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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용현 여수기행]요트와 맺어진 인연 - 2 -

  • 입력 2013.05.24 18:39
  • 기자명 yosu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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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문도 기행 / 요트와 맺어진 인연 - 2 -

서울↔여수간 광-케이블은 집전화로 연락을 주고 받는 정신적 기둥으로서 역할을 다하는 것같았다.

"CH-형님과 유대관계의 결실은 형제애의 돈둑한 의미를 담고 있었다." 이런 저런 사업의 경영상태와 가족의 건강 및 서로 앞날에 대해서도 부담없는 사이로 발전되었으니 말이다.

다시말하면 "모든 면으로 봐서 학문적으로나 경제적으로나 질적 수준차이의 격차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유지된 것이 참 특이하다 할 것이다." 거기에는 "운동을 통해서 정신적으로 한 형제처럼 이끌어 주시는 넉넉한 마음가짐의 배려와 슬기로운 인품의 척도를 통하여 질적 향상을 좌우할 올바른 덕목으로서 그분의 본바탕이라고 말할 수 있었다."

여수에서 서울 잠실로 전화하면 사모님이 받을 때가 많았다. 그때마다 공손히 받아 주시는 태도를 여러 차례 듣다 보니 언뜻 이런 생각이 들었다.

"송구스럽지만 한-마디해도 될는지 모르겠어요?"

"어려워 말고 기탄없이 말씀하세요."

요즈음, "형님과 아우 사이로 아주 편안하게 거리감도 완전히 해소할 정도"라고 말씀 드렸다.

그리고 "아직 사모님을 찾아 뵙지 못해 서운하기도 하지만 목소리를 들을 때마다 부담감없이 편안한 기분에 어떻게 고운 음성의 사모님을 형수님이라고 불렀으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꼭 여쭈고 싶었습니다."

"아 그러세요! 세금 붙는 것도 아닌데 홀가분하게 듣기에도 좋네요.

따지고 보면, 하나의 존칭은 어색한 굴레가 아닐까요."라고 말씀하셨다.
"사모님 고마워요. 형수 형-수님 불러도 되는 거죠! 고맙고 너무너무 감-사합니다. 항상 전화가 끝날 마지막 순간에도 공손히 한 식구 이상으로 감싸주시는 말씀에 더욱 용기백배였다고 말할 수 있었다."

CH-형님은 전남 순천에서 태어나셨고 어린 시절 아버님께서 인성교육으로 성장시켜 주셨다고 말씀하셨다. 아버님은 의과대학교 출신으로 고향 순천에서 병원을 운영하셨고 동부 6군의 환자들이 치료를 받았는데 아버님의 의술을 인술로 인정을 받았으니까. 그런 덕분에 부유하게 성장하면서 학창시절 재능과 운동에 대하여 상당한 소질을 인정 받았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여러가지 운동을 열거해 본다면,

첫째, "초등학교 시절 축구선수로 자기 포지션도 체격이 듬직해서 풀백이 안성-마춤이었다네. 순천에서는 어떤 시합이든 출전 할 때마다 전승으로 이어 갔으니까 말이야." 마침 동부 2시4군의 축구시합이 순천에서 개최되었어. 우승컵은 받아 논 밥상이라고 호언 장담까지 했는데, 때 아닌 여수 서초등학교에 브레이크가 걸렸지 뭐야?
"우리는 막강한 체력을 가진 구례-초등학교를 이기고 결승에 진출하였으니 한마디로 승승 장구였다고 말할 수 있었지." 반면에 결승에 올라온 상대팀은 여수서 초등학교였는데.

결승전이 시작되었지. "박진감이 넘치는 시소게임으로 우열을 가리기가 쉽지 않았었고 그런데 여수서 초등학교 신출내기 정ㅇㅇ선수는 마지막 3분을 남기고 결승골을 터뜨려 버렸어."

분통했지만, "여수 서 센터포드 정 선수 기량을 인정하고 경기에 밀리면서 정신적 판단력은 수비진이 깨지면서 축구의 본질을 체험한 패인의 쓰라림도 처음 느껴본 울분이었으니까." 섭섭한 마음 금치 못했지만 방법이 없는 걸, 그래서 만감이 교차되는 것 같다고 말할 수있었네.

하지만, 아쉽다면 너무 아쉽지 않았겠어. 한번도 져 본적이 없었기에 말이야. 그때 그 사람이 다름아닌 대한민국 축구 센터포드로 발군이었음을 뒤늦게나마 알게 되었고 훌륭한 선수라고 인정할 수 있었네.

둘째, 대학시절 요트와 인연이 되어 춘천 양수리와 청평에서 종류 별로 요트를 구입하였고 Yacht Sailing을 하였으니 햇수로 따지면 어언 40년의 장구한 세월이 하나의 흔적처럼 뇌리를 스치는 스포츠였고 마지막 보루인 지금도 청평에 6인승 크루저로 가까운 친구들과 함께 범주를 한다고 말씀하셨다.

CH-형님께서 "요트의 진가를 피부로 느꼈기에 인생을 마감할 때까지 나의 진정한 벗이자 정신적 시너지라고 생각하고 있을 정도였어." 하시면서 넌지시 옛 추억을 더듬는 것이었다.

세번째, "낚시와 함께 좋은 선배님들을 안내했고 서울에서 12시간 이상의 운전 중에 전남 광주를 벗어나면 비 포장도로로 울퉁불퉁하여 몸을 가늠하기가 정말 힘들었다네."

"이런 고통을 고사하고 거문도, 손죽도, 초도, 고흥-녹동, 남해안을 휘젓고 다닐 때는 내 집 안방처럼 드나 들었으니까 두 말할 필요가 없었다."고 말씀하셨다.
지금은 세상을 달리 하셨지만, "영화배우였던 최ㅇ룡씨와 작곡가 박ㅇ석씨 등등 기라성 같은 형들이 내 주변에 있었기에 더욱 성장할 바탕이 되었지."라며 눈시울을 적시었다.

마지막 4번째, "스키, 스키하면 베테랑 급으로써 강원도 용평에 콘도가 있다네.

겨울이면 체력 단련과 심신을 위한 스포츠를 생활화하고 있다는 말씀까지 들었다." 즉 "모든 사람들의 이목이 집중되도록 선천적 체질을 타고난 탓인지는 몰라도 활강하는 자세를 보고서야 부러움을 살 정도라면 충분히 납득이 가고도 남을 것같았다."

"있잖-아! 유감스럽다면 초등학교 6학년의 키가 오십의 세월속에 키는 1Cm도 성장하지 않았으니 형언하기 조차 할말이 없다니까."

"어머나, 그러셨어요?"

형님, "그 동안 얼굴이 많이 좋아지신 것 같아요. 홍조 띤 분홍색상처럼 자기의 건강을 상징하는 것 같습니다."

"응, 고마워."

요즘은 "친구들과 함께 일주일에 2차례씩 꼭 등산을 했어. 그 사이 몸 속에 축적되었던 노폐물들이 땀으로 빠져 나온 덕분에 가벼운 발걸음은 건강을 되찾는 요인이자 촉진제가 아니었을까 생각하며 상쾌한 기분이라고 말할 수 있었네."
"아-! 그 참 잘 하셨습니다."하고 힘주어 말했다.
"우리 몸 속의 필요악들이 건강을 헤치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누누이 잘 알면서도 그러지 못했던 관습들이 매우 안타까울 뿐이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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