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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준모 소년의 절규, "엄마야!"

  • 입력 2018.09.27 17:05
  • 수정 2018.09.27 17:31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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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9년 9월 25일 추석을 열흘 쯤 앞두고 구상 골의 마을 앞 논배미들은 나락모가지들이 노릇노릇 해져 일 년 내내 요 때를 허기지게 기다린 사람들은 집집마다 올개십리를 한다고 아이어른 할 것 없이 마음이 부풀어 침을 삼키는 때였다.

“그러면 뭣 할 것이여. 반란군들이 득실거려서 그놈들 잡는다고 애먼 사람이 죽어 나가는 판 인디.”

흥대리 마을

마을사람들은 불안에 싸여 숨죽이는 나날이 계속되고 있었다.

그렇듯이 구상 골 깊숙한 용계산 자락의 마지막 동네 흥대에는 전날 오후 반란군을 토벌한다고 군인들이 들어와 막사를 치고 주둔하여 밤을 보냈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열한 살 공준모 소년은 난리통에 학교가 문을 닫은 상황에서도 아침밥을 먹기가 바쁘게 소에게 풀을 뜯기러 동네 앞 방천 둑으로 몰고 나갔다. 골목을 벗어나자 어제 저녁부터 마을입구 회관 앞 공터를 차지하고 있던 군인들의 막사가 용계산 토벌을 가기 위해 새벽에 말끔히 치워지고 군인들은 시간을 기다리는지 서성였으나 그냥 고개를 숙이고 지나쳤다.

방천에 도착한 그는 몇몇 또래 아이들과 함께 물가에다 소 고삐를 길게 매놓고 가끔 한 마리씩 보이는 메뚜기와 땅깨비를 찾으려고 아직 햇살이 퍼지지 않은 풀밭을 막대기로 해쳐가며 놀기 시작했다.

보통 때 같으면 학교에 가서 책을 펼쳐 들어야 할 시간인 아홉 시 무렵 느닷없이 이 마을 저 마을에서 총소리가 들리더니 동네 여기저기서 뭉글 뭉글 연기가 겁이 나게 솟아오르는 것이 보였다.

놀란 준모소년은 한눈에 봐도 그곳이 자기네 집임을 알고 소고 뭐고 버려두고 정신없이 집을 향해 달려갔다. 동네로 들어서니 골목에는 총을 멘 군인들이 깔려  있었고 살벌한 분위기에 갈팡질팡 뛰어다니는 사람들이 보였다.

그러거나 말거나 허겁지겁 집 앞에 도착을 해보니 사람은 하나도 보이지 않고 집은 불이 타올라, 만약 거기 있었다면 타죽어 버렸을 것 같았다.

잔뜩 겁에 질려 가까운 큰집에 달려가면서 보니 당숙모네집도 불이 타고 있었다.

큰어머니를 소리쳐 부르며 집안으로 달려 들어갔으나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곧장 되돌아나와 한 골목을 돌아 안쪽 끝에 있는 작은집으로 갔다. 집안으로 숨는 사람도 있고 동네 밖으로 마구 달려가는 사람들도 보였다.

다시 발길을 돌려 집 옆의 밭을 가로질러 산비탈 언덕 밑으로 나가니 여기 저기 숨어서 겁에 질린 눈으로 동네를 바라보고 있는 사람들이 보였으나, 정작 식구들은 다른 곳으로 갔는지 아무도 보이지 않았다.

그제야 군인들이 마을에 불을 지르고 돌아다녔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가족들을 찾아 갈 수도 없어 마음이 조마조마 하였다. 그렇게 한 시간 쯤 지났을까, 불길과 연기는 계속 타오르고 있는데 군인들이 용계골로 떠났다는 말을 듣고 사람들이 하나 둘 숨죽이며 동네로 들어가기 시작했다. 준모소년도 그들 뒤를 따랐다.

골목으로 들어서니 그동안 어디 있다가 나왔는지 사람들이 보였다.

준모를 본 사람들은 대뜸 아버지 어머니가 군인들에게 잡혀가버렸다고 했다. 처음 들었을 때는 무슨 말인지 몰라 어리둥절했으나 알아차렸을 때는 정신이 번쩍 들어 냅다 큰집으로 달려갔다.

불타고 있는 집들에는 사람들이 웅성거렸지만 그런 것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았다. 큰집으로 들어가니 어디에 숨어있다 왔는지 큰어머니 큰아버지도 와있고 덕모누님역시 언제 왔는지 구석에 쭈그린 채 어깨를 들썩이고 있었다.

제정신이 아닌 준모소년은 큰어머니에게 달려들어 양팔을 붙잡고 참말이냐고 물었다. 그러나 큰어머니는 말문을 열지 않고 어께만 쓰다듬어 진모는 그만 눈물이 왈칵 솟구쳤다.

마음 같아선 당장 용계골로 달려가고 싶었으나 큰어머니의 손길과 눈빛이 그럴 수 없다는 것을 말해주고 있기 때문에 더욱 더 서러움에 북받혀 눈물만 흘렸다.

 

토벌군 백골부대

 

군인들이 마을에 불 지르고 사람들을 산으로 끌고 가서 죽이기 전날, 그러니까 음력으로 8월 초 나흗날 해가 서편으로 기울 무렵이었다.

반란군을 토벌하러 왔다는 백골부대 군인들이 동네 입구의 회관 옆에다 막사를 쳤다.

백골부대막사를 세웠던 흥대마을 입구 정자나무공터

작업할 때만 해도 내일이면 벌어질 끔찍한 상황을 상상도 못하고 그저 날이 새면 용계산으로 토벌하러가기 위해 잠자리를 만드는 가보다, 이런 생각만 했다.

마을유지들이 찾아가 인사를 할 때는 믿음직한 우리 국군들의 모습이 분명했다.

어른들의 말로는 경찰로는 반란군토벌을 할 수 없으니까 백골부대가 진주에서 광양 순천으로 올라왔다는데,  빨갱이 잡는 일이라면 이들 백골부대 이상이 없으며 또한 인정사정을 봐주는 일 없는 무서운 부대라고 했다.

백골부대가 흥대로 오기 전날 저녁에 구랑실재에서 구상과 흥대의 작은 마을 사람들 여러 명을 사살해 버리는 끔찍한 상황이 벌어졌으나, 그때까지만 해도 모르고 있었다. 그러나 이 일은 곧 가까운 이웃에 입에서 입을 건너 알려졌으나 수십 년에 걸쳐 쉬쉬할 수밖에 없는 무서운 세상이었기에 아무도 입을 열지 않았다.

그날은 구상골 6개 마을 사람들이 동원돼서 학구로 나무를 치러 갔던 날이었다.

나무치기란 산에서 활동하는 반란군들이 나무가 우거진 길가에 숨어서 토벌대를 공격하기 때문에 시야확보를 위하여 산길 주위의 나무들을 모두 베고 찍어 눕히는 일을 말한다. 그런데 제일 늦게 마치고 날이 어둑어둑해서 돌아오던 사람들이 어찌 했는지는 몰라도 검문을 받다가 사살되고 말았다.

당시 이름이 알려진 사람인 흥대의 아래 작은 마을 연동의 박덕기, 박정오, 박정석은 현장에서 사살되었고 구상리 작은 마을의 세동사람 박기오는 마을까지 끌려와 사살되었다. 거기에 또 몇 사람이 더 있었다.

세동마을

『-그때 구랑실재에 매복한 백골부대에 오인되어 사살 당한 사람들은 억울하기 짝이 없는 사람들이야. 당일에는 마을사람 아무도 몰랐어.

-그들이 더욱 불쌍하고 억울하게 생각되는 것은 그때 상황을 곰곰이 생각해보면 분명히 오인을 받을 만한 언행이 있었던 것 같아서 그래.”

-빨갱이에 대한 분노와 감정 때문에 분풀이로 주민을 사살했을 리는 없지 않아.”

-전시에는 답변이나 사소한 행동의 의심으로 인해 사살되는 사례들이 많지.”

-군인들이 주민들의 인명을 경시한 행동이었다는 생각이 들기는 해.”

-하필 그들만 뒤쳐져 오다 그렇게 되었는지 죽은 사람들만 억울할 뿐이지.“

-그도 그럴 것이 여순사건 터지고 나서 시내 쪽에서는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는 소리를 들었지마는 그때까지 구상 흥대에서는 반란군이나 경찰한테 잡혀 가기는 했어도 총 맞아 죽은 사람이 없었는데 더군다나 나무치러 갔던 사람들이 군인들에게 사살되어 버렸다니 그렇지만 난리 통에는 아무리 억울한 일을 당해도 어디다 대고 말도 못하지. 그랬으니 가족들은 오죽 했을 것이라고…

-구랑실재가 왜 구랑실 잰가 하면 구랑실은 흥대리의 옛날 이름이여. 이 골짜기는 서면(순천)소속이고 생활권이라 구랑실 사람들이 늘 그 고개를 넘어 다니니까 자기마을 이름을 붙인 것이여.

-구랑실재에서는 그 무렵 많은 민간인들이 많이 죽어 6.25가 끝나고 사람들이 넘어 다닐 때 무서워했고 뒤에 유골이 나오고 그랬었지.

-구랑실재에서 사람을 많이 죽인 것은 여기(흥대)가 소속은 서면(순천)이지만 골짜기는 광양인데 구랑실재가 가로막고 있는 형태지. 그런데 용계산에 반란군들이 득실거리고 마을들이 그들의 영향력에 들게 되자 토벌과 관련자색출로 인한 비극은 끝없이 이어지고 후미진 경계 구랑실재는 사람들 죽이는 곳이 되어 버렸지. 나무치기를 하고 오다가 죽은 사람들도 있고 말이여.』

구랑실재 흥대(구랑실)방향

그러고 나서 이튿날 오후 다섯 시 경에 그 백골부대가 용계산 토벌을 한다고 흥대로 들어와 회관 앞 당산나무 밑 공터에 막사를 짓고 야영을 한 것이다.

군인들이 막사를 치기 시작할 때는 해거름이었다. 어수선하고 긴장된 분위기 때문인지 서둘러 골목길을 돌아 집으로 들어간 사람들 중 드러내놓고 내다보는 사람은 거의 없었다. 막사를 치는 데는 그리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해가 지고 군인들의 식사가 끝났는지 조용해지자 대장은 이장과 유지들을 불러 반란군들의 활동에 대해 자세히 묻고는 돌려보냈다.

불려간 사람들은 모두가 다음날 용계산으로 토벌을 가기 위해 파악하는 것으로 알고 묻는 대로 대답을 하였다.

산골은 해가 지기 무섭게 어두워져 금방 적막강산이 되고 만다. 더군다나 여순사건이후 전쟁터로 변한 이곳은 어둠이 깔리게 되면 사람들은 그림자도 얼씬거리지 않는 것이 생활화되었다. 그런데 한밤중이나 다름없는 밤 열시 경, 안경덕 서면지서 주임이 부하들 몇 명을 데리고 백골부대 막사로 들어갔다가 한참 후에 돌아가는 모습이 사람들 눈에 띄었다.

그것을 본 사람들은 군인들 앞에서는 꼼짝도 못하는 것이 경찰이므로 대장이 작전에 필요한 정보를 듣기 위해 불렀던지 아니면 무슨 보고를 하고 가는 것으로 생각하였다. 그러나 다음날 집들이 불타고 사람들이 끌려간 것을 보고서는 입산자들에 대한 정보를 제공해 준 것으로 짐작했다.

안경덕 지서주임이 떠나고 한 시간이 조금 더 지난 자정이 넘을 무렵 초닷새라 달도 없고 깜깜한데 반란군복장을 한 군인들이 막사에서 두셋씩 짝을 지어 나오더니 조를 지어 구상 흥대 각 마을로 출발하였다.

그들은 반란군으로 변장을 한 군인들이었다.

그리고는 미리 점이라도 찍어둔 것처럼 망설임 없이 집들을 찾아 들어가서는 산에서 몰래 내려온 반란군 행세로 은밀하게 군인들에 대하여 묻기도 하고 식량이나 물건을 요구하기도 하면서 차례로 떠보고 돌아다녔다.

그러기를 한 시간 남짓이나 되었을까. 산으로 가는 것처럼 나온 군인들은 모두 다시 막사로 돌아와 반란군 행세에 협조한 집을 파악해 놓고 잠자리에 들어 날이 새기를 기다렸다. 안경덕 지서주임으로부터 빨갱이 가족이라고 제보를 받은 집들을 찾아들어가 은밀한 속임수로 동조자를 색출하여 미리 처단을 하려는 작전이었다.

『-군인들이 변장을 하고 빨갱이 내통자를 색출하려고 사람들을 시험해본 것이지.

-마을 사정을 잘 아는 안경덕 주임이 미리 정보를 제공해 준 것이 틀림없어.

-아무리 무관하고 눈치가 빠른 사람일지라도 그렇게 하면 걸려들지 않을 수 없지.

-이때 걸려든 사람은 다음날 꼼짝없이 당할 수밖에 별수가 있어.

-토벌대들이 흔히 쓰는 수법이지만 현지경찰들은 얼굴을 알기 때문에 외부에서 온 부대가 손쉽게 찾아내는 방법으로 써먹었지.

-그런 방법이 수월했을지는 몰라도 너무도 억울한 죽음과 고통을 주었어.

-주야로 토벌대와 반란군이 번갈아 총을 들이미는 상황 속에서 주민들은 목숨을 지키기 위해 그때그때 상대에 따라 비위를 맞출 수밖에 없었는데 말이야.

-그렇게 어처구니없이 걸려들어 목숨을 잃은 억울한 사람들도 한둘이 아니야.』

날이 밝아 사람들이 아침들을 먹고 하루를 시작하려고 나오는데 백골부대가 와 있어 그런지 지난밤의 일 때문인지 평소와 달리 행동은 조심스럽고 긴장된 분위기가 감돌았다.

 

총소리를 신호로 타오르는 연기

 

날이 새자마자 아침을 지어 먹고 난 군인들은 막사를 말끔히 치우고 출동시간을 기다리기나 한 듯 공터를 서성이고 있었다.

그러기에 마을사람들은 당연히 반란군을 토벌하기 위해 용계산 골짜기를 향해 출발할 것으로 생각하면서 아무리 난리통이라도 먹고 살기는 해야 하므로, 어른들은 굳게 입을 다물고 눈을 내리깐 채 빠른 걸음으로 공터를 벗어나 나락이 누릇누릇 익어가는 논과 잡곡들이 여물어 가는 밭으로 갔고, 아이들은 학교가 문을 닫았으므로 소를 몰로 방천 둑으로 나갔다.

당시에 구상소학교는 광복이듬해 유지들이 구상골 여섯 마을의 어린이들에게 소학교공부를 시키기 위하여 흥대에서 십분 거리인 건너편 구상 무새뜰 몰랑에 있는 동각을 학교로 인가를 받아 수업을 시작하였으나 아직 학교모양을 제대로 갖추지 못해 서당이나 다름없는 때였다.

구상리 마을

아홉 시가 가까운 무렵 흩어져 서성이던 군인들이 정렬을 하는 것이 마치 출발하려는 것처럼 보였다. 언제나 토벌대가 출발할 때는 방위대 청년들을 길잡이로 차출하는데 이날은 어쩐 일인지 나오라고 하지를 않았다.

아홉시 쯤 되어 군인들이 출발했다. 그런데 이들은 평소처럼 산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서너 조로 나누어서 건너편 구상과 아래동네로 내려가고 남은 조는 그곳 흥대 골목으로 각각 흩어져 나가는데 그 분위기가 매우 살벌했다.

구상골은 여섯 동네로 이루어져 있다. 구상은 작은 마을 마륜과 세동을 합하여 구상리이고 준모소년이 사는 흥대리는 연동과 학동을 합해 전체 약 100호 중에 원 흥대가 60호였다. 

그리고 동네의 위치는 용계산 골짜기 깊숙이 들판이 끝나는 가장 안쪽에 큰 마을인 구상과 흥대가 용계골에서 흘러 내려오는 하천을 가운데 두고 동서로 마주보고 있으면서 아래쪽으로 이삼백 미터 거리를 두고 각각 작은 마을을 거느리고 있다.

군인들이 출발하고 한 이십 여분이 지났을 때 아래 연동에서 전투가 벌어진 것처럼 파~바~방하고 총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마치 신호라도 주고받듯이 구상과 흥대에서도 거의 동시에 총소리가 골짜기를 흔들었다. 사실 그 소리는 작전을 개시하는 미리 약속된 신호였다.

갑작스러운 총소리에 마을 사람들은 모두가 놀라고 어리둥절하여 들에 있는 사람들은 소리 나는 곳으로 눈을 돌렸고 집안에 있던 사함들이 놀라 모두가 밖을 내다보니, 뜻밖에도 골목에는 살벌하게 돌아다니는 군인들이 보였다. 무슨 일이 났구나, 싶어 가슴을 졸이며 살펴보다 군인들이 집에 불을 지른다는 것을 알고 모두 도망가고 숨어 사방은 온통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잔뜩 겁에 질린 사람들은 온 동네 전부를 불질러버리는 줄 알고 모두 간이 콩알 만해져 벌벌 떨었다.

흥대 60호 중에는 준모네와 당숙모네 그리고 다른 두 집, 총 네 집에서만 불길과 연기가 솟아올랐다.

군인들이 흥대에 불을 지른 집은 밤에 빨갱이 내통자 색출에 걸려든 집들이었다.

반란군으로 변장을 하여 시험을 하고 나서 아침에 출발을 하기 전 불을 지르고 내통자는 체포해갈 계획으로 모른 척하고 돌아갔던 것이다.

평상시 같으면 온 동네 사람들이 물동이 낫 쇠스랑과 같은 소화기구들을 들고 불을 끄려고 달려들었을 텐데 그날은 나오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모두가 총부리 앞에 바짝 움츠려 있는 판에 빨갱이 집이라고 불을 지르는데 감히 누가 그 불을 끄겠다고 나서겠는가?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일이었다.

불을 지르고 난 군인들은 점찍어둔 사람들을 붙잡으려고 했다. 그러나 어떻게 눈치를 챘는지 아니면 미리 도망을 갔는지는 몰라도 준모소년의 부모와 당숙모 그리고 또 한사람만 붙잡히고 말았다.

물론 같은 시간에 건너편구상에서는 여섯 집이 불탔고 아래 연동서도 두 갈래의 연기가 뭉글뭉글 솟아올랐다. 그리고 역시 내통자로 찍힌 사람들은 체포 되고 있었다. 뒤에 알게 되지만 체포된 사람은 흥대의 3명 외에도 구상12명 연동3명 세동 1명이 끌려가 무참히 사살되어 용계산 골의 원혼이 되고 말았다.

산비탈에 몸을 숨기고 조마조마 지켜보던 사람들은 불난 집에는 안됐지만 자기 집에는 불이 나지 않은 것을 다행으로 여기며 마음이 놓여 군인들이 빨리 나가기만 기다렸다. 한 시간 이상이 지나 군인들이 간 것을 알고 동네로 돌아왔다. 거기에는 방천에서 소를 뜯기다 달려와 엉겁결에 사람들을 따라 피해 있던 준모소년도 있었다.

골목으로 돌아온 진모는 자기네 집은 처참하게 불타고 있고 부모님이 군인들에게 잡혀 갔다는 말을 듣고 허둥지둥 큰집으로 달려가 언제 돌아 왔는지 넋을 잃고 있는 큰어머니의 품에 안긴 것이다.

그렇지만 준모소년은 동네서 네 집이나 불을 질렀는데 어떻게 자기 부모와 당숙모 그리고 또 한 사람만 잡혀 갔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며칠이 지난 뒤 어른들이 그날 밤 군인들이 지서주임이 제보한 입산자들 집을 찾아 유도한 속임수에 걸린 것 같다 하고 덕모 부모는 불탄 집에서 뭐가를 건져보려고 서성거리다 붙잡혔다는 말을 하여 도무지 무슨 말인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용계골에서 울려 퍼진 총소리

각 마을로 분산되어 내통자로 점찍어둔 집들의 방화와 체포 작전을 마친 백골부대 토벌군들은 열시 반경 다시 마을회관 앞 공터로 집결하여 인원점검을 마친 뒤 체포자들을 끌고 용계골 입구인 안골로 출발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가족친지 어느 한사람도 애원하거나 매달리는 모습은 볼 수 없었다. 그것은 이미 불을 지를 때 모두가 겁에 질려 숨어 있었기 때문이기도 하지만, 당시에는 빨갱이라면 누구라도 인정사정없이 처단을 하던 때라 감히 나설 용기조차 마비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지금 흥대에서 토벌군이 출동하고 있는 용계산(625m)은 순천의 송치재에서 백운산으로 이어져 구례와 섬진강을 가로막고 있는 호남정맥의 줄기이다. 구상골로 흘러내린 3km에 달하는 깊은 용계골로 들어가면 두 개의 고갯길이 있다. 하나는 입구인 안골에서 용계골을 따라 고룡재를 넘어 구례로 가는 길이고, 또 하나는 중간 우측 진골로 올라가 계룡재를 넘어 광양 봉강면으로 가는 길이다. 이중 토벌군들이 어느 길로 갈 지는 아무도 몰랐다.

용계골의 들머리인 안골까지는 구상이나 흥대 공히 이십여 분이 걸리는 멀지 않은 거리이다. 그렇지만 마을 사람들은 출동하는 토벌군을 드러내놓고 보지 못했다. 몸을 숨기고 뒷모습을 바라보는 몇 사람이 있을 뿐이었다.

마을사람들이 미처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을 때 안골 위에서 몇 발의 총소리가 울려 퍼졌다. 첫 번째 총소리가 나고 20분 뒤에 다시 몇 발의 총소리가 더 멀리서 울렸고 그로부터 30분가량이 지난 뒤에 또다시 여러 발의 총성이 있었으나 마을에는 잘 들리지 않았다.

사람들은 거의 모두 그 총소리가 무엇을 말하고 있는지 짐작도 못하고 군인들이 떠난 것만으로 오그라들었던 가슴을 쓸어내리며 다행이라는 한숨과 무거운 침묵에 빠져야 했다.

내통자라는 민간인들을 체포하여 끌고 가던 토벌군들이 안골입구에 도착했을 때 뒷줄의 구상 사람 하나가 살려달라고 애원하며 붙잡고 늘어지니, 가족과 이웃 서넛이 합세를 하였다. 발길질과 개머리판으로 구타를 하였지만 물러나지를 않으니 시간이 지체되었다.

곧 그들을 향해 총성이 울리고 말았다. 이것이 첫 번째 총성이다. 그리고 잠시 후 개룡재로 가는 진골입구에 다다랐을 때 또 애원하며 버티는 세 사람이 있었다. 역시 그들도 총알받이가 되고 말았다. 그곳에서 토벌군은 광양 봉강으로 넘어가는 개룡재 길인 진골로 들어섰다. 걸음을 재촉하여 고갯마루가 가까웠을 때 대열은 걸음을 멈추었다. 끌려가던 사람들은 잠시 휴식을 취하는 줄로 알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곳이 그들의 생을 마감해야 할 곳이었다.

갑자기 악마로 변신한 우리 군인들의 총구는 저항할 힘도 없는 주민들을 향해 차례로 불을 뿜었다. 이미 끌려올 때부터 정해져 있었던 사살의 집행을 그곳에서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고 나서 토벌군들은 십 수발의 총성과 억울한 죽음의 원성이 용계산의 하늘로 울려 퍼지는 것을 뒤로하고 짐을 덜어버린 발걸음으로 개룡재를 넘어 봉강 길로 사라졌다.

이곳에서 쓰러진 열두 명은 안골과 진골에서 먼저 목숨을 빼앗긴 사람들보다 겨우 한 시간도 되지 않는 짧은 시간을 고통으로 연명하였을 뿐이다. 그곳에는 준모소년의 부모도 눈을 감지 못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로부터 3일이 지난 후에야 마을 사람들과 준모소년은 총소리가 남기고간 처참한 비극의 현장을 마주하게 된다.

진모소년은 잡혀간 부모님을 따라 쫒아 가고 싶었지만 어린 눈에도 어른들이 공포의 분위에 눌려 겁을 먹고 움직일 생각조차 안 하니 덩달아 숨을 죽일 수밖에 없었다.

아버지 형제간이 여덟이나 되어 큰집과 작은집 눈치를 보아도 눈을 깔고 있기는 매 일반이었다. 겁에 질려 하루해가 어떻게 가는지도 모르고 집은 불타버렸으니 큰집에서 잘 수밖에 없었다. 아침이 되자 밤을 어떻게 보냈는지 기억조차 나지가 않고 동네사람들은 어제의 일을 모른 체하려고 애써 태연하니 온 동네가 짓눌려 적막강산이 되어 버렸다.

무엇을 어떻게 슬퍼해야 할지도 모르게 사흘이 지났을 때, 엊그제 군인들이 잡아간 사람들을 계롱재로 끌고 가다 안골에서부터 차례로 총살시켜 계룡재에는 시체가 널려 있다는 말이 마을에 퍼졌다. 사실은 그날 잡혀가고 얼마 안가 산에서 총소리가 들렸을 때 사람들을 죽인 것으로 짐작한 사람도 있었다고 한다.

그러자 동네마다 난리가 나고 말았다. 열두 명이나 잡혀간 구상 마을은 온통 초상집이었다. 그렇지만 흥대는 진모가 작은아버지 뒤를 따라 나갔을 때는 세 사람 밖에 안 돼서 그런지 어른들이 회관마당에 모여서 어찌할 줄 모르고 하나 같이 심각한 얼굴로 수군거리며 한숨만 쉬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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