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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수와 익수형제의 죽음②

접치재의 절규

  • 입력 2018.09.23 13:37
  • 수정 2018.10.16 13:40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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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인부들을 실은 경찰차가 접치마을 아래를 지나갈 때 등교를 하던 길갓집 국민학생 2학년 김영창 소년은 잠시 후면 총알 밥이 되어 죽어갈 그들을 향해 영문도 모르고 손을 흔들며 지나갔다.

그들 사이에는 문길 새터에 사는 한광수 익수 형제도 끼어 있었다. 그러고 나서 잠시 후 접치재에서는 총소리가 콩을 볶듯 골짜기를 울렸다.

접치마을 사람들은 요란하게 울린 그 총소리가 설마 공사장의 인부들을 죽인소리였을 것이라고는 상상도 못하고 있을 때 경찰차가 내려오더니 황주임이 마을사람들을 향해 “올라가서 치워!” 하고 내려 가버렸다.

마을입구로 모여든 사람들은 무서워 사지를 벌벌 떨었다. 그러나 실려간 사람들 중에 마을사람도 있었으므로 머뭇거릴 수가 없어 나이 먹은 사람들과 몇몇 중년들이 먼저 달려갔다.

여자나 아이들은 무서워서 아예 처음부터 나오지도 못했고 아무리 지서주임이 가서 치우라고 했다지만 언제라도 누가 빨갱이를 도운일로 꼬투리를 잡는다면 험한 꼴을 당할 수밖에 없는 일이라는 것을 경험으로 아는 노인들이 젊은 사람들은 뒤로 물러서게 했다.

건너편 고갯마루 아래까지 삼백여 미터거리를 단숨에 달려가 보니 총에 맞아 피를 흘리고 쓰러진 사람들이 늘비하게 쓰러져 있었다.

 

모두 넋이 빠져 주저앉아버릴 지경이었다.

그렇지만 우선 마을사람을 찾기 위해 시체를 살폈다. 그런데 놀랍게도 죽지 않고 살아 있는 사람이 있었다. 가슴을 누르고 엎드려 있는 한 마을의 김 영철이었다.

기적 같은 상황이었다. 급한 대로 옷을 찢어 총 맞은 곳을 눌러 감아 묶고 급히 마을로 옮겼다. 그가 훗날 접치재 학살현장에서 살아난 유일한 생존자였다.

그뿐만 아니라 아직 완전히 죽지 않은 사람이 몇몇 더 있었다.

총살을 시키고 난 직후였기 때문이기도 했겠지만 개별조준사살을 한 것이 아니라 몸통을 마구잡이로 갈겨버렸기 때문에 여러 발을 맞은 사람이라도 심장을 피한 사람은 피를 흘려 숨을 거두기까지 시간이 걸렸기 때문이었다.

영철이 말고도 살아남은 접치사람은 두 사람이 더 있었다. 바로 오종호와 하쌍수였다. 하쌍수는 이미 시체가 되어있었으나 오종호도 그때까지는 아직 숨이 붙어 있었다. 이밖에 한두 사람이 더 살아있었으나 이미 어찌 해볼 수 없는 상태였으므로 측은한 눈으로 언짢은 마음을 억누르며 극락왕생을 빌어줄 뿐 통탄할 일이였다.

그렇지만 김영철은 그런 상황에서도 천운을 타고난 사람이었다. 처음 가슴에 한방을 맞고 곧바로 쓰러져 더 이상 맞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요행이 그 한발도 심장을 피했기 때문이었고 그런 상황에서 치료도 병원이나 약방은 엄두도 낼 수 없으니 여름날 상처에서 벌컥벌컥 나는 고름을 닦아내며 겨우 파 마늘 느릅나무 껍질 등을 찧어 붙이고 살아났으니 말이다.

훗날 그는 “총소리를 듣고 재빨리 쓰러져 만약 일어나면 또 쏴죽일까봐 다 가불 때까지 꼼짝 않고 있어서 살아났다”고 말했다. 마을사람들은 그의 기적을 일컬어 맷돌 속에서 나온 온 콩이라고 칭했다.

마을사람인 오종호와 하쌍수를 그곳 산비탈 조금 높은 곳으로 옮겨 그 작 저작 묻어 묘 같지도 않는 봉분을 나란히 만들어 장사지내고 다른 시체들은 가족들이 찾으러 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우선 마을에서 가져온 이불 홑청과 가마니때기 등으로 덮어 두고는 모두 마을로 내려갔다. 거기에는 문길의 광수와 익수형제도 함께 붙들고 쓰러져 있었다. 그리고 이틀 후에는 더이상 그대로 둘 수가 없으므로 여기저기 구덩이를 파고 한 구덩이에 시체를 둘도 넣고 셋도 넣어 그대로 묻어치우고 말았다.

험난한 시절이라 그럴 수밖에는 없었지만 보기에는 마구잡이로 묻어버린 것 같아도 근본이 선량한 그들로서는 가족들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었다. 후제라도 시신을 찾겠다고 찾아와 물을 때 알려주지 못한다면 그 죄를 어떻게 져야할까, 하는 부끄러움이 앞섰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무더기무더기 시체를 묻으면서도 안면이 있는 시신들은 끼리끼리 짝을 지우며 장소를 기억해 두려고 애를 썼다.

하나같이 말없이 기계처럼 움직이는 그들의 무표정은 오히려 담담해보였다. 하지만 그것은 담담이 아니라 목숨을 지키기 위한 무심의 가장이었는지도 모른다. 도대체 목숨을 건 사상의 대립이 무엇인지 총칼이 부딪는 틈바구니에 끼어 살아남으려면 가느다란 생명의 끄나풀이나마 붙잡지 않으면 안 되었고 어느 쪽에든 언행이 그들의 기분을 상하게 하면 그만이므로 세상을 초월한 수도자의 걸음걸이 흉내 속에다 무심을 꽁꽁 감추며 살아야만 했던 그들이었다.

참으로 비참하고 비통했던 현장을 뒤로 하고 내려가는 접치마을 사람들의 발걸음은 모두 땅에 끌리고 있었다. 두 번 다시 눈길을 머물고 싶지 않은 그곳이었지만 자신도 모르게 고개가 뒤로돌아가며 모든 시신들이 가족의 품으로 돌아가 접치재를 맴도는 원혼이 하나도 없기를 마음으로 기원했다.

 

하지만 접치마을 사람들의 염원과는 달리 훗날까지도 가족들이 찾아와 시신을 거두고 억울함에 뜬눈으로 헤매는 혼을 달래어 하늘길을 열어준 가족은 겨우 두셋이나 되었을지 모른다고 할 정도였다. 과연 이성을 잃은 한 경찰의 한마디 구령에 산비탈에 버려지듯 쓰러진 원혼으로 부모와 처자식을 향해 손을 뻗어 제발 좀 들리라고 애절하게 왜친 소리들이 어디까지나 전해졌을까 .

그곳에 함께 쓰러져 있는 사람들의 억울함이 누군들 다를 수가 있으며 시공을 초월한 영혼의 외침에 있는 곳의 멀고 가까움, 설사 하늘나라라 할지라도 전달에 소요시간은 어찌 다를 수가 있으랴.

여수에서 홀로 돈벌이를 와서 죽은 장호준 총각처럼 연고 없이 누운 시신들이야 아무리 손을 흔들고 외쳐 댄들 이 사실을 까마득히 모르고 있을 가족들에게는 꿈에 흉몽으로라도 전해졌다면 다행이겠으나 외지에서 들어와 결혼하여 가정을 이루고 인근마을에 살림을 차리고 사는 가족들마저도 세상이 무서워 찾아나설 엄두를 내지 못하여 피눈물을 머금고 웅크려야 했으니 사상전쟁의 소용돌이가 주는 공포를 지금의 먼눈 잡이로 생각한다면 과연 이해가 될 수 있을까?

이제 그들이 산비탈에 누워 애달픈 손짓을 멈추지 못한 흔적마저도 60여년이란 세월에 지쳐 진토되고 풀숲으로 바뀌고 말았으니, 기다림마저도 놓아버린 영원한 불귀의 객이 되어 접치재를 맴돌고 있을지 몰라 안타까운 일이다.

그러나 그때 광수와 익수 형제의 영혼이 부르짖는 간절한 절규는 어머니를 향해 느릿느릿 달려가고 있었다. 다음날 충격의 소식을 전해들은 광수어머니는 한달음 거리에서 두 자식형제가 억울한 죽음을 당해 못난 어미를 향해 두 눈을 부릅뜨며 뒤엉켜 손을 내밀고 있을 모습에 하늘이 무너지도록 온 몸이 오그라들어 눈을 감고 쓰러지며 겨우 입 밖으로 나오는 말은 바보 같은 놈들, 죽일 놈 들이었다.

 

빨갱이

광수와 익수가 빨갱이들과 내통을 하여 총살을 당했다는 소식을 들은 마을 사람들은 누구도 믿기지 않아 어리둥절했고 광수어머니가 혼절을 참으려고 이를 악물고 방문을 걸어버린 것도 얼토당토 않는 빨갱이라는 누명이 그저 자기 자식이라는 편견이 아니라 차라리 빨갱이라도 한번 해보고 죽었다면 하는 억울함에

“바보 같은 놈들! 죽일 놈들!”이라고 부르짖을 수밖에 없는 세상을 향한 분노였다.

광수는 어려서부터 또래들에게는 뒤지지 않았고 청년이 되어 최근까지는 야무진 성격으로 무조건 순종하는 다섯 살 터울의 동생 익수를 데리고 객지를 떠돌며 장사를 하여 조금은 거친 행동을 보일 때도 있었지만 빨갱이사상에 휩쓸릴 여유도 없이 먹고사는데 열중하느라 일밖에 모르고 살아 왔다는 것을 알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도 함바 생활을 하면서 산속빨갱이들과 내통한 한산인부들을 모두 잡아다 죽였다지만 접치의 오종호 하쌍수는 외지에서 왔으나 이곳 처녀와 결혼을 하여 아기도 낳고 육년이나 살아 지방 사람이나 다름없었지만 한산인부 줄에 서서 죽었고 광수형제는 외지사람이 아니라 한발거리의 문길이 집이었으나 집이 비좁아 몇 달 함바 생활을 하였기에 한산인부 줄에 서서 죽은 것이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행정저수지공사장으로 돈벌이를 하러간 것이 그렇게 죽으라는 팔자였을 것이라고 모두들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때는 여순 사태가 발생한 이듬해라 문길에도 좌익사상에 물든 사람이 있어 가족들과 청년들은 전혀 무관함에도 의혹과 감시의 눈초리에 시달릴 때였다.

여수14연대반란봉기에 실패한 좌익들이 지리산 권으로 은신할 때 조계산으로 들어간 사람들이 많아 주암은 그들의 주요한 사상활동의 배후지가 되어버렸다.

주암은 조계산줄기의 북쪽 보성강변의 넓은 들에 전통 있는 가문의 부호들이 학문을 이어 내려온 소재지로서 일정 때부터 일본이나 서울 등지로 유학을 하여 공산사상에 심취한 사람들과 일본군에 가서 공산주의사상을 보고 들은 사람들이 타도제국주의의 분노와 연계시켜 새로운 평등 사회를 이룩하겠다며 몸을 불사르려 들었으며 그 사람들의 부르짖음에 각 마을에서는 먼저 제법 똘똘하다는 젊은이들이 빠져들어 앞장섰고 뒤를 이어 무지한 젊은이들이 맹목적으로 휩쓸려 아까운 목숨을 초개처럼 버리면서 가족들도 못살게 하는 천추의 한을 남겼다.

 

주암이 좌익들의 배후지가 되었으니 산비탈마을인 문길도 휩쓸리지 않을 수 없었다.

주암을 대표하는 좌익 활동인 오산회의는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앗아갔고 후세에게까지 두고두고 고통의 상처를 남긴 사건이다. 오산회의는 전남유격대부대장인 낙안사람 김용길이 처가마을인 오산에서 사람들을 모아 인민들의 나라를 세우기 위한 사상을 독려하고 투쟁활동의 지침을 교육한 회의였으나 근거가 탄로나 오산의 농부11명이 경찰에 의해 당산나무아래서 총살을 당한 것을 비롯하여 빨치산에 의해서도 10여명이 사살되었고 형무소로 잡혀가 사형되거나 행방불명 된 사람도 30여명에 달해 주암면의 오산마을은 그야말로 쑥대밭이 되어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그 회의에 참석한 사람은 물론 그들과 연관된 수많은 사람이 죽거나 고통을 당해야만 했다.

그때 문길에도 좌익에 물들어 오산회의에 참석한 사람이 있었다. 마흔네 살의 조학섭과 한광수의 집안 스물네 살 한인수였다. 문길은 그들과 함께 좌익에 빠져 입산을 해버린 사람도 몇이 있는 산 밑 마을이라 그러한 틈바구니에 끼어 결국 여러 사람이 죽고 수난을 당할 수밖에 없었고 경찰로부터는 빨갱이 동네라는 의심과 감시를 받게 되었다.

그러는 중에도 때때로 밤이면 찾아드는 산사람들의 요구는 발등의 불일뿐 아니라 혹은 내 가족 이웃의 목숨인지라 내일의 총부리 보다 천륜의 인정이 앞서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가 어둠과 함께 사라져 버린다면 천만요행이겠으나 대부분은 그렇지가 못했다. 그것은 번뜩이는 눈초리 때문이기도 하지만 사실과 관계없이 들이미는 연좌의 고리로 얽어맨 칼끝에 막무가내 회를 쳐야 하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혹시라도 그물에서 빠져 나오거나 말려들지 않기 위해서는 연줄과 재물은 말할 것 없이 비굴함 양다리 등 모든 처신이 다 동원되었다.

그러나 역시 난세일수록 인맥과 재물은 목숨을 부지하는 힘의 원천임을 모두가 절감하지만 광수 네처럼 입에 풀칠하기도 어렵게 가난을 짊어지고 사는 사람들은 빨갱이와는 아무리 무관해도 경찰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므로 직접 또는 누구를 통해서라도 안면을 유지해 두는 것이 밑천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억울함을 당했을 때 상대적 반감이라는 심리적 작용 즉 괘씸죄의 대상이 되기도 하는 것이다.

광수어머니가 방문을 닫고 들어가 “바보 같은 놈들, 죽일 놈들” 하고 되뇌는 소리도 그와 같은 억울함을 표현한 분노였을 것이다.

훗날 사람들이 주고받는 말은 쌍수 그 사람들은 여기서 오래 살아 지방 사람이나 매 한가진데 멍청하게 그 줄로 서서 그렇게 됐다고 했고 광수익수는 문길사람인께 지방인부 줄에 서도 됐는데 무슨 혜택을 줄까 싶어 머리를 쓰느라고 한산인부 줄에 서서 그렇게 돼버렸다고 그들의 죽음에 대한 억울함과 안타까운 마음을 지나가는 이야기처럼 하면도 광수형제를 모른 척 해버린 재무계장과 그 악독한 황몽둥이 때문이었다는 말은 빼놓지 않았다.

 

만주로 떠나다

한광수는 삼일운동이 난 다음 해에 주암면 풍교리(문길)에서 아버지 한 하경과 어머니 고 씨 사이에서 셋째로 태어나 위로는 형님과 누나 하나가 있고 다섯 살 터울의 남동생은 이름이 익수였다.

광수네는 원래 주암 사람이 아니었지만 가난했던 할아버지가 문길로 들어와 터를 잡았다. 주암은 통일신라시대에 부촌을 뜻하는 부유현이란 지명의 부자와 인물이 많아 대대로 순천을 좌지우지 했을 정도로 송광사를 가까이하고 있는 넓은 들을 가진 고을이지만 정작 그가 사는 문길은 송광으로 넘어가는 산비탈에 사십 여 호가 모여 사는 변두리 동네로서 식량을 해결할 만큼 자기 논을 지닌 집은 몇 집에 불과하고 대부분 남의 땅을 붙이면서 산비탈에 의지하여 살아가는 형편이었다.

 

집이 가난한 광수는 연약한 형과는 달리 어려서부터 몸집이 크고 힘이 좋아 먼 산에까지 가야 하는 집안의 땔나무는 도맡았고 부잣집 농사일을 다니며 자랐다.

그러나 논밭뙈기 하나 변변치 못한 처지에 남의 집 일도 바쁠 때 한철이고 날마다 산천을 헤집고 다니며 먹을 것을 구하는 것이 일과인지라, 온 식구가 건너편의 가까운 등계산은 말할 것 없고 멀리 조계산의 장박골은 물론 모후산까지 사철을 헤매고 다녔지만 초근목피로 연명하기조차 힘들어 날이 갈수록 못 먹는 끼니가 더 많을 지경이었다.

거기다 일제의 공출에다 징용까지 그래서 광수가 열 아 홉살 되던 해 봄에 광수아버지는 고향을 뜨기로 결심을 하고 식구들을 모아 놓고 얘기를 하였다.

“자 모두 들어봐라, 이러다가는 우리식구들 모두 굶어 죽을 판이 되고 말았다. 그래서 내가 만주로 가기로 결심을 했은께 그리들 알그라!”

이 말을 들은 식구들은 모두 눈을 떨 구고 앉아 침묵의 시간이 흐를 뿐 말이 없었다.

큰아들이야 이미 결혼을 해서 따로 살았으니 그런가보다 하고 있고 어머니하고 누님은 여자라도 가난에 시달리고 지쳐서인지 아니면 기가 막혀서인지 두 사람이 붙어 앉아서 손을 잡고 있을 뿐 겉으로는 오히려 덤덤한 표정으로 속을 달래는 것처럼 보였다. 성질이 사내다운 광수가 침묵을 깨고 입을 열었다.

“아부지가 잘 생각해 부렀소. 진작부터 다들 만주로 떠난다고들 그래 쌌든디 차마 여그보다 더 못 할라고라.“

귀동냥으로 세상 돌아가는 물정을 알고 있다는 듯 제법 결기 있는 목소리로 아버지를 거들고 나섰다. 그 시간에 아직 어린 익수는 삼년 전에 광챙이(광천) 여자가 즈그 아버지하고 몰래 눈이 맞아 딸 하나를 낳아 주고 가버린 바람에 갑자기 생긴 네 살짜리 동생을 보느라 집안에서는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도 모르고 데리고 노는데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로부터 보름 남짓 오두막 같은 집과 지어 먹던 논밭 뙤기를 정리하고 꼭 필요한 부엌살림과 이부자리 몇 개를 제외한 살림 같잖은 물건들은 모두 이웃들에게 나눠들 줘 버렸다. 섭섭하다고 없는 차독을 긁어 한 바가지씩 들고 온 잡곡을 메인 목으로 받아 담았고 떠나기 전날에는 자리에 들기 전 어디에 있었는지 씨앗 등 필수품들을 조목조목 적어 놓은 횟가리 포대종이를 끄집어내 하나하나 대조하여 맞춰 보고나더니 낼 아침에는 동네사람들 안 보게 새벽밥 먹고 일찍 떠나 불세 하면서 익수와 광수가 자는 문간 옆 골방을 향해

“느그도 낼 아침에는 일찍 인나야 쓴께 언능 불끄고 자그라.”

하고는 내외도 자리에 들었지만 날마다 친구 집으로 자러 다니던 큰 딸이 오늘은 지어미 곁에 누워 가끔씩 내는 코고는 소리를 들어야 했고 두 사람 사이에 재운 네 살배기가 자꾸 이불을 차고 웃목으로 밀고 올라가니 그때마다 끄집어 내리기를 반복 했다. 모두가 깊이 잠든 첫닭 울 시간이 다 되었음에도 두 내외가 좀체 잠을 이루지 못하고 계속 뒤척인 것은 두 딸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서로가 알고 있었다.

 

아무도 몰래 나선다고 서둘렀지만 어찌 알고 나왔는지 컴컴한 골목에는 벌써 사람들이 나와 있었다. 어떻게 마련했는지 가다가 잡수시시오. 하고 주먹밥을 내미는 사람, 아이고 저 어린 것이 얼매나 고생을 할꼬. 하고 네 살배기를 끌어안는 사람 어쩌던지 건강하게 살다가 해방되거든 우리 꼭 다시 봅시다. 하는 사람 모두가 제 식구를 떠나보내는 것처럼 눈물로 환송을 해주었다.

행장으로 꾸린 짐들을 이고지고 동구 밖으로 나설 때 큰길 벅수 앞에서 걸음을 멈춘 광수가

“우리 다시 올 때까지 동네 잘 지키고 있으시오.”

라고 중얼거리더니 잘 보이지도 않는 동네를 향해

“나 갔다 꼭 올 것인께.”

하고 말끝을 놓아버리며 등짐을 한차례 추켜올리고 나서 뒤도 돌아보지 않고 한길을 건너 접치로 가는 지름길로 마을 앞 개천에 놓인 신다리를 향해 팽팽하게 걸어 가버렸다.

 

식구들이 순천 역에 도착한 것은 해가 서편에 걸칠 무렵이었다.

밤차를 타고 서울에 내려 다시 갈아타고 며칠이 걸려서 황량하고 낯선 만주 땅에 도착하였다. 그러나 압록강을 건너 만주에 도착하기까지 기차에서는 출발 전에 함께 가기로 미리 약속해둔 만주사정을 잘 아는 사람과 몇 가족이 중간 중간에 함께 동행을 하였기에 그나마 부푼 마음으로 잠시나마 고난을 망각할 수 있었지만 막상 마을도 없는 황무지 같은 벌판에 도착을 하니 버려진 돌 맹이처럼 어디로 굴러가야 할지 몰라 누군가의 발 뿌리라도 붙들고 싶은 막막한 심정이 되어 두고 온 고향 문길로 되돌아가 주저앉는 마음이 일어설 줄을 몰랐다. 그러나 그것은 일시적인 감상일 수밖에 없고 출발하기 전에 그곳에 가면 먼저 간 사람들이 사는 동네가 있어 걱정 없다고 들었는데 막상 와서 보니 마을이 있기는 했지만 차를 타고 오던 내내 머릿속에 그렸던 고향처럼 오순도순 모여 사는 동네가 아니었다.

황량한 곳에 몇 집이 오두막처럼 모여 있는 상태여서 기대가 허물어지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싸들고 온 식량이라야 여섯 식구가 풀칠만 한다 해도 몇 달 남짓이니 넋 놓고 있는 다는 것은 목숨을 재촉하는 일이 아닐 수 없었다.

그러나 살려고 하는 사람은 어찌해도 사는 법, 우선 하늘을 가릴 막을 쳐 간신히 누울 자리를 만들고 온 가족이 피땀 흘려 개간을 시작하였다. 그렇지만 겨울이 되니 고향에서는 상상도 못했던 추위에 굶어 죽더라도 당장 주암으로 되돌아가고 싶었다. 그러나 다시 돌아 갈 수는 없는 일 간신히 한겨울을 보내고 날이 풀리자마자 토담집도 세우고 본격적으로 밭을 개간하였다. 그렇게 온 식구가 풀뿌리와 나무열매를 먹어가며 팔다리가 저리고 손톱이 빠지도록 일한 덕에 두 겨울을 넘긴 가을에는 잡곡이나마 겨울을 넘길 만큼 수확을 하였다.

그러한 광수네의 악착같은 부지런함은 4년 만에 뒤따라 이주해와 마을을 이룬 사람들이 이제 완전히 자리를 잡았다고 부러워할 정도가 되었다.

그러나 그놈의 향수는 날이 가면 갈수록 마음속을 후빌 뿐인데 더군다나 광수는 낯선 사람들과 만나고 나면 식구들에게 머지않아 해방이 될 것이라는 말을 하여 가족들의 향수를 부채질했다.

아닌 게 아니라 광수가 뭘 알고 말을 했는지는 모르지만 만주로 온지 6년이 되었을 때 드디어 조국이 해방됐다는 소식이 만주 땅에도 전해지자 모든 사람들이 길거리로 뛰쳐나와 만세를 부르며 서로 부둥켜안고 춤을 추니 온 천지가 진동을 하여 모두들의 마음은 이미 고향으로 돌아간 상태가 되어 다음날로 짐을 싸는 사람들이 수두룩하였다. 그리하여 광수 네도 9월을 막 넘겨 추위가 벌판으로 내려앉고 있는 어느 날 한 서린 만주 땅에 피땀으로 일궈 놓은 농토와 떠날 때 네 살배기 코흘리개가 열 살로 훌쩍 커버린 세월을 남겨두고 떠날 올 때와 마찬가지로 등짐 하나씩을 챙겨 가지고 북새통 같은 열차에 몸을 매달아 몽매에도 그리던 고향으로 향했다.

 

장삿길로 나선 형제

그러나 막상 그리던 고향에 도착을 하여보니 겉으로는 6년 전보다 크게 변한 것은 없어 보이지만 마을 사람들이 맞아주는 품에서부터 사는 것이 훨씬 팍팍해 졌음을 한 눈에 느낄 수 있었고 전에 살던 집은 이미 다 쓰러진 헛간으로 변해 있었으며 옆 동네에 살았던 형 내외도 그들이 떠난 뒤에 곧바로 대처로 가고 영영 소식이 없다고 하였다. 어차피 동네에는 남겨놓은 땅 한 평도 없으니 마을 위쪽의 새 터에다 오두막을 짓고 또다시 어려운 살림살이를 시작하였다.

그놈의 향수 때문에 돌아오기는 했어도 포도청보다 무서운 것이 목구멍이라 했던가? 고픈 배를 고향으로는 채울 수가 없으니 간사한 것이 인간이라고 그토록 지긋지긋했던 만주 땅이 오히려 그리워지기도 하였다. 그러나 사람은 목숨을 부지해야 극락 가는 길도 찾는다고 만주를 떠나 올 때 보퉁이 보퉁이 싸들고 온 곡식은 다 떨어져 가고 꼬깃꼬깃 넣어온 얼마간의 돈마저 달랑달랑 해지므로 또다시 맨주먹으로 바지 가랑이를 걷어붙이고 나서야 했다. 그렇지만 제대로 된 논밭 한 뿌대기가 없으니 먹고 살기 위해 광수는 스물여섯이 된 이듬해에 동생을 데리고 장사 길로 나섰다.

촌놈이 옛날 같았으면 상상도 못했을 일이지만 객지를 한 바퀴 돌며 다른 세상을 보고 왔기 때문인지 광수의 생각이 많이 달라져 있었다. 처음에는 주암 인근에서 많이 나는 감을 거둬서 순천과 광주로 내다 파는데 생각보다 이문이 쏠쏠하여 차차 다른 과일이나 곡식도 가져가고 대신 내려올 때는 잡화를 가져다 팔아 재미를 보았다.

그리하여 광주나 순천을 오가기만 하던 것을 발을 넓혀 서울까지 올라 다니며 철따라 물목도 바꾸고 가짓수도 늘리고 왕복장사를 하니 한 이년 사이에 밥은 굶지 않고 살 수 있을 정도로 살림이 폈다. 밥을 굶지 않고 산다는 정도가 어느 만큼인지 지금으로서는 상상하기가 힘들겠지만 당시 없는 사람들은 목에 풀칠을 하기도 힘들어 부황이 들어 죽는 사람이 흔한 시기였으므로 동네사람들이 부러워할 정도라고 생각을 하면 될 것이다. 그리고 장가를 들어 부인도 맞이했다.

그러나 인생살이는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만주서 돌아 온지 3년 째 되던 해에 뜻밖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말았다. 아직 돌아가실 나이가 못되었는데도 만주 땅에서는 한과 고난을 정신력으로 이겨내던 것이 고향에 돌아오자 긴장이 풀렸는지 점차 기력이 쇄진해지는가 싶더니 다시 살만하게 되어가는 차에 결국 세상을 버리게 되고 만 것이다.

지금껏 아버지를 존경한다든가 믿고 의지한다는 생각을 해본 적 없이 살아왔는데 막상 돌아가시고 나자 허무한 생각이 들고 일손이 잡히지 않았다. 그래서 실없는 사람처럼 술이나 마시며 돌아다니자 스물세 살이 된 익수가 그에게 싫은 소리를 하였다.

나이차이가 있는 동생이라 어리게 대한 동생에게 그 말을 듣고 나니 정신이 버쩍 들었다. 그는 다시 서울로 올라가 장사를 시작하기로 결심하고 익수와 함께 기차를 탔다.

서울에 도착하여 전부터 다니던 거래 집으로 찾아가 전에 가끔 보았던 안면 있는 사람을 만나 인사를 하자, 한동안 보이지 않아 궁금했다,면서 요즈음은 무슨 일을 하기에 이렇게 오랜만에 보겠느냐,고 하여 아버지도 돌아가시고 집안에 일이 좀 있었다고 대답을 하니 그는 은근한 얼굴로 팔을 끌었다. 그리고는 귀에다 입을 대고, 자기가 하는 것이 아무에게나 말을 할 수 없는 한 목 보는 장산데 그동안에 보니 담력도 있어 보이고 다니는 길도 이녁의 고향과 가깝고 하여 권한다,면서 한번 따라 나서지 않겠느냐고 했다.

잠시 방황했던 탓인지 돈이 궁했던 탓인지 한 목 잡는 다는 말이 솔깃하여, 사람 죽이는 일 아니면 어디 한번 해 봅시다, 하고 승낙을 하여 그날 저녁 술자리를 같이 하며 장사 내용을 듣고 나서는 당장 나서자고 의기투합을 하였다.

 

그가 말하는 장사란 제주에서 잡은 쇠고기를 서울로 가져와 파는 밀도살고기장사였다. 제주에서 잡은 쇠고기를 서울로 가져와 파는 것이 무슨 한 목 잡는 장사냐고 하겠지만 그것은 시대를 모르는 사람이 하는 말이다. 왜냐하면 당시에는 사사로이 소를 도살하는 것을 국법으로 엄히 금했기에 일반인들이 쇠고기를 먹는다는 것은 상상도 할 수 없던 때였다.

그러나 서울에 사는 부자와 고관들은 끊임없이 쇠고기를 찾았으므로 몰래 쇠고기를 팔수만 있다면 당연히 몇 배를 남기는 장사가 되기에 은밀히 밀도살을 하여 암거래를 하는 사람들이 있었다. 강원도 등에서도 밀도살을 하였으나 여기 같은 육지에서는 금방 탄로나기 쉬우므로 주로 제주에서 소를 잡아 몰래 배를 통해 은밀히 싣고 나오는 밀거래가 성행할 때였다.

 

삼일 후에 첫 번째 제주행에 나섰다.

당시는 경험이 없어 익수와 동행을 하는 것은 위험이 더욱 컸다. 그는 익수와 함께 내려오다가, 다른 장사관계로 제주에 다녀오겠다,는 핑계를 대고 익수를 집으로 보냈다. 제주에 도착하자 여관에 들어 그는 그곳에서 상대하는 사람들을 만나 거래를 하였다.

광수에게는 얼마간의 밑천을 대고 같이하자, 하였으므로 시키는 대로 따라만 다니는데 밤이 되어 동쪽 해변으로 갔다. 뒤에 들으니 김녕 어느 곳이라고 하였다. 그곳에서 고기를 대주는 사람들이 잡아 놓은 소를 바닷가 창고 같은 집으로 옮겨 고기를 발라 각자 몫대로 나누어 포대에 담아 배에 싣고 목포로 나왔다. 목포에서 다시 기차에 옮겨 실어 서울로 와서 팔고 나니 공동으로 떼는 돈이 적지 않았음에도 몇 배의 장사가 되었다. 공동의 경비는 각자가 고기를 사는 비율대로 떼는데 그 액수가 많았지만 밀도살에서 거래까지 관계하는 사람이 많고 알게 모르게 들어가는 돈이 많을 것이라는 것을 그동안 장사를 해온 경험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으므로 내용을 물으려고도 하지 않았다.

첫 번째 밀거래가 쉽게 이루어진 것이다.

 

첨이라 얼마 투자를 못해서 그렇지 정말 이렇게만 장사를 계속 한다면 금방 부자가 될 것 같아 흥분이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광수형제가 스스로 나락으로 떨어지는 시발임을 깨닫지 못하고 있었다. 한차례 더 다녀온 뒤에는 자신이 생기자 익수도 함께 데리고 갔다. 그러나 그런 일이 늘 안전하게만 이루어진다면 누가 못살겠는가?

역시 오래가지 않아 기어이 사단이 나고 말았다. 그러니까 해가 바뀌어 1948년 추석을 앞두고 이번에도 형제가 밀도살한 쇠고기를 가지고 서울역에 도착하여 한 포대씩 짊어지고 광장으로 나가는데 경찰이 검문을 하려고 세웠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으며 이미 끝장이 났다는 것을 알아챘기에 서로 눈길을 교환하고 나서 바닥에다 부려놓고 나서 서너 발짝 뒤로 물러섰다.

경찰이 포대를 주시하며 이게 무엇이야? 하고 소리를 지르더니 메고 있던 총을 벗어 포대를 쿡쿡 찌르더니 풀어보려고 총을 내려놓으며 엎드렸다.

이때다 싶어 익수의 옆구리를 툭 치며 냅다 튀어 사람들이 많은 곳으로 내달렸다.

후다닥하는 느낌에 고개를 든 순사가 저놈들 잡아라! 하고 소리 쳤지만 이미 인파 속으로 사라진 뒤였다. 그길로 두 사람은 맥 빠진 몸으로 고향 문길로 내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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