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년만이다. 18일 여수보도연맹 사건 희생자 위령제와 추모식이 ‘애기섬’ 옆 해상에서 처음 열렸다.
여수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버지를 잃은 김양기(68, 여수시 신월동)씨는 아버지가 돌아가신 이후 68년 만에 처음으로 이곳 애기섬에 와서 제를 모시고 추모식을 가지면서 한숨을 짓는다.
“이게 말이 됩니까? 아버지가 희생됐는데 이곳을 오는데 무려 68년이나 걸리게... 유복자였던 저는 여전히 가슴이 먹먹합니다. 이번 위령제로 끝나버리면 뭐 합니까? 분노가 끓어오릅니다. 주홍글씨가 새겨지고 연좌제에 묶여 고생한 세월을 어디에 다 말하겠어요?”
여수 돌산대교 유람선 선착장을 출발한 여순사건 유족 70명을 포함한 150여명의 시민들은 50여분 천천히 달려 경남 남해군 상주면 소치도 해상에 도착했다.
애기섬 주변은 한국전쟁 당시 여수국민보도연맹원들이 국가기관에 검속돼 총살당한 후 수장된 곳으로 알려진 곳이다. 진실·화해를 위한 과거사정리위원회는 이곳에서 당시 총살 후 바다에 수장당한 민간인 희생자는 최소 110명 이상으로 추정하고 있다.
지금까지 국가기관은 물론 그 어떤 단체나 개인도 이곳에서 추모식을 지낸 적이 없다. 처음으로 여수시민들이 지방정부의 도움도 받고 국회의원과 지방의원의 참여 속에 추모식을 가졌다.
이날 행사를 준비한 여수지역사회연구소 이영일 소장은 “처음으로 추모식이 열린 것도 중요하지만, 유족들이 첫 참가한 것은 물론 아마도 마지막이지 않겠느냐 하는 생각이 든다”며, 이번 행사가 상당수 유족들에게는 고령화 추세로 현장에서의 처음이자 마지막 추모행사가 될 것이라고 말했다.
위령제가 열리는 뱃머리에서는 유족들의 통곡이 이어졌다.
올해 68세 서홍례(여,여수)씨는 20대 초반의 아버지를 여수보도연맹 사건으로 잃었다. 어머니는 자신을 낳자마자 아버지가 처형당한 탓에 바로 재가했다고 한다. 그는 당숙 집에서 자랐다. 태어나자마자 아버지를 잃어야 했고, 어머니와는 헤어져야하는 세월이 원통하고 분해 위령제 내내 눈물을 흘렸다.
“할아버지가 어렵게 어렵게 돈 마련해서, (경찰에 돈봉투도 주면서) 아버지 안 잡혀가게 하려고 노력했는데도 결국 검속에 걸려 잡혀갔다고 들었어요. 아버지가 면사무소 다니다 14연대 입대하고 다시 재대한 후에 면사무소 다녔는데 14연대 관련되니까 보도연맹에서 관리를 했나 봅니다.
똑똑하고 야무졌다고 들었어요. 근데 잡혀간 후에 ‘애기섬’으로 끌고가서 총살당했다고 그런 얘길 듣고 자랐죠. 애기섬, 말만 들었는데 처음 와서 눈물 안흘리고 가겠어요? 어려서 아버지 얼굴도 모르고 혼자 당숙집에서 크고 자랐죠”
여기저기서 통곡소리가 들린다. 애기섬을 바라보면서 한 없이 우는 분도 보인다.
율촌에서 살다가 역시 20대의 아버지가 보도연맹원이어서 잡혀가고 희생당했다. 혼자뿐인 어린 박순자(부산, 70)씨 역시 어머니는 재가하고 홀로 외갓집에서 자랐다.
“외할아버지로부터 보도연맹 사건으로 아버지가 잡혀갔고 ‘애기섬’서 처형당했단 얘길 듣고 자랐습니다. 진화위 조사가 있을 때, 고향 삼촌이 조사에 응했다가 친족이 아니면 대상자가 아니라고 해서 나한테 연락이 와서 어렸을 때 들은 얘기를 하면서 진화위 조사에 응했고, 그 후 여순사건 유가족 회원이 되어 이렇게 함께 와서, 제를 모시고 가니까 이제 죽어도 여한이 없습니다. 눈물이 너무 나서 참을 수 가 없었죠”
뱃머리에서 위령제가 끝나고 여순사건 여수유족회 황순경 회장은 추모식 인사말에서 “국민보도연맹 사건뿐 아니라 여순사건이나 여타의 민간인 학살이라는 불행한 역사가 더 이상 반복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하며, “정부와 국회가 적극나서 여순사건특별법을 반드시 20대 국회에서 제정해 줄 것을 촉구한다”고 강한 어조로 주문했다.
축사에 나선 국회 정인화(민주평화당 광양.구례.곡성),이용주(민주평화당 여수갑) 국회의원도 특별법이 조속히 통과되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하겠다고 다짐하기도 했다. 특히 특별법 대표발의자인 정인화 의원은 국회와 정부 분위기가 좋다며 기대감을 나타나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