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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강점기 말에 사라진 대첩비, 그리고 ‘복구’

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 ④

  • 입력 2019.02.25 14:44
  • 수정 2019.02.27 05:21
  • 기자명 오병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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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 말 헐리기전의 충무동 비각 사진.  <사진으로본 여수발전사>에 실린 사진으로 촬영한 연도 표시가 되어있지 않았다.  1931년 당시 신문에 동일 사진이 게재되기도 했다.
일제강점기의  이순신비각 사진.  '복부서점(도쿄의 히쯔도리서점) 발행' 이라고 적힌 관광 엽서 형태의 사진이다.   수원광교박물관 소장

지금은 여수시 고소대에 자리한 충무공비각은 원래 충무동에 자리하고 있었다. 건립당시 비각 터 행정지명은 동령현이었다. 동령현은 사라지고 지금은 인근의 도로명 ‘동령현길’로만 남아있다.

대첩비 기준으로 322년간 처음 건립시부터 세워져 있던 것인데, 일제강점기 1942년에 충무동의 비각이 헐리고 대첩비와 부속비들이 반출되었다.

민족정신을 말살하려는 일제강점기 막바지에 일본인 여수경찰서장 마쓰키(松木)는 그들의 입장에서 보기에 가장 눈에 거슬리는 비각과 ‘대첩비’ 일체를 철거해 버렸다.

충무동의  옛 비각터는 가옥이 들어섰다. 도로명 주소로 옛 동령현이 남아있고  옛 비각터 였던 가옥의  주소 팻말

일제강점기 말 전국적인 동시다발로 반출을 진행한 걸로 보여 일개 경찰서장의 단독 결정이 아닌 총독부의 지시에 의한 것으로 추정된다.

여수에 남겨진 일제 잔재 탐사보고서인 『일제 강점기, 여수를 말한다』의 저자 주철희 박사도 민족정기 말살 프로젝트로 곳곳의 문화재 반출이 진행되었다고 말한다.

“일제의 민족정기 말살은 여수에서만 있었던 것이 아니다. 전라우수영에 있던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를 비롯하여 아산 이순신신도비, 고양 행주전승비, 진주 촉석정 충단비 등 20기의 비석이 똑같은 방법으로 훼손되었다. 이 비석들은 대부분 임진왜란 당시의 전적비이다”

여수시문화원 DB <사진으로본 여수발전사> 1934년 비각이 없는 모습의 대첩비. 사진제공 여수시문화원

주 박사는 “일본은 자신들이 침략했다는 역사를 감추려는 의도에서 훼손했다기 보다는 임란에서 승리 못한 분풀이로 충무공비를 훼손한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더 일찍 조선을 강탈할 수 있었다고 아쉬워한 것이다. 7년 전쟁을 치르면서도 이순신 장군으로 인하여 강탈하지 못한 앙갚음에 훼손하였다고 보는 것이 더 타당하지 않을까 한다”

대첩비는 400여년 전에 여수와 인연을 맺은 관리들과 당시 명사들이 힘을 합해 건립한 기념비다. 멀리 황해도에서 원석을 구해 여수까지 어렵게 옮겨와 충무공을 영원히 기리고자 조성한 상징물인데 일제는 그 뿌리를 뽑아 버렸다.

임난 7년 전쟁으로 피폐해진 전라좌수영과 인근은 전후 복구라는 어려움 속에서도 지역민들의 자원봉사와 기부로 어렵게 조성한 석조물인데 뽑아버리고, 비각 또한 헐어버린 것이다.

비각은 현장에서 허물어졌지만 돌은 어디로 갔는지 그 행방이 묘연했다.

해방후 경복궁 근정전에서 이를 발견하고 여수로 다시 ‘복구’가 추진된다. 경복궁 근정전은 1940년대 박물관으로 사용했었다. 발견한 때가 혼란스런 해방 직후 1946년이다. 미군정은 체계적으로 문화재라며 챙길 여력이 없는 상황이었다.

근정전에서 이를 발견하고 확인한 이는 여수의 김수평(메이지대 졸. 해방후 미군정에 의해 여수경찰서장에 임명), 김중태(1920~1990. 도쿄대 정치학과 졸. 조일산업 사장, 8대 국회의원)다.

1947년 서울서 찾아온 대첩비를 미군용 트럭에서 내리고 있는 장면. 주철희 저 『일제 강점기, 여수를 말한다』 에서

발견한 이듬해인 1947년 여수 시민들은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를 조직해서 서울서부터 대첩비를 옮겨와 세우고 비각 짓는 일을 추진하게 된다.

우리를 강점한 일제는 이충무공의 정신과 혼을 헐어버리려 했지만, 이제 그 상징물을 찾았으니 여수시민들은 그 혼을 바로 세워야 했다.

400여년전 황해도에서 집채만한 저 돌을 얼마나 힘들게 여수까지 옮겨왔던가? 누가 돌을 쪼고, 누가 공사에 참여한 인부들이었으며, 누가 그들에게 침식을 제공했던가? 여수의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는 그 답을 들려주고자 했다.

당대 여수의 대 역사였고 시대정신을 상징하는 기념비와 건축물인데 일제 강점기에 무너지고 뽑혔다가 해방되어 되찾아와 이를 다시 복구하는 일인데 뒷짐만 지고 있을 수가 없었다.

훼손당한 5년 전의 일을 상기하며 대첩비 복구를 시민운동으로 전개한 것이다. 지역민들의 협동과 기부 정신을 다시 살렸다. 나라를 지키고 싸워온 ‘독립’의 정신이 허물어지지 않았다고 외쳤다. 공동체를 화목하게 유지하려는 ‘평화’의 정신이 뽑히지 않았다고 선언했다.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 등장으로 허물어진 비각의 재건과 뽑힌 대첩비의 복구를 통해 여수시민들은 ‘독립’정신과 ‘평화’의 정신을 일깨웠던 것이다.

여수시민들이 조직한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는 그러나 하루 아침에 이뤄진 게 아니다.

동아일보 1931년 6월 2일자. 이광수의 '충무공 유적순례'기       ⓒ 동아일보

1931년 동아일보 6월 2일자 이광수의 ‘충무공유적순례(7)’ 기고문을 보자. 그는 5월 25일에 여수에 들렀던 여행기를 신문에 기고한다. 거기엔 300년 전통의 여수‘비각계’ 기록이 있다.

“충무공 비각은 옛날 좌수영서문 밖 지금은 여수시가의 서단에 잇습니다. 서남향의 정문과 동쪽으로 협문이 잇고 그 문을 들어가면 비각이 있는데.... (중략) 

서원철폐로 충민사가 훼철된 뒤로는 이 비각이 이 지방의 주되는 충무공 기념물이 되었습니다. 비석은 황해도에서 수로로 실어온 것이라 하며, 이 지방 인사들로 조직된 비각계라는 계가 있어서 3백년 일관하게 연 2차 춘추로 이 비에 제향을 지냅니다”

300년 역사를 지닌 여수의 ‘비각계’ 전통이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로 연결된 것이다.

여수시민들은 해방후 혼란기에 비석과 비각을 다시 복구하는 일을 해냈다. 그리고 복구 장소로 일제강점기에 황국신민의 예를 강요한 신사가 자리했던 고소대를 택해 오늘에 이르고 있다.

1957년 발간한 <여수시지> 부록의 사진. 대첩비를 고소동으로 옮긴 후 초창기 대첩비각의 모습.  출입문이 비각과 가깝다.

 

현재 고소대의 충무공대첩비각 모습.  초창기 보다는 비각 정원이 넒어졌다.
편집자 소개글

올해 3.1운동 100주년을 맞아 많은 행사들이 줄을 잇고 있습니다. 3.1운동의 근본정신은 ‘독립’과 ‘평화’입니다. 그리고 3.1운동의 근본정신을 일깨워줄 여수의 상징물로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떠올려 봅니다.

본지는 ‘3·1운동 100주년’을 맞으면서 충무공대첩비에 담긴 내용과 역사성을 살펴보고자 「그 존재로 말한다! ’통제이공수군대첩비’」를 5회에 걸쳐 아래 순서로 연재하고자 합니다.

① 초대 여수군수 오횡묵의 회고 “한서린 파도소리” (2월 16일)
② 오성대감 이항복의 추모 “노량을 깊고 깊은데...” (2월 19일)
③ 통제사 유형과 증손자 류성채... 대를 이은 ‘여수사랑’ (2월 22일)
④ 일제강점기 말에 사라진 대첩비, 그리고 ‘복구’ (2월 25일)
⑤ 현대에 되살려야 할 ‘충무공비각복구기성회’ 정신 (2월 28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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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탁 2019-02-25 11:55:23
이참에 지금의 여수시민으로 있게 해준 1897년 5.16 여수군 설군을 통한 여수회복 122주년, 여수시승격 70주년에 대해 많은 관심 부탁드립니다. 태안군은 복군 30주년, 같은 시승격 동기인 수원김천순천포항은 70주년 행사를 열리려 하는데 우리 여수만 아직도 관심이 없어서 되겠습니까?? 여수넷통이라도 여수시승격 70주년, 여수회복 122주년 신문기사 내는등 많은 관심 부탁드리며 여수만의 삼일운동격인 삼복삼파에 대해 더더욱 관심 기울여 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