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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상을 시작하다

'춤추는 정원' 연재 (5)
명상으로 내면에 있는 혼돈의 세계와 마주해
혼돈의 세계를 통과하자 비로소 평화가 찾아와

  • 입력 2019.09.24 09:00
  • 수정 2020.04.25 17:18
  • 기자명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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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소개글]
 
여수시 돌산읍에서 정원을 가꾸며 느낀 감동과 깨달음을 적어 나간 작가 최미숙(55, 필명 '환희')씨는 여수에서 태어나 자라고 10년 정도 약사로 일하다 접고 고향 여수에서 15년간 가꾼 정원 이야기를 책으로 썼다. 그 책이 <춤추는 정원>이다. 저자의 양해를 받아 책의 내용 일부분 편집해 싣고 있다.

매일 아침 눈을 뜨면 가장 먼저 정원으로 달려나간다. 아기를 쓰다듬는 엄마처럼 꽃과 나무를 어루만지며 정원을 빙 둘러보는 일로 내 하루는 시작된다.

때로는 나무에 올라 탄 넝쿨들을 걷어주고, 꽃잎에 붙은 벌레도 털어 낸다. 맨손으로 식물을 만지다보면 손은 거칠어지지만 어여쁘게 자라나는 생명을 보면 그것마저 기쁨이 된다.

자연을 가만히 관찰해보면 식물이나 동물은 ‘명상’을 일상적으로 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비바람에 흔들리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고요하게 존재한다. 먹이를 구하고 짝짓기를 하는 등 생존을 위해서 치열하게 활동하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고 그저 ‘머무르는’ 상태로 존재할 때가 많다. 오직 인간만이 자신을 가만히 놔두지 못한다. 끊임없이 내면은 떠들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오쇼는 인간 자체가 ‘질병’이라고까지 표현했다. 정상인과 정신병자의 차이도 이 내면의 지껄임이 밖으로 나오는가 그렇지 않은가 하는 차이에 불과하다고 했다. 그럼 대체 이 내면의 목소리는 누구의 목소리인가. 이 목소리가 바로 ‘나’일까.


세상에서 가장 쉬운 명상, 바라보기

나는 주로 내 스승이 정립한 ‘바라보기’ 명상법을 수행한다. 좌선을 할 때는 호흡과 마음을 바라보고, 요가나 기체조 등 몸 수련을 할 때는 몸을 관찰한다. 일상에서도 내 행동을 자각된 의식으로 바라본다.

언뜻 불교의 위파사나 수행과 유사해 보이지만 ‘바라보기’ 명상법은 불교적 집단주관이 없는 담백한 수행법이다. 세상에서 가장 쉬운 명상법 같지만 이 쉬운 명상법 앞에서 몇번이나 좌절했는지 모른다. 눈만 감으면 펼쳐지는 온갖 잡념 속에서 마음을 고요히 가라앉혀 바라본다는 것은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었다.

명상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지고 평화로워진다는 생각은 순전히 편견이었다. 1에서 10까지 호흡에 맞춰 숫자를 세는 그 짧은 순간에도 오만 가지 생각이 밀려들었다.

혹시 나는 명상이 맞지 않는 사람은 아닐까. 타고난 끈기가 너무 부족한 것은 아닐까, 하루에도 수십번씩 회의감에 빠졌다.

공부가 깊어진 뒤 알게 된 사실이지만 명상에서 이런 현상을 겪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것이었고 오히려 이렇게 자각한다는 것 자체가 제대로 공부하고 있다는 반증이기도 했다.

명상을 통해 감각을 차단하고 표면의식 활동을 저하시키면 의식 아래에 흐르는 무수한 사념의 실체가 드러난다. 따라서 명상을 한다는 것은 곧 자신의 의식세계에서 펼쳐지는 알 수 없는 혼돈의 세계와 마주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 혼돈의 세계를 통과해야 비로소 고요함과 평화를 맛볼 수 있다.

그렇게 내 일상은 서서히 변하고 있었다. 가장 먼저 거칠고 기복이 심한 감정들이 순화되면서 점점 평화로워지기 시작했다.

 

신비로운 꿈

원래도 꿈을 잘 기억하는 편이었지만 명상을 하고 난 뒤부터 꿈이 더 선명하게 기억났다. 소위 ‘자각몽’ 상태로, 꿈속에서도 꿈을 꾸는 일이 잦아졌다.

분명 내 의식세계에서 벌어진 일인데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이 현상을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그 신비한 꿈의 세계를 밤마다 탐구하는 자세로 마주했다.

소위 말하는 ‘영적 계시’가 담긴 꿈도 가끔씩 꾸곤 했는데 그와 관련된 꿈 하나가 지금도 잊히지 않는다.

어느 밤, 명상을 하던 나는 깊은 절망을 느꼈다. 아무리 명상을 해도 마음을 평화롭게 다잡아도 내가 원하는 만큼 변하지 않은 현실에 대한 회의였다. 그 절망감을 안고 잠이 들었는데 그날 꿈에 부처님이 나타나셨다.

부처님이 펼친 책에는 한 번도 본 적 없는 글씨가 가득했다. 그림 같기도 하고 한문 같기도 했다. 고개를 드니 부처님은 그저 입가에 웃음만 띠고 계셨다.

얼마 안 가 또다시 꿈속에 부처님이 나타나셨다. 다시 한 번 간절히, ‘지금 저에게 가장 필요한 가르침을 주소서’ 하는 마음으로 정성을 다해 절을 올렸다. 서서히 고개를 드니 커다란 한자가 정확히 눈에 들어왔다. 상근上根. 자신에 대한 믿음 부족으로 좌절감에 빠진 내게 그 두 글자는 우주가 보내준 격려와 지지였다.

꿈을 꾸고 난 후에야 비로소 자신감을 갖게 됐다. 영적 여정에서 이런 내면의 격려와 지원은 큰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런 현상은 꼭 특별한 사람이나 특별한 경우에만 일어나는 것은 아니다. 주변의 도반들에게도 빈번히 일어나는 현상이었다.


세계관의 변화

바로 이 시기가 물질이 의식을 지배한다는 ‘유물론적 철학’에서 모든 현상은 의식의 표현이고 산물이라는 ‘유심론적 철학’으로 내 세계관이 대전환을 이루던 때였다. 눈 앞에 펼쳐진 세계는, 그게 무엇이든 내 의식의 반영이라고 생각하자 많은 문제의 실체가 파악됐다.

‘지금 이 투쟁적인 삶은 나의 의식에서 벌어진 투쟁적 세계의 투영이구나. 이 투쟁적인 의식 세계를 바꾸지 않고는 나의 삶은 영원히 전쟁일 수밖에 없구나.’

쉽지는 않았지만 명상을 통하여 조금씩 거친 에고를 부드럽게 바꿔갔다. 더딘 과정이었지만 조금씩 평화가 찾아왔다.

명상을 접한 지 20년이 넘은 지금, 나는 유심론자도 유물론자도 아니다. 의식과 물질은 하나이기 때문이다. 세상 모든 것은 의식의 표현이지만 동시에 모든 물질은 의식을 지배한다.

명상은 모든 것을 분리하는 ‘지성’의 세계에서 한 발 더 나아가 모든 것이 통합되어 있는 광대무변한 ‘의식’의 세계로 나아가는 과정이다. 물론 현실에서 지성은 여전히 중요하다. 하지만 지성만으로는 고통스런 현실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바로 이 시기, 나는 굽이굽이 조그만 골짜기를 급하게 내려오는 물줄기처럼 새로운 영성의 바다로 빠르게 흘러가고 있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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