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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영제 기고] 한반도 식민지 근대화 도시, 여수

식민지 근대화 도시 여수는 '수혜' 아닌 '수탈'과 '착취' 당한 도시
식민지 근대화론자는 '뉴라이트'로 대표돼...모든 걸 경제논리로
위안부는 성노예가 아닌 자발적 몸을 시장에 판 사람으로 규정
뉴라이트 안병직과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일본 도요타 재단의 수혜자
여수 조선식산은행은 일제강점기 수탈 본거지 역할

  • 입력 2019.08.22 15:37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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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2014년 1월 방송된 jtbc '썰전' 장면

일본 아베 정부가 한국에 대한 전략물자 수출 규제로 인한 ‘노 아베 정권’ 민간운동이 확산 중이다. 이런 와중에 이승만 학당 교장이라고 하는 이영훈 전 서울대 경제학과 교수와 뉴라이트 학자들이 출판한 반일 종족주의 책이 반사적으로 시끄러웠다. 이들 학자들이 주장하는 근간은 한반도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하고 있다.

식민지 근대화론은 요즘 갑자기 나타난 것이 아니다. 꽤 오래 전부터 안병직 전 서울대 교수를 필두로 하는 학자들이 주창해 왔다. 이들 학자들은 스스로 뉴라이트라고 부른다. 뉴라이트 학자들은 박근혜 정권 때 불거진 국정교과서 문제에서도 자신들의 논리를 관철시키려 노력했고, 이승만을 국부로 신격화시켜 4.19 기념사업회 회원들로부터 거센 항의를 받기도 했다.

이들 뉴라이트 학자들은 조선여성 위안부는 일본군 성노예가 아니고 거래관계라고 주장한다. 즉 매춘이라는 것이다. 조선 여성들이 시장경제 하에서 자발적으로 육체를 시장에 내다 판 것이고 이를 전시 하에 제도화 된 것이 공창이라고 주장한다.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 이승만 학당 티비 강연 캡쳐

뉴라이트 학자들의 논리 바탕인 식민지 근대화론을 아주 거칠게 압축하자면 이렇다.

전 국민의 대부분이 농어민으로서 일차 생산물을 생산하고 사회구조는 왕조체제로써 생산관계는 지주와 소작관계 속에 있었다. 그런데 일본이 한반도를 식민지화 하면서 비로소 근대적인 경공업 생산체제와 봉건사회에서 탈피하여 반봉건사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즉 한반도가 근대화 사회로 접어들게 되었다. 이전까지 한반도는 사회내부 전통적 구조 때문에 근대화가 지체되고 있었다. 이를 일본이 한반도를 반식민지화(완전한 지배가 아니라고 주장) 하면서 산업화 기초를 형성하게 만들었다. 농업구조에서 산업구조로 바뀌고 노동력도 상품화 되면서 산업자본주의 기초를 마련했다. 시장경제가 마련된 것이다.

뉴라이트 학자들이 주장하는 식민지 근대화론에 입각해서 보자면, 여수는 대표적인 일제 식민지 근대화 수혜 도시다. 지금도 그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서 식민지 수혜도시임을 증명하고 있다. 여수 중앙동에 식산은행 건물이 아직도 굳건히 서 있다. 일제 조선총독부 산업정책을 동양척식주식회사와 함께 금융 지원한 은행들의 통합체가 식산은행이다.

여수 식산은행

식산은행은 일제가 패망하고 나서 미군정은 ‘신한공사’로 상호만 바꿔서 적산을 관리했다. 한국전쟁 후 1954년에 설립된 한국 산업은행 전신인 식산은행은 중일전쟁 중에 조선의 자본을 흡수하여 일본군 군비를 마련하는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경제수탈 본거지다.

말하자면 여수 농어민들에게 사채나 다름없는 고리대금업 창구인 것이다. 식산은행에서 농경지를 담보로 고리 사채를 빌려 쓴 여수 농어민들은 이자라도 갚아 농경지와 배를 빼앗기기 않기 위해서는 죽어라고 쌀을 생산하고 고기를 잡아야 했던 것이다. 그래도 원금은커녕 이자조차 내지 못하면 결국 땅을 빼앗기고 자신의 노동력을 시장에 내다 팔아야 했다. 

농어민에서 노무자로 전락한 여수 사람이 어디로 가야 했을까. 아마도 철길 놓는 데 가서 일을 해야 했을 것이다.

일제강점기 여수역

일제는 만주침략을 넘어 중국대륙을 집어삼키기 위해 쌀 등 군수물자를 실어나를 기차가 필요했다. 여수는 일본 시모노세키와 가깝고 호남 곡창지대 쌀을 모아 일본이나 전쟁터로 보낼 수 있는 군수물자기지였다.

기차선로를 놓기 위해서는 마래산에 굴을 파야 했는데 그게 여수사람들이 ‘만성리 굴’ 이라고 하는 마래터널이다. 만성리 굴은 '꾸리'라고 하는 중국인 노동자와 조선이 노동자의 정질로만 뚫어진 터널이다. 지금은 관광객 낭만을 싣는 바이크선로가 되어 있지만 뉴라이트 학자들이 주창하는 초기 산업자본주의 이행과정을 상징적으로 보여 주는 기찻길이다.

또 일제는 군수물자를 보내고 농수산물을 수탈하기 위해 근대식 항구가 필요했다. 그게 오동도 옆 신항(요즘은 지명이 뭔지 모르겠다)이다. 신항을 만들기 위한 오동도 방파제 축조 공사를 했고 여기에는 많은 조선인 노무자가 동원됐다.

오동도 방파제 축조공사

조선인 노무자는 처음부터 노동자가 된 것이 아니고 소작이나 자작노농 또는 어민이었다. 그러니 뉴라이트 학자들 주장대로 하자면 고용과 노동이라는 산업자본주의 형태가 맞는 것이다.

그럼 식산은행에서 빌린 대출 이자를 갚지 못해 배를 빼앗긴 여수 어민들은 어디로 가야 했을까. 아마도 항구 노무자로 일을 해야 하거나 제빙공장에서 얼음을 만들어 일본으로 가는 배에 싣지 않았을까.

여수 인근 황금어장에서 잡힌 고기가 상하지 않은 채 일본 본토 사람들 밥상에 올려 지기 위해서 얼음이 필요했고 그래서 세워진 제빙공장 건물이 아직도 여수에는 고스란히 남아있다.

일제강점기 여수 제빙공장 건물 모습

어디 그뿐이랴, 일제황국식민지 의식을 주입하기 위해 서당을 부수고 세워진 학교는 또 어떤가. 조선인 어린 학생들을 모아 황국사관을 심어 주었던 서초등학교, 일본인 자녀들과 친일파 조선인 소수 자녀가 다녔던 동초등학교와 더불어 여수 부속 섬에도 일제 학교가 세워졌으니 뉴라이트 학자들이 말하는 식민지근대화 수혜 도시임이 틀림없는 것 같다.

그런데 이러한 식민지 근대화가 수탈과 지배를 위해 이행된 수탈과정인 것이지, 어디 그걸 근대화과정으로 볼 수 있겠는가. 물론 뉴라이트 학자들은 식민지 수탈론을 이리저리 부정한다.

그렇다면, 봉건체제와 생산구조를 갖고 있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면서 초기산업 근대화 과정이 이식되었다면, 차라리 영국이나 프랑스 미국 식민지가 되었다면 더욱더 근대화를 이루어졌을 것이라는 주장은 왜 안 하고 일제만 고집하는지 모르겠다. 또한 한반도가 일제 식민지가 아니었고 주권 국가로 지속되었다면 자주적 근대화는 불가능했다는 것인지도 묻고 싶다.

아주 허약하지만 교묘한 뉴라이트 계열 학자들은 자신들의 주장을 굽히지 않는다. 오히려 강화되어 가끔씩, 그러나 지속적으로 사회이슈화 되어 등장한다. 이들의 심리는 어떻게 구성되어서 사이비 종교 집단처럼 되는 것일까. 이런 심리구조를 두고 강자의 논리를 자기내면화 시키는 약자의 근성이라고 부른다. 이들 강자의 논리에 휩쓸리는 대중의 심리를 식민지 트라우마라고 부른다.

쉽게 표현하면, 지식인은 자신의 존재를 위해 강자에게 빌붙어 혼이고 정신이고 마음이고 스스로 개조하는 것이며 대중은 강자에게 붙지 않으면 왠지 불안한 것이다. 그래서 한반도를 삼십 육년간 식민지로 삼고 삼년간 미군지배 시기와 한국전쟁을 경험했던 일부 대중은 일본과 미국에 대한 강자에 대한 경험이 트라우마로 남아 광화문 보수 집회에서 성조기와 일장기를 흔드는 것이다. 불안한 심리에 나부끼는 깃발인 것이다.

광화문 보수 집회 성조기와 일장기

정작 의문이 드는 것은 뉴라이트 학자들이 왜 기생적 논리에 스스로 빠져들어 헤어나지 못하고 오히려 식민사관를 강화시키는 것인가 하는 점이다. 지식인이고 학자인 그들은 왜 일본 극우 학자들 논리를 그대로 이식하는 것일까. 더구나 안병직 같은 학자는 한때 진보적이기까지 했다. 왜 진보적 지식인이 변질되어 극우보수 식민사관을 전파하는 것일까. 그들은 언론에 대고 당당히 학문적 연구 성과임을 주장한다. 과연 정말 학문적 연구결과에 따른 양심의 발로일까.

전혀 그렇지 않다. 뇌가소성(腦可塑性) 때문이다. 가소성(可塑性. plasticity)이란 외부에 의한 반응으로 일정 성질이 변화하는 물리적 성질을 말한다. 즉 물질이 외부의 압력을 받으면 압력을 제거해도 원형복원이 안되고 변형되어버리는 성질이다. 뇌도 마찬가지다. 외부의 어떤 압력이 뇌에 가해져 신경회로망에 흔적을 남기는 것이다. 즉 뇌에 길이 새롭게 나는 것이다. 그때부터는 뇌에 새로 새겨진 회로에 따라 움직이게 되는 것이다. 그 시점이 바로 변절기점인 것이다.

그럼 그들의 뇌에 새로운 길을 만드는 외부의 압력이란 무엇일까. 여러 가지 요소들이 있겠지만, 아주 간단명료한 것은 잘못된 존재의식과 돈이다. 특히 돈은 사람의 정신을 개조하는 강력한 압력수단이다. 이완용이 대표적 인물이다. 나라를 일본에 팔아먹은 친일 매국노 이완용은 과거에 급제한 수재다. 지금으로 말하면 사법고시나 행정고시에 합격하여 관료가 된 사람이다. 그리고 일제의 탄압을 피하고자 고종을 러시아 공사관으로 피신시킨 아관파천의 주역이기도 하다. 즉 처음부터 친일파과 아니라 친러파였다. 그러다 다시 친미파 그 다음에는 친일파로 돌아섰다.

이완용이 친일파가 된 자기 논리는 정교했겠지만 그건 일제로부터 금은보화를 하사 받아 조선 제2의 갑부가 되는 지름길로써의 논리였다. 이완용을 친일파로 돌아서게 만든 것은 결국 백작이라는 일본 작위와 돈이었다. 그게 바로 친러파 이완용이 뇌가소성을 일으켜 친일파로 전향시킨 외부압력인 것이다. 

지금의 한국의 극우 뉴라이트 학자들도 마찬가지다. 뉴라이트 대표 학자 안병직과 그의 제자 이영훈 전 서울대 교수는 누구에게 학술자금 명목으로 돈을 받아 식민사관을 주창하는가. 일본 도요타 재단으로부터 학술연구비 명목으로 돈을 받지 않았는가.

안병직 도요타 재단 금품 수수 기사

친일학자를 양성하는 곳이 어디 도요타 재단뿐이랴. 일본 전범으로 도박 사업으로 재벌이 된 사사카와 료이치가 만든 사사키 재단에서는 국내 모 명문사립대에 100억 엔을 아시아 연구기금 명목으로 지원하여 친일학자를 양성해 내지 않았는가.

모 대학 아시아 연구실

그렇게 양성된 친일학자가 모 정당 혁신위원이 된 적도 있었다. 일본 극우의 한국 침략은 요즘 전략물자수출제한 조치 이전부터 지속적으로 친일세력을 길러내고 있었다. 

일본 극우재단이 양성해 낸 한국 뉴라이트 학자들이 모여 있다는 이승만 학당. 한국전쟁 때 국민을 놔두고 대전으로 먼저 도망가서 사기방송을 했던 이승만. 그것도 모자라 일본으로 망명신청까지 했던 이승만을 국부를 넘어 신격화 시키며 식민지 수탈을 근대화로 둔갑시키는 이들의 학술 행사비는 누가 마련해 주고 있는 것일까.

일제 식민지 근대화 도시로 수혜가 아닌 수탈과 착취를 당한 도시, 여수가 관심 가져 볼 만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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