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12.12 수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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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만에 공개된 여순항쟁 "주동자를 네번이나 조작"
1948년 10월 19일 그로부터 70년 여순항쟁 기록전...신기동 노마드갤러리에서 27일까지 전시
  • 2018.09.30 18:48
여순전문가 주철희 박사는 여순을 역사로 보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념적 대결이나 좌우익의 대립적 갈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굉장히 많아 기록전을 통해 시민들이 여순항쟁을 바로 알았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화해와 상생은 아픈 사람들을 치유해줘야 되는 겁니다. 여수시가 가해자인 죽인 놈들에게는 한마디 말도 못하면서 죽임을 당한 유족들에게 화해하라고 종용하고 있습니다. 그건 폭력이고 미친 짓 아닌가요.  시장부터 국가가 저지른 짓에 대해 사과하라고 한 후에 유족들에게 상생하자 해야지 아무것도 안하고 있으면서 이게 무슨 짓입니까?"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주철희 박사는 유족들에게 '화해와 상생'을 요구하는 여수시를 향해 이렇게 일갈했다. 그는 이제는 시장이 나서야 될 때고 대통령이 나서서 여순항쟁에 대해 사과할 것을 강하게 촉구했다.

여순항쟁 기록전 연 주철희 박사... 여순 전시관 갖춰야 

여순항쟁 기록전이 열리고 있는 신기동 노마드갤러리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29일 오후 전남 여수 신기동 노마드갤러리에서 특별한 전시전이 펼쳐지고 있다. 여수지역신문협의회가 주관한 이번 행사는 다음달 27일까지다. 여순사건 전문가 주철희 박사가 수십 년간 연구한 자료 중 일부를 최초로 공개했다는 점에서 주목을 끌고 있다.

여순항쟁의 큰 특징 중 하나가 여순과 관련된 사진이 굉장히 많다는 점이다. 약  150여점의 사진이 있다. 이번 기록전은 전시관이 아닌 갤러리다 보니 저작권 문제로 지역의 작가들이 일부 사진들은 그림으로 표현했다.

48년 14연대가 창설된후 6월 제1기 하사관 후보생들이 훈련을 마치고 수료식에서 찍은 기념 사진

특히 전남동부에서 불붙기 시작한 '여순사건 진실규명 및 명예회복을 위한 특별법 제정'에 대해 주박사는 올곧은 제정을 촉구해 눈길을 끌었다.  

이날 바람직한 특별법 제정을 묻는 청중의 질문에 주 박사는 "현재 순천을 비롯해 특별법 서명운동을 하고 있지만 특별법을 만들 때 우리 지역사회가 합의된 특별법 안이 있어야 한다"면서 "이용주 의원이 최근 대표발의한 특별법은 정인화 의원의 특별법에 비해 100배 후퇴한 아주 악질적인 특별법이다고 본다"며 작심 발언을 쏟아냈다.

그 이유에 대해 ”특별법 내용을 자세히 보면 여순사건의 성격을 '반란'이라 써놨는데 그러면 법제처에서 절대 통과할 수 없다“면서 "특히 정인화 의원이나 이용주 의원의 특별법에는 배보상문제가 있는데 그러면 통과하지 못할 가능성이 크다“면서 ”진실화해위원회법에는 배보상 문제가 없었지만 국가로부터 진실규명을 받으니까 소송제기해서 다 받은 전례가 있다. 배보상 문제는 미리서 특별법에 굳이 포함시키지 않아도 된다"라고 지적했다. (관련기사 : 이용주의원,여순사건특별법 새법안 대표발의) 

그는 이용주 의원이 최근 대표발의한 특별법에서 '반란'으로 규정한 부분은 수정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왜 여순항쟁인가를 설명중인 주철희 박사의 모습

'여순사건'이냐 '여순항쟁'이냐를 놓고 정명에 대한 논란에 대해 그는 "여순사건으로 표기했지만 제14연대 국군의 제주도 출병거부 행위는 반란으로 간주한다"고 지적한 뒤 "항쟁은 역사용어다"면서 "지배 권력자의 부당함에 맞서 집단적 대중적 실천행위로 이루어진 역사로는 동학농민운동, 제주4.3항쟁, 광주민중항쟁, 프랑스혁명 등이 포함된다"라며 여순항쟁으로 불러야함을 강조했다.

여순항쟁 시대적 상황을 설명중인 주철희 박사의 모습

1948년 10월 19일 그로부터 70년 여순항쟁 기록전에는 ▲ 여순항쟁 시대상황 연표 ▲ 여순항쟁 발발 ▲ 국군 제14연대 ▲ 여순항쟁용어(명칭)의 역사적 개념 ▲ 여순항쟁은 왜? ▲ 항쟁의 나팔소리 ▲ 제14연대 봉기의 주도인물 변화 ▲ 인민위원회 ▲ 토벌작전 ▲ 문인조사반 활동 ▲ 여순항쟁을 기록하다 ▲ 여순항쟁과 문화예술 ▲ 여순항쟁과 빨치산 ▲ 민간인 학살에 대한 여순항쟁의 역사를 한눈에 볼 수 있도록 전시됐다. 그가 지금껏 여순항쟁을 연구한 이유가 뭘까?

“우리 지역 사람들이 많이 죽었다고 연구한 것이 아닙니다. 여순항쟁의 핵심은 지금까지 반공주의, 국가주의, 군사주의가 여순으로 인해 탄생되고 권력자들이 이용해 먹었죠. 그 문화가 지금까지 우리에게 뿌리박혀서 군인들은 무조건 명령을 따라야 한다고 하는데 정당한 명령을 따라야 합니다. 

반공주의에 살다보니 무조건 명령에 따라야 하는 사고에 이승만과 박정희가 철저하게 악용한 겁니다. 부당하면 안병하처럼 거부해야합니다. 그래야 민주시대에서 통일시대로 접어드는 거죠."

주 박사는 ”2차 세계대전이 일어난지 73년이 지났지만 지금도 독일총리는 폴란드에 가면 아우슈비츠를 찾아가 무릎을 꿇고 사죄를 한다“면서 ”73년이 지났는데도 독일은 폴란드에 가서 73년 동안 사죄를 하고 있다“라며 ”70년 동안 반란으로 몰았던 여순항쟁에 대해 이제는 대통령이 나서 사죄하라”고 촉구했다.

 

부당한 탄압과 억압에 저항했던 여순항쟁

여순항쟁 전문가 주철희 박사가 여순항쟁은 왜 일어났는지를 설명 중인 모습

이번 여순항쟁 전시전을 가진 이유에 대해 주박사는 “여.순은 역사다. 고등학교 교과서에 역사로 기록되어 있다”면서 “그런데 여순을 역사로 보지 않고 계속적으로 이념적 대결이나 좌우익의 대립적 갈등으로 보는 견해들이 굉장히 많다. 기록전을 통해 시민들이 여순항쟁을 바로 알았으면 좋겠다”라고 덧붙였다.

 

전라도 천년 역사의 진정한 가치는 무엇보다 '저항'이다

그러면서 “올해는 대한민국 정부수립 70년인 동시에 여순발발 70년의 해지만 특히 전라도라는 명칭을 갖게 된 천년이 되는 해인데 전라도 천년 역사는 저항이다"면서 "저항은 대한민국의 민주주의를 만들었다고 생각한다. 여순항쟁도 군인들 얘기만 하는데 이 지역 민중들이 부당한 억압과 탄압에 저항했다”라고 정의했다.

여순토벌군의 작전 계획 지도

1층과 지하에 전시된 자료들은 지금껏 왜곡되어 알려지지 않았던 많은 여순항쟁의 사료들이 논리있게 전시됐다.

여순발발의 직접적인 계기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제주도를 토벌하겠다는 초토화 작전에서 시작된다. 당시 제주 4.3항쟁의 도화선이 되었던 10월 제주도 경비사령부를 설치하면서 여수에 주둔한 14연대 군인들이 왜 제주도 출병을 거부했는지 객관적인 자료들이 눈에 띈다. 제주도 출동거부 병사위원회가 발표한 '애국인민에게 고함'이라는 성명서는 당시 14연대 군인들이 붓으로 써서 거리에 부착한 총궐기 원문에 '인민'이라는 단어가 등장한다.

이에 대해 주 박사는 “현재 우리는 '인민'이라는 단어를 쓰면 뭔가 거북스럽다”면서 “인민을 쓰면 북한하고 결합하려고 하는데 당시 이승만이 발표한 포고문에도 '인민'을 쓸 정도로 자연스런 단어였다”라고 말했다.

9일간의 기록에는 비상회의 소집부터 미군들이 여순토벌을 주도한 여순발발 10월 19일부터 마지막 진압되었던 27일까지 기록이 상세히 나열되었다.

참석자들이 여순발발 10월 19일부터 마지막 진압되었던 27일까지 9일간의 기록에 대한 설명을 듣고 있다

여순항쟁 당시 국방부 측은 2차 전투로 보고 있지만 지역에서는 5차 전투가 일어났다. 10월 23일 쫑포해상으로 상륙하려고 들어오는데 여수시민들이 허수아비를 세워 막아낸 전투가 1차 전투다. 2차 전투가 잉구부 전투다. 3차, 4차 전투가 해상으로 상륙을 시도한다. 마지막 5차 전투가 27일 일어난 여순토벌 작전지도가 공개됐다. 자료에는 그동안 남로당의 지령이 아닌 여수를 지키려는 시민들의 자발적인 참여가 돋보인다.

동족상잔의 살육을 거부했던 14연대는 어떤 부대였을까? 이 부대는 48년 5월 4일 창설되어 후보생을 뽑았다. 첫 번째 교육을 마치고 6월 14일에 찍은 ‘14연대 제1기 하사관 후보생 기념’이라고 쓰인 최초 공개된 사진에는 주동인물 김지회의 모습도 보인다.  처음 공개되는 이 사진에 대해 주 박사는 해당사진을 당시 훈련에 참가했던 하사관 후보생에게 직접 받았다고 말했다.

주동자를 네번이나 조작한 14연대 봉기 왜?

주동자가 네 번이나 바뀐 여순항쟁 14연대 봉기의 주동인물

14연대 봉기의 주동인물이 네 번이나 바뀐 사료도 공개됐다. 한눈에 봐도 조작임을 알 수 있는 자료다. 이는 이승만이 정치적 정적인 김구를 제거할 목적으로 처음 오동기를 반란의 주동자로 몰았다. 이후 느닷없이 여수중학교 송욱 교장이 반란을 일으켰다고 바뀐다. 주박사는 "군의 반란이 민간인 반란으로 바뀌는데 그 총지휘자를 송욱으로 몰았던 웃지못할 서글픈 과거였다"라고 말했다.

사실 14연대 봉기의 주모는 김지회 중위였다. 국군은 그를 잡으려고 현상금을 내걸었다. 그런데 또다시 여순발발 19년 만에 반란의 주모자가 김지회에서 지창수로 바뀐다. 왜였을까? 남로당의 지령을 받았다고 엮기 위한 인물이 바로 지창수였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주 박사는 "국가는 지금껏 여순항쟁이 남로당의 지령을 받은 반란이고 빨갱이라고 조작했는데 국가주의의 프레임 속에 우리는 이를 그대로 믿고 사실로 인식해 왔다”라고 주장했다.

여순항쟁 당시 기독교인들을 많이 죽였다는 왜곡된 자료들도 꼼꼼히 제시됐다. 손양원 목사의 사랑의 원자탄은 당시 희곡을 바탕으로 썼다고 기록됐다. 중학생이 쓴 순천역의 위치를 그린 약도도 전시했다. 1949년 제작된 영화 <성벽을 뚫고>는 칸 영화제 출품작으로 선정된 최초영화이며, 그 외에도 여순항쟁을 그린 영화가 꽤 많은 것으로 알려졌다. 이런 영화는 반공문화의 첨병역할을 했다.

특히 여순과 관련된 형제라는 소설은 김동리가 썼는데 당시의 문화예술인들이 권력에 집착해 권력자의 입맛대로 썼다고 비판했다. 여순항쟁과 관련된 광풍 속에서 악랄하게 표현한 <절망 뒤에 오는 것>은 한국 최초의 장편소설로 1960년 민주정부가 들어서면서 한국일보에 게재됐다. 

 

그는 곡학아세한 문학인들을 비판하기도 했다.

 "모든 문화예술작품이 관이 개입되어 여순항쟁을 부정적으로 묘사한 반면, 음악은 유일하게 이 지역의 아픔을 그대로 노래했다.  대표적으로 최초 금지곡이 된 '여수야화'가 있다. 문화예술작품에 관이 개입되다 보니 여순항쟁을 '빨갱이', '반란'으로 몰아가는 반공주의와 국가주의에 맞게금 표현했다“

청와대 앞 1인시위를 두달째 이어가고 있는 여순항쟁 피해자인 장경자(74세)씨가 대통령의 사과를 촉구하는 모습

이날 여순항쟁 피해자인 장경자(74세)씨가 참석했다. 그는 여순항쟁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청와대 앞에서 8월 15일부터 지금껏 1인 시위를 펼치고 있다. 철도 역무원이었던 그의 부친과 철도원 16명은 명령3호에 따라 한 달 만에 순천이수중학교로 근처로 끌려가 총살당했다.

장씨는 ”제주4.3처럼 70년이 지나도록 여순사건은 대통령이 왜 사죄하지 못하냐“면서 ”70주년을 맞아 19일 열리는 여수위령제는 유가족으로서 인정하지 못한다. 대통령으로서 당연히 사죄해야 역사가 바뀐다“라며 ”우리가 원하는 것은 돌아가신 아버지가 빨갱이 딱지를 떼어 명예를 회복하는 거다“라고 눈물을 글썽였다.

행사에 참가한 여수시의회 민덕희 의원은 “여순항쟁 조례제정에 여수시의회가 6대와 다르게 7대는 모두가 다 동의해 통과되었다”면서 “시의회가 여순특위를 준비 중인데 의원들이 전문가라고 할 수 없기에 주철희 박사님처럼 이 분야 전문가 의견을 반영해서 제대로 된 특위를 구성해서 활동하고 싶다”는 바람을 전했다.

심명남  mnshim2424@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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