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단영역

본문영역

조계암골 토벌작전

  • 입력 2018.08.23 17:49
  • 기자명 김배선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조계암골 입구 송광사 숯창고 터

남한을 핏빛으로 휩쓸어간 6. 25남침전쟁이 38선을 경계로 지루한 공방전을 벌이고 있던 1951년도 가을 어느 날 오전 햇살이 퍼질 무렵, 송광사 대웅전과 마주보는 조계암 골짜기에는 일주문 앞 숯 창고 뒤에서 두 발의 총성에 의해 박격포가 터지고 화엄전 뒤편의 가파른 능선위에서는 골짜기의 한 곳을 향해 60미리 기관단총이 와르르 총알을 쏟아내며 온 골짜기를 총성으로 몰아넣었다.

박격포 옆에는 토벌대장 유주문 경위가 벌교토벌대를 지휘하고 있었다.

박격포와 60미리 기관단총의 집중사격이 한바탕 휩쓸고 나자 토벌대들이 숯 창고(비림) 뒤편 골짜기 입구 좌우에서 골짜기 중앙을 향해 콩을 볶듯 소총을 쏘아대며 개미처럼 올려붙이기 시작했다.

편백림 숲으로 어둑한 아지트에서 어젯밤의 뻐근한 보급투쟁으로 오랜만에 만족스러운 아침식사에 들떠 있던 30여명의 반란군(당시의 호칭)들은 그야말로 갑작스럽게 퍼붓는 기습총알세례에 쓰러지는 동료의 발악을 보면서도 감히 어찌해볼 겨를도 없이 혼비백산하여 총알이 날아오는 반대 방향인 서쪽능선을 향해 산비탈로 산산이 흩어져 마구잡이로 뛰기 시작하였다.

그러나 토벌대들은 그들이 달아나는 조계암골의 우(서)측 능선도 그대로 달아나라고 비워 두지는 않았다.

능선길 따라 산비탈로 돌아가는 길 위에서미리 잠복하고 있던 토벌대들이 건너편 깃발 신호를 보고 총을 쏘아대며 그들을 맞이하니 몇몇은 쓰러지고 총이 없는 사람은 그대로 손들고 항복하여 체포되기도 하였지만 죽기 살기로 이리저리 흩어져 골짜기 너머로 달아나는 사람들을 향해서는 그 방향으로 총을 갈겨만 댈 뿐 추격하지는 않았다.

당시의 토벌작전에서는 자신들의 안전과 기습공격을 염려하여 포위 밖으로 달아나는 적을 무리하게 쫓아가지는 않았다.

약 한 시간 가량 계속된 총성이 멈추자 사방의 대원들이 반란군들의 아지트였던 골짜기 중앙의 편백숲으로 서서히 조여들기 시작했다.

혹시 매복자가 있을지 몰라 웅크린 자세로 기관총이 있는 화엄전길 능선에서 산비탈로 내려와 제일 먼저 가까이 접근한 토벌대원들의 눈에 나무에 묶여 있는 소 한마리가 눈에 들어 왔다.

“그놈들이 틀림없이 맞네!”

그러고는 작전 명령에 따라 더 이상 다가가지 않고 주변을 지켜보며 다른 방향에서 좁혀오는 대원들이 가까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것이 당시 반란군들이 산척마을에서 소 두 마리를 몰아가 토벌작전이 전개된 송광사 건너편 조계암골의 토벌현장이다.

그러니까 토벌작전이 전개되기 전날 밤 이슥해질 무렵, 이읍출장소(지서)에서 의용방범을 나갔던 한청대원 두 사람이 헐레벌떡 뛰어들어와 집에도 들어가지 않고 숙직실에 누워 있는 소장을 불러댔다.

무슨 큰일이 터진 줄 알고 놀란 소장이 문을 열고 나오며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조금 전에 반란군들이 산척에 내려와 소 두 마리를 몰아가버렸다고 보고했다.

“이 사람들아, 나는 무슨 난리가 터진 줄 알았네.”

부하들 앞이라 대수롭지 않다는 듯 말은 했지만 소를 두 마리나 몰아갔다면 보통 일이 아니었다.

반란군들 몇 놈이 한 짓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군화를 끌고 소장 자리로 가서 전화기 손잡이를 드르륵 드르륵 돌리고 나서, 여보세요를 몇 번 소리치고 나니 교환이 나왔다.

“벌교경찰서 토벌대 빨리 대!”

이렇게 하여 토벌대에 상황을 보고하자 꼬치꼬치 캐묻는데 자세한 내막을 몰라 대충 얼버무리자 빨리 가서 자세히 알아보고 다시 보고하라 소리치며 전화를 끊었다. 개자식들, 하고 반란군들을 향해 툴툴거리며 군화를 동여맨 소장은 즉시 의용대원들을 대동하고 이웃 산척으로 달려갔다.

마을에 도착한 지서주임은 반장과 노인들을 불러 모아 자초지종을 물었다.

방어 의식에 길들여져 모두가 입을 다물고 있으니 하는 수 없이 반장이 나서 입을 열었다.

날이 막 어두워졌을 때 산에서 내려온 반란군 10여명이 큰집을 털고 돌아다니더니 노샌 집하고 이샌 집 소 두 마리를 몰고 등논 쪽으로 가버렸다는데 자세한 내막은 아무도 모른다고 하였다.

그리 가면 어디로 가냐고 다시 물으니, 가다가 민재로 올라갔는지 큰골로 들어갔는지 모르겠다고 대답했다.

그 말을 듣고 난 소장은 괜스레 울컥 화가 났다.

“소를 두 마리나 몰고 갔는데 어디로 갔는지도 몰라!” 하고 소리를 지르며 화풀이를 했다.

잔뜩 주눅이 든 반장은 “무서워서 따라가지도 못하고…” 하며 죄송하다고 계속 굽실거렸다. 그러자 이 영감님이 나서서, 우리들도 안 봐서 모르기는 해도 민재로 갈라면 등논을 넘어가기 전에 골짝으로 가다 등허리를 타야 했을 것인께 등논을 넘었다먼 큰골 쪽으로 갔다고 봐야 헐 것이요,했다

사실을 알고 하는 말이 아니라, 반장이 당하는 것을 보다 못한 노인이 오랜 경험으로 소를 몰고 민재로 올라가도 거기서 반란군이 많이 숨어살 만한 조계산의 깊은 골짜기로 가려면 운구재 쪽 능선을 타고 큰골 뒷몬당을 지나가야 하며, 설령 그들이 큰골로 바로 올라가도 민재서 올라오는 길과 만나는 조계봉으로 가는 길이 있다는 것을 알고 한 말이었다.

“영감이 그걸 어찌 아시오?”

소장이 다시 묻자 이 영감은 단박에, 의심을 하는구나, 생각이 들어 우물쭈물 하면서 쓸데없이 괜한 소리를 했구나 하고 자신을 나무라며 후회를 했다.

소장의 의심은 그냥 해 본 소리인 것 같기도 했지만, 만약 이 말이 반란군 귀에 들어가면 보복으로 돌아올까 후회가 되었던 것이다.

그래도 대답하지 않을 수가 없으므로, 등논을 넘었다면 질(길)이 그렇다는 것이요, 하고 눈앞의 해명부터 해야 했다.

다행히 소장은 더 이상 묻지 않고 소의 주인인 노샌과 이샌을 불러 소를 끌고 갈 때의 상황과 아는 놈들이 없드냐고 물었다.

사실 두 사람 모두 반란군들이 집에 들이닥쳤을 때 나가보려 했으나 나오면 죽인다는 말에 방안에 꼼짝 않고 있었다. 소를 몰아가는 것을 알았을 때는 뛰어나가 매달려 사정하고 싶었지만 너무 겁에 질려 문도 열어보지 못하고 방안에서 벌벌 떨다가 그놈들이 가고 조용해진 뒤에야 겨우 나와 외양간 앞에 서서 넋을 놓고 한숨을 쉴 때 안사람들이 통곡을 했던 터라 목이 메여 말이 나오지 않았다.

하지만 경찰 앞에서는 정신이 버쩍 들어 두 사람 모두 당시 겁이 나서 나와 보지도 못했다고 말했다. 그러자 소를 몰아가는데 그대로 보고만 있었느냐고 윽박지르자 무슨 생각이 떠오르는 모양으로 노샌이 입을 열었다.

“그때 밖에서 그놈들끼리 하는 소리가 빨리 몰고 가서 날 새기 전에 한 마리 잡아 동무들 멕이자고 허는 것이 근방을 잘 아는 사람인 갑습디다” 라고 했다.

그 두 집뿐만 아니라 반란군들이 들어가 양식이나 반찬들을 내놓으라 하여 보리, 소금, 된장, 김치 등을 내준 집들은 모두가 혹시나 조사를 할까 싶어 겁먹고 입을 꼭 다물고 있었다.

그렇게 한 이유는 당시에는 좀 사는 집이 먹을 것이 아무것도 없다고 대답하면 속이고 있다며 구타를 하기 때문에 집 밖에 감추어 두고 조금씩 날라다 먹으면서, 반란군들이 올 때면 있는 것을 다 털어 주는 척 했다. 반란군도 어느 정도는 짐작은 하면서도 시간을 끌며 찾아 낼 수도 없고 또 마을 사람들을 괴롭히면 자기들에게 이로울 게 없으므로 그저 협박만 하고 넘어가 주곤 했다.

 

그러니까 그날 반란군들이 조금 잘사는 집만 골라 들어간 것이나 소를 끌어간 집 사람들은 밖으로 나오지 못하게 한 것을 보면, 이 마을의 사정을 잘 아는 입산자가 미리 계획하고 인솔하여 지정해 준 집들만 골라서 털어간 것으로 보아야 할 것이다. 주임(주임이라고도 하고 소장이라고도 함)이 다시 노인들에게, 큰골로 올라가면 어디로 넘어가느냐고 물었다.

사실 소장도 산길은 거의 알고 있었지만 다시 한 번 물은 것이었다.

이번에는 반장이 나서서, 큰골 몬당으로 길 따라 올라가면 그 넘에가 시양골(현재 매표소 남쪽 골짜기)이고 거기서 중허리 길을 타고 돌아가면 행기다리로 내려가는 능선 중간에서 큰절 앞의 골짜기(조계암골)를 가로질러 화엄전으로 간다,고 설명하였다.

조사를 끝낸 소장은 소를 끌고 간 시간과 마을 넘어 송광사 쪽의 골짜기와 넘어가는 길, 그리고 무엇보다도 아침에 소를 잡아먹는다는 말에 초점을 맞춰 반란군들이 숨어 있을 골짜기를 그려보며 보고를 하기 위하여 지서(출장소)로 달려갔다.

“여보세요 벌교토벌대지요? 여기는 이읍 출장소장입니다.”

밤이 깊어 시간은 열한시를 넘고 있었다.

전화를 받은 근무자가 토벌대장에게 전화를 바꾸자 쩌렁쩌렁 울리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봐 소 두 마리를 어디로 끌고 갔다고?”

“옛! 이읍 출장소장 경사 누구누구입니다.”

“빨리 자세히 말해봐.”

산척에서 몇 시경에 소 두 마리를 끌고 송광사로 넘어갔는데, 하고서는 마을 사람에게서 들은 이야기에다 자신의 의견을 덧붙여 조계암골이 거의 틀림없다고 보고 하였다.

보고를 다 받은 유 대장은, 내일 새벽에 출동을 할 터이니 의용대 20명을 준비시켜 대기하라,고 하면서 비밀을 엄수하라고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는 강형진 1중대장과 최병우 2중대장에게, 내일 모후산 계획을 송광사 앞 골짜기로 바꾼다면서 벽에 걸린 지도에서 작전을 설명해 주고 네 시에 출발한다며 숙소로 들어갔다.

조계암골(중앙)과 조계봉

이른 아침 다섯 시가 조금 넘어 이읍 지서 앞에는 토벌대를 실은 차 두 대가 도착하였다. 1중대 40명과 2중대 40명, 미리준비하고 기다리던 이읍 한청의용대 20명 모두 100명 이었다. 유 주문 대장은 20명의 의용대원을 양쪽 중대에 나누어 편성하고 포위 방법과 공격루트 등을 설명 하는 작전지시를 내렸다.

『자! 지금부터 작전명령을 하달하겠다.

-2중대는 출발하면 운구재로 가서 조계봉으로 올라가 서쪽(좌측) 능선 길을 따라내려 가다 아지트가 보이는 곳에서부터 적당한 거리를 두고 2인1조로 매복을 시키고 조계암 터가 가까워지면 시양골 쪽으로 돌아가는 길이 보이는 지점에 집중 매복을 하여 기다리다가 기관단총 공격을 받고 도망가는 빨갱이 놈들을 모조리 사살하라.

-2중대장!

“옛!”

-조계봉에는 틀림없이 보초가 있을 것이다. 알겠지. (척후병을 보내 발견되면 소리 없이 제거 하라는 뜻이다.)

“알겠습니다.”

-1중대는 송광사로 간다.

-척후병은 기관단총 사수 조와 화엄전 뒤로 돌아 화엄전등으로 올라가 빨갱이들이 보이면 보고하고 사수는 기관총을 설치하고 신호를 기다려라.

-공격 조는 숯 창고 앞에서 박격포와 기관단총 사격이 끝나면 공격을 개시한다.

지금부터 무전기를 점검하고 공격 신호는 총성 두 발이다.” 이상.』

작전지시를 마친 유 대장은 2중대를 먼저 산으로 출발 시킨 뒤 1중대(중대장 강형진)와 함께 송광사로 가서 입구에 박격포를 설치하고 총지휘를 하였다.

최병우 중대장이 인솔하는 2중대는 작전지시를 받은 후 각자 주먹밥을 허리에 차고 인원과 병기점검을 마쳤다. 다섯 시 반 쯤 이읍 한청사무실(현재 리사무소) 앞을 줄지어 도보로 출발했다.

이때 김귀선(20) 청년도 한청의용대로 2중대에 편성되어 운구재로 향했다.

여섯 시 반쯤 되어 운구재에 도착했다. 주위는 숲속이라 아직 어둠이 다 걷히지 않았다. 중대장은 대원들을 모아 잠시 쉬게 하면서 매복조를 편성하고 지시 받은 작전을 다시 한 번 설명한 뒤 다시 척후병 2명에게 10분 거리의 제짜(조계)봉 보초에 대한 주의를 다짐한 뒤 멀찍이 떨어져 조심조심 몸을 낮추며 따라 갔다.

그런데 이상한 일로, 평소 같으면 그놈들이 있는 골짜기의 꼭대기에는 분명히 보초가 서 있을 텐데 그날은 아무도 없었다. 그래서 이놈들이 이 골짜기에 없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여기서 조계암골의 좌(서)측 능선 길을 따라 내려가며 적당한 위치에 순서대로 잠복조를 배치시켜 기관총사격이 끝날 때까지는 절대 움직이지 말라고 명령한 후 내려갔다.

 

우측 능선에는 잠복조를 배치 않는 것이 궁금한 귀선 총각이 선배에게 물었다. 그랬더니 퉁명스럽게 “니 같으먼 포가 쏟아지는 쪽으로 도망 가겄냐? 글고 요 우쪽 깔크막으로는 어찌케 올라 온다냐?” 라고 대답하면서도 선배는 속으로, 사람이 죽을라 그러먼 무슨 짓을 못할까, 하면서 고개를 갸웃거렸다.

잠복을 모두 마치고 포 소리가 나기만을 숨죽이며 기다리고 있을 때 드디어 계곡의 입구에서 쏘아올린 박격포가 터지고 건너편 화엄전 등에서 기관단총을 쏘는 소리가 골짜기에 진동하였다.

2중대보다 먼저 차로 송광사에 도착한 대장과 1중대는 골짜기의 입구에 박격포를 설치하였다. 유 대장은 지휘를 하고 1중대는 밑에서 공격준비를 마쳐 기관단총 척후병의 무선만 기다리고 있다가 곧바로 공격을 시작한 것이었다.

전날 밤에 산척에서 소 두 마리를 몰고 와 오랜만에 먹음직스런 보급투쟁을 성공적으로 마친 30여명의 공비들은 기대감에 들떠 그중 한 마리는 옆의 나무에다 묶어 두고 어두운 새벽부터 한 마리만 잡아 그 반만 가마솥에다 삶고 정말 오랜만에 몇 톨이라도 쌀이 섞인 밥을 지어, 산죽을 기다랗게 엮어 말은 자리를 풀어 깔고 배식을 하던 중이였다.

그릇이 부족했는지 놋 밥그릇 하나에다 똑같이 퍼서 한 사람 자리마다 한 그릇씩 엎어 놓고 고기를 찢어 나눌 판이었다. 그때 갑자기 사방에서 총탄이 퍼부었다. 공비들은 명령을 기다릴 틈도 없이 혼비백산하여 직감에 따라 뛰기 시작하였다.

대부분 기관단총의 반대방향 언덕 밑으로 굴러 시양골 쪽으로 내달았다.

원래 자기 총이 있는 사람은 항상 총을 몸에다 지니기 때문에 총을 들고 뛰지만 총이 없는 거의 반수 이상은 상대도 없고 겨를도 없으니 무작정 달아나기 바빠 겁에 질려 총을 들고 뛰는 선임동무들의 뒤를 놓치지 않으려고 따라 뛰는 형태였다.

박격포와 기관단총이 멈추자 계곡 토벌대가 아래쪽에서 총을 쏘아대면서 올라 왔다. 그리고 잠시 후에는 잠복조가 있는 곳 여기저기에서도 총소리가 들려오고 가끔씩 총에 맞아 쓰러진 이들의 비명소리도 들렸다.

잠복조들에게는 무슨 일이 있어도 숨어서 지켜보다가 도망가는 반란군들이 나타나면 총을 쏘아 잡으라고 하였지만, 옆에서 총소리가 나면 덩달아 쏘아대는 조들도 있었다. 그것은 적과 마주치지 않으려는 일종의 자기보호심리의 작용이었다.

조계암골 토벌현장 조계암터

골짜기를 뒤덮은, 한 시간에 가까운 총성이 멈추자 조계암 골은 다시 적막에 싸이고 옛 조계암 터였던 공비들의 아지트에는 토벌대들이 모였다.

여기저기 죽어 있는 사람이 5,6명이고 잠복조에서 생포한 놈들도 넷이나 되었으며 잠복조의 총에 맞아 죽은 사람도 몇 명이 있었다.

두어 뼘 넓이의 산죽자리에는 30여개의 밥덩이가 양쪽으로 줄지어 놓여 있고 가마솥에서는 김이 무럭무럭 나고 있었다.

널려 있는 밥덩이를 보고 이런 모습을 생전 처음 본 한청대원이 중얼거렸다.

“빨갱이 새끼들 저것이 무슨 짓이여! 그냥 놓고 떠다 처묵으면 될 것인디.” 

그 말을 듣고 고참 대원이 한마디 했다.

“똑같이 나눠묵는다고 그런 것이여. 국만 따로 떠다 묵고 말이여. 어찌 보먼 맞는 것이제. 제제금 떠다 묵으라 그러먼 공평하게 묵겄냐?”

나무에 묶어 놓은 소는 총소리에 놀라 얼마나 날뛰다가 주저앉았는지 넋이 나간 모양으로 쓰러져 있었다.

가마솥에서 김이 펄펄 나는 고기를 보고 대원 몇 사람이 달려들어 먹으려고 꺼내려 하자 중대장이 고함을 쳤다. 그러고는 솥을 그대로 뒤집어엎고 흙과 재를 뿌려 덮어버렸다.

귀선이 총각은 이해가 되지 않아 어리둥절하였다.

“약을 타 놓았으면 어쩔라고 그래!”

그는 절대 먹어서는 안 된다고 엄명하였다.

그 말을 듣고 나니 이해가 갔다.

대원들이 모두 모이자 생포자들을 묶어 앉혀 놓고는 대장이 대원들을 치하하고 다음 지시를 내렸다.

그 통에도 생포자들을 발로 차고 욕을 하며 화풀이를 하는 사람이 있었으나 대장이 말리며 사망자들을 뒤처리(귀를 베도록)하고 다시 조별로 나누어 골짜기를 수색해 이읍에서 모이도록 지시를 내리더니 생포자들을 끌고 내려갔다

그러나 실지로는 수색이 아니라 철수였고 잠복조들이 잡은 사망자들의 귀는 이미 잘려 호주머니에 있었으며 현장의 사망자의 귀도 몇 사람은 잘려 있었다.

산척마을의 소 두 마리를 몰아가 전개된 조계암골의 토벌작전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소 두 마리를 몰고 간 산척마을

문: 그런데 귀는 왜 잘랐습니까?

답:『원래 그런 것이여! 그런디 그때는 반란군을 잡으면 귀를 잘라 가지고 오라 했거든. 그래야 상을 주는디 상이 뭣 인고 허니 샛별담배 한 보루여.

지금처럼 열 봉(갑)이 아니고 30봉씩이었어.

그때 차라리 담배를 주지 말고 서장이 상장을 줬으면 지금 보상을 받을 것인디 말이여. 허 허… (당시에 받은 표창이 있으면 유공자 등급이 높아 연금을 더 많이 받을 것이라는 뜻)

그런디 귀를 잘라가지고 오라하니 양쪽 귀를 다 잘라가지고 가.(간단 말이야),

왼쪽이면 왼쪽 오른쪽이면 오른쪽 한쪽만 가지고 오라고 해야지 무조건 귀만 잘라가지고 오라니 사람 하나를 잡으면 두 사람이 되는 것이여. 두 사람이 되어버려.(웃음) 그러다가 안 되겠으니까 나중에는 코를 베어오라고 해 그러니까 정통으로 맞아 떨어져버렸지.

산척에서 뒤로 올라가면 절(송광사)로 돌아가는 중허리 길이 있는디 지금도 있는지 모르겠어. (예. 지금도 있어요)

그때 저그 산우게(시한골 능선위에) 서있는 놈이 보이 길래 여럿이 앞뒤 안보고 사정없이 갈겼더니 어찌 한 방을 맞았던가 고자배기 자빠지듯이 픽 씨러지는디…

그때 시간들은 맞지요? 어떻게 딱 맞단가? 대강 가남으로 하는 말이지.』 

끝.

 

2011. 3. 15

<이 이야기는 2009. 12. 13 12:30~14:30 당시 한청요원으로 토벌작전 참가했던 송광면 장동마을 김귀선(78)씨의 증언을 정리한 것임.>

 

저작권자 © 여수넷통뉴스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기사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