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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이야포 폭살(爆殺) "폭격에 의한 학살"

소설가 양영제가 말하는 이야포 미군학살 "이건 시나리오가 아니다"

  • 입력 2019.08.11 06:30
  • 수정 2019.08.12 07:04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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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3일 여수시 남면 안도 해변에서는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추모제 및 표지판 제막식'이 열렸다. <여수역>의 저자 양영제 소설가도 함께 추모식에 참가했다. 추모제에서 그는  자료를 동원해 현장에서 당시 상황을 설명하며 이야포 미군폭격사건은 "단순히 폭격사건이 아니며, 미국의 말처럼 전쟁 중 발생한 오폭이 아닌 학살이다"고 강조했다.

오래 전부터 양 작가는 이야포 학살'을 다룬 소설로 펴내려고 취재.증언등 각종 자료 수집을 하고있다. 서울에서 활동하지만 소설을 구상한 이후 이야포 현장만 30여회 이상 방문했다. 지난 3일 추모제 현장에서 밝힌 내용을 포함해 이야포사건에 대한 양영제 작가의 특별기고문을 싣는다.

이야포 추모제 현장에서 양영제 작가가 '학살'임을 자료를 통해 설명하고 있다.

#1 : 1960년대 말 83일 .  장소 : 전남 여수시 안도

파도는 몽돌들을 간지럽게 핥고 있었다. 어머니 품처럼 육지가 바다를 감싸고 있는 형상이었다. 이야포 몽돌해안이었다. 멸치 황금어장이라서 안도 이야포 몽돌해안은 허연 멸치를 볕에 말리는 풍경이 펼쳐지곤 하였다.

파도라고 할 것 까지 없는 물살이 남자의 발끝까지 밀려왔다 밀려나갔다. 물살은 잔잔해도 그런 물살에 온 몸이 할퀴는 몽돌들은 서로 부딪치며 아우성이었다. 몽돌들이 내는 소리를 가만 듣고 있다보면 절규 같아 마음이 자닝스럽기 까지 했다. 그 부부 마음도 그러했을 것이다.

이야포 해변과 그 앞바다 전경

전남 여수시 부속섬 안도 이야포 몽돌해안에 젊은 남녀가 앉아 있었다. 헐렁한 양복을 입은 남자와 색이 바랜 한복을 입은 젊은 여자가 이야포 몽돌 밭에 앉아 고개를 숙인 채 몽돌들의 절규소리를 듣고 있었다.

신혼부부 같은 남녀는 그만 이야포 몽돌해안에서 걸어 나왔다. 안도 당산 밑을 지나 두멍안 선착장에서 여수로 나가는 배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어디선가 나타난 경찰들이 카빈 소총 총구를 신혼부부에게 겨눈 채 다가왔다.

손 버쩍 들어!!”

왜이래요? 우린 신혼부부야요.”

신혼부부 좋아하네 요런 간첩새키들.”

우린 간첩아니야요.”

잔말 말고 따라와. 조사 해 보면 다 불게 돼있어.”

경찰들은 신혼부부를 포승줄로 칭칭 묶었다. 경찰들에게는 하늘이 내려준 특진 기회였다. 1948년 여순항쟁 이후 이승만에 의해 형성된 절대 반공 이데올로기가 박정희 군사독제 체재로 이어지고 있던 시대였다. 이 시대 간첩신고는 신고자나 군경에게는 로또나 다름없는 선물이었다.

간첩신고는 이러했다. 전날 저녁, 신혼부부 차림의 남녀가, 어스름한 저녁에 이야포 해안이 내려다보이는 산기슭 소나무 밑을 파서 무언가를 파묻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 무언가는 분명히 권총 따위 무기나 아니면 북한 간첩들이 사용하는 난수표 같은 것이라고 신고자 및 경찰은 판단했을 것이다. 신혼부부는 경찰에 의해 끌려가 여수 경찰서로 이송됐다.

# 2 : 1945- 1950년.   장소 : 한반도

1945년 일제가 무조건 항복을 선언하기 며칠 전인 88 일 소련은 대일선전포고를 하고 참전하였다. 미국 트루먼 대통령이 소련 스탈린에게 연합군으로 참전요구를 하였기 때문이었다. 미국의 입장으로서는 만주 중국 지역 일본군을 철퇴시키기 위해서는 소련의 참전이 필요했던 것이다. 소련군은 만주 지역 일본 관동군을 쉽게 패퇴시켜 장악했다. 그리고 며칠 후 일제는 무조건 항복했다.

연합군으로 참전한 소련은 미국에게 참전 대가로 제물포(인천) 부산 제주도 인천 항구 관할권을 요구하였다. 동북아시아 해양에서 소련 해군의 자유로운 통행을 보장받기 위해 남한 중요 항구를 미국에게 요구했던 것이다. 더구나 소련은 일본 훗카이도 북부지역을 점령하려는 구상까지 하였다.

소련의 구상은 1948924일 영국 런던외상회의(...)에서 제안되었다. 소련의 한반도에 대한 전후 구상은 러시아 대외정책문서보관소에 소장되어 있고 지금은 기밀해제 되었다. 그러나 미국 입장에서는 소련의 무리한 참전 배당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동경 연합군 최고사령부 건물

일본패망 후 한반도는 이런 일련의 과정을 거쳐 38선을 분기점으로 분단질서 맹아가 형성된다. 북한은 소련 사령부, 남한은 미군사령부에 의해 후견인(점령군)으로 자리한다.

이 시기 남한사회를 미군정기(1945년부터 1948)라고 부른다. 남한의 통치는 미군 하지 중장이 맡게된다.

하지 중장 1948년 9월 8일자 한국상륙 관련 기사

한반도에 비해 패전국 일본에 대한 통치는 19524월까지 동경에 설치된 연합군 최고사령부(SCAP/GHQ) 맥아더의 직접통치를 받게 된다. 일본을 점령한 미국은 일본열도를 군사기지로 사용한다. 오끼나와 극동 제 7 비행전단이 대표적이다. 한반도를 비롯한 동남아 일대 미군 비행작전은 이곳에서 이루어졌다.

당시 한반도 북한이나 남한은 자생적 인민위원회가 행정공백을 메워가면서 완전한 자주독립 국가체제를 준비해 나가고 있었다.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에도 인민위원회가 구성되었다.

북한에 주둔한 소련군은 선거에 의해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건설되어가는 것을 관망하면서 소련에 우호여부를 주시하고 있었던 반면에, 남한의 통치자 하지 중장은 몽양 여운형의 건국동맹에 뿌리를 둔 남조선 인민위원회를 이승만과 미군정이 부활시킨 친일경찰에게 지시를 내려 해산시켜 버린다.

이것은 모스코바 3상 회의에서 결의에 의해 한반도를 신탁통치 후 장차 통일정부를 세운다는 계획이 무산되고, 미소공위 마저 결렬된 후 한국전쟁을 불러들이는 패착의 시작점이었다.

결국 남한에서는 1946년 미군정 폭압에 저항하는 대구 10월 추수항쟁이 일어난다. 1948년 제주에서 4.3 항쟁이 일어난다. 같은 해 1019일 여수에서 14연대에 의해 촉발된 여순항쟁이 일어난다. 이를 지켜보던 북조선노동당 김두봉(한글학자 주시경 제자이며 상해 임시정부 정의원 의원이다. 김일성과 함께 휴전협정 조인 당사자다)은 김일성에게 조선의 수도인 한양만이라도 해방시켜야 한다고 종용한다. 머뭇거리던 김일성은 스탈린에 도움을 청했다. 스탈린은 연합군 일원으로 미국을 살펴야 했다.

대신 중국 모택동에게 서신을 보내 무력으로 한반도를 통일하겠다는 김일성을 도와주라는 친서를 보낸다. 이때 소련은 이미 핵무기를 미국에 이어 개발 완성한 상태였다. 중국 모택동은 항일원조(抗日元朝)인 북한을 지원하기로 한다. 이로써 북한은 1950625일 한반도 통일을 위한 무력남침을 한다. 한국전쟁이 일어난다.

#3 1950726일.   장소: 충북 영동군 황간면 노근리

영화 '작은연못' 한 장면.   사진   (유)노근리프로덕션 제공

미군은 속절없이 밀려나기 시작했다. 대전을 인민군에게 내주고 계속 후퇴를 거듭하다 충북 영동군 일대에 방어선을 구축했다. 미군 제1기병사단 7기병 연대는 노근리에 배치되어 무엇이 되었든 남하를 저지하라는 명령을 받는다.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남쪽으로 내려오고 있었다. 피난민들이었다.

미군 7기병 연대는 무차별 사격을 가한다. 피난민들은 노근리 기차 쌍굴 아래로 피신한다. 미군은 남하하는 사람들이 무장한 인민군이 아님을 인식했어도 미친 듯 소리 지르며 사격을 계속해 댔다. 이른바 남한 지역까지 확장된 미군의 초토화 작전에 의해 흰옷을 입은 사람(people in white)’은 무조건 적으로 간주하였다.

노근리 평화공원에서 필자

충북과 경북지역을 관할하던 미 제10군단 사령관 에드워드 앨먼드(Edward Almond)1951125현지 주민들이 죽는 것은 사실이지만, 살아남은 자들은 적에게 동정적이고, 마을은 은신처가 된다.” 고 주장하였다. 그래서 충북 영동 노근리에서만 400여명의 흰옷 입은 피난민들이 학살되었다. 흰옷을 입고 움직이는 사람은 미군에게 피난민이나 민간인이 아니라 그냥 적, 아니면 잠재적 적 이었을 뿐이었다.

미군이 인민군에게 밀려난 지역은 미군 폭격기의 초토화 작전이 진행되었다. 미군 폭격기 조종사들은 남한 내 작전구역 내에서 발견되는 모든 흰옷 입은 사람들을 사실상 적으로 간주했다. 폭격기 정찰관 중 하나였던 조지 울프(Geore Wolf)많은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있었다. 우리는 적으로 간주할 수밖에 없었다.”고 증언했다.

이러한 사실은 도진수(都珍淳)씨가 발굴하여 학계에 발표한 문서에 의해 진실화해위원회의 조사가 이루어져 발표되었다. 미군 노근리 학살 사건은 영화로 만들어져 전 국민이 알게 되었다.

영화 '작은 연못'의 한 장면  (출처 네이버영화)

노근리 미군 학살사건 유족들이 사실을 알리는 작업은 눈물겨울 정도였다. 박정희 독재정권 시절에 미군에 의한 학살 사실을 알리는 작업은 목숨을 담보로 얻는 용기를 가지고 해야만 했다. 그리고 끝내 이 땅에 문민정부가 들어서고 사실은 미국 언론에 알려졌다.

미국의 빌 클린턴 대통령은 노근리 학살사건을 인정하며 한국국민에게 사과가 아닌 유감표시만 했다. 하여, 노근리에는 지금 평화공원이 조성되어 유족과 이 땅에 살아가는 민족에게 조금이나마 위로와 역사를 생각하는 기회의 장이 되어 주고 있다.

#4 194868일.  장소 독도

독도폭격사건 당시 '동아일보' 신문기사

한국전쟁이 발발하기 이태 전 이미 미군에 의한 폭살이 있었다. 194868일 오끼나와 카네나 기지에서 미군 제93폭격비행전대 소속 B29 일곱 대가 발진하였다. 뒤를 이어 6대의 B29가 떴다. 328 대대 전폭기들이었다. 이들 미군 전폭기들은 19476월에 완성한 극동지역 비상전쟁계획인 문라이즈Moonrise’에 의한 훈련이었다.

B29 편대는 울릉도 옆 작은 섬을 돌면서 폭탄을 투하 하였다. 이른바 독도폭격 사건이다. 이날 독도 폭격은 훈련이라기보다는 북한과 소련에 대한 일종의 무력시위로 일본군의 생체실험이나 다름없었다.

움직이는 물체에 대해 폭탄 투하와 기총사격을 하였던 것이다. 미역채취하려고 독도에 있던 울릉도 주민들과 인근에서 조업하고 있던 어선들이 B29 폭격기 무차별 폭격에 맞아 이백 여명이 사망했다.

독도 폭격을 하였던 제329 폭격비행대대 폭격수 깁슨은 폭격을 가한 사실을 증언했다. 미국은 폭격기가 작은 암초로 보였다고 했지만, 깁슨은 어선들이 마약을 운반하고 있다는 무전이 있었다고 증언했다. 이에 대해 한국전쟁의 기원을 쓴 브루스 커밍스(Bruce Cumings)는 미국의 인종주의적 편견에 의한 폭살이라고 일갈 했다.

독도 해상 물속에 잠겨 있는 불발탄

아직도 독도 인근에는 수거되지 않은 불발탄이 물속에 묻혀 있다고 한다.

유족들은 해마다 6월 이면 당시 희생되었던 독도를 찾아와 원혼제를 지내고 있다.

그런데 독도폭격 원혼을 달래기 위해서 독도에 세웠던 위령비가 어느 날 감쪽같이 사라졌다. 태풍으로 사라졌는지, 누가 무엇 때문에 없애 버렸는지 알 길 없었다.

사라지기 전의 독도위령비 모습

 

독도 해상 수중에서 발견된 '독도위령비'

그러다 기적적으로 물속에 잠겨 있는 독도폭격 위령비를 찾아냈다. 태풍에 소실되었다고 보기에는 원형 그대로 모습이었다. 이 땅에서 일어난 옳지 않는 역사 비극 흔적을 찾기 위한 사람들의 끈질긴 노력의 결과였다.

#5 195083일 오전.    장소 : 전남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 해상

슈팅스타 편대비행 모습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미군은 속절없이 후퇴하였다. 그렇다고 그냥 후퇴만 한 것이 아니었다. 후퇴한 지역에는 무지막지한 폭격을 가해서 크거나 작아도 움직이는 물체는 폭격으로 청소해 버렸다. 그게 폭격에 의한 초토화 작전이었다. 초토화 작전은 미군이 밀려나는 남한 지역으로 확장 되었다. 아군, 즉 미군이 없는 지역에는 무지막지한 폭격을 가해 아무것도 움직일 수 없도록 청소를 해 버렸다.

최일선에서 표적공격을 전담한 폭격기는 F-80 슈팅스타(shooting star)였다. 공중지휘통제기격인 모스키토(Mosquito) 정찰기가 먼저 목표물을 찾아내 슈팅스타 편대에 알리면, 슈팅스타기가 나타나 목표물을 타격하는 게 한국전쟁 당시 미군 폭격전술이었다.

당시 북한군이었던 사람들 증언에 의하면 왱왱 거리는 모스키토가 나타나면 곧 슈팅스타 편대가 나타나 대량 폭격을 퍼부었다고 한다.

길이 10.49미터, 날개 11.81미터, 높이 3.43미터, 무게 3819 킬로그램, 최고시속 969킬로미터이며 총 1800발을 장전할 수 있는 50구경 기관포와 로켓으로 무장한 슈팅스타기는 개전 초반 전투출격횟수의 70프로를 담당했다. 당시 북한의 피해 85프로는 미군의 슈팅스타 전폭기에 의한 것일 정도로 무시무시한 폭격기이었다.

다른 전투기와는 비교가 되지 않게 매우 낮은 목표물을 정밀폭격 할 수 있는 전폭기였다. 한국전쟁 당시 슈팅스타 전폭기는 미군 제 5 공군 제8 전투 폭격단에 속해 있었다.

그러나 슈팅스타 전폭기의 단점도 있었다. 그것은 항속거리가 짧다는 것이다. 일본 기지까지 회항하려면 한반도 작전지역에서 불과 일이십 여분 밖에 머물 수 없었다고 한다. 그러기 때문에 당시 미군 정찰기 모스키토가 찾아 주는 북한군을 타격할 시간이 없이 조종사의 육감에 의존하는 폭격이 자주 일어났다고 한다. 연료부족 압박감에 최대한 빠른 시간 안에 조종사 스스로의 육감에 따라 크고 좋은 표적을 찾아내 폭격임무를 완수해야 했던 것이다.

지난 3일 추모제 현장에서 당시 상황을 증언하는 마을 주민 이서연씨 (가운데 마이크 잡은 사람)

그런데 뜬금없이 슈팅스타기가 안도 이야포 해상에 나타났다. 정찰기 모스키토의 앞선 비행이 없이 나타났다. 비행기를 구경하기 위해 언덕에 올라 하늘을 쳐다보던 안도 소년이 있었다. 당시 13세로(1938년 생)으로 안도 이야포 앞에서 살고 있었다. 소년 이서연이다.

소년 이서연은 194810월 여순항쟁 당시 안도에서 일어난 학살도 고스란히 목격했다. 여순항쟁을 진압하러 부산에서 미군 수송선 LST를 타고 와서 여수 시내에 박격포를 엉터리로 쏘아 대 여수 시내가 일차로 화염에 휩싸이게 만든 학살자가 김종원 대위다. 미군에 의해 작전에서 배제된 진압군 김종원 대위(일본군 하사관 출신이다)가 안도에 와서 화풀이로 학살을 저지른 것이다.

안도 소년 이서연은 비행기 꼬리 부근에 별 모양이 선명한 슈팅스타가 그려져 있는 것을 똑똑히 보았다. 소년 이서연은 이야포 언덕에 서서 바라보았다. 슈팅스타기는 이야포 해상에 떠 있는 피난선을 아주 낮은 고도로 선회하고 나서 사라졌다. 소년 이서연은 피난선 장대에 매달려 나부끼고 있는 태극기와 피난민들이 빨아서 배에 널어놓은 흰 빨래를 바라보다가 다시 하늘로 고개를 쳐들었다.

사라졌던 슈팅스타기가 나타났던 것이다. 소년 이서연은 천둥소리에 놀라 땅바닥에 엎드렸다. 이어서 하늘에서 슈팅스타기가 피난선을 향해 기관포를 쏟아 부은 것이다. 소년 이서연의 머리 위로 자치기 막대보다 큰 50구경 탄피가 떨어졌다. 모든 것은 순간이었다. 당시 안도 이야포에는 멸치잡이 어선들이 전단을 이루어 떠 있었는데 정박 중이던 피난선에만 기관포를 쏟아 부었다. 기관포를 맞은 피난선 안은 순식간에 아비귀환이 되어버렸다.

2017년 필자가 증언을 듣기 위해 안도 제일식당에서 마련한 자리에서 1948년 10월과 1950년 8월 안도 상황을 증언하는 목격자 이서연님과 전 이장님들

슈팅스타기의 피난선 일차 폭살에 의해 아버지를 잃은 피난민 소년이 있었다. 현재 유일한 생존 증언자 이춘혁(1935년 생으로 당시 16세 였다) 아버지는 선장실 보다 높은 곳에 있었다고 한다. 때문에 슈팅스타기의 일차 폭살을 피하지 못하고 절명하고 말았다.

일차 폭살을 한 슈팅스타는 사라졌다. 피난선 안은 떨어져 기관포에 맞아 떨어져 나간 살점과 피가 사방으로 튀었다고 한다. 피난민들의 절규는 이야포 언덕에 엎어져 있던 소년 이서연 귓가에까지 들려오고 있었다.

조금이라도 안전하다 싶은 거문도로 향하던 피난선이었다. 피난선은 충무에서 피난민들을 태우고 출발하였다. 이 배에 탔던 피난민들은 부산에 피난 내려와 운동장에 수용되었던 사람들이었다.

국군이 낙동강까지 후퇴하자 부대를 수용할 장소로 운동장이 필요했다. 부산시는 운동장에 수용되어 있는 피난민들을 충무(현 통영)로 소개 시켰다. 충무도 안전하지 않아 피난민들은 사선을 이용해 거문도로 향했다. 욕지도를 거쳐 이야포 해상을 지나고 있었다.

그때 이야포 곶머리에서 해상을 감시하고 있던 영암경찰서 소속 경찰들이 피난선을 불러 세워 이야포에 정박하게 된 것이다. 아마도 경찰은 피난선에 인민군이라도 타고 있었는지, 검문을 하려고 했던 것으로 추정해 본다. 덕분에 피난선 피난민들은 안도 뭍으로 올라와 쌀을 얻어 밥을 해먹고 빨래도 하여 피난선에 널어놓았다. 하얀 빨래가 태극기와 함께 해풍에 휘날리고 있었다. 슈팅스타가 나타 난 것은 오전 아홉 시 경이었다.

구체적 전선이 형성되어 있지 않는 안도 지역에 미군 슈팅스타기가 사전 정찰비행도 없이 불현듯 이야포 해상에 나타난 것이다. 당시 안도에 내려와 있던 영암경찰의 정보에 의한 것인지, 아니면 다른 군사정보에 의해 금오도 해상 일대를 청소하러 왔던 것인지 필자로서는 알 길 없다. 하지만 그 전까지는 안도에 한 번도 나타나지 않았던 슈팅스타기였다.

1차 폭살을 하고 사라졌나 싶었던 슈팅스타기는 다시 나타났다. 큰 것을 공격하라는 명령이 있었던 미군 제 5공군 전폭기 소속 슈팅스타기 조종사는 일차 공격으로 청소가 미진했다고 여겼던 것 같다.

슈팅스타는 2차로 폭살을 시작했다. 미군이 없는 지역의 움직이는 물체인 흰옷 입은 사람들, 즉 적이거나 적에게 동조하는 잠재적 적이라고 무조건 간주하던 미군 조종사에게는, 적이 가득한 배에 태극기가 휘날리고 있든, 배에 흰옷을 입은 사람들이 많이 타고 있든, 그 무엇이 되었든 인민군 보급품을 실은 배로 보고하면 될 일이었다.

독도폭격 때 고기잡이 어선들을 폭격훈련 타켓으로 폭살하고서 문제가 되자 마약 운반선이라고 했던 것처럼 말이다.

슈팅스타기의 피난선 2차 폭살에 많은 피난민이 목숨을 잃었다. 생존자들은 당시 사망한 사람이 일백 오십 여명이 된다고 한다. 이 증언은 폭살 현장과 시신을 목격한 안도 주민들의 증언과도 대략 일치한다. 안도 주민들과 살아남은 피난민들은 해상에 떠 있는 시신들을 이야포 몽돌 밭에 올려놓았다.

어디선가 산발적인 전투가 있었다는 소식만 들릴 뿐, 피아간에 구체적 전투가 없던 이야포였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항속거리도 짧은 전폭기가 불쑥 이야포에 나타 나 피난선만 정밀 폭살 한 것은, 여러모로 의구심을 들게 만든다. 더구나 벌처럼 왱왱 소리를 내는 모키스토라는 정찰기를 본 적이 없고 색색이(슈팅스타 전폭기)만 나타났다고 당시 안도에 살았던 주민들은 전한다. 그날이 노근리 미군 학살 사건이 일어나고 나서 채 두 달이 지나지 않는 195083일 이었다.

2차 폭살 때 피난민 이춘혁 소년의 남동생도 슈팅스타 기관포에 맞아 죽었다. 일곱 식구 중 살아남은 가족은 소년 이춘혁과 누이 이경애 남동생 이춘송(당시 13) 어머니와 어머니 등에 업힌 세 살 박이 남동생이었다. 서울 염리동에서 살던 일가 중 아버지와 여동생이 슈팅스타 기관포에 맞아 피난선 안에서 사망했다.

안도 주민들은 살아남은 피난민들을 뭍으로 실어 나르기 위해 전만선(노를 저어 이동하는 조그만 조각배)을 띄었다. 언제 또다시 미군 슈팅스타가 날아와 폭격을 할지 몰라 일초가 다급했던 상황이었다.

너희들은 수영을 할 줄 아니까 얼른 헤엄쳐 가라. 엄마는 배 타고 가마. 빨리!!”

엄마는 살아남은 자식들에게 소리쳤다. 폭살 당 한 아버지 시신을 수습할 상황이 안 되었다. 우선 살아남아야 했다. 엄마는 세 살 박이 남동생을 미군 요를 찢어 만든 포대기로 업고 있었다. 살아남은 자식 셋은 수영을 해서 몽돌 밭으로 기어올라 왔다. 뭍으로 올라 온 피난민들은 소년 이춘혁 남매를 끌고 숲으로 숨었다.

슈팅스타가 또다시 나타나 몽돌 밭 피난민들을 향해 기관포를 쏠지도 모를 일이었다. 숲에 숨은 어른들 사이 소년 이춘혁 눈에 동생을 업은 엄마가 전만선에 올라타는 모습이 보였다.

그러나 전마선은 작고 올라탄 피난민들은 많았다. 기어코 전마선이 뒤집어 졌다. 피난민들이 허우적거렸다. 안도 주민들은 허우적거리는 피난민들을 다시 전마선에 끌어 올려 몽돌 밭으로 옮겼다. 그러나 동생을 포대기에 업고 있던 엄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뒤집어진 조각배에 타고 있던 피난민 중 수영을 할 줄 아는 사람들은 헤엄쳐 나오고 있었다.

소년 이춘혁은 그 중에 어머니도 있을 것이라 믿고 싶었지만 뭍으로 올라오는 사람 중에 어머니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미군 요로 만든 포대기는 너무도 많은 물을 먹어 엄마는 수면에 떠오르지 못했다. 물 먹은 미군 요 포대기가 이야포 바다 밑으로 엄마와 동생을 데려가고 있었다.

소년 이춘혁은 어머니와 동생을 구하러 물에 뛰어 들어가려고 했다. 그러나 피난민 생존자들이 소년을 붙잡았다. 슈팅스타기가 다시 날아와 총을 쏘게 되면 뭍에 있는 사람조차 죄다 죽기 때문이었다.

생존 피난민들은 울부짖는 소년 이춘혁 입을 틀어막았다. 그 후 소년 이춘혁은 동생을 업은 어머니 모습을 다시 보지 못했다. 다만 안도 주민들이 끌어 와 몽돌 밭에 뉘어놓은 아버지 시신만 봤을 뿐이다.

이야포 학살 안내문 앞에 선 생존자 이춘혁

시신은 백오십 여 구나 되었다. 생존자 유가족 중 일부는 시신을 산에 묻기도 했다. 그런데 어디선가 나타난 청년들이 생존한 피난민들에게 시신을 옮기거나 산에 묻으면 죽여 버리겠다고 협박을 했다.

안도, 그곳은 이승만의 분단고착에 반대해서 19485.10 제헌의회 선거를 치루지 못 한 곳이다. 섬이라서 인민위원회가 해체되지 않은 채 19481019일 여순항쟁을 맞이한 곳이다. 그 덕분에 이승만 진압군 김종원 대위가 학살을 맨 처음 자행 했던 곳이다.

이후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북에서 내려온 치안대가 장악했다가 다시 함평 경찰서, 영암 경찰서 경찰들에 의해 무자비한 보복이 일어났던 곳이었다. 경찰의 보복 행태는 차마 글이나 입으로 표현 할 수도 귀로 듣기도 어렵다.

경찰들은 시신을 처리해야 했다. 한국 장제문화는 매장을 하는 것이고 나무가 부족한 안도에는 풍장(風葬)이라는 장례문화가 있었다. 영문도 모른 채 학살된 사람들 시신은 풍장으로나마 처리해야 했었다. 그러나 경찰들은 살아남은 선장과 기관사를 시켜 시신들을 다시 피난선에 안에 집어넣게 했다.

그리고 피난선에 기름을 끼얹고 불을 질러버렸다. 시신을 가득 실은 피난선 불길은 삼일 동안 타 올랐다고 안도 목격자들은 전한다. 그리곤 이내 안도 주민들에게 이상한 소문이 순식간에 퍼지기 시작했다. 배 선장이 북한 간첩이었다는 것이다.

이것에 대해 필자는 경찰에 의한 자국민 2차 학살이라고 부르고 싶다. 아무리 시신이 많고 전쟁와중이라고 해도, 살아남은 생존자 유가족들이 있었다. 생존자들은 시신을 임시라도 산에 묻으려고 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괴청년들이 나타나 시신을 옮기지 못하게 겁박한 것, 배에 기름까지 부어 소각처리 한 것, 등등 정황은 경찰에 의한 또 다른 학살이라고 밖에 부를 수 없다.

필자는 왜 경찰이 피난선을 불러 세웠고, 괴청년들이 누구이며, 왜 경찰이 나서서 시신에 굳이 기름까지 부어서 소각 처리했으며, 선장이 간첩이었다는 소문의 근원지는 누구인지 알아보려고 애를 썼다. 안도를 돌아다니면서 학살순간을 목격했거나 아니면 학살 이후 상황을 아는 사람을 찾으러 다녔다. 안도에 현존하는 나이 많이 드신 분들은 대부분 슈팅스타 학살 사건에 대해 뚜렷하게 알고 있었다. 그러나 시신처리과정에 대해 물어보면 대부분 모른다는 대답만 되돌아 왔거나 자리를 떴다.

만약 경찰이 거문도로 향하던 피난선을 불러 세워 폭격학살을 맞게 했다면, 그것이 경찰의 정보제공에 의한 것이든, 아니면 짧은 체공시간 압박에 시달리는 슈팅스타 전폭기 조종사의 육감에 의해 큰 물체에 대한 폭격이었든, 경찰의 책임은 면할 수 없다. 그렇다면 경찰에 의한 시신소각처리, 즉 미군 전폭기 이야포 학살증거 청소는 자국민에 대한 경찰의 2차 학살이다. 경찰의 말끔한 청소 덕북에 미군 폭격기 슈팅스타는 피난선 피난민을 폭살한 것이 아니라, 간첩선을 폭격한 것이 되어버렸다. 미군 전폭기는 전쟁임무를 수행 한 것이다.

이 모든 처참한 광경이 소년 이춘석과 그의 누이 이경애 그리고 세 살 아래 남동생 이춘송의 눈앞에서 고스란히 펼쳐졌다. 그리고 목격 증언자 안도 소년 이서연도 죄다 눈에 담았다. 한국전쟁이 발발하고 두 달이 채 지나지 않는 195083일 오전 여수 부속섬 안도에서 벌어진 이야포 미군폭격기 학살사건이다. 이것은 전쟁 와중에 부수적 일어난 비극적 사건이 아니다. 의도적 학살이다.

2018년도 이야포 추모제에 참석한 목격자 이서연씨(왼쪽)과 생존자 이춘혁씨(오른쪽). 이춘혁씨는 이날 바라를 향해 부모님께 꽃을 드렸다.

#6 2007712일     장소 이라크 바그다드 인근 어느 마을

평범해 보이는 이라크 남자들 열 댓 명이 동네 한 가운데서 천천히 걸어 이동하고 있었다. 그 중에는 가방을 어깨에 걸치고 있거나 손에 들고 있는 사람이 있었다. 이 장면은 일 킬로 밖에서 공중선회하고 있는 미군 아파치 헬기 조준 스크린에 선명하게 촬영 녹화되고 있었다. 요란한 아파치 헬기 프로펠러 소리를 듣지 못했을 리 없는 이라크 사람들은 아무렇지 않게 어느 집 대문 앞으로 모였다. 누구 생일축하를 위해 모인 것인지, 아니면 어디 일을 하러 가기 위해 모인 것이지는 헬기 조준 스크린 상에서는 알 수 없었다. 아파치 헬기 조종사는 흑백 스크린에 나타나는 이라크인들 모습을 본부에 전하고 있었다.

모여 있는 이라크인들

그때 아파치 헬기에 청소해버려라는 본부 무전이 날라 온다. 헬기 조종사는 머뭇거림 없이 흑백 조준 스크린 화면에 나타나 있는 이라크인들을 향해 기관포를 난사한다. 기관포를 맞은 이라크인들은 픽픽 쓰러지고 뽀얀 먼지가 일어났다. 오락실 게임기 화면 같았다.

아파치 헬기 기관포를 맞고 쓰러지는 이라크인들

목숨을 잃지 않은 이라크인 한명이 상채를 일으키는 장면도 헬기 조준 스크린 화면에 나타났다. 얼마 후 검은색 봉고 차량이 달려와 아파치 헬기 기관포에 맞아 숨진 사람들을 싣고 있었다.

그 봉고 차량 안에는 어린 아이 두 명이 타고 있었다. 아마도 봉고 운전자 자녀들이 아니었겠나 싶다. 헬기 무전에서는 사격을 계속하여 깨끗이 청소하라는 본부 명령이 날라 온다. 아파치 헬기 기관포는 다시 불을 뿜었다. 살아남았던 이라크인과 봉고를 몰고 온 사람도, 봉고 안에 있던 어린 아이 두 명도, 아파치 헬기 기관포를 맞아 즉사한다.

검은색 봉고 차량 안 이라크 어린 아이들

이어서 미군 지상군 장갑차가 들이닥친다. 아직도 목숨이 붙어 있는 이라크인이 있으면 확인사살을 하려는 것인지 수색을 한다. 그러다 봉고차 안에 어린 아이가 숨져 있는 것을 본 미군병사는 아이를 안고 급히 장갑차로 뛰어간다. 병원으로 이송했던 것인지, 아니면 아이들 죽음을 숨기려 했던 것인지는 알 수 없다. 나머지 이라크인 시신들은 어떻게 처리했는지는 밝혀지지 않았다. 장례절차를 거쳐 땅에 묻어 주었을까? 아니면 학살흔적을 없애기 위해 시신에 기름을 끼얹어 소각처리 했을까?

아파치 헬기 기관포에 의한 이라크 민간인 학살 장면은 20104월 폭록 전문 웹 사이트 위키리크스(Wikileaks)실려 미국의 이라크 주유소 습격사건실상을 세상에 알리게 된다. 미국은 이라크 독재자 후세인이 생화학무기를 숨겨놓았다는 이유를 들어 이라크를 침공했다. 그러나 이라크에 생화학 무기창고는 없었다.

다만 수많은 이라크인 시체만 널려 있었을 뿐이었다. 그 덕분에 미국은 다시 이라크에 친미정권을 심어 놓고 석유 꼭지를 쥘 수 있었다. 뿐만 아니라 중동 국가 중에 미국에 대항하면 어떻게 되는지 무자비한 본때를 보여 주었다. 미국이 심어 놓은 이라크 친미 정권은 아파치 헬기의 이라크인 학살 사건에 대해,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직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

#7 : 1960년대 말 8월 어느 날.    장소: 여수 경찰서 정문 앞

몹시 피곤해 보이는 젊은 남녀가 경찰서를 허적허적 걸어 나왔다. 남자는 헐렁한 양복을 입었고 여자는 한복을 입었다. 안도 이야포 두명안 선착장에서 경찰에 체포된 부부였다. 이야포 몽돌 밭에 앉아 있던 그 차림 그대로였다. 심한 고초를 당한 것이 역력했다.

경찰이 이들 젊은 부부가 간첩이라고 판단하여 체포한 것은 이야포 산기슭 나무 밑에 무언가를 파묻었다는 간첩신고 때문이었다. 그 무엇은 권총이나 난수표가 아니었다. 금가락지였다. 결혼 금가락지를 이들 젊은 부부는 이야포 언덕에 파묻은 것이다. 이를 몰래 눈여겨보고 있던 주민이 간첩으로 오인하여 경찰에 신고 한 것이다.

남자는 195083일 이야포 해상 피난선에 타고 있었다. 미군 폭격기 슈팅스타에 의해 부모를 잃고 고아로 어렵게 살다가 결혼을 하였다. 몇 번을 망설이고 두려움을 이겨내고서야 부모가 돌아가신 여수 안도 이야포를 찾은 것이다. 부모에게 결혼 소식을 알릴길 없어 대신 결혼 금가락지를 땅에 묻었다는 것이다.

그 후, 이들 부부는 이 땅을 버리고 해외로 인민 갔을까? 아니면 또다시 이야포를 찾아 왔을까? 역시 부모를 미군기에 의해 여위고 고아로 살다가 목숨 걸고 1973년이 되어서야 다시 이야포를 찾아 온 생존자 이춘석 이춘송 형제처럼 말이다. …… 그러나 이때는 살아남은 생존자 이춘혁 형제 중 누이 이경애는 세상에 없었다.

1955년에 부산 영도다리에서 몸을 던져 세상을 등졌다. 살아남은 형제 중 가장 나이가 많았던 누이 이경애는 남동생들보다 더 극심한 정신적 충격을 이겨내지 못했을 것이다. 나이 23, 생기가 넘쳐나는 꽃다운 나이에 누이 이경애는 육신을 버려 정신의 고통도 버렸다. 그러나 살아남은 남동생들과 생존자 가족들은 끝까지, 아직까지도 고통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지난 3일 이야포미군폭격사건 추모제 현장에서 본인이 조사.취재한 내용을 설명하는 필자

# 때 : 201983일     장소 : 안도 이야포

폭염 주의보가 내려진 날이다. 이야포 몽돌 밭은 불에 달군 것처럼 뜨거웠다. 마치 폭탄이 터져 뿜어나는 열기 같았다. 미군 폭격기 이야포 학살 사건 69주년 위령제. 여수 지역 신문사 여수넷통이 작년부터 주최하기 시작한 위령제에 참석한 사람은 많지 않았다.

이 자리에 생존자 소년 이춘혁이 노인이 되어 다시 찾아왔다. 구두닦이와 신문배달 택시기사를 하면서 모진 세월을 눈물에 실려 흘려보내왔던 소년 이춘혁은 노인이 되어 버렸다. 생존자 이춘혁 노인은 필자를 만나자 마자 폭격사실을 알린 안내문이 어디에 세워졌는지 물어보았다.

그리고 부모를 만나러 가듯이 허적허적 뛰어갔다. 그리고 신문사 여수넷통이 힘써서 세운 이야포 학살 안내판 앞에 서서 한자 한자 또박또박 읽어 나갔다. 생존자 이춘혁님 곁에 서 있는 필자의 귓가에는 비명 소리로 들렸다.

이야포 미군폭격사건(학살사건) 안내판 앞에 선 생존자 이춘혁 씨

혼자, 오로지 혼자 남았다. 살아남은 형제 중 혼자 남았다. 아마 학살을 증언할 생존자 중 유일하게 살아남아 이야포에 섰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옆에는 학살을 목격한 안도 소년 이서연도 노인이 되어 같이 섰다. 안도 소년이었던 이서연님은 암 투병 중에도 몇 되지 않는 위령제 참가자에게 증언을 하기 위해 힘들게 이야포에 섰다. 그래도 작년 첫 위령제보다 참석 인원이 늘었다.

필자도 오래 전에 이야포 학살 사건을 풍문으로만 전해 듣다 사 년 전부터 진상을 반드시 세상에 알려야겠다고 마음 다지고 수십 번 안도를 찾았다. 그날 학살 사건 때부터 안도에 살았다는 주민이 있으면 찾아가서 증언을 녹취했다. 밭에서 일하시는 할머니가 계시면 조심히 다가가 일을 거들면서 증언을 들어보기도 했다.

그러나 안도에서 태어나 자랐다고 하는 주민들 중 필자가 만난 어르신들은 공통점이 있었다. 비행기가 피난민 배를 때렸다는 것 까지는 말씀들을 해 주셨다. 다만, 필자가 꼭 알고 싶은 시신 처리과정에 대한 질문을 하면 죄다 돌아서버렸다. 거기에 대해서는 잘 모른다거나, 아니면 저쪽 어느 집에 가서 물어보라고 하였다. 딱 한 사람, 밭에서 머위를 캐시던 할머니는 이렇게 말을 흘렸다.

빨갱이가 타고 있었다고 하드만…….”

이승만과 친일경찰 그리고 군부정권 유지를 위해 사용한 만능마취제 절대반공 주술이 부리는 요령소리처럼 들렸다.

또 당시 안도 오지암에서 살았다는 김영자 할머니(82. 금오도 거주. 실명기재 허락 받음)는 산에서 삼을 쪄 말리고 있다가 슈팅스타가 피난선 학살을 목격하였다고 하면서 이렇게 말했다.

나가 삼을 찔라고 연기를 피우고 있었드만 그거 보고 뱅기가 달라들었는가비 아직도 가슴이 벌렁벌렁거리네……….”

학살 이후 이야포에는 해녀들도 몇 년간 물질을 하지 않았다고 덧붙였다.

미군 폭격기 슈팅스타에 의한 이야포 피난선 피난민 학살은 분명히 진상을 밝혀져야 한다. 그건 절대반공 정권에 의해 가려진 역사 비극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이를 대하는 현재 우리의 모습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또한 지금 한반도를 둘러싸고 펼쳐지는 정세가 역사 반복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기 때문에 이야포에 평화공원이 반드시 세워져야 한다.

진상을 밝히기 위해서는 무엇보다 학살을 가 한 전폭기가 어떤 기종이었는지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었다. 그래야 당시 어느 곳에 주둔하고 있었는지 그리고 출격 사실을 밝혀 낼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미군 F-80 슈팅스타 임을 확신한다. 필자가 확신하는 까닭은 생존자 중 몇 년 전에 작고하신 이춘성님이 그린 전폭기 그림이 안도에서 색색이 비행기를 목격한 주민들의 증언과 일치하기 때문이다.

항간에 호주기라는 설도 있다. 하지만 이는 사실과 다르게 안도 주민들의 오해에 의한 것이다. 우선 한국전쟁 초반에 투입된 호주기는 슈팅스타처럼 제트엔진이 아닌 프로펠러 엔진이다. 흔히 어른들이 무스탕이라고 불렀던 F-51 머스탱Mustang 기종이다.

호주 공군이 사용한 F-51 머스탱기

호주는 이 전투기를 미군으로부터 불하받아 한국전쟁에 보내 미 제 5 공군 작전지휘를 받았다. 이는 공군본부가 발행하는 공군사 1 집 증보판에 실려 있다. 호주가 제트엔진 전투기를 사용한 것은 1951년 이후 영국제 글로스터 마티어(Gloster Masteor)라는 T7- A77 기종이다. 따라서 195083일 이야포에 나타난 비행기 기종에서 '호주기'는 완전 배제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호주기'로 불리었던 까닭에 대해 안도 어촌계 사무실에 만난 안도 최고령이라고 하는 할아버지는 이렇게 답을 주었다.

! 그때 호주댁(이승만 부인)이 우리나라 도와주려고 보내 준 비행기 아녀?”

그러니까 오스트리아 출신 프랜체스카를 호주(오스트렐리아Australia)출신으로 착각한 것이다. 당시에는 오스트리아와 오스트렐리아(호주) 많이 착각 하였다고 한다. 아무튼 이야포 학살 전폭기가 슈팅스타인지는 이날 생존자 이춘역 옹과 목격자 이서연 옹으로부터 재차 확인을 거쳤다.

다음으로 고 이춘송님이 그린 피난선 모습과 유사한 배를 찾아내어 역시 생존자 이춘혁 옹과 목격자 이서연 옹으로부터 확인하였다. 다만 사진의 배 보다 좀 더 길고 배 뒤편이 나무로 이어 만든 복층구조라는 것도 증언 받았다.

추정되는 피난선 모습

여기까지가 필자가 자료와 증언을 통해 알아낸 사실들이며 한계다. 필자나 여타 개인의 힘으로는 슈팅스타 전폭기 기지 및 작전일지 등은 입수 하여 학살 사실을 증명해 낼 수 없다.

국가기관이나 언론이 나서지 않고서는 증명해 내기 어렵다. 따라서 우선 여수시 의회부터 나서줘야 한다. 관광객 천만 여수이면 무얼 하는가. 역사와 현재에 대해 눈 감고 관광도시로만 존재해서 관광객이 무얼 얻고 가겠는가.

이승만 분단획책과 제주도 학살을 거부하고 떨쳐 일어나 항쟁한 자랑스러운 여수에 지금까지 역사관이나 항쟁 위령탑조차 없는 판국에 여수사람들도 아닌 피난민이 학살 당 했다고 해서 여수시에서 눈길이나 주지 않을 것이라고 여기는 것은 필자의 너무 서투른 예단일까? 아무튼 역사적 사건이 일어난 곳에 위령탑이나 기념관이 없는 곳은 여수뿐일 것이다.

지난 3일 이야포 추모제 현장

#  에필로그

역사를 밝히는 작업은 사실의 단순 나열이 아니다. 조립이며 형상화 시켜 가려진 모습을 선명히 들여다보게 하는 것이다. 필자는 그동안 취재를 통해 얻은 증언과 자료 등을 종합하여 일정 가공하여 간략하게 이야포 학살에 대해 조립 형상화 시켜 보았다. 그러던 중 지금 일각에서 국부라 칭송하는 이승만이 했던 발언 중 하나가 떠올랐다.

미군 전폭기에 의한 무차별 폭격으로 한반도이곳저곳에서 폭살이 이루어지고 있던 1951년 이승만은 외신과의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한국국민들이 자기 집이 파괴되는 것을 눈앞에서 보는 것은 무서운 일이나, 그들은 그것을 묵묵히 참고 차라리 가옥이 파괴될지언정 적에게 나라를 뺏기어 독립된 국가에서 자유민으로 살 수 없는 것을 원치 않는다.”

이런 흉악한 권력언사에 대해 작가 조지 오웰은 이렇게 말 했다.

political language is designed to make like lies sound truth and murder respectable, and to give the appearance of solidity to pure wind  (정치언어는 거짓말이 진실하도록 보이게 만들며 학살행위는 훌륭하며 순수한 임무 행위로 보이도록 한다,)

지난 3일 추모제 마지막 순서에 참석자들이 당시 희생자를 기리며 바다에 헌환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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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제 2019-08-12 18:32:14
이야포 학살에 관련해서 추가 사실이나 에피소드 알고 계신분의 정보제공을 기다립니다.
김말이 2019-08-11 19:30:34
우와~
잘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