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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 한가마니 때문에

  • 입력 2018.08.20 12:02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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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는 6.25 전 해인 1949년 가을, 조계산의 북쪽 주암면에서도 가장 외진 산골인 접치마을 입구에 사는 우기 최샌은 서너 달 전부터 아랫마을인 감성이나 갈마로 집을 옮겨가려고 마음먹고 전 재산인 서마지기 논을 어떻게 처분해야 하나 궁리하던 중이었다.

팔십여 년 전 조부께서 접치로 들어와 고향이 되어버린 동네를 멀리도 아닌 아랫마을로 떠나려고 마음먹은 것은 아들 용남이가 광천지서에 근무하게 되면서 아무래도 이곳에 계속 살다가는 좋지 않은 일을 당할 것 같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이때는 여순사건이 난 이듬해라 봉기군 일부가 조계산으로 들어와 인근의 입산자들과 함께 야간에는 저희들 세상처럼 기승을 부리던 탓에 주민들은 생활터전인 산에도 못 들어가고 하루하루 목숨을 하늘에 맡긴 꼴로 살아가고 있었다.

소의 주인이었던 접치 이두일(92) 옹

선암사와 송광사 쪽에서는 주간토벌이 시작되었지만 그때까지는 아직 동네를 완전히 비우고 소개를 나가지 않고 밤으로만 마을 밖으로 소개를 하고 낮으로는 돌아와 농사일을 하던 시기였으므로 목숨을 걱정하여 터전까지 멀리하고 나가 살 생각은 하지 않았으나, 얼마 전에 아들이 의용경비대로 들어가 광천지서에서 근무하기 시작하면서부터는 반란군들이 경찰가족은 가만두지 않는다는 말이 머릿속을 맴돌아 내려가야 되겠다는 생각을 하면서도 논 때문에 미적미적 하여오다가 드디어 오늘 흥정을 해볼 요량으로 점심때가 지나서 동네 가운데 있는 두일이 이샌 집을 찾아갔다.

“용남이 아부지가 웬일로, 어서 들어오시시요! ” 이샌 어머니가 맞아 들였다.

두일이 이샌과 마주앉자 마음먹고 온 참이라 망설이지 않고 말을 꺼냈다.

“이샌도 짐작 허실란가 모르것는디, 내가 요 아래로 내려갈까 허고 우리 논 서마지기를 처분해야 것써서 이샌 소하고 바꾸면 맞을란가 싶어 말해볼라고 왔소.”

“멋땀시 내래갈라 그런다요?”

이샌 어머니가 놀랍다는 듯이 물었다.

“여그는 반란군들이 와싼께 무서와서 그런다요.”

아들인 두일이 이샌이 대신 대답을 해줬다.

그렇게 우기 최샌의 논 서 마지기와 두일이 이샌의 새끼를 세배나 낸 암소를 두고 흥정이 시작되었으나 두일이 이샌은 논 서마지기에 쌀 한가마니를 더 얹어 달라는 주장을 끝내 굽히지 않아 흥정은 성사되지 못했다.

만약에 시끄럽지 않은 세상이었다면 내려갈 필요가 없으니 당연히 팔 생각도 안했겠지만 그때는 험한 세상이라 논을 사려고 나서는 사람도 없고 마찬가지로 묵갈림이라도 내놓자 해도 농사를 제대로 지을 수 있는 형편이 못되니 수를 줘가며 지으려는 사람도 없었다.

보통 때 같으면 오리 남짓 밖에 안 되는 거리라 내려가 살면서도 너끈히 올라 다니면서 지을 수도 있지만 만날 오르내리는 것은 이사를 가지 않은 것이나 매 마찬가지라는 생각에 하는 수 없이 이사를 못하고 어물쩡 주저앉게 되어 늘 마음이 편치 않고 불안이 가시지 않았다.

1948년도 10월 여순사건 이후 조계산으로 들어온 봉기군과 좌익분자들이 은신활동을 하면서 조계산 북쪽과 인접해 있는 주암면의 가장 외진 산중마을인 접치는 치안의 사각지대나 다름없었다. 마을이 깊은 산골에 위치한 이유도 있지만 접치고개가 주암과 쌍암(승주)의 면계인 관계로 양쪽 지서 모두 거리가 멀어 보호를 받기가 어려웠다.

게다가 접치재 조계산등산로와 송광사로 향하는 오두재 길 모두 그들의 통행로여서 야간이면 제집 드나들 듯 하여도 경찰들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래서 경찰들은 밤이면 마을 청년들을 동원하여 전봇대보초를 세웠고 철저한 신고를 요구했다. 이후 마을사람들은 빨리 신고를 하지 않았다는 이유 등으로 수많은 고초를 겪어야만 하였다.

첫해 겨울에는 동네 뒤가 북풍받이라 입산자들이 동네로 들어오는 일이 드물었다. 이듬해 날이 풀리면서 주암 사람들이 산으로 많이 들어가 복다나 감성 등 주암의 동쪽마을로 오가는 길목에 접치가 있는 관계로 입산자들이 내려오는 횟수가 늘어도 마을에는 그다지 피해가 없었다.

이것은 수시로 드나드는 길목이나 은신처와 가까운 곳의 마을 사람들과는 적대관계를 만들지 않는다는 그들의 전술 중 한가지였다.

그때까지는 입산자들이 어렵지 않게 마을로 숨어들어올 정도로 감시나 방어체계가 갖춰져 있지 않았음은 물론 가족이나 마을사람들 역시 뭐가 뭔지를 몰라 그저 눈치를 보아 가며 인정으로 대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차츰 입산자들의 수가 늘어나면서 보급투쟁과 정보수집 등을 위한 야간하산활동이 거의 매일 같이 전개되어 이것을 차단하기 위하여 경찰의 경계태세도 강화되고 군경의 공비토벌작전 또한 본격적으로 이뤄지기 시작하였다.

하지만 조계산의 토벌작전은 대부분 선암사가 있는 동쪽과 송광사가 있는 서쪽 그리고 송광면과 외서면이 있는 남쪽골짜기들을 대상으로 실시되었다.

그 까닭은 북쪽방향의 골짜기들은 기후 조건이 좋지 않아 예부터 사람들이 거주한 장소가 별로 없고 특히 동절기에는 은신이 불가하여 아지트로 삼을 조건이 못되기 때문이었다.

접치 오두재길 반란군 은신처 하학골 입구

그렇지만 접치마을의 뒤편에는 하학골과 먼골이라는 대단히 깊고 큰 골짜기가 조계산의 북쪽을 형성하고 있어 동절기를 제외한 기간에는 은거지로 삼거나 통행로로 이용하였고 마을서쪽 오두재는 송광사로 이어지는 큰길이면서 잿마루에 오르면 능선이 송광사 뒤편의 모든 골짜기로 연결되어 그곳에서 쌍암이나 주암의 동쪽으로 넘어오려면 접치마을을 거쳐서 가도록 되어 있는 중요한 경유지였다. 그래서 오두재 길은 입산자들뿐만 아니라 경찰관들에게도 토벌작전을 위한 중요한 통로였지만 다른 점은 경찰관들은 낮에만 다니고 입산자들은 밤으로만 다닌다는 사실이다.

이처럼 접치마을이 입산자들 활동에 주요한 경계 대상이기는 하였지만 주암 지서에서는 깊은 산중이라는 조건 때문에 주간에는 장악을 할 수 있어도 야간에는 근접도 할 수 없어 무방비 상태로 놓아둘 수밖에 없었으므로 여름이 되면서 사람들은 밤이면 아예 집을 비워두고 마을아래 저수지 가까운 곳으로 빠져나와 잠을 자고 낮으로만 올라가 농사를 짓고 사는 반쪽 소개 생활을 할 수밖에 없었다.

여름 이전까지만 해도 우기 최샌이 지서 가까운 동네로 내려갈 생각을 할 필요가 없었으나 봄에 아들 용남이가 의용경찰로 들어가게 되어 반란군들을 무섭게 생각하게 된 것이다.

아무튼 두일이 이샌의 소와 서마지기 논의 흥정이 이뤄지지 않아 그대로 눌러 살게 되었지만 토벌이 시작되자 입산자들의 기세도 조금 숙어 드는 중에 불안을 안고 그럭저럭 겨울과 봄을 나고 여름을 맞게 되었다.

그러나 6.25 남침으로 인민군들이 밀려오자 상황은 완전히 뒤바뀌었다. 빨갱이들의 세상이 되자 전에는 그들 편에 표나지 않게 서있던 이웃마을 좌익성향 젊은이들이 나서서 득세를 하고 다니더니 두어 달 만에 공산군들이 모두 물러간 후에는 조계산으로 들어간 입산자들이 밤이면 더욱더 설쳐대기 시작하였다.

그래서 가실(추수)을 끝내고 온 동네 사람들은 주암의 감성 갈마 등으로 완전히 소개를 하였다가 이듬해 봄에야 마을로 돌아왔다.

조계산에 봉기군들이 들어오고부터 조마조마하지 않은 날이 없었지마는 이 시기에는 정말 한치 앞을 모를 지경이었다.

전과는 달리 송광사뒷산에 은신한 입산자들이 오두재를 넘어 움직이기만 하면 신고를 받은 경찰들과 마을 인근에서 전투가 벌어지고 뒤이어 막바지에 몰린 듯 접치에서도 소를 몰아가는 일까지 벌어졌다.

이 시기에 접치사람들은 매일 초저녁부터 짝을 지어 전봇대보초에 동원되어 밤을 새워야 했다.

전봇대보초란, 반란군들이 야간작전을 하는 날이면 전화연락을 차단하기 위하여 몰래 내려와 나무전봇대 하나를 베어 눕히고 전선을 잘라 가져는 일을 방지하기 위하여 어두워지면 마을의 젊은이들을 동원하여 전봇대 하나에 한 사람씩 맨몸으로 그 밑에 앉아 지키다가 반란군이 나타나면 신호를 보내 잠복대에 알리는 일이다.

이 마을의 열아홉 살이었던 이종진 총각도 전봇대보초를 서던 날 다른 보초의 전봇대가 잘려 초죽음이 될 정도로 맞아 수일간 일어나지 못한 적이 있었다고 당시의 경험을 이야기 하며 너털웃음에 씁쓸한 미소를 담아 옛날을 회상하였다.

이때 주암(광천)지서주임은 악독하기로 유명하여 황 몽둥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는 황영환이라는 사람이었다. 그는 빨갱이와 연관된 일이라면 이유 불문하고 사람을 파리 목숨처럼 다루어 사소한 일만 발생하여도 신고를 안 하거나 늦었다는 이유로 주민들을 혹독하게 닦달하여 빨갱이들과 지서 양쪽에 치인 사람들은 견딜 수가 없던 때였다.

그래서인지 마을사람들은 산사람은 물론 낯선 사람만 보아도 즉시 신고에 들어갔다.

그때마다 경찰들이 출동을 하여 그들을 잡기 위해 총을 쏘았기 때문에 접치마을 사람들은 마을주변에서 전투가 많았다고 기억을 했다.

접치 하학골 반란군 초소

그러나 조계산의 다른 곳에 비해 군경 토벌작전은 많지 않았다. 반란군들이 송광사 쪽에서 오두재를 넘어 이동하다가 접전을 벌인 경우가 가끔 있기는 했지만, 대부분이 상호전투라기보다는 소수의 은신자들이 내려온 것이 신고되어 출동한 경찰들로부터 일방적으로 공격을 당하는 형태가 대부분이었다.

그 예로 6.25가 나기 석 달 전쯤 점수 박샌이 널나무를 베려고 마을 뒤로 올라가다가 숨어 있는 반란군들을 발견하고는 못 본 척 살며시 내려와 신고를 했더니 경찰들이 출동을 하여 양쪽에서 총을 쏘아 대며 올라갔으나 한사람도 잡지 못하고 사방으로 튀어 달아나버리니 나중에는 자기들끼리 서로 적인 줄 알고 총을 쏘면서 도망간 적도 있었다. 

또 한 번은 어느 새벽 마을 앞에 있던 작은 빈집 안에서 낯선 사람을 발견하고 행정잠복대에 알렸더니 잠복조 여러 명이 올라와 멀리서부터 총을 쏘자 개둠벙 밑의 개울을 건너 등계봉 정상방향의 소맷골로 도망가는 것을 보고 볶아댔는데 결국은 놓치고 말았으나 피를 흘린 흔적이 있는 것을 보고는 얼마 가지 못하고 죽었을 것이라고 생각해버린 적도 있었다.

이처럼 접치는 반란군들과 가까이 있는 산골마을이었으므로 우기 최샌이 불안해하던 일은지금까지 요행이 넘어 갔지만 결국은 찾아오고 말았다.

6.25가 터지기 직전, 하루는 해질녘에 인민군 모자를 쓰고 총을 멘 사람과 산사람 몇 명이 우기 최샌 집으로 몰려 들어와 며느리에게 반동남편이 지금 어디에 있느냐고 윽박질렀다.

그들의 거침없는 말투와 행동으로 보아 작정을 하고 찾아온 것이 분명하였다.

그러나 의용경찰로 광천지서에서 근무하는 용남이는 거의 집에 있지 않던 때였다.

그러므로 서방은 집에 오지 않아 모른다고 하자 반동은 처단해야 한다며 용남이 각시를 끌고 나갔다. 마을 뒤 오두잿길로 끌려가면서 살려달라고 애원해보았지만 소용이 없었다.

하학골 반란군 초소 흔적

그들은 집으로부터 약 오백 미터지점 물통거리입구 정자나무쉼터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추고 다시 며느리를 닦달했다.

물통거리는 접치마을에 있는 유명한 물맞이 폭포이다.

조계산의 장박골몬당에서 시작하는 하학골의 끝자락에 있는 폭포로서 70년대까지만 해도 백중 무렵이면 전남의 동부지역은 물론, 멀리는 남원에서까지 버스를 대절하여 단체로 물맞이를 올 정도로 약효가 소문난 물맞이 터였다. 물통처럼 생긴 모양에서 붙여진 이름이다. 오두잿길에서 화학골로 들어가는 물통입구의 삼거리는 당산나무가 있던 쉼터였다. 그래서 하학골에서 활동하는 반란군은 그곳이 출입구이다.

한편, 들에서 일을 하던 우기 최샌은 며느리가 반란군들에게 붙잡혀갔다는 말을 전해 듣고 숨가쁘게 달려왔다. 있는 힘을 다해 달려가니 물통 입구에 있는 정자나무 밑에 며느리를세워두고 총을 겨누며 죽이려고 하는 참이었다. 하늘이 샛노랗고 눈앞이 캄캄한 우기 최샌은 군관을 붙들고 사정하다가 발로 채이자 며느리의 앞을 가로막으며 차라리 나를 죽이라고 애원을 하였다.

그러나 그놈들은 인정 없이 총을 발사하였다. 총소리와 함께 두 사람은 그대로 고꾸라졌다. 그러고는 반동에 대한 본보기이라며 며느리가 총에 맞지 않은 것을 알면서도 그대로 두더니 쓰러진 우기 최샌을 정자나무에 매달아 놓고 산으로 가버렸다.

최우기 씨 며느리가 총살되었던 당시 정자나무 쉼터 자리

얼마나 지났을까. 정신을 잃은 사람처럼 우두커니 앉아 있던 용남이 각시는 갑자기 하늘이 무너져라 땅을 치며 통곡하였다.

마을사람들이 올라갔을 때는 거의 실신한 상태였다.

두 사람을 모두 집으로 옮겨와 우기 최샌 시신은 건너편 산비탈에다 장사를 지냈으나 그 이후로 한동안 용남이 각시는 말을 잃은 사람이 되어 버렸다 그러면서도 가끔씩

“그때 쌀 한가마니 더 주고 바꽈 부렀어야제!”

하고 돌아가신 시아버지를 향해 넋두리를 하곤 했다. 이와 같은 일이 발생하자 동네사람들은 쌀 한가마니 아끼려다가 목숨하고 바꿨다고 수군거렸다.

그러한 수군거림이 아니더라도 두일이 이샌 집에서는 일부러 그러라고 한 것이 아니지만 죄지은 사람처럼 마음에 걸려 편치가 않았다.

인민군들이 물러가고 해가 바뀐 어느 날 아침, 일어나보니 외양간에 소가 보이지 않았다.

논 서마지기 하고도 바꾸지 않은 재산이 하룻밤 사이에 사라져버리니 기가 막혔으나 속으로는 이미 짐작을 하고 있었다.

어젯밤 사람들의 발자국소리가 두어 차례 났으나 무서워서 일부러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지난밤에 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이 소를 몰아간 과정은 이렇다.

하학골 작은골에 숨어 살면서 보급투쟁을 하러온 그 사람들은 두일이 이샌 집으로 들어가 외양간에서 소 고삐를 풀어 몰고 나갔다.

우기 최샌이 총 맞아 죽은 정자나무 쉼터에 도착하여 화학골로 몰고 가려고 산속으로 접어 들 때 갑자기 소가 돌아서서 마을을 향해 도망치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그 사람들은 소가 도망을 쳐도 놀라지도 서두르지도 않았다. 소는 자기 집으로 돌아간다는 성질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조금 지체되기는 했지만 천천히 뒤따라가 먼저외양간에 와 있는 소를 다시 몰고 가버린 것이다.

처음에 두일이 이샌이 사람들의 발자국소리를 들었을 때 만약에 주인을 나오라고 불렀더라면 일어나 나갔을 터이지만 아무 소리가 없으므로 일어날까 말까 하고 있는데 부인이 옆구리를 건드려 말리는 신호를 보내 일어나지 않고 아이들도 소리를 내지 못하게 단속을 하였다.

잠시 후 조용해지자, 나가보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한밤중에 나가봤자 득 될 것이 없다는 경험의 지혜로 한번 안 나갔으면 끝까지 나가지 말아야 한다고 참았다.

그런데 한참이 지난 뒤에 또다시 발자국소리가 들려 긴장하며 숨을 죽이고 있으니 다시 조용해졌다. 잠을 설치고 날이 밝기 무섭게 일어나 보니 짐작대로 소 마구가 텅 비어 있었다. 이를 본 아내가 소리 내어 울어 집안이 소란하자 이웃들이 몰려와서는 놀라하며 그들을 위로했다.

소를 빼앗긴 접치 이두일 씨 댁의 현재 외양간

그렇지만 이렇게 소를 잃고 나자, 쌀 한가마니 때문에 한집은 사람이 죽고 또 한집은 소 한마리를 잃은 안타까운 일이 동네사람들 사이에 화제 거리가 되어 60년이 지난 뒤에도 접치마을 노인당에서는 “그 소란 놈, 참 멍청한 놈이여 허허!”하면서 이 기막힌 사연은 두고두고 회자되고 있었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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