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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무서운 잡부금(雜賦金)①

  • 입력 2018.09.19 12:44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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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가 중천에 떠오른 오전 나절, 자전거 한 대가 벅수거리를 돌아 올라오고 있었다.

집 앞 길가에 나와 있던 괴목마을의 이장 최선용 청년이 자전거를 보더니

“독한 놈 또 돈 걷으러 댕기는구만!”

하고 중얼거리고 나서, 집에 들어가 빼다지에서 장부를 꺼냈다. 그는 동네사람들로부터 걷어 놓은 돈다발을 괴비에 넣고 종종걸음으로 큰길가에 위치한 동네회관으로 내려갔다. 회관입구에 도착하자 자전거도 곧 따라들어 왔다.

쌍암지서 임상기 주임이 치안수습비를 걷으려고 손수 자전거를 타고 온 것이다.

“임 주임님 오셨는게라.”

먼저 나와 있던 서문갑 마을고문회장과 당코쓰봉을 입은 윤섭이아부지도 함께 깊숙이 고개숙여 인사했다.

자전거를 멈춘 임 주임은 삐식허게 한 발을 땅에 디딘 채 고개를 까딱하고는 자전거에서 내리자마자 돈 얘기부터 꺼냈다.

선암사입구 괴목마을 회관(중앙건물)

“이장! 수습비는 갖고 나왔제에.”

최 이장의 폼 새로 보아 한눈에 돈을 가지고 왔다는 것을 읽을 수 있어서 인지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예에, 안으로 들어갑시다.”

최 이장이 회관의 방문을 향해 고개 짓을 하며 말했다.

“방으로 들어 갈 것 없어.”

빨리 돈만 내놓으라는 말이다.

“여기까지 오셨는디 점심 잡숨서 막걸리도 한잔허고 가셔야지라우.”

서회장이 깍듯한 말로 거들었다.

“오늘은 점심 때 쌍암에서 만날 사람이 있어서 시간이 없어”

임 주임은 나이가 훨씬 많은 어른에게도 늘 반말이다.

하는 수 없이 최 이장이 회관마당에 서서 괴비에서 돈다발을 꺼냈다. 그는 손에 침을 발라가며 꾸깃꾸깃한 돈을 한 장씩 셌다.

큰돈으로 묶어 놓은 10만원 한 다발을 세어 놓고 이어 큰돈과 잔돈이 섞인 5만원 다발을 세고 나서 “여기 있습니다. 맡는가 보시오” 하고 건네주었다.

“됐어!” 세는 것을 옆에서 지켜보고 있었으므로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래도 시어 보셰야지라, 이번에는 윤섭이 아버지가 한마디 했으나 임 주임은 대꾸도 않고 돈만 챙겨서 다시 자전거에 올랐다.

 

이처럼 빨리 떠나는 것은 고마운 일이었다. 식사와 술 접대를 하게 되면 그 돈은 모두 마을 사람들 경비에서 나가기 때문이다.

그러면서도 윤섭이 아버지가 굳이 그 자리에서 돈을 확인해보라고 한 이유는 나중에 책잡히는 일을 막기 위해서였다. 나중에 액수가 맞지 않다며 모자란 돈을 채우라고 호통을 칠 것이 빤하기 때문이었다.

오늘 임상기 주임이 받아간 돈은 이달 분 치안수습비이다.

괴목마을 사람들에게 지서에서 부과하는 세금과 잡부금은 짐승만도 못한 삶을 강요하는, 그야말로 피말리는 고문이었다. 그게 어디 괴목마을 뿐이겠는가.

세금은 나라에서 정해놓고 바치라고 하니 그렇다손 치더라도, 밑도 끝도 없이 날만 새면 내라고 잡죄는 잡부금 때문에 주민들은 배겨나기가 힘들었다.

특히 여순사건 이후부터 지서로 들어가는 잡부금이 수도 없이 늘었고 금액도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커졌다.

서너 달 전에도 잡부금 16만원을 내라길래 이장이 집집마다 형편에 따라 풀이를 하였는데 동네 28호수를 나누어 매겨놓고 보니 액수가 제일 적은 집이 2천원이고 제일 많은 집이 7천원이었다.

매번 그렇지만 최 이장은 그날 치안수습비로 꽤 진땀을 뺐다.

그날도 최 이장은 논에서 일을 하며 치안수습비 나올 때가 넘었는데, 생각하던 차에 상천이 짐샌이 숨을 헐떡이며 뛰어오더니 그저께 치안수습비 나왔다고 전하란 것을 깜빡 잊었다,면서 16만원인디 낼까지 내라 드라,고 논가에 서서 큰소리로 알려주고는 미안함 때문인지 달아나듯 돌아섰다.

가슴이 덜컥했다. 액수가 문제가 아니라 돈을 걷을 시간이 촉박하기 때문이다.

치안수습비는 늦어도 3,4일전에 마을별로 분배한 금액이 꼬박꼬박 고지되기 때문에 안심하고 기다리고 있었는데, 지서에서 상천이 짐샌에게 치안수습비를 걷으라고 이장한테 전하란 것을 깜빡했던 모양이다.

“인자사 말허먼 어쩔 것이어!”

하고 상천이 짐샌 뒤를 향해 중얼거리며 일손을 팽개치고 급한 대로 융통을 해보려고 사람들을 찾아 나섰다.

동네에서 돈이 있을 만한 사람이야 빤하므로 우선 서 고문을 찾아갔다. 그러나 서 고문은 출타를 해버리고 집에 없었다.

몇 집을 돌아봤으나 아무도 없어 들로 찾아 나서는데 마음이 조급하여 걸음이 터덕거렸다.

 

잡부금 하나를 두고 이토록 긴장하고 서두르는 데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면에서 징수하는 세금이나 잡부금은 보통 정해진 기한 내에 납부 못하면 하루이틀 말미를 준다. 그래도 돈을 내지 못할 시에 최후의 방법으로 가축이나 물건을 강제로 압수하는 일이 보통이지만 독하기로 이름난 임상기 주임이 쌍암지서로 온 뒤로 이는 어림도 없는 일이었다.

임 주임은 여타 주임들과는 달리 본인이 직접 거두러 다니는 탓에, 매달 매기는 치안수습비는 물론 그때그때 부과하는 잡부금 날짜를 어긴다는 것은 감히 엄두도 낼 수 없는 일이었다.

만약 임 주임이 직접 수금을 하러 왔을 때 곧바로 돈을 내지 못하면 그는 어느 이장을 막론하고 그 자리에서 사정없이 발로 차고 손에 잡히는대로 두들겨 패기 때문이었다.

임상기 주임이 처음 부임하여 왔을 때, 그의 성질을 모르고 몇몇 이장들이 기한을 어겼다가 죽지 않을 만큼 맞은 일이 있고부터 이장들은 돈을 다 준비해 놓고도 임상기가 나타나기만 하면 괜히 겁이 난다고 말했다. 뒷날 아이들이 울면 어른들이 “임상기 온다”고 할 정도였으니 그 정도를 짐작하고도 남을 것이다. 그래도 가끔씩 날짜를 맞추지 못해 얻어맞는 이장이 있어 이는 경고의 표본이 되곤 하였다.

괴목마을의 최 이장도 돈을 맞춰내지 못한다면 어김없이 작살이 나고 말 것임을 알고 있었다. 아직 작부금을 다 걷지 못한 그는 걱정이 태산이었다. 그렇다고 전달자 때문에 늦었다는 변명이 통할 리도 만무했다. 오히려 두 사람 모두 쌍으로 당할 것이 틀림없기 때문에 차라리 혼자서 감수를 하는 것이 나았다. 그러나 최선의 방책은 어떡하든 융통을 하여 당하지 않는 것이 상책이었다.

최 이장이 급히 동답(마을 논)들로 나가랴다 오십 줄의 정수 박샌과 마주쳤다. 박샌이 무슨 일이냐고 묻는데, 선암사 쪽에서 내려오는 임상기가 보였다.

무슨 돈이 있겠냐 싶어 지나치려 했으나 급한 김에 저도 몰래 사정 이야기가 튀어나오고 말았다. 그러고서 곧장 내려가려고 하자 정수 박샌이 잠깐 있어보라고 세우더니, 자기가 몰래 숨겨둔 돈이 좀 있으니 따라오라고 하였다.

감춰 놓은 돈이니 모른 체 할 수 있었지만 사정을 너무도 잘 아는 판에 박샌은 그럴 수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이장을 집으로 데려간 정수 박샌이 뒤안에서 바위 하나를 떠들어 종이로 둘둘 말은 뭉치 하나를 꺼냈다.

오래 전에 감춰두었는지 습기가 차서 축축해진 돈뭉치였다.

둘이서 쭈그려앉아 붙어 있는 돈을 하나씩 떼어갔다. 박샌은 16만원을 세어 건네며, 급한 사정을 잘 알고 있으니 우선 개리(치르)고 나중에 거둬서 살짝 달라고 하면서 눈을 마주쳤다.

정말 구세주를 만난 기분이 되어 저도 몰래 머리가 숙여졌다.

그 돈을 받아 장부와 함께 들고 회관으로 내려가니 임 주임이 이미 도착하여 최 이장의 표정을 살피고 있었다.

늦게 와서 미안하다고 인사를 하면서 돈다발을 건네주었다.

돈을 받아든 주임이 왜 이리 돈이 축축하냐고 물었다.

반란군들한테 뺏기지 않으려 바위 밑에다가 숨겨 놔서 그렇다고 하자 껄껄 웃으면서

“잘했어! 그렇게 해야지.”

흡족한 듯 칭찬을 하고 내려갔다.

돈을 받은 것보다도 공비들한테 빼앗기지 않으려고 했다는 말에 그토록 기분이 좋은 모양이었다.

지금까지 한 차례도 잡부금 날짜를 어긴 일이 없어 지서주임한테 은근히 큰소리를 치던 최 이장이 이날은 십년감수를 한 날이었다.

 

이상은 6.25 직후에 선암사입구 괴목마을이 내는 잡부금 중 치안수습비(치안대책비) 어느 한 달 치에 관한 이야기였다.

그럼 괴목마을의 잡부금 이야기를 계속하기에 앞서 당시 우리나라의 잡부금에 대한 실태와 특징을 대충 살펴보기로 하자.

잡부금이란 기본부과금 이외의 잡다한 부과금을 말한다.

잡부금의 원 뜻은 국가에서 국민들을 대상으로 매기는 세금의 일종이기에 한자의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 뜻이 명확해진다.

잡부금(雜賦金)의 雜(잡)은 뒤섞이다 장황하고 번거롭다 등을 말하고 賦(부)는 구실 조세 부역 부역에 징발된 사람 등을 뜻하며 金(금)은 돈을 말하며 잡과 부를 돈으로 환산했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잡부금은 국가에서 백성들에게 법으로 정하여 기본적으로 부과하는 세금 이외의 잡다하게 물리는 돈이라는 말이 된다.

부(賦)의 뜻에서 볼 수 있듯이 잡부금의 원조는 돈으로 거두는 것이 아니라 필요한 일에 동원하는 잡역과 부역에서 왔음을 알 수 있다. 그러던 것이 화폐가 정착되고부터는 편리하게 돈으로 대납하도록 한 것이다.

그러나 잡부금화 된 후에도 여러 형태의 부역동원은 여전하였다.

뿐만 아니라 5.25를 전후한 시기에 농촌의 잡부금은 그 명목이 헤아릴 수 없을 정도로 많아서 몇 가지 이외에는 모두 기억조차 할 수 없을 정도이다.

1953년도 조사에 의하면 잡부금의 종류가 280여종에 이른다는 기록이 있다.

그와 같이 많은 명목이라면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이름만 붙여 거두어들였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때 농민들로부터 징수한 세금과 잡부금의 명목을 살펴보면 세금은 ‘임시토지수득세’라하여 지세, 소득세, 호별세, 교육세 등을 통합한 별도의 농지개혁 상환료를 포함하여 전체소출의 60%이상을 현물로 거둬들였다.

한편 잡부금 부과 기관은 군, 경찰, 면사무소 등 관공서와 국민회, 대한청년회 등 여러 사회단체들이었으며 각 기관별 대표적인 항목으로 군에서는 방위비. 군용지프운영비, 출정군인 축하금, 포로병 구제비, 구호품취급경비, 장정 신체검사비 등이 있고 경찰에서는 경찰경비비, 지서운영비, 치안대책비, 의용경찰회식비, 총기(실탄)대 경찰관입교비, 서장관사수리비, 지서사택구입비, 지서직원생활보조비, 순직경관조위금, 경비용화목비 등이며 지방행정단체에서 거두는 잡부금은 면사무소건축 및 수리비, 각종출장비, 면의회의장 상부비, 지방의회선거비, 부락경비 등이고 반공단체에서는 병무협의회비, 대한청년단비, 국민회비, 한청유가족 위문비, 시국대책비, 휴전반대지방대회비 등이 있었다.

그밖에도 도로유지회비, 장학회비, 성인교육비, 야학비, 노무징집비, 노무동원 해제비, 운크라경비 등이 있으나 이는 큰 제목에 불과하고 실제로는 서장생일축하금과 같이 명칭만 붙이면 되었을 정도로 별의별 잡부금이 다 징수되었다.

당시를 증언한 남상윤(96) 옹

당시의 잡부금에는 다음과 같은 특징이 있었다.

* 세금과 같은 성격이나 엄격한 법의 기준이 없다.

* 면이나 군경 사회단체의 일방적인 부과와 강제징수라 할 수 있다.

* 항목과 한계가 불분명하여 무한대로 부정하게 악용될 소지가 있다.

* 마을의 이장이나 반장을 통하여 고지를 하고 거두어들인다.

* 전시이므로 군경관련 잡부금이 많고 징수 방법이 가혹하였다.

* 농민들에게는 저항할 수 없는 수탈의 대상이었다.

그러나 한 시대에 우리농민들의 숨통을 옥조였던 잡부금이 이제는 그 용어마저 들어보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으나 가만히 귀를 기울여보면 아직도 학교나 학원가에 남아서 어긋난 소리를 내고 있어 옛날을 회상하게 하고 있다.

이는 우리나라의 국력이 신장하고 법과 제도가 잘 정비되어 모든 잡부금이 세금으로 일원화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다시 괴목마을의 특별한 잡부금인 총기구입대금의 실례 하나를 더 소개한다.

조계산에 빨치산토벌이 한창이던 어느 날 지서에서 공문을 보내왔다. 이번에는 의경잠복대로 뽑힌 사람들이 사용할 총과 실탄 구입비 고지서였다.

괴목에서는 잠복대로 최 이장 뒷집에 사는 17세 오성옥 한 사람이 뽑혔다.

거기에는 잠복대가 입을 경찰복비용까지 포함되어 있었고 쌀값은 세 가마니 값이 넘었다.

당시에는 경찰복 값이 비싸지 않을 때였다.

지금까지 총이나 실탄을 새로 구입할 때는 간단히 말로 언급했는데, 이번에는 웬일인고 싶었다. 최 이장은 서 고문회장 등 유지들과 함께 집집마다 부랴부랴 돈을 걷기 시작했다.

3일 후가 마감이지만 총과 실탄을 직접 구입하여 남원의 군사령부로 대령해야 하였으므로 하루밖에 여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직접 사오라 하는 이유는 구입절차가 까다롭고, 때에 따라서는 가격흥정뿐만 아니라 뒷돈까지 줘야하는 등 복잡한 사정이 있기 때문이다.

집집마다 밤늦게까지 돌아보아도 그날 낸 사람은 28호 중 열 집도 안 되었다.

그래도 최 이장은 믿는 구석이 있는지 크게 적정을 하지 않는 것 같았다.

다음날 오전, 마을을 한 바퀴를 돌아 반 남짓 거두고 나서 마을유지들인 운영위원들을 모아 회의를 열었다. 어차피 당장 내지 못한 사람들은 기한 내에 낼 수 없는 사람들이므로 방법을 찾기 위한 의논이었다.

“이장, 얼마나 덜 걷혔는가?”

서 고문이 물었다.

“집수로는 반이나 되요 마는 돈으로는 8만원만 채우먼 되겄소.”

“전번에 배급 쌀값 남은 것도 안 있는가? 그것도 합해봐.”

“예~에 고것 합허먼 한 3만원만 있으먼 되겄소.”

“그럼 누가 3만원 대납해서 융통을 하고 이장이 알아서 갚아 주소.”

이것으로 회의는 끝났으며 부족분은 이장이 채워 넣기로 하고 마무리가 되었다. 이번에는 어찌 수월케 해결이 된 편이었다.

날만 새면 쏟아지는 잡부금을 원활히 대기 위해서는 근본적으로 가가호호의 살림살이가 넉넉해야 하겠지만 좀 먹고 살만한 동네라고 해도 이때의 농촌사정이란 부자는 부자대로 수단을 가리지 않고 긁어가는 판이니 정말 잘사는 몇 집을 빼고는 자가의 소득으로 세금과 잡부금을 감당한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이었다.

당시 가난한 농민들은 모두가 피땀 흘려 수확을 하여도 자신들의 목구멍으로 넘길 것이라고는 거의 없는 판이었지만 괴목 마을은 다른 농촌에 비해 좀 나은 점이 있었다.

논은 거의가 절 땅을 소작하는 사하촌이었으므로 큰 산 큰 절 밑에서는 산비탈에 콩 하나를 심어 먹어도 인정이 그리 사납지가 않았다.

마을사람들은 이 모두를 부처님의 은덕이라고 여기고 살았다.

그래서 사실 괴목 사람들은 잡부금에 비하여 세금은 남의 일이나 다름없었지만 그놈의 잡부금 중에도 지서에서 거둬가는 것이 피를 말렸다.

그러다보니 당사자인 본인들은 당연히 죽든 살든 감내해야 할 일이지만 중간에 끼어 시달리는 이장이 문제였다.

세금과 같이 면에서 내라는 것은 전달이나 독촉을 하는 것이 이장의 주된 역할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도 대부분 날짜를 맞추도록 하지만 개중에는 약간의 말미를 주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어기는 사람도 있었다.

이런 경우 이장은 욕을 먹는 정도에 그치고 면직원이 직접 그 집의 소나 솥단지 같은 물건을 차압하여 해결하기도 하지만, 지서에서는 본인들이 아니라 이장을 잡아 족치고 물고를 내므로 무슨 방법이든지 찾지 않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찾아낸 게 국민들에게 나눠주는 전시배급물자인 구호미(배급 쌀)와 영농지원으로 나오는 비료 등을 처분하거나 활용하는 방법이었다.

전시 구호미는 6.25때 미국에서 우리나라에 지원해준 베트남 쌀로, 굵고 모양이 길어 베트남의 한자이름 안남미(安南米)를 따 알량미라고 불렀다.

배급쌀을 창고에 실으러 가면 이장이 마을 사람들의 전표를 모아 몇몇 실수령자들 것을 제외하고 실세보다 약간 싼값으로 현장에서 돈으로 바꾸어 본인들에게 나누어 주지 않고 경비로 충당하는 방법이었다.

그러므로 배급쌀마저 만져볼 기회가 없는 가난한 사람들은 잡부금으로 대납할 수 있는 것만으로도 고마워하면서 살아야 했다.

창고에서 돈으로 바꿀 수 있었던 것은 당시에 쌀이 귀한 때라 창고담당직원이 싼값에 사서 장사를 하기 때문이었다.

아침쌀값이 저녁이면 갑절로 오르기도 하던 전시라 그들은 어마어마한 폭리를 취하여 상관들에게 상납을 하고도 횡재를 하였다.

아닌 게 아니라 다음날 오후 지서주임이 해당 이장들을 불러 놓고는 보자마자 잔뜩 성질을 부리면서 돈이 다 거출되었냐고 다그쳤다. 그는 내일 아침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총을 사러 출발하라고 못을 박았다.

최 이장은 이럴 줄 알고 이미 준비를 마쳤기에 자신있게 대답했지만 다른 이장들 중에는 아직 덜된 사람이 있는 눈치였다.

그래도 임 주임이 정한 출발시간을 어길 수는 없었다.

다음날 아침 지서주임 명의로 쓴 확인서를 갖고 이장 등 해당마을의 대표자 여섯명이 남원전투사령부로 갔다. 앞서 몇 차례 다녀왔기 때문에 절차는 훤히 알고 있었다.

남원의 군부대에 도착하여 보초에게 도민증을 보이고 용무를 말하니 통과시켜주었다. 무기를 관리하는 사무실로 가서 미리 써가지고 간 지서주임 명의의 확인서(무기판매 요청서)를 제출하였다. 사무실의 군인들은 거의 다 낯이 익었다.

이번에 살 물건은 M1총 세 자루와 실탄 900발이다. 그러니까 최 이장 몫은 총 한 자루와 실탄 300발인 셈이다.

담당 대위가 총은 두 자루만 가지고 가라느니 총알이 부족하다느니 하면서 시간을 끌었다. 늘상 해먹는 수법이라 그는 자연스럽게 따로 준비한 돈을 대위의 호주머니에 찔러 넣었다. 대위는 거절하는 척하다 돈을 만지작거리면서 창고로 걸어갔다.

이렇게 총을 구입해 지서에다 주었지만 오성옥이는 M1이 아니라 구구식 단발총을 들고 보초를 섰다. 총이 모자라니 M1은 토벌대로 나가는 대원들에게 돌아간 것이다. 이후로도 괴목 사람들과 이장을 잡는 총 대(총 대금)는 계속되었다. 특히 총알이 좀 부족한듯 싶으면 임상기는 지랄병(미쳐 날뜀)을 했다.

그래서 최 이장이 꾀로 생각해 낸 것이 자기 돈으로 미리 총알을 사다가 몰래 감춰 두고 필요할 때 내놓는 방법이었다. 그러나 몰래 총알을 더 사려면 와이로(뒷돈)를 써야 하고 그렇기 때문에 잡부금을 더 많이 풀어야 했다.

동네사람들에게는 미안했지만 최 이장이 살기 위해서는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러나 총알을 몰래 더 사와도 보관이 문제였다.

누군가 지서에 알리는 날에는 당장 압수해 버릴 것이며 반란군들이 눈치를 채는 날에는 정말 큰일이 벌어질 것이었다. 안 주면 죽일 것이고, 주었다가 지서에서 알게 되면 식구들까지 모두가 몰살감이다.

그래서 사온 총알은 백발씩 나누어 다람쥐가 도토리를 감춰 놓듯이 밭이나 언덕에다 땅을 파고 묻어 놨다가, 그가 지랄을 할 때면 이삼백 발을 꺼내와, 마치 방금 구해다 바치는 것처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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