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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보다 무서운 잡부금(雜賦金)②

  • 입력 2018.09.21 10:59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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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개월 후에 권총을 사러간 이야기를 하나 더 하여보기로 하자.

임상기 주임이 가고 다음 사람이 새로 부임한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이장들을 모아 놓은 자리에서 지서주임이 권총이 없어 되겠느냐고 한 자루 사 달라고 노골적으로 요구를 했다. 그러자 다른 이장들이나 유지들 몇몇이 엠왕이나 칼빙은 몰라도 권총은 살수가 없어 곤란하다며 어물어물 대답을 피했다.

사실 항상 사는 총이 M1이고 어쩌다가 카빈이지 권총은 사본 일이 없었으며 값도 엠왕보다 소대장이나 지서주임이 쓰는 칼빙이 훨씬 비쌌고 권총은 구하기가 힘들뿐만 아니라 얼마나 더 비쌀지도 몰랐다.

그런데 총을 구입하러 남원으로 가는 날 사복을 입은 주임이 직접 따라나섰다.

직접 가서 권총구입을 확인하려는 것이며 또 충분히 권총을 살 수 있다는 사실을 알고 있던 모양이었다.

주임은 권총도 한 자루가 꼭 필요하다고 군인에게 오금을 박듯이 말을 하고는 가게 밖으로 나가버렸다. 뒷일은 알아서 하라는 말이나 다름이 없었다.

최 이장이랑 유지들이 권총도 하나 달라고 하도 사정을 하니까 안되겠는지 대위가 안으로 들어가 사오구경 한 자루를 가지고 나왔다. 그가 총을 내밀면서 실탄은 줄 수가 없다고 말하자, 군인들은 마음이 약하다는 것을 알고 있던 최 이장과 유지들은 다시 총만 있고 실탄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냐고 붙들고 늘어지면서 호주머니에다 한주먹을 찔러 넣었다. 그들은 끝내 이기지 못하고 실탄 백발을 가져오더니 열흘 후에 오면 300발을 더 주겠다고 하였다. 아마도 다른 곳에 실탄을 내주며 빼놓으려는 모양이었다.

권총과 실탄 백발을 사는 데만 쌀 두가마니 값이 훨씬 넘게 들었다.

이후로도 공비토벌이 끝날 때까지 총과 실탄은 계속사서 대줘야 하였다.

매달 나오는 치안수습비와 가끔씩 사다주는 총값 말고도 지서에서 나오는 잡부금은 치안제도라고 하여 스무 가지도 넘는 비목이 시도 때도 없이 나왔다.

수리비, 회식비, 위로금, 축하금, 출장비 등 앞에다 이름만 붙이면 모두 고지서가 되었다.

면에서도 마찬가지였다. 각 계마다 잡부금이 쉴새없이 나왔을 뿐만 아니라 나중에는 지서에서 배웠는지 기한도 삼일로 줄여 버렸다.

정말 지긋지긋한 잡부금이었다.

 

이쯤에서 괴목 서봉근(84) 씨의 면사무소 잡부금에 대한 기억 하나를 소개한다.

6.25 이듬해 늦은 봄 어느 날 오후, 밖에서 그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 문을 열어보니 면 직원 박주사와 소사가 마당에 서 있었다. 올 것이 왔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방문을 열고 기듯이 마루를 내려가 허리를 숙여 꿇어 엎드리며 내일은 무슨 수를 쓰더라도 가지고 가겠다고 사정을 했다. 하지만 그들은 더 이상 봐줄 수 없다면서 오늘은 무슨 일이 있어도 받아 가야겠다는 것이었다.

실은 10여일 전쯤 면사무소에서 무슨 잡부금이 삼천 원 씩 사흘 기한으로 나왔는데 끊임없는 독촉에도 마을에서 가장 어려운 세 집이 내지 못하고 있었다. 그들은 잡부금 삼천원을 내지 못한 집에 들어가 소를 몰고 나오고, 건너 짐샌 집은 솥을 빼내 들었다. 다른 한집도 마찬가지였다. 이 광경을 보던 마을사람들이 부리나케 돈을 차용하여 쫓아가 그들이 면사무소가 있는 쌍암까지 가기 전에 찾아 왔는데, 다음날 면의원이 이 사실을 알고 면장에게 호통을 쳤다는 소문이 들렸다. 그 다음부터는 면직원이 물건을 압수해가는 일이 거의 없었다고 한다.

 

당시 마을사람들은 면이나 지서에서 거둬가는 잡부금에 대해서는 어쩔 수 없다는 자포자기상태가 되어 거의 무감각한 상태였지만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고 마음을 괴롭히는 비용은 이장이 풀어 매기는 접대비와 기타경비였다.

이 비용은 그 이름에서 말해주듯이 모두 구체적인 내용이 없었고 또 돈의 액수가 많기도 하였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이장을 의심하기도 하고 심지어 다툼이 일기도 하여 대가 차지 않는 사람은 이장을 시켜도 얼마 하지 못하고 스스로 물러나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한편 산골인 괴목마을 사람들은 그 많은 잡부금을 일일이 다 알 수도 없을 뿐만 아니라 안다고 해서 확인해 볼 수 있는 것도 아니고 내지 않고는 배길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그때그때 잡부금을 낼 수 없는 사람도 적지 않으므로 아예 이장과 몇몇 유지들이 알아서 하도록 맡겨두는 상황이었다.

그러다보니 위에 열거한 잡부금 항목들이 괴목마을 사람들에게는 별 의미가 없었다.

그저 지서나 면사무소에서 거둬가는 잡부금 중 이장이 자주 들먹이는 것을 기억할 뿐, 오히려 무슨 경비니 접대비니 하는 알 수 없는 낯선 돈에 관심을 두게 되고 그 내용을 조금 아는 사람의 불평에 의해 다툼이 벌어지고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앞서 치안수습비나 총기구입에서 보았듯이 이장에게도 감당하기 어려운 고충이 있었으므로 경비나 접대비 내용의 일부를 살펴 그 고충을 이해해보기로 하자.

 

먼저 가장 기본 비용은 이장본인의 경비와 접대비이다.

멀리 출장을 가는 비용은 말할 것도 없고 거의 매일 쌍암(면소재지)으로 나가 순사들과 면 직원들을 만나 그때마다 접대를 해야 했으며 또 접대를 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대부분이었다.

뿐만 아니라 옆자리에 앉아 있는 공무원이 아는 체를 하는 경우에는 인사치레라도 자기가 값을 치르겠다고 말해야 하는 것이 당시의 분위기였다. 그래서 이장이 먼저 일어설 때는 함께 내주고 나와야 했으며 만약 뒤에 나가게 될지라도 그들이 내지 않고 가버릴 경우에는 그 돈을 떠안아야 하였다.

 

다음은 찾아오는 사람들에 대한 접대비이다.

괴목은 선암사의 입구마을이 되어 찾아오는 공무원들이 많았다.

물론 오는 사람이라고 해서 모두 접대를 하는 것은 아니었다. 군의원이나 면의원이 민폐의 방패가 되기도 했으나 이해관계가 얽힌 공무원들의 접대는 피할 수가 없었다.

그중에서도 경찰과 산림계 직원에게는 최소 식사와 담배, 막걸리만은 접대하여 보내야 마음이 편하였으며, 또 절 때문에 주막이 다섯 곳이나 있는 이곳에서는 이장이 없거나 유지들이 안내를 하지 않아도 자기들끼리 먹고 나서 이장 앞으로 비용을 달아 놓고 가는 일도 공공연하였다. 그러므로 이런 모든 비용을 울며 겨자먹기로 잡부금에 넣어 충당할 수밖에 방법이 없었다.

 

다음은 마을사람의 부역동원에 영향력을 미치기 위한 접대이다.

그러나 세금과 잡부금의 원조인 부역과 잡역은 전시 중이라 평상시와 같이 원칙에 따를 수가 없었다.

당시의 동원 형태를 보면 그때그때 필요에 따라 한 명에서부터 온 마을사람이 모두 동원되기도 하는데 수가 많은 경우는 몇 사람이 나오지 못해도 이해하고 넘겨 문제가 없었으나 한 사람이나 소수를 차출하는 경우는 잡부금처럼 분배할 수가 없으므로 지명을 해야 했다. 그러나 농사일에 묶인 사람들이 서로 나가지 않으려고 하기 때문에 무척이나 곤란하였다.

지금이면 다른 잡부금으로 공제해주면 될 것이 아니냐고 생각하겠지만 그렇게 간단한 일이 아니었다.

또 그때라고 해서 그런 생각을 못한 것은 아니다. 하루나 이틀씩 동원되는 부역은 순번을 정해놓고 하거나 대가를 보상해주는 등 이장과 마을 운영위원들이 정한 방법에 따랐으나 장기간 동원되는 차출은 일에 따라, 설사 국가에서 어느 정도 보상을 해주는 경우라도 너무 희생이 크므로 서로 차출되지 않으려고 피하였다.

그런 경우 이장이 지명을 할 수가 없으므로 면이나 지서에서 직접 차출토록 하는데 이때 자기 마을사람이 차출되고 안 되는 것은 이장의 능력이 많은 좌우를 하였으므로 평상시에 면직원이나 경찰관들과 친분관계유지를 위한 접대 등 이장들의 로비가 치열할 수밖에 없었으며 구호나 지원물자 배급도 마찬가지로 로비가 많은 영향을 미쳤다.

그러나 마을사람들 중에는 그러한 접대비가 이장 개인을 위한 낭비로 생각하여 불평하는 경우가 많아, 때에 따라서는 커다란 시비거리가 되기도 했다.

원래 접대라는 것이 한계가 애매하여 이장 개개인의 성격에 따라 지출에 많은 차이가 날 수 밖에 없으므로 그에 따른 불만도 당연하였다.

그러므로 혈기 있는 20대 중반의 최 이장도 일을 하는데 많은 애로가 있을 수밖에 없었으나, 6.25전후 가장 힘들었던 시기에 4년 반 동안이나 이장 직을 맡아서 원만히 할 수 있었던 것은 본인의 능력보다는 운영위원(유지)들의 적극적인 도움이 중요했다고 하면서 다음과 같은 예를 들고 있다.

그날도 설을 앞두고 배급 쌀을 수령하기 위해 전표를 모아가지고 출발해야 했다. 그는 떠나기 전 서 고문회장을 만나 설도 쇠야 하니 전부 돈으로 바꾸지 말고 쌀로 좀 나누어 주면 어떻겠냐고 물었다.

그러자 그가 화를 벌컥 내면서, 마을이 살아야지 무슨 말이냐,며 모두 돈으로 바꿔 잡부금을 내는데 쓰고 말았다. 물론 좀 서운하기도 하고 안 되기도 했지만 만약 그때 그렇게 하지 않았더라면 다음 잡부금 낼 때 무슨 고초를 받았을지 모를 일이었다. 후에 그는 서문갑 씨 같이 강단지고 대찬 마을의 고문회장이 밀어주지 않았더라면 이장일이 어려웠을 거라는, 고마움이 담긴 회고의 말을 빼놓지 않았다.

 

조계산의 향토사 중에서 가장 비극적이고 처참했던 기간은 근대사 중에서 6.25를 전후한 봉기좌익 활동기간이라 할 수 있다.

좌익사상에 심취한 지식인들의 영향을 받은 조계산 주변마을의 일부 젊은이들이 이에 동조하거나 휩쓸리다가 여순사건과 함께 입산을 하여 공비로 전락을 하여 활동을 하면서 많은 사람들을 회유 또는 강제입산 시켜 마을마다 빨갱이라는 사상에 연관되지 않을 수 없었다. 따라서 전쟁이 끝날 때까지 토벌이라는 또 다른 전쟁과 관련자 색출로 인해 수많은 무고한 사람들이 목숨을 잃거나 상상할 수 없는 고난과 고초를 겪어야 했다.

전쟁은 인간의 정상적인 사고를 깨뜨려버리는 최악의 수난이다.

그것은 생명이 직결되어 있는 상황을 순간순간 헤쳐 나가야 하기 때문에, 때때로, 차라리 죽는 것이 낫다는 삶의 고통에 대한 한계에 다다른다.

평상시의 이와 같은 말은 어느 개인의 일시적 상황에 대한 반응일 것이나, 전쟁의 소용돌이 속에서 가난하게 살았던 괴목마을 사람들은, 무기에 대한 공포는 그만두고서라도, 초근목피로 생계를 유지하는 하루하루가 생명 그 자체의 수레에 매달려 있는 것이나 다름없었으므로 죽음에 대한 초월이 아니라면 생을 자포자기하고 있는 시간의 연속이었다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조계산 주변마을의 향토사 중에 6.25의 전후를 겪은 괴목마을 노인들이 하나같이 입을 모아 피를 말리는 고통이었다고 말하는 당시의 잡부금에 관한 이야기 중의 일부이다.

끝.

 

¹: 현재 선암사산림경계비가 있는 무학 길 삼거리를 옛날 벅수가 서있던 곳이라 벅수거리라 불렀음.

 

<2010년 괴목마을의 유천년(92) 최선용(87 당시이장) 서봉근(84) 죽학마을 남상윤(96)노인으로부터 수집한 내용을 정리한 것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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