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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에서 찾은 평촌의 이산가족

  • 입력 2018.09.10 18:50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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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보세요 이정환 선생님 댁이시지요?”

위엄 있는 목소리가 수화기를 울렸다

사십을 목전에 둔 평촌의 영배 이샌은 낯선 사람으로부터 뜬금없는 전화를 받자 시골사람 특유의 말투로, 그렇습니다만 아버지는 돌아가셨는데요. 저는 아들입니다, 라고 대답했다.

“예~ 여기는 ㅇㅇㅇ입니다.”

“그러세요? 저한테 무슨…”

ㅇㅇㅇ 이라는 말에 영배 이샌의 목소리가 기어들어 갔다.

“다름이 아니라 좋은 소식이 있어 알려드리려고 전화를 드렸습니다.”

목소리를 듣고 상대방의 분위기를 알아 차렸는지 이번에는 목소리가 한결 부드러워 졌다. 

“네 네에, 무슨 일인지 말씀 하십시오.”

“방송국에서 이산가족 찾기 한다는 거 아시지요?”

“예에 그렇습니다만.”

“북쪽에서 선생님 가족을 만나고 싶다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러나 영배 이샌은 지금까지 이북에 친척이 있다는 말을 들은 적이 없는지라 아무리 생각해도 기억이 나지 않으므로 선생님 저는 이북에 우리가족이 있다는 말을 들어본 적이 없습니다, 라고 대답을 했다.

그러자 ㅇㅇㅇ 직원이라는 사람이 북한에 사는 김순태와 이길조라는 친척 되시는 분이 이산가족상봉에서 찾고 있다고 했다. 영배 이샌은 순태는 생각이 났지만 이길조라는 이름은 언뜻 잘 떠오르지 않았다.

그래서 길조는 잘 모르겠다고 대답을 하자, 이길조는 6.25전에 같은 마을에 살았던 이순태의 조카이고 이학래 씨의 아들이라고 했다.

학래라는 이름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순태와 학래 아들이 살아 있다니!”

34년 전, 다섯 살 어린 나이에 한마을에 살았던 유일한 친척이었던 그들로 인해 아버지가 치른 고통과 그 후유증을 돌아가실 때까지 받은 고통을 보면서 살아야 했으므로 길조라는 이름이 언뜻 떠오르지 않았지만 순태와 학래라는 이름을 듣고 그제서야 어렴풋이 기억이 떠올랐다. 그의 아버지 학래의 가족들은 살아있는 동안 결코 잊을 수 없는 이름이다.

계속해서 순태, 길조와 친척관계에 대하여 마치 신원조회를 하는 것처럼 자세하게 물었으나 아버지는 물론 마을사람 누구도 그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를 함부로 입밖에 내지 않으려 했을 뿐 아니라 친척이었기는 해도 어린 나이의 어렴풋한 기억이 34년이란 세월이 지났으므로 답변할 수 있는 내용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긴 시간 통화를 하기는 했지만 대부분 잘 모른다는 대답이 전부였다.

그렇게 ㅇㅇㅇ직원이라는 사람과 첫 번째 통화는 끝이 났으나 그 이후로 한 열흘 사이에 군청 등으로부터 몇 차례 전화가 더 왔었다.

전화를 받는 동안 귀찮기도 하였지만 한편으로는 야릇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 6. 25전후의 사정을 잘 아는 동네 아저씨를 찾아가 전화 내용을 설명하고 길조에 대해서 물어보았다.

그 말을 들은 아저씨가 깜짝 놀랐다.

“가가 이북에 살아 있다고? 순태도 북으로 넘어 가부렀구만이. 그러니께 그때 즈아부지가 길조를 이북으로 보냈단 말이 맞았네이. 그때 나이가 열한 살이나 묵었을 것인디 응천이 완룡이랑 동갑이여. 기묘생일 것 이니께 자네보다 댓살 더 많을 것이구만.”

하면서 여순사건 났을 때 다리거리 살다가 조계산으로 입산한 학래의 아들이라고 말해 주었다.

사실 영배 이샌도 그때 나이가 댓살쯤 되어 당시의 기억은 어렴풋하지만 자기 집과 친척이 되는 학래 삼형제가 평촌에서 입산을 하는 바람에 아버지가 몸을 제대로 쓸 수 없을 만큼 고문을 당하여 돌아가실 때까지 고생을 했으며 친구들도 잡혀가서 심한 고초를 당했다는 말을 들어 왔기 때문에 그들의 얼굴은 기억이 없지만 그들의 이름과 아버지의 불행에 대해서는 마음에 새겨져 있었다.

하지만 아저씨가 놀라는 것처럼 당시에는 빨갱이와 관련된 이야기는 금기시 되던 시대였으므로 평촌에서는 유일하게 입산한 학래 가족들에 관해서는 친하게 지냈던 친구들 사이에서도 꽁꽁 입을 다물었다. 전쟁이 끝나고 십여 년 이상의 세월이 흐르자 어른들 사이에 가끔씩 학래 형제들의 행동이 화제가 되는 경우는 있었지만 당시 어린 나이였던 길조는 그 난리통에 당연히 죽었을 것으로 생각해서였는지 잊혀버린 이름이 되어 있었다. 그러한 길조가 갑자기 북에 살아있다고 연락이 왔으니 영배 이샌이 놀라고 기억나지 않은 것은 당연하였다.

그런데 ㅇㅇㅇ 담당자라는 사람이 나라에서 주선하는 어려운 기회에 북에서 신청을 하였으니 잘 생각을 해보라고 하여 영배 이샌은 어찌해야 좋을지 망설여지고 고민이 되었다.

영배와 길조 사이가 가까운 촌수는 아니다. 그러나 할아버지 때까지는 가까웠다고 할 수 있으며 평촌에는 친척이 단 두 집 밖에 없어 아버지와 길조할아버지 때까지는 촌수를 떠나 큰집 작은집으로 지내 왔었다.

그러다가 학래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부터 왕래가 조금씩 뜸해지다가 길조아버지 학래가 좌익에 물들면서부터는 악연이 시작되어 그 결과로 남쪽 끝자락에 가까운 이곳 산골마을 평촌에서 이 천리나 떨어진 머나먼 북한 땅에 갈리어 사는 이산가족이 태어난 것이다.

학래 형제 입산활동의 증언자 평촌 김응태 노인

6.25 직전 길조아버지가 가족들을 데리고 입산해버리자 영배 이샌 집과는 이미 남남을 떠나 원수처럼 되어버렸고 34년이 지난 지금은 당사자였던 부모님들도 모두 이생을 떠났고 길조네는 기억에서조차 거두어버린 사람들이었음에도 살아 있다는 소식을 듣자 왠지 모르게 마음이 끌려, 그래서 핏줄이 아닌가 싶은 마음이 들었다. TV 영상이 보여준 인간적 감동이 잠재의식을 일깨웠는지도 몰랐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거부하는 마음이 과거와 현재를 오가며 결정을 망설이게 했다. 무엇보다도 빨갱이인 길조아버지 학래가 친척이라는 이유로 아버지가 한실 지서로 끌려가 고문을 당해 거의 다 죽어가는 모습을 어머니의 손에 잡혀서 보았던 아버지에 대한 기억은 가느다란 핏줄의 연을 더욱 가로막았다.

그럼 여기서 길조아버지와 그 형제들이 좌익에 빠져 입산하게 된 이야기로 돌아가보자.

길조아버지 이학래는 광복 이전인 일제강점기부터 평촌마을 입구인 다리거리에서 부모님과 함께 살았다. 아버지는 기골이 장대했으나 농토도 없고 집이 가난하여 어머니가 송광사로 가는 신작로이며 마을을 지나 낙안과 흥양 방면으로 가는 삼거리인 이곳 다리거리에서 주막을 하여 생계를 꾸려갔다.

해방 당시 길조네 가족 구성원은 삼일만세운동이 일어날 무렵에 태어난 장남 학래와 세 살 가량의 터울로 둘째 순태 그리고 막내 형기가 있고 끝으로 순례와 봉례 두 여동생이 있었다. 그리고 학래에게는 칠팔 세 되는 아들 길조와 두 살짜리 딸 행자가 있었다.

아버지는 이미 돌아가신지 오래고 어머니는 같은 마을의 김 회장님에게 계가를 하여 아들을 낳고 살았으므로 음으로 양으로 많은 보살핌을 받았다.

당시에는 집안 형편이 어려워 삼형제는 소학교도 제대로 다니지 못했지만 모두가 건강하고 야물었으며 학래는 머리가 좋고 순한 편이었고 둘째 순태는 똑부러지고 괄괄한 성격이었다.

광복 직전 학래가 순천으로 나가 과자공장에 취직하였다. 화덕에서 센베를 굽고 오꼬시와 비가 등을 만드는 공장이었다. 그런데 순박한 시골청년 학래가 도회인 순천읍으로 나가 과자공장에 취직한 것이 그의 가족들을 사상전쟁의 소용돌이로 몰아넣은 발단이 될 줄은 몰랐다.

전부터 그곳에서 일하고 있는 공원 중에는 좌익사상에 깊숙이 심취한 사람이 있었고 그로 인해 함께 있는 공원들도 대부분 상당히 물이 들어 있는 상태였다(과자공장 사장이 좌익이었을 것이라고 말함). 새로 학래가 들어오자 그들은 며칠 지나지 않아 능란한 말솜씨로 공산주의에 대한 이론을 설명하였다.

배운 것은 없지만 그래도 시골에서 똑똑하다는 말을 들으며 자란 학래로서는 귀가 번쩍 뜨이는 학문이 아닐 수 없었다. 지금껏 가난하고 힘들게 살아온 학래에게는 자신과 같은 사람들을 위한 세상을 만드는 기가 막힌 이론으로 들렸으므로 그 말을 듣는 순간부터 이미 학래는 새로운 사람으로 변해 있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래서 그 선배로부터 적극적으로 사상학습을 받았고 학렬이의 능력을 인정한 선배는 순천읍내에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도 그를 소개하여 좌익사상에 대한 신념과 폭을 넓힐 수 있는 지도를 받도록 키워 주었다.

우리나라가 8.15 광복이 되고 정치사회적 혼란기를 맞아 학래는 좌익을 더욱 신봉하면서 순천과 집을 오가며 생활하였고 이때부터는 동생들에게도 간단한 과자 만드는 법을 가르치며 자기 집에서 센베 등을 만들어 점방에서 팔기 시작하여 학래 형제들은 다리거리 과잣집 삼형제로 불리었다.

한편 순태는 해방 전에 일본군에 들어가 기마병으로 근무하다 광복이 되어 돌아왔는데 그때 좌익에 물들었을 것으로 사람들은 짐작을 했지만 정확히는 알 수는 없다.

동생인 순태와 형기가 볼 때 형님이 순천으로 나간 뒤부터 하는 말과 행동이 유식한 사람으로 변하였으므로 형님을 우러러보게 되었다. 그런 이윯 학래 형제들은 좌익사상으로 뭉치게 되었을 것이라고 마을 사람들은 추측했다.

1948년 10월 19일 여수 신월리에 있는 14연대에서 제주 4.3사건의 진압출동을 거부한 여순사건이 발발했다. 그러나 그 시각 순천에 있던 학래가 봉기 기간에 무엇을 하였는지 아는 사람은 없다.

봉기가 실패로 돌아가자 집에 숨어 지내다가 해가 바뀔 무렵, 순태와 막내 형기 그리고 여동생 봉례와 어린 아들 길조까지 일가족 모두가 조계산으로 들어가 버림으로서 이때부터 평촌의 다리거리 과자집 삼형제의 좌익입산활동이 시작된다.

이때 입산을 하지 않은 큰 여동생 순례는 남의 집살이를 하다 그 집을 따라 일본으로 가버렸고 댓살 된 딸 행자는 고대 외할머니에게 맡겨졌다.

어린 딸을 외가로 보내는 학래의 마음은 몹시 언짢았다. 그러나 애비가 중대한 과업을 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하며 부디 잘 살아주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길조도 어리기는 마찬가지였으나 사내아이였으므로 단련을 시켜 반드시 아버지의 뒤를 이어 인민들을 위한 용맹한 투사로 키울 것이라 마음먹고 데리고 갔다.

그 결과 장남인 학래 부자와 둘째 순태는 난리통에 행방불명이 되어버렸고 막내 형기와 여동생 봉례는 산에서 빨갱이로 잡혀 총살을 당하고 말았으니 이처럼 일가족 모두가 참혹한 결말을 맞은 것은 이 나라에서 발생한 이데올로기 전쟁에 한 젊은이가 뛰어든 결과였다.

그들이 입산을 하고 약 5년 만에 총포의 전쟁은 끝이 났지만 이후로도 사상 전쟁은 계속되어 평화롭게 살았던 고향 이웃들마저 그들을 마음대로 입에 올릴 수 없는 상태라, 30년 넘게 지나는 동안 동네 사람들의 뇌리에서 그들이 모두 서서히 잊혀가고 있을 때 아무도 살아 있을 것이라고는 상상을 하지도 못했던 순태와 당시 겨우 열한 살이었던 길조 어린이의 소식이 느닷없이 북쪽으로부터 날아들어옴으로 험난했던 당시를 경험했던 어른들에게 두 번 다시 떠올리고 싶지 않은 기억을 되살리게 한 것이다.

학래 형제가 입산할 시기에는 조계산 주변마을에 살거나 연고를 둔 좌익에 물든 많은 젊은이들도 입산을 하여 각각 지도자의 지휘에 따라 지리산으로 가기도 하고 조계산과 모후산 등을 오가며 연고가 있는 마을과 가까운 곳에 자리를 잡아, 머지않아 반드시 인민의 군대가 내려온다는 선전을 믿고 의기양양하게 보급투쟁활동을 하며 산속을 누빌 때였다.

입산 당시 서른 한 살이던 학래는 광복 직후부터 좌익에 몸을 담았으므로 평상시의 직책은 알려져 있지 않았지만 그들 사이에서는 지도자로 받드는 사람이었다.

그래서 자기 마을인 평촌에서는 가족들만 입산을 하였지만 송광면의 낙수가 중심인 상도와 인근에서 입산한 사람들을 통솔하는 위치에 있었다.

그는 입산하자마자 50여명을 인솔하여 송광사의 입구인 장정지(송광사삼거리) 안쪽 불분더리 우측 골짜기인 초매골에 자리를 잡았다. 

학래 삼형제가 은신했던 초매골

초매골에서는 송광사 방향의 길만 내려다보이지만 몇 발짝 거리의 능선인 장정지등으로 오르면 자기 집이 있는 평촌도 좌우가 한눈에 들어오고 조금만 더 위로 올라가면 송광사의 청룡줄기이면서 산척마을과 경계를 이루고 있는 봉우리인 바구설이 있어 이곳에서는 산척이나 곡천으로 바로 내려갈 수 있었다. 또한 외송과 산척을 넘나드는 민재가 10여분 남짓의 거리이며 평촌으로 직접 내려가는 봉우리인 얼음박골몬당도 서쪽 눈앞에 가까워 지리적 조건이 우수했다.

이곳을 아지트로 선정한 이유는 아직 입산활동 초기라 깊은 산으로 들어갈 필요가 없기도 했지만 시야확보와 다양한 퇴로가 충족되어 있는 것이 중요한 요소였으며 그에 못지않게 급할 때 보급물자나 정보를 손쉽게 얻을 수 있는, 자기들이 가장 잘 아는 고향마을을 품안에 넣고 있다는 점도 매우 중요한 요소였다. 그곳에서 삼형제의 역할은 입산자들을 지휘하고 작전에 앞장서는 일이었다.

학래를 대장이라 불렀고 스물일곱쯤 되었던 순태를 전투사령관이라 하였으며 스물 두세 살이던 막내 형기는 언제나 전투에 앞장서는 척후병의 앞잡이가 되어 행동대장으로 모든 작전을 삼형제가 지휘하였다. 당시에는 언제나 그랬듯이 주간에는 경찰과 아군들의 세상이었고 야간은 반란군들의 세상으로 되어 가는 때였다.

본격적인 토벌이 시작되기 전인 49년 봄까지 마을사람들도 소개를 하지 않고 그대로 살았으며 자율야경보초 체계도 갖춰지지 않아 그들은 동네를 마치 제 집처럼 마음대로 드나들었고 마을사람들도 소개를 나가기 전까지는 적당히 경계를 하면서도 대부분 그러려니 하면서 함께 어울려 살 수밖에 없었다. 다시 말해서 토벌이 감행되기 전인 여름은 물론 수세적 경찰경계치하에서는 지서가 있는 낙수나 가까운 고대 금평까지 야간보급투쟁의 목적지로 거침없는 발걸음을 하며 평촌은 마음놓고 쉬어 가는 곳이기도 했다.

49년 여름을 지나면서 본격적인 토벌이 시작되었다. 그리하여 반란군들은 초매골과 같이 마을에서 가까운 곳은 은신처가 될 수 없었으므로 조계산의 서편뿐만 아니라 모후산의 동쪽 각 골짜기들 전체를 활동 무대로 상부의 지령에 따라 다른 조직의 동지들과도 연락을 취하며 이 골짜기 저 골짜기로 옮겨 다니면서도 북쪽의 군대가 내려온다는 굳건한 믿음으로 생존 투쟁을 계속하고 있었다.

겨울이 되자 토벌활동이 더욱 강화되어 이듬해 봄까지는 낮이면 은신을 하고 밤이면 어렵게 보급투쟁을 하면서 버텨나가야 했지만 골짜기들은 불타고 낙엽은 떨어져 은신과 활동이 어려운 상태에서 부하들 인솔은 고사하고 자기 목숨을 부지하기도 어려운 상황이 되어 이미 목숨을 내놓은 사람들이었다고 하지만 하루하루가 바람 앞의 등불같은 나날이 계속되었다.

그래서 입산 초기에 공비들을 인솔하고 자기 마을인 평촌에 와서 의기양양하게 교육을 하고 아량을 베풀었던 때와는 달리 거의 행방조차 알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6. 25가 나기 직전에는 학래 형제간들의 행방에 대하여 셋째 형기를 제외하고는 정확하게 아는 사람이 없었다. 학래는 아들을 데리고 지리산으로 갔다느니 길조는 벌써 이북으로 보내고 반란군들을 지휘하다가 장박골에서 여동생 봉례와 함께 죽었다느니 하는 말이 떠돌았으며 순태는 지리산에서 보았다는 사람이 있는가하면 죽었다는 사람도 있었으나 속으로는 관심이 있으면서도 내놓고 묻는다거나 관심을 보이는 것은 상상할 수 없는 침묵 속의 관심 그런 것이었다.

다만 셋째인 형기는 제일 먼저 6. 25가 발발하기 바로 직전 조계산에서 보성강을 건너 모후산으로 왕래하는 여러 길 중에서 현재는 주암댐으로 수몰된 신평리 금평마을의 옹기막에서 유경으로 건너가는 루트에서 체포되어 자수를 권유했으나 듣지 않았다. 그는 오금에 장작 끼우고 무릎 밟기, 고춧가루 물 먹이기, 전화기 돌리는 전기고문 등 거의 초죽음의 고문을 당하고도 꿈쩍을 안하여 결국 유경 앞 횟동굴에서 총살을 당하고 말았다.

당시 상황에 대해서 한마을의 두 살 아래 후배였던 김채선(79) 씨는

“뒤에는 어쩔지라도 전향한다고 몇 자만 쓰고 지장 쿡 찍어버렸으면 살았을 것인데…”

하면서,

“그런 사람들(전향자)로 편성한 고아라 부대에 여남은 명이 있었는데 거기다 써먹으려고 그랬지” 

라고 아쉬움을 보였다.

그렇게 형기를 제외한 나머지는 모두 행방불명인 상태였으나 6. 25가 터지고 인민군들이 진주하자 거의가 다 죽은 줄 알고 있었던 둘째 순태가 지리산에 있다가 왔다면서 조계산 모후산 경찰관총사령관으로 백마를 타고 순천경찰서에 나타났다.

당시 순천경찰서에서 보았다는 김채선 씨의 증언을 옮겨보자.

『그때 내가 태지 한샌(평촌의 한태지 씨)하고 무슨 일을 보러 순천경찰서에를 갔을 때 순태가 하얀 백말을 타고 왔는데 지리산 이쪽의 조계산 모후산 경찰관총사령관이라고 대단하드만…

그런데 지리산에서 어떻게 살아났는가? 하고 물었더니 다른 사람들은 토벌대들에게 몰려서 거의 다 죽었는데 순태는 높은 바위 절벽에 칡넝쿨이 덮인 것을 타고 내려와 중간에 굴 같은 곳에 숨어 있으니까 이리저리 그렇게(양손으로 아래 위 양 옆을 휘둘러 가리키며) 다니면서도 거기 있는 것은 몰라 살아났다는 것이여.』

순태가 순천경찰서에 나타나 백마를 타고 다니며 사령관 행세를 한 것도 한 달 남짓. 인민군들이 물러가 버리자 또 다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마을사람들은 다시 지리산으로 들어가 투쟁을 하다가 죽었을 것으로 짐작만 할 뿐이었다.

이처럼 학래 형제들의 산중 행적에 대해 거의 잘 알지 못하는 것은 평촌 마을에서 입산한 사람이 유일하게 그들 형제간들뿐이기도 하지만 셋째 형기와 봉례가 마을에서 가까운 조계산과 모후산을 오가며 활동을 하다가 잡혀 총살을 당한 뒤로는 학래 부자와 순태가 영영 모습을 감춰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마을 사람들이 이해를 하지 못하고 궁금해했던 것은 그만한 위치에 있는 학래가 회유를 하거나 강제로라도 이녁동네 사람들을 입산시킬 수 있었음에도 단 한사람도 끌어 들이지 않았다는 점이다.

그러나 지난 뒤이기는 하지만 거의 모든 사람들이 피해를 입히지 않기 위한 고의적인 행동이었을 것으로 이야기들을 하고 있다. 그러한 생각의 바탕은 학래가 한마을에서 자라면서 어른들에 대한 예의가 바르고 친구들과 잘 어울리는 온화한 성격의 소유자였기 때문으로 여기고 있었다.

그리하여 전쟁이 끝나고 어느 정도 시간이 흐른 뒤에 사람들이 모인 지리에서 학래 가족들의 얘기가 나오면, 학래 부자는 함께 이북으로 갔을 것이라느니 길조는 먼저 이북으로 보냈다느니 그 통에 길조가 어떻게 살아났겠느냐 하는 추측들을 한동안 소곤거리기도 했지만 세월이 흐르면서 차차 잊히고 오직 공식적인 표현인 행방불명만 남아 있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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