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4 금 22: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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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준모 소년의 절규 엄마야! 2
  • 2018.10.08 12:51

부모님을 찾아서

 

아버지 형제와 친척들이 바지게에 괭이, 삽 그런 장사지낼 도구와 물건을 챙겨지고 안골로 나서자 어리지만 준모도 뒤따라갔다.

저만큼 앞서 구상사람들이 가고 있는데 여자들도 많이 보였다.

한 칠백 미터쯤 올라갔을까, 물막골 입구가 가까워졌을 때 사람들의 울음소리가 들렸다. 가까이가보니 앞서 가던 구상사람들이였다. 피를 흘리고 쓰러진 네 구의 시체를 여자들이 붙들고 통곡을 하고 있는데 이미 제정신이 아니었다. 군인들이 끌고 가다가 반항을 하니까 죽여 버리고 간 사람들이라고 했다.

안골입구 첫번째 총살지

눈앞의 광경에 모두가 말도 못하게 놀랬지마는 막상 죽은 사람을 보고는 그만 맥이 풀려 울고 있는 사람들한테 위로고 뭣이고 할 생각도 못하고 그냥 지나쳐 갔다.

얼마를 더 올라가 진골입구에 가니 또 세 사람을 죽여 놨는데 준모부모는 없으므로 계속해서 시체가 많이 있다는 계룡재로 걸음을 재촉했다.

구상 안통의 안골에서부터 시작하는 삼 십리나 되는 깊은 골짜기는 그 안에 이쪽저쪽 저쪽으로 안골 물막골 진골 진산태 구영기가 있고 마지막이 고룡인데 고개를 넘어 가면 구례로 간다.

계룡재는 안골에서 흥대 뒤 용계산(625)을 오른 쪽에다 두고 가다 진골로 올라가는데 주로 구상 쪽 사람들이 광양의 봉강면 계룡마을로 넘어 다니는 고개이다.

여순사건이 나고부터 이 골짜기들은 반란군들의 통로가 되어 낮에도 동네사람들은 물론 경찰들마저 얼씬도 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백골부대가 준모 부모님과 마을사람들을 끌고 가다 모두 죽여 버리고 봉강으로 넘어가버린 것이다.

계룡재 몬당 아래 쏘거리에 왔을 때 위에서 웅성거리고 흐느끼는 소리가 들리자 어른들의 걸음걸이가 달음박질로 바뀌었다. 준모 소년이 혹시라도 놓칠까봐 바짝 따라 붙으니 큰아버지가 막아 세우고는

“너는 보면 못 쓸지 모른께 여기 있다가 부르거든 오너라.” 

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한참을 서있었지만 도저히 그대로 있을 수가 없어 살금살금 올라가니 언뜻 보아도 쓰러진 시신들이 십여 구는 되어 보였다.

먼저 온 사람들은 벌써 준비해온 광목으로 시체를 덮어 옮길 준비를 했고 넋을 잃은 사람들이 부르짖는 통곡소리는 고갯마루를 덮고 있었다.

준모의 작은아버지들이 피를 흘리고 쓰러져 죽어있는 아버지를 찾아 들어 옮겨 바로 눕히다가 막둥이작은아버지가 그만 엉엉 울어버렸다. 참지 못하고 달려가니 큰아버지가 감싸 안는데 눈물이 펑펑 쏟아져 그냥 붙잡고 울었다.

그런데 어머니가 보이지 않았다면서 여기저기 산비탈로 흩어져 찾고 돌아다녔다.

그러고 조금 있으니까 밑에서 작은아버지의 여기 있다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달려 가보니 사람들을 죽인 곳에서 이삼십 미터 떨어진 개울 쪽에 엎드려 있었다.

작은아버지가 나뭇가지랑 풀을 헤치고 내려온 자국을 가리키며 총을 맞고 쓰러져 있다가 군인들이 다 가버린 뒤에 깨어나 목이 마르니까 살아 보려고 물을 찾아 피를 흘리면서 기를 쓰고 기어 내려온 것이 분명하다고 하자 모두가 그저 아무 말이 없었다. 그 순간에도 준모는 엉뚱하게 어머니가 물이나 먹고 죽었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엄마야!~

부모님 시체를 거두어 가져온 널판위에다 올려 이불 홑청 같은 것으로 덮고 바지게에 지고 줄지어 내려가는 동안 누구도 입을 열지 않았다. 물막골에 내려와 모두 멈춰서더니 부모님의 시신을 내려놓았다. 거기 어디에다 장사를 지내자고 미리 의논이 있었던 모양이었다. 집이 불타버리고 없어서가 아니라 그렇게 죽은 사람을 짊어지고 동네로 들어갈 수도 없는 일이었다

큰아버지가 언덕 쪽의 평지를 골라 묏자리를 잡아 잡나무와 풀을 걷어 내고 구덩이 파는 일을 시키면서 셋째작은아버지에게 자네는 둘이 집으로 가서 물이라도 한 사발 떠 놓게 이런저런 물건들 좀 챙겨오라고 일러주고 있을 때 내려놓은 어머니의 시체를 바로 눕히며 살피던 둘째 작은아버지가 무엇을 보았는지 기겁을 하며,

“와서 이거 좀 봐!” 

하고 눈을 돌리며 뒤로 물러서버렸다.

모두 작은아버지의 눈이 멈췄던 곳을 향하다 말고 고개를 돌리고 다가가던 사람들도 멈춰버렸다. 누워있는 어머니의 하체 밖으로 빠져 나와 있는 핏덩이가 보였다.

모두가 정말로 보기 민망한 상황에 기가 막혀 서로 얼굴을 쳐다보았다.

순간 준모소년이 “엄마야!” 하고 울먹이자 작은아버지가 몸으로 가리고 돌려세웠다. 그사이 큰아버지가 얼른 받아 내어 놓고는 내려가려는 작은아버지에게

“저놈도 묻어 줄라면 단지도 하나 가져와야 할 것이여.” 

하였다.

그러니까 태어나지도 못하고 단지에 묻혀버릴 동생이었다.

말이 장사지 구덩이라 그래봐야 사람 들어갈 깊이로 밖에 파지 않고 그냥 대강 묻어 두는 것이라 장사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핏덩이 동생은 단지에 넣어 어머니 묘 앞에다 묻어주었다.

내려오면서 생각하니 어머니와 함께 묻어줄 걸 그랬다는 생각이 들었다

일을 마무리하던 작은아버지가 주먹등만 한 흙 봉상에 붙은 몇 조각의 마른 떼를 삽으로 두들기면서 “천벌 받을 놈들!”하고 분노를 삭였다.

모두가 주섬주섬 연장들을 챙겨 자리를 뜨는데 산골짜기의 짧은 해가 앞 등성이에 걸려 그늘이 지기 시작했다.

오전에 올라가 점심도 안 먹었지만 배고픈지도 모르고 발걸음이 떨어지지 않아 멈춰서면 빨리 가자고 등을 떠밀어 밀려 내려오면서도 자꾸 뒤돌아 보이고 설움에 북 받혀 “엄마야!”를 부르며 흐르는 눈물과 코를 훔치니 얼굴은 범벅이 되었다.

물막골 입구에 오니 아침에 있었던 구상사람들도 그 부근에다 묻고 내려갔는지 아무도 없었다. 작은아버지가 혼잣말처럼 “여덟 달은 됐겄드만!” 하고 중얼거렸다.

준모는 처음에 무슨 말인지 몰랐으나 갑자기 무섬기가 밀려들어 몸이 떨리고 오그라들었다.

 

빨갱이 동네

『-48년도 10월 19일 여수신월리에 있는 군인들 19연대가 봉기를 일으켜 난리가 났다고 그랬는데 그것이 여순사건이야.

-다음날 학생 젊은이들이 봉기군과 합세하여 순천으로 밀고 올라와서 기세등등하게 구례 남원으로 밀고 올라 갈라가다가 사흘만엔가 학구에서 진압군하고 붙어서 안 져버렸다고~오.

-그때 참 무서웠거든.

-져버리고 나니까 그 사람들이 다 산으로 숨어들어 버렸는데 지리산이쪽 백운산줄기 그런데 여.

-그때 여기 용계산에도 겁나게 많았어.

-그 사람들이 들어오자마자 겨울이 되어 버리니까 토벌대가 없는 경찰이나 군인들은 어찌해볼 엄두를 못 냈지. 그런데다 이듬해 봄이 지나면서는 숲이 우거져 버려 낙엽이 질 때까지는 산으로 들어갈 수가 없으니 여기 구상 흥대는 광양 순천 사이에 있는 제일 깊은 골짜기라 밤만 되면 동네가 완전히 그놈들 세상이야.

-그렇게 되니까 이 안통에서도 입산한 청년들이 하나 둘 생겨나게 되었지.

-처음에는 머리가 좀 돌아간다는 사람들이 들어가 활개를 치고 다니니까 금방 그 사람들 세상이 될 것처럼 보였어.

-그러자 은근히 휩쓸려서 들어간 사람도 생기고 짐을 지워가지고 끌려갔다가 못 나와 버린 사람도 있고, 그러니까 이쪽에서 들어간 사람의 숫자가 수십 명으로 많아져 버렸지.

-그러니까 경찰이 구상 흥대 이쪽을 완전히 빨갱이 동네로 못 박아 버렸지.

-생각해 보면 토벌대들이 들어오기 전까지 반란군들이 활개를 치고 다니니까 어른들은 그렇지 않는데 젊은 사람들은 솔깃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어.

-밤만 되면 반란군들이 내려와서 식량물건 지워가고 낮이면 경찰들이 내통자들 잡아낸다고 들볶고 다니면서 잡아가고…

-그런데 반란군들은 자기들 필요한 것만 빼앗아 가지 주민들한테는 신고 같은 것만 안하면 친절하게 잘 대해줘.

-자기들 은신처와 인접한 활동지역주민들과 원수를 안지고 자기들 편으로 만들라는 전술이었을 것이여.

-그래도 어떻든 겁은 나도 당장 해를 안 입히니까 좋은 것이지 뭐.

-그러지마는 경찰들은 달라 원래 좌익이라고 의심하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고 산으로 들어가는 청년들이 생기니까 그 사람들 사상하고는 아무런 관계도 없는 부모형제들도 모두 빨갱이로 몰아버리고 친척들도 다 감시를 받지 않을 수가 없지.

-그래도 먹고 살기는 해야 되니까 농사를 지으며 밤낮으로 시달리고 있었는데 여름이 지나면서 토벌작전이 시작된다고 9월 들어서는 군인들까지 들어와 집들을 불 지르기 전날 군인들이 마을에다 진을 치게 된 것이여.

-인공당시 우리 동네(흥대)서 행방불명 말고도 빨갱이 관련으로 죽은 사람이 30명도 넘어. 입산했던 사람들 중에는 행불이 많고 자수한 사람 중에는 보도연맹관련자로 여럿이 총살당하고…

-구상 사람하나는 농사꾼인데 6.25 나던 해에 경찰이 왔을 때 구경을 하다 잡혀가 소련재에서 총살을 당했는데 그 사람 각시(김순애)도 반란군들 밥 해줬다고 잡혀가서 교도소에서 딸을 낳아 그 애기가 커서 지금 예순세 살 먹어 살고 있어.』

두 시간이 넘는 대화를 끝내면서 노안의 증언자들은

“나라에서 억울함을 풀어 주려는지 조사를 해 가기는 했는데…” 하고 긴 한숨을 지었다.

(2012.11.10. 11:00~13:30 흥대노인당 정현종(78)노인 등 8명)

 

형님은 빨갱이가 아닌데

구상흥대에서 토벌대에게 집들이 불태워지고 사람들이 총살을 당하기 보름 쯤 전 저녁 주위가 완전히 어두워 졌을 때 용계산에서 내려온 반란군 여러 명이 흥대마을 가운데 골목으로 들어갔다. 그들 중 지휘자로 보이는 두 사람만 총을 메고 나머지는 모두 빈 몸이었다. 

그들이 걸음을 멈춘 곳은 이 마을의 부자인 진모소년의 큰집이었다. 그들은 잠시 주위를 살피는 가싶더니 앞장선 두 명이 거침없이 집안으로 들어가 불이 켜져 있는 아래 사랑채의 방문을 열고 얼굴을 들이 밀더니 놀라지 말라는 듯 웃어 보였다.

밤마다 동네의 총각들과 머슴들이 모여서 노는 방안에는 7,8명의 청년들이 앉고 눕고 벽을 기대 이야기꽃을 피우다 말고, 놀라 긴장을 하면서 눈치를 살폈다. 그러자 걱정들 말라며 짐을 좀 지고 가자고 하였다. 그 말은 그들이 보급투쟁으로 거둔 식량과 물품을 용계산으로 지고 가자는 말이다.

용계산

사실 그날 작전의 길잡이를 한 사람은 이 마을에서 입산하여 훗날 행방불명이 되어버린 이용우지만 앞으로 나서지는 않았다. 그렇게 그날 산으로 짐을 지고 간 사람들 중에는 덕용이와 영석이 그리고 또 한 사람만 내려왔다.

그때는 용계산에 반란군들이 들어오고부터 흥대에서 입산한 사람들이 있어 동네사정을 훤히 알았고, 반란군과 토벌대가 대치를 하여 밤과 낮으로 주인이 바뀌던 때에 경찰들은 오히려 좌익 검거네 관련자 색출이네 하여 혹독하게 대하였으나, 반란군들은 마을사람들을 자기 편에 두어야 했으므로 잘 대해주니 겉으로는 반란군이라고 욕을 하여도 속으로는 은근히 좋아하는 마음을 가지던 때였다.

 

공덕용과 영석이 반란군들의 밤짐을 지고 갔다 온지 며칠이 지나지 않아 토벌군이 구상흥대의 집들을 불태우고 많은 사람들을 총살하는 참사가 벌어졌다.

총살을 당한 준모소년의 부모가 큰집의 장남인 덕용이의 친아버지고 당숙모 아들이 공석영이다. 준모의 큰형이 큰아버지에게 양자로 가게 된 사연이다.

“흥대 공 씨 집안의 8형제 중의 둘째인 준모의 부친은 슬하에 덕용 덕성 덕모 삼형제와 딸들을 둔 가장이었다. 그러나 큰집인 형님에게는 대를 이을 아들이 없었다.

행여나 하고 기다렸으나 나이가 들도록 생기지 않자 진모아버지는 장남인 형의 대를 잇게 하기 위해 다 자란 준모의 큰형을 양자로 주어 큰집의 장남으로 바뀌어 살게 된 것이다.“

그렇게 집이 불타고 부모가 총살을 당해버리자 공덕용과 영석은 반감에 저항의 생활이 시작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사랑방에서 머슴들과 모여서 놀아 늘 주시를 밭던 터에 완전히 감시대상자가 되자 집을 떠나 산으로 들어 가버렸다. 그러자 두 사람은 반란군이 되어 버린 것이다.

해가 바뀌고 6.25가 터진 1950년이 되었다.

지난 겨울부터 봄까지는 봉기군토벌과 관련자 색출이 본격적으로 전개되고 초여름이 되자 대대적인 자수 권유를 하기 시작하였다.

그러자 덕용이와 영석이는 입산을 한지 6개월여 만인 5월 초 산에서 내려와 동네에 있다가 붙잡힐 처지에 놓이자 자수를 하였다. 정확하게 말하면 유지들에 의해 자수자가 되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시기는 자수한 사람도 많고 붙잡혀간 사람도 많을 때였다.

그렇게 자수자가 된 두 사람은 그날로 일단 서면지서에 구금이 되었다.

아래는 당시 열두 살이던 준모소년이 팔순을 목전에 둔 노인이 되어 들려주는 회고다.

 

『-그러다가 6.25가 터져 북한군이 밀고 내려오니까 가둬 놓은 사람들을 학구삼거리, 지금 자동차학원이 있는 산비탈로 데리고 가서 형님이랑 모두 쏴 죽여 버렸다고 연락이 왔어. 보도연맹 자들을 처단한다고…

그때가 음력으로 오월 말이었지 싶은데 작은아버지들이랑 동네사람들 여럿이 갔는데 나도 따라 갔지.

우리가 며칠 만에 갔는지는 잘 모르겠고, 거기 가서보니 시체들이 산비탈에 늘비하게 쌓였는데 여름이라 썩어 있어서 손도 못 대겠고 누가 누군지도 알아 볼 수가 없어.

그러니까 옷만 보고 이 사람이 맞다, 아니다 그러면서 찾은 사람들은 찾고.

형님도 그렇게 찾아서 그 자리에다 그냥 파묻어 주고 왔지.

그런데 우리당숙모 아들(공영석)도 거기서 죽었다는데 시체를 못 찾았어.

죽을 때 형님나이가 열아홉 살이었는데 우리부모는 아들 났다고 좋아라만하고 양자로 줘버렸는데 정말로 잘못된 것이지……』

 

“정말로 잘못된 것이지!”

부드럽게만 들리는 이 한마디는 세월에 분노와 원망마저도 삭혀버린 채찍이었다.

 

끝.

 

<본문은 주인공이라 할 수 있는 공준모 본인의 생전감회와 마을 노인들의 증언을 수차례 청취하여 정리한 것이다.>

 

 

김배선  ㅓ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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