 뛰어 다니다보니 발에 물도 들어가고 모래도 들어가 발을 뗄 때마다 버걱버걱 소리를 내면서 살을 깎아 내려서 걸을 수가 없도록 쓰리고 아프게 된 것이었다.

산척으로 올라오더니 입구에 학규하고 나하고만 놔두고(기다리라 하고) 그놈들만 또 동네를 털러 들어갔다.

정자나무 밑에서 발을 붙들고 앉아 학규를 보고, 자네는 어쩐가? 나는 발이 아파 죽것네, 그랬더니, 성님 나도 죽것소, 하면서 우리가 뭐 할라고 이 사람들한테 왔는지 모르겠다고 진정 후회어린 푸념을 주고받으며 머리를 떨어뜨린 채 맥없이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한참을 기다리고 있으니 무엇을 털었는지 둘러메고들 나와서는 다시 뒷산을 넘어 외송으로 가는 민재를 향했다.

그러더니 민재 몬당에 와서는 거기서 한숨 자고 간다고 평편한 곳에 자리를 잡았다.

가만히 누워서 생각하니 선암사 옆에서 여기까지 온 오늘 하루가 십년도 더 되어 보일 정도로 길고 고통스런 시간이었다.

조금 전에 있었던 산척에서 옆으로 한 굽이만 돌아 넘어가면 우리 동네(이읍)인데도 도망갈 생각을 못해 서러운 마음만 들었다.

잠시 눈을 붙였는가싶은데 깨워서 눈을 뜨니 동쪽이 뿌옇게 밝아오고 있었다.

모두가 짐을 챙겨 일어서는데 외송으로 내려가지 않고 운구재 방향으로 동쪽 등줄기를 타고 조계봉으로 올라가더니 조계봉을 막 넘어 왼쪽 중허리 길로 타고 돌아 송광사를 향해 내려갔다.

입산 제5일째가 시작되는 날이었다.

 

발은 점점 더 아파와 나도 모르게 절룩거리면서 골짜기를 따라 송광사하마비 앞에 있는 숯 창고에 도착하자 한 사람이 잠깐 기다리라 그러더니 비림 밑의 텅텅 비어 있는 숯창고 속으로 들어가서는 바닥에 떨어져 있는 숯 부스러기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뜻을 알아차리고 우리도 들어가서 함께 모아 한가마니가 되자 짊어지고는 일주문과 화엄전을 지나서 수석정 징검다리를 건너 대웅전의 뒤편 우측의 개울을 따라 모개배미로 올라갔다.

개울이 끝나는 곳에서 조금 더 올라가더니 짐을 내려놓았다.

그곳은 옛날 실상암이란 암자 터였는데 우물이 있던 구덩이에는 물이 흘러넘치고 날은 환하게 밝았다. 밥을 한다고 돌을 놓아 솥을 걸고 낫으로 나무들을 찍고 마른나무를 모아 불을 붙이는데 연기도 나지 않게 불을 피웠다.

정신없이 걸을 때는 아픈지도 모르고 왔는데 앉아서 쉬니 발이 말도 못하게 아파 왔다.

하는 수없이 지까다비를 벗고 감은 헝겊을 풀어보니 온 발이 까지고 벌겋게 부어 있어서 학규도 벗어보라고 했더니 나보다는 조금 나았다.

그래서 밥을 하는 동안 발을 찬물에 담가서 씻으면서 생각하니 이러다가는 몇 걸음도 걷지 못하고 낙오되어 버리고 말 것 같았다. 이래가지고는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결심을 하고 외진 곳에 따로 떨어져 앉아 있는 모자를 쓴 지도자한테로 다가가서 부은 발을 내보이면서, 대장님 발이 이래가지고 한 발짝도 제대로 못 걷겠소. 저~기 국골에 환자 터가 있던데 그리 가서 며칠 치료를 받아가지고 다시 올 테니 좀 보내주시오, 그랬더니 두말 않고 그러라고 허락을 해줘서 얼마나 반가운지 속으로는 춤을 추고 싶었다.

그러나 겉으로는 표를 내지 못하고 인상을 찌푸리면서, 고맙습니다. 동무!, 하고 지금까지 한 번도 해본 적이 없는 동무라는 말이 저도 몰래 튀어 나왔다.

 

보리쌀 삶은 것을 먹는 둥 마는 둥 학규와 함께 그들이 보는 앞에서는 심하게 절룩거리며 걸어내려 오다가 한 구비를 돌아서서는 아프거나 말거나 뒤도 돌아보지 않고 뛰어 내려왔다.

골짜기를 다 내려와 개울을 건너 환자 터를 향해 돌아가면서 곰곰 생각을 해보니 대장이 두말 않고 보내 준 것은 우리들을 데리고 다녀봤자 짐만 될 것 같아 차라리 잘됐다고 보내버렸구나 하고 나라도 그랬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어 좋아라고 날뛴 속없는 짓을 한 것 같아 조금은 부끄러운 생각이 들기도 했다.

수석정을 지나 공마당으로 나왔을 때 운구재가 한눈에 들어왔다.

저기만 넘으면 바로 우리 집인데 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발걸음은 여전히 국골을 향하면서, 학규 우리 그냥 저리 넘어가 불(버리)세, 하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왔지만 그랬다가는 우리 가족들 보복은, 하며 가로막아 꿀꺽 삼켜버렸다.

토다리를 지나 굴등이로 올라가고 있는데 어떤 놈이 옆구리에다 자그마한 백을 하나 차고 철렁철렁 거리며 내려오고 있는데 자세히 보니 우리 동네 우재구였다.

뒤에 낙성에서 살다가 죽은 재구는 키가 훤칠하고 잘생겼는데 산에서 위생병을 하는 모양이었다. 너무 반가워서 어디를 가는가? 하고 묻고는 여기 치료 좀 받을 라고 오네. 그랬더니 이 아래 절에 좀 갔다 올라고 그러면서 휑하니 내려가 버렸다.

어찌나 섭섭한지 괜히 왔다 싶은 생각이 불쑥 솟았다.

낙수에서 눈 깜짝할 사이에 없어져 버렸더니 어느 틈에 여기에 와 있는 것을 보고 그때 우리가 몰라서 뒤에 쳐지는 바람에 그 사람들을 따라 오느라고 고생을 했지 우리 둘이라도 그냥 이곳으로 바로 왔으면 결국 다 만나게 되었겠구나하는 생각이 들면서도 우리만 따로 움직였다면 오히려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는 생각과 함께 새로운 것을 많이 알게 되었다.

환자 터로 올라가니 어린아이 같은 놈이 칼빙을 메고 감시를 서고 있기에 칼빙을 메면 높은 사람이라는 생각에 그 앞으로 찾아가 이러이러해서 왔다고 보고를 하니까 여기에 있으라고 그러고서는 재구를 따라 내려가 버렸다.

거기서 하루를 보내는데 팔 부러진 놈 다리 떨어진 놈들이 나 죽는다고 악을 쓰는데 차마 보고 있을 수가 없어 한쪽으로 가서 귀를 막고 누워있었다.

그러는 중에도 피를 너무 흘려서 인지 죽은 사람이 나왔다.

그러자 성한 사람들을 불러 모으더니 그곳을 통솔하는 지도자가 승리의 날을 보지 못하고 먼저 희생을 한 동지의 명복을 빌자면서 삼베로 몸을 감아 산비탈을 파고 묻어 주면서 동지를 위해 우리들이 꼭 승리를 쟁취하자고 연설을 하였다.

모두 박수를 치며 궐기를 했지만 돌아와서 다시 누워 있으니 비명을 지르는 소리와 땅에 묻은 사람의 모습이 머릿속을 흔들어 잊어버리려고 눈을 질끈질끈 감다보니 아무런 생각이 나지 않을 때도 있었다.

저녁이 되자 학규가 곁으로 와서, 성님 저~어 총 든 지도자가 날보고 같이 송광사로 내려가자 그래요, 하기에, 그래 갔다 오니라, 그러고서 내려가는 것을 보고 있으니 학규하고 떨어지지 않고 지금까지 붙어 있는 것이 정말 다행으로 생각되어 고마웠다.

그러나 학규가 내려가고 나자 산속이 텅 빈 것 맹키로 서늘하고 허전하여 부모님이 누워계실 동네를 가리고 있는 시커먼 산줄기 너머로 자꾸 눈이 돌아갔다.

얼마나 지났을까. 저녁이 제법 깊어 가는데 학규가 목에 숨이 차게 뛰어 올라오더니, 성님 나 안 죽고 살아 온 것이 천만다행이요, 하고는 내 앞에 거꾸러지는데 얼마나 놀랐는지 말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았다. 어께를 붙잡아보니 온 몸이 요동을 쳤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정신을 차려라, 하면서 손에 힘을 주고 있으니 차츰 안정을 찾는지 숨소리가 골라졌다. 그래 무슨 일인데 그렇게 사람이 다 죽어가냐, 그랬더니 절에서 당한 이야기를 차례차례 들려주었다.

지도자를 따라 절에 내려가서 사무실마루에 앉아 있으니 바가지 모자가 휘~익 돌아오는 것이 눈에 띄어 아차! 군인이구나 싶어서 한 길이나 되는 담을 두 사람이 단번에 뛰어 넘어 담장을 타고 돌아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고 산 쪽만 바라보며 무조건 내달리는데 뒤에서는 총소리가 콩을 볶는 듯 하고 총알소리가 피~잉 피~잉 뒤통수를 향해 날아가 숨조차 쉬지 못하고 엄마쯤을 달리다 숨이 막혀 엎드려 보니 지도자 동무는 어디로 가벼렸는지 보이지 않고 총소리는 계속 났지만 우리를 보고 쏘는 것이 아니라 아무데나 보고 마구 갈겨대는지 처음 담을 뛰어 넘었던 뒤쪽으로 날아가는 총알들의 불빛이 하늘을 갈랐다.

그래도 안심을 할 수가 없어서 조심조심 다시 개울 쪽으로 더듬어 내려가 겨우 길을 찾아서 돌아오게 되었다면서 군인들이 주둔해 있는 것도 모르고 들어가 꼼짝없이 죽을 뻔 했다가 조상이 도왔는지 다행히 안 죽고 살아왔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나서, 동생은 이제 오래 살겠다, 그랬더니, 말도 마씨요 이러다가는 제명에 못 살고 금방 죽고 말것소, 하면서 조금 전과 달리 목소리에 웃음이 베어 나와 오늘 하루도 우리 두 사람 목숨이 붙어 있어 다행이라는 위로의 손을 붙잡고 힘을 주었다.

 

바위언덕에 얼기설기 나무로 하늘만 가린 곳에서 두 사람은 몸을 기댄 체 잠이 들었다.

참기 어려운 긴장이 순간 생각을 멈추게 했는지도 모른다.

눈을 떠보니 그토록 발악을 하던 환자들도 지쳐 버렸는지 신음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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