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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흐른 여순사건 왜 항쟁으로 못부르나

여순항쟁 70주년 '사진과 함께한 뮤직토크' 성황리 마쳐 ....여순10.19 특별법제정 서명운동 동참 촉구

  • 입력 2018.10.20 15:53
  • 수정 2018.10.27 22:14
  • 기자명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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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직토크에 방송인 출신이자 전 여수시의회 김유화 의원이 사회로 주철희 박사와 여순항쟁 토크를 진행중인 모습

”요즘 여순항쟁에 화해와 상생이 등장했다. 그렇게 처참하게 죽은 가족들을 국가가 한번이라고 사과한 적이 있나? 그 가족들을 여수시장이나 전라남도지사가 한번이라도 보듬어 준적이 있나? 죽인 이는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데 죽임을 당한 사람들에게 용서해달라고 한다. 그 아픔을 당하고 70년을 살아왔는데....응어리진 마음들을 풀어주지 않고 이제 70년 되었으니 화해와 상생하자는 건 어불성설이라고 본다.”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은 토크쇼에서 주철희 박사가 한 말이다. 이 말을 들은 청중들에게서 우레와 같은 박수가 터졌다.

역사의 가치는 사람이 만든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여수넷통뉴스> 엄길수 대표와 임원들의 모습

여순항쟁 70주년 맞아 지난 19일 오후 전남 여수 예울마루 7층 전시실에서 '사진과 함께한 뮤직토크'가 열렸다.

 <여수넷통뉴스>와 <여수뉴스타임즈>가 공동으로 주최한 뮤직토크는 GS칼텍스예울마루, 여순항쟁70주년기념사업위원회, 여수정치개혁시민행동, 대한성공회 여수교회, 동부매일, 여수신문, 노마드갤러리, 문화공동체 ‘컬쳐큐브’가 후원했다.  GS칼텍스도 협찬사로 후원했다.

이번 행사를 주최한 <여수넷통뉴스> 엄길수 대표는 ”역사의 가치는 사람이 만든다“면서 ”올해 70주년을 맞이한 ‘제주4.3항쟁’에서 문재인 정부가 희생자들의 위령제와 대규모 문화행사를 개최해 국민들의 관심과 주목을 받으며 대통령의 4.3추념사는 큰 감동을 안겼다“라며 ”이제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아 여수지역사회에서도 제대로 할 일을 찾았으면 한다“고 지역민의 관심과 참여를 호소했다. 

이는 지역에서 펼쳐진 여순10.19 특별법제정 서명운동 동참 촉구를 염두에 둔 발언으로 읽힌다.

<여수뉴스타임즈> 김경만 대표는 ”그동안 여순항쟁 행사는 유가족들의 입장을 대변하지 못하고 여수시가 특정단체를 의식한 관 주도 행사를 하다 보니 시민의 관심이 적었다“면서 ”이젠 시민의 힘으로 여순항쟁 70주년을 맞이해 여순항쟁의 진실규명과 명예회복의 디딤돌을 마련하자“라고 덧붙였다.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와  호남신문 이경모가 담은 '그날의 참상'

예울마루 행사장에서 지난 12일부터 오는 12월 16일까지 ‘가장 위대한 기록 <라이프>사진전’이 열리고 있다
여순항쟁 당시 국군이 투입된 가운데 불타고 있는 여수시내 모습. 당시 여수시내의 1/3이 불탔다.
여순항쟁 당시 미군이 기관총을 든 가운데 좌익색출을 위해 운동장에 모여있는 여수시민의 모습

지역의 다양한 문화행사를 주도해온 GS칼텍스 예울마루는 지난 12일부터 오는 12월 16일까지 ‘가장 위대한 사진 기록 <라이프>사진전’을 열고 있다. 라이프 사진전은 보도사진 분야에서 선구적인 역할을 해오면서 국제 사건에 대한 사진을 비중 있게 다뤘다는 평을 얻고 있다.

특히 이번 라이프 사진전에는 우리 현대사의 가장 큰 아픔을 가지고 있는 여순항쟁 당시의 모습을 현장에서 생생히 담아낸 종군기자 칼 마이던스의 작품과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 지평을 연 광양출신 이경모 씨가 직접 찍은 여순사건 사진 특별 전시코너가 마련됐다. 

역사학자 주철희 박사는 특별전에 전시된 사진해설과 함께 당시 일어난 일들을 생생히 들려줬다. 이날 제주4.3유족회 회원 40여 명의 참가해 눈길을 끌었다. 이들은 여순항쟁의 도화선이 된 제주4.3항쟁으로 인해 그동안 고통 받았던 여수지역 유족들의 아픔을 함께 나눴다. 여순사건 특별법제정을 위한 서명운동도 이어졌다.

행사장에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위한 서명을 받는 모습

2부행사인 뮤직토크에는 방송인 출신이자 전 여수시의회 김유화 의원이 사회를 맡아 주철희 박사와 여순항쟁 토크를 이어갔다. 

이날 노래 공연에는 상록수밴드를 비롯 여수문화방송에서 방영된 여순사건 70주기 특집 '그 아픔과 선율'에서 ‘여수블루스’, ‘여수야화’를 부르면서 알려진 서혁신씨와 빨치산 노래전문 밴드인 산오락회가 초청되어 분위기를 한층 돋웠다. 

여순사건 당시 불러졌던 여수블르스, 여수야화, 산동애가에 얽힌 사연은 가슴을 먹먹케 했다.

노래로 승화된 그날의 아픔, 여순항쟁! 

빨치산 노래전문 밴드인 산오락회가 산동애가와 부용산을 부르며 분위기를 한층 돋웠다

‘여수블루스’는 여수경찰 강석우가 만든 노래를 시민들이 술집에서 부르면서 지금까지 전해진 노래다. 기록을 보면 반란군과 지방좌익들이 경찰을 죽이고 모든 지서를 불태워 버렸다고 하는데, 이는 사실과 다르다. 이 노래를 작곡한 경찰 강석우는 국군에 의해 초토화된 여수의 아픔을 노래했다.

반면 ‘여수야화’는 공식음반으로 출품된 노래다. 1949년 7월에 남인수가 불렀고 목포의 눈물을 작곡한 이난영의 오빠인 이봉용이 노래를 작곡했다. 

여수야화는 이승만 정부가 음반출시 두 달 만에 금지한 대한민국 최초의 금지곡이다. 또 산동애가는 구례 산수유마을에 19살 먹은 처자에게 세 명의 오빠가 있었다. 큰오빠는 일제감정기때 징용으로 끌려가 죽고, 둘째 오빠는 10월 말에 국군에 의해 총살을 당하고 셋째 오빠마저 또 국군에 의해 죽게 된다. 

기구한 인생살이에 어머니가 딸을 잡고 셋째 오빠마저 죽으면 대가 끊긴다고 하니 막내딸인 백순례가 자기 오빠를 대신해 죽으로 간다. 당시 여순사건 때 흔했던 ‘대살’(대신해서 죽음)이 벌어지는데 산동애가는 셋째 오빠를 구하면서 불렀던 심청이가 아버지의 눈을 뜨게 하기 위해 인당수에 팔려 가는 모습을 떠올리게 하는 구슬픈 노래다.

왜 여순항쟁인가?

여순사건이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주둔 국군 제14연대가 제주도 출동 거부를 기점으로 1955년 1월 23일까지 무력충돌과 진압과정에서 많은 민간인이 희생당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4.3사건 투입을 앞둔 14연대는 동족상잔 절대 반대와 미군 즉시 철퇴를 주장하며 출병을 거부했다. 무력 충돌이 일어났고 군인들은 정부군에 진압됐다.

여수 신월동에 주둔한 14연대가 제주도 파병명령을 거부하며 제주도에서 벌어지고 있는 모든 문제의 근원은 바로 미군에 의해 내려지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했지 통일정부 주장은 현재까지 14연대 기록에서 찾아볼 수 없다.

한 관람객이 여순항쟁 9일간의 기록을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다

당시 10월 19일 8시경에 봉기에 나선 14연대가 여수시내로 나온 시간은 새벽 1시경이다. 이후 6시 반에 순천으로 북상한다. 이 과정에서 경찰과 총격전이 벌어졌다. 

여순사건 전문가 주철희 박사는 ”당시 14연대 군인들이 여수, 순천, 광양을 점령했다는 것은 다 거짓이다“면서 ”14연대 군인들의 목표지는 딱 한곳, 지리산이었다“라며 ”제주에서 4월 3일 무장봉기가 일어나고 산으로 들어갔듯 부당한 명령을 어기고 남아있으면 죽음을 당하기 때문에 지리산으로 향하면서 이를 토벌하려는 국군과 교전이 일어난 지배 권력자의 부당함에 맞서 싸운 동학과 같은 궤를 이룬다“라고 주장했다.

'남로당 지령' 반란으로 조작한 박정희 왜?

여순항쟁 당시 군인들에게 좌익으로 색출된 시민들 모습
붙잡힌 군인들의 모습

주 박사는 ”특히 14연대 반란의 주모자로 모든 기록에 지창수가 여순항쟁을 총지휘했다고 기록되었으나 이건 사실이 아니다“면서 ”여순항쟁 총지휘자는 김지회 중위“라고 말했다. 

그는 ”지창수가 왜 14연대의 반란의 주모자로 등장하냐면 정부는 끊임없이 남로당지령에 의해 여수지역 지방좌익과 결합되어 반란을 일으켰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정설을 만들어 냈다“면서 ”그러려면 중대장이 이곳 출신이어야 하는데 김지회는 함경남도 함흥출신이다. 지창수를 반란의 주모자로 몰아 남로당의 지령에 의한 반란으로 공고화시키기 위한 박정희 짓이었다“라고 주장했다.

라이프 사진전 관람하는 시민들의 모습

청중들의 질문도 이어졌다. 경찰가족이나 군인가족들 입장에서 보면 '반란'이 맞다는 주장인 반면 시민단체는 '항쟁'이라고 충돌하고 있어 감성적으로 해결되지 않는데 어떻게 해야 그들의 입장에서도 여순항쟁으로 받아들여야 하냐는 물음에 주철희 박사는 이렇게 답했다.

”약 10%정도가 빨치산이나 좌익에 의해 희생된 부분은 인정합니다. 근데 이분들의 아픔까지 달래기는 쉽지 않습니다. 근현대사에서 가장 많은 학살이 이뤄진 것은 6.25전쟁이지만 6.25전쟁보다 더 많은 학살이 이 일어난 건 바로 ‘동학’입니다. 우린 전봉준을 중심으로 부패한 지배 권력자에게 맞섰다고 알고 있는데 동학농민운동이 우금치에서 퇴패한 그 다음날부터 모든 지역에서 동학에 가담했던 자들을 색출하기 시작해 어마어마한 처형이 이뤄졌습니다.

그래서 지리산, 백운산 주변 모든 산골마을 50%이상은 1894년 동학을 피해서 온 사람들입니다. 동학농민에 가담했다면 전부 즉결 처분해 버렸기 때문이죠. 지금도 우리는 동학의 배경을 통해 농민회라는 성격을 규정하고 있지 않습니까? 제가 주장하는 것은 동서고금의 모든 역사에서 지배 권력의 부당함에 맞서 싸우는 것은 반드시 폭력을 수반할 수밖에 없다는 겁니다.

여순항쟁 당시의 모습을 현장에서 생생히 담아낸 종군기자 칼마이던스의 작품과 한국 다큐멘터리 사진의 새 지평을 연 광양출신 호남신문 이경모 기자가 직접 찍은 사진을 설명하는 주철희 박사 모습

영화 <암살>에 나온 김원봉이 신채호 선생을 찾아가 조선혁명선언서를 써달라고 했는데 마지막에 ‘민중은 우리혁명(독립)의 대번영이다. 폭력은 우리혁명의 유일한 무기다‘라고 썼죠. 부당한 지배 권력에 맞서 싸우려면 할 수 없이 폭력이 수반됩니다. 프랑스 혁명의 발발도 정치인을 가두고 있었던 바스티유감옥을 침공해 많은 사람들이 죽었습니다. 6월 항쟁도 강목과 짱돌을 들었습니다. 이런 모순을 잘 알고 있듯 14연대 봉기로 우리 지역 우익도 죽고 병사도 죽은 건 어떻게 설명할 수 없습니다.

결론은 우리가 경찰과 군경이 피해가 있었는데 이들을 가해자라고 지목하지 않습니다. 그분들은 어쩔 수 없이 국가의 명령에 따를 수밖에 없었죠. 여수에 있는 보훈단체분들은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걸로 생각하고 있는데 그들에게 책임을 묻는 것이 아니고 국가를 향해 가해자라고 말하는 것이지 이분들에게 가해자라고 말하지 않습니다.

여순항쟁의 가장 중요한 것은 특별법 제정도 있겠지만 여순사건을 올곧게 기억할 수 있는 그러한 장들을 마련해야 합니다. 우리부터 <반란>이라며 인식을 잘못하고 있는데 아이들에게 '항쟁'이라고 부르라고 요구하는 건 어불성설이기 때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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