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0.23 화 18:4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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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소개(疏開)마을
  • 2018.08.09 11:15

*소개(疏開): 공습, 화재 등에 대비해 밀집된 주민이나 시설을 분산함

주암호 이주 신흥마을. 앞쪽이 수몰지점이며 뒤에 보이는 산이 모후산이다

1949년 10월 7일, 이날은 조계산 줄기의 산간마을들이 불길에 휩싸여 검은 연기가 세상을 온통 어둠속으로 몰아버린 날이었다.

가엾은 촌민들은 휘감기는 연기 속에서 조상 대대로 등 붙이고 살아온 집들을 활활 타오르는 불길을 마을 밖 멀리서 바라보며 서로 부둥켜안고 흐르지도 않는 통곡의 눈물을 가슴 속으로 꿀꺽꿀꺽 삼켜야만 하였다.

이미 이웃 소개지(疏開地, 소개하여 옮기거나 옮겨 간 곳)로 떠나 있는 마을사람들은 하룻밤을 보내고 나서야 온 마을이 통째 하늘로 사라져 천지가 비어버린 집터를 찾아와 그때까지 꺼지지 않고 있는 불씨와 군데군데 피어오르는 가느다란 연기를 바라보며 한숨마저도 목에 걸려 토해낼 수 없는 망연자실의 순간이 깨어나기를 기다려야 했다.

이 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리 14연대에서 발발한 여순사건에서 순천을 점거한 봉기군이 3일 만에 진압되면서 조계산으로 잠입하여 은신투쟁하는 일명 반란군들의 소탕과 그들의 은신보급대상지인 산골민가 접근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으로, 근거지가 될 만한 산간마을의 사람들을 모두 소개하고 집들을 모조리 불태워 버린 일을 말한다.

물론 이때는 빨치산들이 활동한 지리산 권에 깊숙이 자리 잡은 모든 산간마을들이 불태워졌고 송광면만 하더라도 조계산과 모후산 노리산줄기의 깊숙이 자리잡은 모든 마을들이 불질러졌지만 당시의 증언을 수집한 송광면의 상도 신흥, 오미실, 평촌, 외송 4개 마을의 상황만을 기록으로 옮겨본다.

『그때가 6. 25나기 전이니까 49년도 나락모가지가 노릇노릇할 때 평촌을 불 지르기 사흘인가 전에 광주20연대 9중대에서 10월 7일 열두시까지 한집도 빠짐없이 낙수나 고대로 전부 소개하라고 지시가 내려 왔어. 밤이면 반란군들 발 못 붙이게 불 지른다고. 그렇지만 설마 진짜로 불을 지를라드냐, 하고 긴가민가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지. (당시 평촌 거주 김채선, 80)』

명령을 전해들은 마을 사람들은 어안이 벙벙하고 기가 막혔으나 설마 마을을 몽땅 불 지르겠느냐하고 반신반의하면서도 나라의 명령이라면 심장부터 오그라드는 주눅에 길들여진 조계산의 산비탈만 의지하여 살아온 가엾은 그들은 설마하는 실오라기 같은 기대만을 꿈꾸며 이미 소개를 가 있었기에 몇몇 사람들만 일부의 농기구 등을 집밖으로 꺼냈다.

지금은 수몰된 주암댐 신흥마을. 멀리 모후산이 보인다

신흥과 오미실 사람들은 거의가 큰 마을인 낙수로 소개를 하였고 송광사의 아랫마을인 평촌과 외송은 인척과 연고에 따라 낙수와 고대 금평으로 나뉘어 살림살이를 옮겨 살고 있을 때였다.

여기서 증언자들이 말하는 소개상황을 옮겨 보면

『우리는 낙수 친척집으로 소개를 하여 한집에 여러 식구들이 모여 한 방씩을 차지하고 살면서 방이 모자라므로 마루 헛간 할 것 없이 집안의 공간이란 공간은 모두 차지하고 살았으며 마당 여기저기 또는 강변이나 산비탈에 막을 치고 사는 사람들도 많았다. -신흥 임채환(86) 김질수(80)-』

『그때 우리 집은 고대 전영근이 이모 집으로 갔는데 그 집 식구가 열이나 돼 오래 살수가 없어서 개천가에 막을 치고 당장 그 추운겨울부터 보내야 했으니 고생이 말이 아니었지. -평촌 김채선(80)-』

소개자들 모두가 다 그렇게 살았다고 당시를 회상하였다. 그럼 여기서 당시조계산의 빨치산과 군경의 상황에 대한 증언을 정리해 보자.

여순 봉기에 실패하고 조계산(지리산 권)으로 잠입한 봉기군과 좌익들은 48년 겨울을 그들의 천하처럼 횡횡하였지만 무방비상태의 군경은 바라보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해가 바뀌고 나서 토벌을 감행하려고 하였으나 녹음기에는 산중 접근이 불가하므로 49년 가을부터 시작할 본격적인 토벌에 대비하여 은신처 제거와 시야 확보를 위해 마을사람들을 동원하여 산길 주변의 벌채가 시작되고 골짜기 곳곳에 불을 질렀다.

이때 치안유지와 토벌을 지휘한 군은 광주에 주둔한 국방경비대였고 낙수에는 1개 소대가 파견되어 있었으며 경찰은 순천(승주)과 고흥 보성의 일부를 분할하여 벌교에 창설한 임시성격의 벌교경찰서였고 벌교경찰서휘하에는 빨치산토벌을 전담한 대장 유주문 경위가 이끄는 2개 중대 약 80명의 토벌대가 있었다.

마을을 모두 불태우기 전 소개대상으로 지정된 신흥과 오미실, 평촌과 외송에는 광주국방경비대로부터 삼일 후인 7일 열두 시를 시한으로 완전소개명령이 하달되었다. 그것은 동절기 고산인접 마을을 통한 빨치산들의 보급과 은신활동을 차단하기 위한 작전의 일환이었다.

소개명령이 마을사람들에게 전달되었을 때야 마을 전체를 불태워 없앤다는 사실도 알게 되었다.  사람들은 지난 소개명령에 의해 이미  마을을 비우고 우선 급한 대로 필요한 의복과 식량 생활도구만을 챙겨 군경이 주둔하여 치안이 비교적 안전한 낙수와 고대 금평으로 옮겨와 살고 있었다.

그러니까 낮으로는 자기 마을의 집으로 드나들며 농사일을 하면서 각자의 집들은 그대로 관리하는 상태였으나 이제는 아예 마을을 불태워 없앤다는 최후의 통첩, 즉 필요한 물건은 모두 꺼내라는 말이니 마을 사람들로서는 청천벽력이 아닐 수 없었다.

주암댐 수몰 전 주민이 찍은 신흥마을 사진

당시 군경의 말은 거스를 수 없는 절대명령이었지만 비좁은 집에서 여러 식구가 북적대는 판에 부피가 큰 농기구나 무거운 살림살이까지 한꺼번에 옮긴다는 것은 장소는 물론 시간이 너무 촉박하여 거의 불가능하였다.

그래서 일부 사람들은 소개지로 옮기지는 못해도 밖으로 꺼내 놓았지만 한편으로는 설마 불까지야 지르랴, 하고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소개마감 시일인 10월 7일이 밝았다. 이때는 나락(벼)이 노릇노릇 익을 때였다.

소개를 하기는 했지만 아직 추수를 하지 않았기 때문에 낮이면 논밭에 가서 일을 하고 해가지기 전에 소개지로 돌아가는 어수선한 때였다.

오전 열시 경에 낙수 학교운동장에서는 군인들과 벌교경찰서장은 이장들과 의용소방대와 향토방위대원 약 40명을 집합시켜 소개마을에 불 지르는 이유를 설명하고 방법 등을 교육시켰다.

『불 지른 그날 오전에 이장들을 낙수에다 소집을 해가지고 불댄 이유를 설명하는 교육을 시켰는데 우리 동네 이장은 김강선 씨였지. (김채선)』

그런데 그 시간에 낙수에 주둔한 군인 서너 명이 반란군들처럼 변장을 하고 정탐하러 신흥마을 입구로 들어섰다. 그러나 마을에 있는 사람들이 보기에는 아무래도 행동이 조금 수상하였다. 그래서 향토방위대인 용감한 청년 김판근과 임수근 두 사람이 나서서 죽창을 들이대며 신분을 밝히라고 제지하였다.

그러자 변장한 군인들이 어처구니없다는 듯,

“낙수에 주둔한 군인이다. 작전 중이니 비켜라.”

라며 고압적인 태도로 말했다. 아마도 그러면 두말없이 비켜설 줄로 알았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두 청년은 “그 말을 어떻게 믿느냐? 신분을 밝히지 않으면 보내줄 수 없으니 기다리라”고 군인들을 붙들어 세웠다.

예기치 못한 상황에 화가 난 군인들이 가만두지 않겠다며 몰아붙였으나 두 청년 물러서지 않았고 결국 마을 앞 미나리꽝에서 멱살을 잡고 드잡이를 하는 소동까지 벌어졌다. 그러자 마을 사람들이 하나 둘 몰려나왔다.

당시는 동네 젊은이들 거의가 의용소방대나 향토방위대에 편성되어 낮으로는 일을 하고 밤이 되면 동원되어 보초를 서는 때였다.

이 광경을 보고 있던 사람 중에 며칠 전에 자기 집 소를 반란군들에게 빼앗겨버린 박화용 노인이 있었다. 박 노인은 그 사람들을 향해

“저놈들이 전에 우리 집 소를 몰아간 놈들 아니라고!” 말했다.

물론 군인들인지는 모르고 반란군복장을 하고 있으니 소를 잃은 반감에 나온 말이었다. 그런데 그 말 한마디 때문에 잠시 후 목숨을 빼앗기게 될 줄을 어찌 상상이나 할 수 있었겠는가.

마을의 청년들이 몰려오자 군인들은 조금 기가 죽었는지 한 발 물러섰고 청년들 역시 처음부터 상대가 공격을 해오지 않았다면 맞대응을 할 생각이 없었으므로 미나리꽝에서 나와 앉아 있다가 결국 군인으로 밝혀져 없었던 일처럼 하고 돌아갔다.

그러나 그것은 없었던 일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두 청년과 박 노인의 얼굴을 똑똑히 기억하고 돌아갔기 때문이다.

『화용이 박샌이 소 줬다고 반란군들한테 협조한 사람이구나 하고 얼굴을 딱 찍어 논 것이여. 소 몰아 가불고 환장한 사람을… -신흥 김질수(80)-』

한 시가 조금 넘을 무렵 무장한 군인들 육칠 명이 의용소방대원들을 인솔하고 불을 지르기 위하여 신흥마을에 도착하였다. 거기에는 조금 전 변장을 하고 와서 소동을 일으켰던 군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도착하자마자 사람들을 모두 마을 앞으로 집합시킨 다음에 조금 전 정탐을 나와 시비가 있었던 두 청년 김판근과 임수근을 앞으로 불러내 멀찍이 세우더니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총살을 시켜버렸다. 정말 어이없는 일이었다.

이 광경을 본 마을 사람들은 혼비백산이 되어 온 몸이 굳어버렸다.

그러나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군인들은 박화용 노인을 부르더니 머뭇거리는 그를 끌어냈다. 총살을 목격한 박 노인의 얼굴은 이미 사색이 되어 있었다.

박 노인을 끌어내어 앞에 세우고서는 저 사람이 반란군들에게 협조한 사람이야 라고 외치는 군인의 말에 이어 총소리가 울리고 박 노인 역시 이승의 사람이 아니었다.

“죽일 놈들 즈그들이 군인이든지 누구든지 의심난 사람들은 무조건 잡으라고 지시를 해놓고 말이여.”

“소 몰아가불고(빼앗기고) 환장한 사람한테 협조했다고…”

세시가 가까울 무렵 이들은 의용소방대원들에게 방화를 명령했다.

빗자루 등을 동원하여 불방망이를 만든 다음에 집집마다 돌아다니며 불을 붙였다. 초가지붕이 대부분인지라 온 마을은 삽시간에 불구덩이로 변하고 말았다. 조상대대로 살아온 마을이 불타는 광경을 멀찌감치 떨어져 바라보고만 있어야 하는 마을사람들의 심정은 차마 형언할 수가 없는 지경이었다. 

그보다도 불을 지르는 의용소방대원 중에는 자기 마을을 자기 손으로 불 질러야 하는 사람들도 있었으니 그들의 심정 또한 어찌 했을지 감히 상상이 가지 않아 후일 마을사람들이 불을 지른 소방대원에게 당시의 심정을 물으니, “그 통에 심정은 무슨 심정 명령을 내리니까 시키는 대로 하는 것이지” 했다고 하니 당시의 상황이 충분히 함축되어 있는 간결한 대답이라고 아니할 수 없다.

한편으로 오미실, 평촌, 외송마을로 나누어간 군인과 의용소방대원들이 도착하여 방화를 시작하고 있었다.

주암댐 건설 후 평촌마을

평촌의 경우 당시 83호였다. 신흥에 불을 지른다는 소문을 듣고 고대에서 빨리 달려온 몇 사람들 중 미처 꺼내가지 않은 쟁기나 홀태 같은 물건을 꺼내려는 사람도 있었지만 다른 사람들은 방화대가 도착하자 쫓겨나 큰길이나 논 밭 등 멀찌감치 서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그들이 사전에 꺼내 놓지 않은 물건들은 고스란히 불태워졌다.

당시 현장에 있었던 김응태(80) 씨의 상황증언이다.

『나는 낙수다리건너기 전 금평삼거리 주막 야박주(젖보) 집에가 있었는데 동네를 불 지른다 그래서 가 보았제. 그때 고대 있던 사람들이랑 여럿이 올라가 보았어. 낙수에서 의용소방대들이 와서 불을 질렀는데 우리 집은 낙수 임창수 동생 임성태가 비찌락(빗자루)에다 불을 붙이드마는 아래채부터 차례차례 불을 대분께 금방 타불제, 눈물이 날라고 그런디…』

마을이 불이 붙는 것을 확인한 후 의용대들은 떠났다. 해질 무렵이 되자 집들은 거의 주저앉아 온 마을이 커다란 모닥불처럼 되어 허탈해진 마을사람들은 모두 소개마을로 돌아갔다.

신흥 오미실, 평촌, 외송 모두가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똑같이 불을 지르기는 했어도 평촌에 비해 신흥을 모질게 한 것은 위장사건 때문이었다.

그 예로 신흥마을 가운데 동네에서 제일 부자인 오철모 씨의 커다란 기와집이 있었다. 초가집과는 달리 불을 질러도 잘 타지를 않아 도중에 꺼져 버렸다. 그러자 대원들을 시켜 다시 불울 붙이고 또다시 붙이고 하여 끝까지 모두 태워버리고 말았다. 

평촌도 마을가운데 큰 기와집이 있기는 마찬가지였다. 모두 세 동 있었다. 하지만 한번 불을 지른 뒤에는 그만이었다. 행랑채나 별채같은 건물은 거의 타버렸고 반쯤 탄 본채들은 다시 수리하여 사용할 수 있었다.

왜냐하면 염탐사건으로 인해 봉변을 당했다고 생각한 군인(그놈)들이 보복을 하기 위해 들이닥쳐 방화현장을 직접 지휘했으나 다른 마을은 한두 명의 인솔군인이 의용소방대원들에게 방화 명령만 했을 뿐 불길이 오르는 것을 뒷짐지고 바라보기만 했기 때문이었다.

외송마을

다음은 외송마을의 방화현장 일화다.

방화명령을 받고 온 소방대 중에는 그 동네 마방댁의 조카 되는 사람이 있었다. 마침 동네 입구에 서있던 마방댁은 조카가 자기 집에 불을 지르려고 가는 것을 보고는 “니가 우리 집에다 불을 질러야!” 하면서 한탄을 하였다. 그러나 그가 어찌 숙모의 집에다 불을 지르고 싶어 질렀으며 명령을 따르는 그에게 좋은 집과 허름한 집 남의 집과 친척집을 가려야 하는 정신적 틈바구니가 있었겠는가. 설사 자기 집이라고 하여도 말이다.

이 이야기를 전해주는 외송마을의 김천식(87) 옹은 허탈한 웃음과 함께 시선을 허공에서 거두지 않았다.

당시 조계산의 빨갱이들을 소탕하기 위해 마을들을 불태워 버린 이 사건을 현장에서 경험한 생존자들은 60년 이상의 세월이 흘러 대부분 사망을 하거나 기억에서도 서서히 사라져 가고 있다.

외송마을 옛 터

그러나 소개마을 방화사건과 함께 벌어진 신흥마을의 정탐총살사건은 후손들에게 잊을 수 없는 역사적 교훈을 남겨주고 있다. 물론 세월이 좀 더 흐르면 사람들의 기억에서 영원히 사라져버릴지도 모르지만 말이다.

『그런께 용감한 것이 병이여. 우리들이 바보였제 거짓말로라도 우리 누구가(일가친척이) 군인이요 했던지 경찰관이요 했으면 안 죽였을 것인디 말이여. 세상에는 억울한 사람도 반드시 있게 마련인 것이 인간사이여. 아무리 그래도 우리 후손들한테는 이런 억울한 일이 다시는 없도록 해야 할 것이여.』

이 말은 군인에게 총살당한 이웃의 억울한 죽음을 두고 안타까워하는 신흥마을 현장생존자 김질수(80) 노인의 후회가 실린 애끓는 하소연이다. 끝.

 

2011년.

<이글은 신흥마을 임채환(86) 김질수(80), 평촌의 정영백(80) 김응태(80), 외송마을의 김천식(87) 김채선(80) 노인들로부터 수회에 걸쳐 증언을 모아 2011년 5월 정리하였음>

 

 

김배선  netong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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