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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수갑문 하나에 농민들 "목숨 걸었다"

  • 입력 2012.08.31 08:57
  • 기자명 황주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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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만 오면 잠기는 관기리, 지난해 이어 올해도...
제15호 태풍 볼라벤이 한반도를 강타하기 나흘 전인 지난 23·24일, 전남 여수에는 많은 비가 내렸습니다. 이틀 동안 내린 비의 양이 315mm입니다. 그야말로 ‘물폭탄‘이 터졌습니다. 이 비로 여수시 소라면 관기리 경작지 180ha가 물에 잠겼습니다. 논이 호수로 변했습니다. 들이 작년에 이어 올해도 물에 잠겼습니다. 농민들은 화가 났습니다.
트랙터를 끌고 나와 배수갑문을 강제로 들어 올렸습니다. 관기리 경작지는 간척지입니다. 때문에 물 빠짐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하는 곳입니다. 비가 많이 오더라도 물이 곧장 바다로 빠지면 대규모 침수 피해는 막을 수 있습니다. 때문에 피해를 줄이는 데 핵심 역할을 하는 배수갑문에 많은 신경을 써야 합니다.
많은 비가 내린 지난 24일, 안타깝게도 관기국가관리방조제 배수갑문은 제 역할을 못했습니다. 배수갑문이 충분히 열리지 않았습니다. 엉거주춤 열린 배수갑문 탓에 논에 물 빠짐이 늦어졌습니다. 그 결과 180ha가 물에 잠겨 호수로 변했습니다.
급기야 24일 오전, 관기리 경작지에서 농사짓는 농민들이 모였습니다. 간밤에 내린 폭우로 호수가 된 논을 애타게 바라보던 농민들이 회의를 마치고 트랙터를 몰고 나왔습니다. 이윽고 그들은 물이 세차게 바다를 향해 흘러가는 배수갑문에 목숨을 걸고 내려갔습니다.
8개의 문비(물을 막는 철판)에 밧줄을 걸어 트랙터와 연결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들이 트랙터 8대를 이용해 배수갑문을 높이 치켜들자 관기리 경작지를 가득 채운 물이 시원스레 빠져나갔습니다. 그러나 이미 너무 많은 물이 들을 채운 터라 그 후 이틀 동안 침수가 이어졌답니다.







문비 충분히 올라가지 않아 물 흐름 막았다
배수갑문은 왜 말썽을 일으켰을까요. 트랙터 몰고 나온 농민들 말을 들으니 배수갑문 개폐방식이 문제라고 합니다. 관기국가관리방조제 배수갑문은 방조제 안쪽에 형성된 조류지와 관기리 경작지 배수로에서 흘러나와 모인 물의 힘으로 문비를 들어 올립니다.
이를 ‘자동문비개폐방식‘이라고 부르는데 농민들은 이 개폐 방식이 문제랍니다. 그들이 말하는 문제점을 정리했습니다. 첫째, 배수갑문에 설치된 문비가 충분히 올라가지 않아 거꾸로 물의 흐름을 막았습니다. 둘째, 문비 자체 무게 때문에 웬만한 물의 힘으로는 문비가 열리지 않습니다.
갑문이 닫힌 시간이 길어지면 방조제 바깥쪽 바다에 갯벌이 쌓입니다. 두껍게 쌓인 갯벌이 문비 들어 올리는데 방해를 하는 거죠. 때문에 배수갑문을 가끔 열어줄 필요가 있습니다. 하지만 방조제 배수갑문은 기계나 사람 힘으로 들어 올리지 못하는 구조입니다.
셋째, 완벽히 닫힌 배수갑문은 바닷물 유입을 잘 막아주지만 방조제 안쪽 조류지에 물풀이 무성히 자라게 합니다. 이들 물풀이 물의 흐름을 약하게 만들어 갑문 열리는 횟수를 줄입니다. 이외에도 다양한 원인이 싸여 관기리 경작지는 해마다 물에 잠깁니다.









임시로 문비에 고리 연결, 갑문 기계식으로 교체, 펌프장도 조기 완공 예정
화난 농민들을 보고 뒤늦게 한국농어촌공사가 방조제에 관심을 가졌습니다. 지난 26일, 한국농어촌공사 박재순 사장과 주승용 국회의원(국토해양위원장)이 현장을 찾았습니다. 그 후, 한국농어촌공사는 배수갑문에 임시 조치를 취했습니다. 트랙터로 문비를 쉽게 들어 올리게끔 양쪽에 고리를 달았습니다.
당분간 큰비가 오면 농민들은 트랙터를 끌고 나와야 합니다. 배수갑문 개폐 방식도 기계식으로 바꿀 모양입니다. 지난 29일 오후, 한국농어촌공사 여수지소장을 만났더니 "예산을 확보하기 위해 노력 중"이라고 합니다. 방조제를 만들 때부터 갑문을 기계식으로 설치했다면, 농민들이 목숨을 걸 일도 없었을 텐데 아쉽습니다.
또, 한국농어촌공사는 지난해부터 방조제 안쪽에 대규모 펌프장을 만들고 있습니다. 초당 19톤의 물을 배출할 수 있는 시설을 만들고 있습니다. 이 펌프장은 2015년 완공을 목표하고 있습니다. 한국농어촌공사는 이 펌프장도 예산을 빨리 확보해 2014년까지 마무리 짓겠답니다.







물에 잠긴 벼, 빨갛게 변했다. 벼가 안 익는다
모든 공사가 마무리되면 관기리 농민들은 한시름 놓겠지요. 하지만 공사가 마무리되기 전까지 농민들은 매번 물에 잠기는 관기리 경작지를 무기력하게 바라봐야 합니다. 그도 아니면 배수갑문에 목숨 걸고 내려가는 작전을 감행했듯이 또 다른 작전을 펼쳐야지요.
농민들을 위험한 사지에 넣지 않으려면 관계기관의 빠른 대책 마련이 필요합니다. 지난 24일 오후 배수갑문 앞에 나온 농민들의 말이 떠오릅니다. 그들은 "지난해에도 이런 일이 벌어졌다"며 "관기리 경작지가 잠기는 일은 이미 예견된 일이었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관기리 경작지는 지난해에 이어 올해도 물에 잠겼습니다. 파란 벼 이삭이 올라온 논이 온통 황토물로 덮였습니다. 연례행사처럼 들이 물에 잠깁니다. 농민들은 목숨 걸고 배수갑문을 열었고요. 그곳 농민들은 "관기국가관리방조제 배수갑문 공사를 새로 하고 난 후부터 이 모양"이랍니다. 한국농어촌공사에서 돈 들여 만든 배수갑문이 제구실을 못했습니다.
30일 오전, 관기리 경작지의 상태가 궁금해 그곳에서 농사를 짓는 최아무개씨와 통화했습니다. 그는 힘없이 말했습니다.
"목숨 걸고 갑문을 연 덕분에 물은 모두 빠졌다. 하지만 물에 잠긴 벼가 빨갛게 변했다. 온 들판이 빨갛다. 벼가 고개를 숙이지 않고 뻣뻣이 서 있다. 벼가 안 익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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