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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 씨 일가①
  • 2018.09.02 17:06

6.25전쟁 뒤 입산자들이 산속을 누비며 사람들의 마음을 졸이게 하던 1951년 여름, 조계산의 남쪽 상이읍 마을뒤편 깊숙한 둔배골(屯兵谷)의 빈 숯가마에서 산수어머니의 시신을 발견한 이재신 총각은 발이 보이지 않을 정도로 허둥지둥 마을을 향해 뛰어 내려갔다.

수풀이 거칠었지만 제집처럼 드나들던 길이기에 막힐 것이 없었다.

 

단숨에 등너머를 돌아 마을이 한눈에 내려다보이는 모개나무거리에 도착하자 걸음을 멈추고 숨고르기를 하면서 눈으로 동네 골목을 더듬더니 긴 숨을 한차례 들이마시고 나서 듣는 사람이 있거나 말거나

“산수 어무니가 죽었소~오!”

하고 큰소리로 외치면서 다시 뛰어 내려갔다. 눈 깜짝할 사이 마을회관 앞에 도착하니 이집 저집에서 사람들이 몰려나오면서,

“누가 죽었다고~오?”

“어디서 죽었단 말이여?”

여기저기서 묻는 말에,

“산수 어무니가 전에 살던 숯굿막에 죽어 있단 말이요.”

대답을 뒷등으로 날리면서 곧바로 산수네 집골목으로 돌아갔다.

재신이 총각이 말하는 위치를 사람들 모두가 알고 있기에 죽음의 내막까지도 알겠다는 듯이 너도나도 뒤를 따르며 웅성거렸다.

 

집안으로 들어서니 남편인 인기 황샌도 외치는 소리를 들어 이미 알고 있겠지마는 벽을 응시하고 앉아 있을 뿐 아무런 반응이 없고 처녀가 다 된 딸 선실이만 부엌문에 등을 돌리고 어께를 들먹이며 서럽게 흐느끼고 있었다.

이장을 하고 있는 학렬이 짐샌이 앞으로 나서며, 산수 아부지 이러고 있을 것이 아니라 얼른 올라가서 장사를 지내야 안 허겄소?, 하고 일어서기를 바랐지만 계 속묵묵부답으로 어금니만 깨물고 있는 절망의 침묵 속에는 스스로 목숨을 버린 아내가 아니라 세상을 향한 분노를 폭발시키고 있는 것이다. 

동산 좌측 상이읍마을 옛길과 천자암 뒷봉우리

“우리 몬춤 올라 갈라요.”

어차피 대답은 없을 것이므로 그냥 집을 나설 때 뒤에서 어기찬 분노의 목소리가 애절하게 울려왔다.

“장사는 무슨 놈의 장사여, 숯굿막에 자빠져 있으라고 냅둬부러~어!”

골목으로 나오자 마을 사람들이 모여들기는 하였지만 당시는 전시이고 빨치산들이 활동하던 때라 여러 사람이 함부로 움직일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하도 많은 사람들이 죽어나가기 때문에 형식을 갖추고 장사를 지내기는커녕 우선 그저 산비탈에다 표시날 정도로 묻어 주는 것이 고작이던 때였다. 젊은 사람 댓명을 데리고 삽과 괭이 등을 챙겨 바지게에 짊어지게 하고 재신이를 앞장세워 산으로 향했다.

숯굿막에 도착한 이장과 청년들이 가마 안에 누워 있는 산수 어머니 황샌 댁의 시신을 확인하고 있을 때 재신이가, 성님 어찌케 허께라?, 하고 이장에게 물었다.

“산수 아버지가 없으니 하는 말이다. 뭘 어떻게 헌다냐 동네로 들어 갈수도 없는디, 준비를 허고 있으먼 올라오실 것이다.”

흉사를 한 송장은 마을로 들어가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러자 또 누가

“그러먼 어디다가 묏자리를 파야 헐거 아니요?”

하고 물으니 이장은 반사적으로 눈을 돌려 주위를 한차례 둘러보고 나서,

“가만있어 봐라 여그 어디 찾아보자”

하고서는 꾸끔새바구 쪽으로 올라갔다.

그리고 나서 잠시 후 자리를 잡았는지, 어~이! 이리 올라와 봐라 여그가 좋다, 하고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세 사람이 연장을 메고 올라오자 자리 잡은 곳을 가리키며 구덩이를 파게 하고 이장은 다시 내려와 재신이와 함께 황샌댁의 시신을 수습하였다.

숯가마에서 들어내는 황샌댁의 무게는 피골이 상접하여 짚 토매 하나를 드는 것마냥 가벼워 저절로 혀를 차는 소리가 나오고 말았다.

수습이라고 해봤자 관도 상여도 없이 가지고 간 널빤지에다 산수어머니를 옮겨 눕히고 홑청으로 덮어 바지게에 올려놓는 것이 전부였다.

그러니까 널빤지가 관이고 바지게가 상여이며 이불홑청이 명정인 셈이었다.

 

여순사건 이후 전쟁을 치르는 동안 너무 많은 사람이 죽어 나가, 형식을 갖추는 것은 고사하고 봉분마저도 제대로 만들어 줄 처지가 못 되었다.

그뿐만 아니라 좌익이나 그들과 연루된 사람에게 인정을 베풀었다가는 어떠한 봉변이 뒤따를지 몰라 마음과는 달리 눈치를 보느라 함부로 나설 수가 없는 세상이었다.

그래도 시신을 그대로 둘 수는 없어 죽은 그 자리나 혹은 가까운 곳에다 눈에 띄지만 않을 정도로 그작 저작 묻어 주는 경우가 허다하였으므로 이렇게나마 한갓지게 매장을 할 수 있는 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시신을 수습해 놓고 옆으로 돌아가 담배 한 대를 피우고 앉아있다 돌아온 학렬이 이장이, 이제 다 파 가것다 지고 올라가자,고 하자, 그러지 말고 더 기달려야 안쓰겄소, 하고 머뭇거리며 눈치를 보았다. 혹시 인기 황샌이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 때문이다.

그렇나 언제 올중도 모른께 올례다 놓고 거그서 기달려 보자,하고는 바지게상여를 진 재신이를 앞장세우고 비탈로 오르는 동안 이장은 마음 속으로 산수어머니의 영혼을 달래는 상여소리가사를 지어 읊으며 느릿느릿 뒤를 따랐다.

- 어~넘 어~넘 어이가리 넘 차 어~화넘

북망산이 머다더니 건너안산 북망일세.

- 어~넘 어~넘 어이가리 넘차 어~화넘

이제가면 언제오나 돌아올날 막막하다.

- 어~넘 어~넘 어이가리 넘차 어~화넘

산수따라 가는길이 극락인줄 알았더니.

- 어~넘 어~넘 어아가리 넘차 어~화넘

저불쌍한 선실이를 두고가니 연옥일세.

- 어~넘 어~넘 어이가리 넘차 어~화넘

가요가요 나는가요 님을두고 나는가요.

- 어~넘 어~넘 어이가리 넘차 어~화넘

다음생엔 다시만나 백년해로 하오리다.

- 어~넘 어~넘 어이가리 넘차 어~화넘

천자암의 부처님들.

-나무아미타불

우리가족 보살펴주소.

-관세음 보~살…

 

묘 자리로 올라가니 벌써 주변을 대충 정리하고 한사람 뉘일 만큼 구덩이를 파 놓았으므로 시신을 옆에 내리고 한 발짝 떨어진 곳에 등을 돌리고 앉아 담배를 피우면서 내려다보고 기다렸으나 황샌과 딸 선실이는 나타나지 않았다.

해가 점점 기울어 가니 지루함을 참지 못한 사람이 재신이를 보고, 요러고 있다가 날이 어두어 져불먼 어쩐다냐. 차라리 니가 얼른 동네로 뛰어 갔다 와불그라, 실은 이장에게 재촉을 하는 말이었다.

학렬이 이장도 하는 수없이 더 이상 기다리고만 있을 수 없다는 판단을 내리고 산수어머니를 구덩이에 누이고 그저 알아볼 수 있을 정도의 봉분을 올리고 나서 편히 가시라고 절을 올리는 것으로 가엾은 황샌 댁을 둔배 안 천자암 쪽 산비탈 꾸끔새바구 아래다 장사지내고 한없이 언짢은 마음을 달래면서 모두 산을 내려왔다.

이장과 청년들이 산으로 향하자 흐느끼고만 있던 선실이가 방으로 들어가 애타는 눈으로 아버지를 재촉했다. 그러나 아버지는 일어나기는커녕 돌부처처럼 꿈적도 않을 기세로 앉아있기만 했다. 야속함에 설움이 더욱 북받쳐 몸을 휙 돌려 문밖으로 나갔다.

그대로 산을 향해 뛰쳐나가고 싶었지만 차마 그러지 못하고 담장에 기대어 숯가마가 있는 곳을 바라보며 목놓아 울었다.

 

그때까지도 벽만 바라보고 있던 인기 황샌이 갑자기 일어서더니 선실이 옆을 휙 지나쳐 휘적휘적 올라갔다.

선실이도 울음소리를 줄이고 어께를 들썩이며 아버지 뒤를 따랐지만 어디서 힘이 솟는지 선실이는 뛰다시피 걸어야 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세 사람이 함께 몸을 숨겼던 숯가마에 도착하자 황샌은 집사람의 마지막 온기라도 느껴보려는 듯 시신으로 누워 있었을 가마 안을 유심히 들여다보다 혀를 차고 돌아섰다.

다시 목청을 높여 우는 딸을 향해 시끄럽다! 고 큰소리를 하고서는 묘를 쓰는 곳으로 올라갈 생각도 안하고 숯가마 옆에 주저앉아 물끄러미 나뭇가지 사이로 빼꼼히 열린 하늘을 바라보면서 염송을 하는지 중얼거렸고 울음마저도 제지를 당한 선실이는 어깨를 들썩이며 숯가마를 붙들고 하염없이 눈물만 뿌리고 있었다.

“산수 아부지 올라 오셨구만이라!”

“요 우게다 기냥 모셔 놨은께 우리는 이만 내려 갈랍니다.”

묘를 다 쓰고 내려오던 이장과 청년들은 부녀를 대하기가 민망스러웠던지 말끝을 흐리며 그곳을 벗어나 버려 부녀가 묘를 써 놓은 곳으로 올라갔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산수어머니가 집을 나간 것은 시체로 발견되기 열흘 쯤 전이었다.

그렇게 만류를 하였건만 무엇에 홀린 놈처럼 하루아침에 입산을 해버린 아들 산수가 양식을 구하러 내려왔다가 경찰의 총을 맞고 쓰러지는 모습을 보는 순간 세상이 무너져버린 황샌댁은 얼마 전까지 숨어 살았던 숯가마를 찾아 들어가 아들 산수 옆으로 따라가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숨을 거둬 버린 것을 동네 청년 재신이 총각이 발견한 것이었다.

그렇게 되기까지의 과정은 대략 이러하다.

아들 산수는 처음에는 여순사건이 나고 조계산으로 숨어든 반란군들에게 강제로 잡혀갔다가 자수를 하여 돌아 왔으나, 6.25가 나고 인민군들이 내려오자 이번에는 스스로 들어갔다. 그러나 인민군들이 물러간 후에는 반란군이 되는 바람에 양식을 구하려고 마을로 왔다가 경찰의 총에 맞아 죽은 것이 어머니가 정신을 빼앗긴 직접적인 동기였다.

그러나 모자의 죽음만이 아니라 순박하고 평화롭게 살던 산골의 한 가정 황 씨 일가가 풍비박산이 나기까지의 근본 원인은 인간의 정신까지 말살해버린 동족상잔의 한국전쟁과 그보다 먼저 이 지방에서 발생하여 6.25로 이어졌던 여순사건이 그 바탕이었다.

 

6.25 한국전쟁은 물질적 이해관계나 종교분쟁으로 인한 전쟁이 아니라 한 시대의 산물인 이데올로기, 즉 사상 전쟁이었다. 이 동족상잔의 사상 전쟁이야말로 아무런 뜻도 모르고 소용돌이에 휘말린 젊은이들은 물론 헤아릴 수 없이 많은 국민들을 정말 억울한 죽음과 처참한 비극으로 몰아넣었다.

조계산의 남쪽 상이읍 마을에 살던 황인기 스님의 일가족도 그중의 하나이다. 비극을 초래한 장본인인 아들 산수와 아버지 인기황샌 그리고 어머니 황샌댁과 네 살 아래 여동생 선실이 이렇게 네 가족의 처참한 삶을 통해 굴곡의 한 시대를 들여다 볼 수 있을 것이다. 

인기 황샌이 스님으로 살았던 천자암

산수아버지인 인기 황샌은 일제강점기가 시작되기 직전인 1907년 조계산의 남쪽 천자암 아랫마을인 상이읍에서 그런대로 농토와 산을 지닌 살만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선친으로부터 장수 황씨라는 가문의 긍지를 들으며 어려서부터 총명한 아이로 자라던 인기소년은 이읍 마을이 예부터 송광사에서 고승들을 많이 배출한 불교마을이었던 관계로 열네 살 되던 해에 천자암의 포봉 스님을 은사로 삼아 출가하여 수도의 길로 들어섰다.

그러나 일제강점기는 우리나라 불교가 대처라는 일본식 불교로 혼란을 겪고 있을 때였다.

인기 총각이 열아홉 살 되던 해에 순천에서 천자암으로 놀러온 순사가 총각스님에게 반해 자기 동생을 중매하여 해룡처녀와 결혼을 하게 되었다.

결혼 후에도 승려생활은 계속 되었는데 부부 간에 아이가 생겨나지 않아 온갖 방편과 공을 들인 끝에 4년이 지난 스물세 살 되던 해에 산에서 동자가 황샌댁의 품으로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아들을 얻게 되었다고 한다.

그렇게 귀하게 얻은 아들이라 이름도 용하기로 소문난 사람을 찾아 작명을 부탁하니 산에서 얻은 아이라는 것을 짚어 내면서 산수라 지어주므로 황산수가 된 것이다.

 

산수가 태어나고 4년 뒤에 딸 선실이를 나았고 이후로도 인기 황샌은 천자암과 아랫 배골의 시풍쟁이에 있는 암자 등에서 승려생활을 계속하였다.

그러므로 아이들은 황샌댁 혼자서 기른 거나 다름이 없었으며 특히 늦게 얻은 독자 아들 산수를 애지중지하였다.

그러나 산수가 열여덟이던 1948년 가을에 여순사건이 나더니 3일천하로 끝을 맺자 봉기에 실패한 14연대 군인들과 민간인들의 일부가 조계산으로 들어오면서 황 씨 일가의 비극은 시작되었다.

그때 조계산으로 들어온, 일명 반란군이라 부르는 봉기군과 이에 합세하여 입산한 좌익들은 이듬해인 1949년 여름 산수가 사는 상이읍 마을 청년들을 집단으로 강제입산 시켰다.

상이읍에는 북한군이 내려와 점령하던 기간에 송광면 당위원장을 한 박장호가 있었다.

박장호(38)는 학력은 없지만 똑똑한 젊은이로서 광복 직후부터 이읍의 이기표 선생 등 외지 유학자들의 영향으로 좌익사상에 빠졌고 한청에도 관여를 하여 이읍국민학교 한청대원 집단강제입산을 주도하여 그를 따르는 박추환(30), 구구선(24)과 함께 조계산에서 입산자들을 지휘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좌우익이 무엇인지도 모르는 마을 사람들은 그전까지만 해도 박장호가 좌익에 빠졌으리라고는 상상도 못했다.

그날 오후에도 구구선이는 이미 입산해 있던 청년들 5~6명과 함께 총을 들고 마을로 내려와 젊은이들이 있는 집들을 돌아다니면서, 공동으로 해야 할 울력이 있으니 회관으로 모이라, 하고 말하고 다녔다. 그때 모인 30여명을 운구재 방향으로 인솔해가서 돌려보내지 않은 것이 상이읍 마을의 집단강제입산 사건이다.

하지만 그날 마을에 없었거나 구구선이의 말에 의문을 갖고 모이지 않아 입산을 모면한 사람들도 여럿 있었다. 그중 한 사람이 황산수였고 그날 이후 입산에서 빠진 젊은이들은 끊임없는 회유와 협박을 받게 되었다.

산수는 부모님의 만류로 입산자들을 피했으나 추석날(음력14일) 저녁밥을 먹는 중에 그들에게 불려 나가 조계산으로 가버렸다.

그렇게 산으로 들어가 사람들이 말하는 반란군이 되어버린 산수는 겁이 나고 불안하여 마음을 종잡을 수 없었으나 그러면서도 어쩔 수 없이 그들을 따라 하루하루를 보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동안 자기도 모르게 동지애 같은 것이 싹트기도 했지만 순간일 뿐, 대부분은 집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과 돌아갔다가 경찰들에게 잡혀 죽는다는 공포심 사이에서 갈등을 하며 나날을 보내야 했다.

그때 강제입산을 당한 사람들 중에는 권유에 의해 집으로 돌아와 자수를 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도 산수가 용기를 내지 못하고 갈등만 한 것은 열아홉 살이라는 어린나이 탓도 있지만 그보다는 또래의 다른 아이들과 비교할 때 어려서부터 유약했던 성격이 더 큰 원인으로 보였다.

산수의 유약한 성격은 타고난 성품일 수도 있지만 그보다도 늦게 독자로 태어나 어머니 품에서 응석받이로 자라면서 형성된 후천적 성격 때문으로 보인다.

 

산수가 산으로 끌려가고 나자 황샌과 황샌댁은 입산자의 가족이 되어 경찰로부터 자수권유의 강요와 감시의 대상이 되었고 암자를 오가며 사는 아버지는 연락을 의심받아 지서에 불려 다니면서 시달림을 받았지만 어디로 갔는지 소식이 끊겨 버린 산수와는 붙들고 애원을 하고자 해도 만날 수가 없는 상황이었다.

그러던 산수가 다음해 봄에 초췌해진 몸으로 이웃 장안마을의 뒤편 강터골에 나타났다. 은신해 있는 산수를 발견한 사람은 장안에 사는 이읍 지서에서 일하고 있는 소사였다.

그때는 나라에서 정책적으로 입산자들에게 대대적으로 회유와 자수를 권할 때였다.

그래서 이읍에서는 지서 건너편 개천가에다 대형막사를 지어 입산자 가족들을 모두 격리수용하여 입산자들과의 접촉을 차단하고 부모들을 산비탈로 인솔하고 다니면서 아들의 이름을 부르면서

“× × 야 인자 자수하면 나라에서 다 용서하고 살려 준단다 걱정 말고 내려 오너라.” 이렇게 외치고 다니게 했던 때였다.

산수를 발견한 소사는 지서에 신고하여 체포를 할 수도 있었지만 그렇게 했을 경우 자칫 죽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여 살며시 가까운 사람에게 연통을 하여 함께 찾아가 상황을 설명하자 산수가 달아나지 않으므로 지서로 데리고 와서 자수를 시켰던 것이다.

 

지난해 추석, 처음 산으로 붙들려간 산수는 얼마동안 조계산에 있었지만 이내 지리산으로 옮겨갔다. 어디가 어딘지도 모르지만 지리산에는 대부대가 있었다.

그곳에서 교육도 받고 보초도 서면서 한겨울을 보냈다.

그러나 혹독한 겨울을 보내기란 죽지 않은 것이 다행스러울 정도로 고통스러웠고 실지로 산수는 많은 사람들이 동상에 걸려 병신이 되거나 죽는 것을 보았다.

그렇게 겨울을 보내고 봄이 되자 같이 갔던 세 사람과 몰래 빠져나가기로 약속을 하고 보초를 서다가 도망쳐 나오게 된 것이다.

나이 많은 사람들이 이끄는 데로 몰래몰래 지리산을 빠져나와 황전에 도착하였을 때 토벌대를 만나 함께 오던 사람들은 모두 흩어져 생사를 모르게 되었다.

황전에서는 어느 정도 방향감각이 있어 힘겹게 쌍암(승주)으로 와서 다시 조계산으로 들어왔다. 장박골에 도착한 산수는 일단 큰길인 장안으로 내려와 동태를 살피고 서낭고개를 넘어 상이읍으로 갈 계획을 세우고 마을과 가까운 강터골로 왔다. 그러다 거기서 눈에 띄고 만 것이다.

그러나 산수의 행동으로 보면 꼭 숨어 있다가 발견된 것이라기보다는 이미 자신을 내어 맡기기 위해 그 사람들의 조직에서 이탈한 몸이 되었으므로 일부러 안전한 사람의 눈에 띄도록 하여 잡히려는 행동의 결과라고 봐야 할 것이다.

 

이렇게 산수가 돌아오자 인기 황샌은 아들을 살리기 위해 팔을 걷어 붙였다.

그당시 지서주임(출장소장)은 앞서 오 주임이 가고 악독하기로 유명한 정철모 주임이 있을 때였다. 그러므로 산수가 자수를 하러 오기는 했지만 받아주고 안 받아주고는 지서주임의 손에 달려 있었다. 그러므로 인기 황샌은 그에게 무작정 매달리기로 하였다.

그날로 애저를 잡고 방석만한 노란 가오리를 벌교 장에서 사다가 황샌댁의 요리 솜씨로 잔칫상을 만들어 지서에다 차려 놓고 두 내외가 무릎을 꿇고 제발 불쌍한 산수를 살려 달라고 주임과 경찰관들에게 수없이 절을 하면서 애원을 하였다.

이 시기는 국가에서 자수를 적극 권하여 받아들이는 기간이었으므로 자수를 해온 산수는 당연히 자유의 몸이 되었으며 게다가 지서에서 소사로 일까지 하게 되니 가족들은 짐을 벗은 몸으로 홀가분하게 살게 되어 더이상 바랄 것이 없게 되었다.

 

김배선  netongs@daum.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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