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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청도 중식당에서 '백반' 시키면 나오는 것

수목이 무성한 큰 섬, 대청도의 매력에 빠지다

  • 입력 2019.10.08 11:33
  • 수정 2019.10.08 13:44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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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각변동을 보여주는 해변가 암석 모습 ⓒ오문수

서해 5도의 대표적인 섬 중 하나인 대청도에 들렀다. 푸른 바다 건너 아스라이 보이는 북한 땅을 바라보면 가슴 아픈 섬이다. 인천에서 북서쪽으로 202㎞, 북한 황해도 장산곶과 불과 19㎞ 떨어진 국가안보상 전략적 요충지다. 15.56㎢ 면적에 최고점은 삼각산으로 1307명(2019년 2월 기준)의 주민이 살고 있다.  

백령도 구경을 마치고 대청도에 들르니 점심시간이다. 눈에 보이는 중식당으로 들어갔다. 짜장면, 짬뽕, 탕수육 등 일반적인 중화요리가 나열된 메뉴판을 훑는데 그 사이에서 이색적인 메뉴가 눈에 띄었다. '백반'이었다. 중식당의 백반은 과연 무엇이 다를까 궁금해 그것으로 주문했다.

대청도 소재 중화요리 식당에서 내놓은 식탁모습. 손님상을 돌아다니며 "더 잡숴요!"라고 권하는 주인아주머니의 푸짐한 인심을 느낄 수 있었다 ⓒ오문수

흰밥에 국과 생선 구이, 김, 몇 가지 반찬이 나왔다. 여느 한식 밥상과 다를 바 없었다. 그래도 반찬이 푸짐하게 나와서 마음에 들었다. 반찬 가짓수보다 더 푸짐한 것은 주인 아주머니의 인심이었다. 그는 수시로 돌아다니며 손님들에게 말을 걸었다.

"더 잡숴요!" 

그 모습이 인상적이어서 나도 주인에게 말을 걸었다.

"모든 손님들에게 언제나 그렇게 더 잡수시라고 권해요?"
"예! 밥이 부족한 손님들에게 좀 더 잡수시라고 권하는 거예요."


그의 말투를 듣고 보니 내 고향 사투리와 비슷해 "어디서 왔느냐?"고 물었다. 벌교란다. 전라남도 벌교에서 이 먼 곳까지 왔다는 게 의아했다. 손님이 뜸해진 시간을 틈타 그가 살아왔던 이야기를 들었다.

"육지에서 살다 남편 고향인 대청도에 들어온 지 13년째"라는 주인에게 "사는 게 힘들지 않느냐?"고 묻자 바로 답이 돌아왔다.

"겁나게 힘들어요. 징허게 힘들어요."

9.7톤짜리 어선을 운영했던 남편은 대청도에서 고기를 제일 많이 잡았다. 하지만 9월 어느날 꽃게잡이를 나갔다가 통발에 맞고 닻줄에 감겨 바다에 빠져 영영 돌아오지 못했다.
다시마를 말리고 있는 대청도 주민들 모습 ⓒ오문수

그녀는 선장과 선원을 구해 배를 운영하지만 구하기가 힘들다. 대청바다에서는 꽃게, 우럭, 노래미, 소라, 삼치 등이 잡히지만 3년 동안 고기가 잡히지 않고 있다. 중국배가 쌍끌이 그물로 다 잡아가면서 고기 씨를 말려 버렸기 때문이다. 다행인 것은 아들이 면사무소에 근무하고 있다. 아들은 서해 5도 특채로 면사무소 직원이 됐다.

"문화 혜택은 적지만 정부 보조가 많아 살기가 괜찮아요. 노후주택 개량사업을 신청하면 4천만 원을 보조해줍니다. 그래서인지 살기는 괜찮아요. 인심좋고 먹을거리가 풍부합니다. 사람들이 순수해서 외부 관광객들이 들어와도 바가지를 씌우지 않아요."

 

수목이 무성한 큰 섬

기린소나무가 울창하게 우거진 모래울해변 모습. 대청도로 유배당한 원나라 순제가 소나무림과 모래울해변이 보이는 이곳에서 산책하던 중 이곳 소나무를 바라보며 "아들을 가져다 주는 기린송이로구나!"라고 하였다. 중국에서는 기린송이 아들을 가지고 온다는 전설이 내려오고 있다 ⓒ오문수

대청도의 유래를 살펴보면 흥미로운 점이 있다. 조선 명종은 인순왕후의 신병으로 전국팔도 관찰사에게 뽕나무에 맺혀진 '상기향'을 구하도록 명했다.

그러던 중 이곳 내동에서 그 상기향을 구했고, 인순왕후의 병이 완쾌됐다. 명종은 '암도를 방치할 수 없다'면서, 그때부터 수목이 무성한 큰 섬이라는 뜻의 대청도라고 칭했다.

대청도 옥죽동해변에는 해안침식으로 생긴 모래가 계속 쌓이고 있어 모래사막같은 모습을 연상케한다. 모래위에 낙타조형물을 세워 사막같은 느낌을 준다 ⓒ오문수

대청도에는 한국에서 쉽게 볼 수 없는 독특한 풍경이 있다. 이른바 '한국의 사하라'로 불리는 옥죽동 해변 뒤쪽에 펼쳐진 모래사막이다. 북풍이 세게 불어와 해변에 쌓인 모래가 모래산을 만들고 골짜기를 만들어 사하라 사막 같은 이국적 풍경을 만들어냈다. 현지 택시 기사의 설명에 따르면 "모래 해변은 지금도 계속 확장되고 있으며 옹진군에서 관광자원으로 활용할 계획"이란다.

옥죽동 인근을 지나던 택시 기사가 흥미로운 이야기를 전했다. 대청도는 고려 충혜왕시절 원나라 마지막 황제(순제)가 11세 태자 시절 600여 명의 식솔과 함께 옥자포(지금의 옥죽동)로 들어왔던 곳이다. 그들은 현재 대청초등학교 자리에 궁궐을 짓고 1년 5개월간 귀양 생활을 하면서 삼각산과 소청분바위 등에서 경치를 즐기고 망향의 한을 달랬다고 한다.

"옥파골은 황제의 암자가 있었던 곳으로 여러 가지 유물이 나왔는데 주민들은 평범한 놋그릇인 줄 알고 개밥그릇으로 사용했다고 합니다. 어느 날 도회지에서 몸이 아파 휴양차 온 사람이 노인네 집에 놀러 갔다가 기물(향로, 촛대, 제기)을 방치한 것을 보고 '영감님께 돈을 드릴테니 파세요' 하자 '담배갑이나 주라'고 해서 풍년초 잎담배 24갑을 주고 물물교환했답니다."

"나중에 유물의 값어치를 안 노인은 얼마나 억울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바닷가를 향해 한참을 가는데 택시 기사가 "여기 이곳은 꼭 봐야 할 곳입니다"라고 말하며 차를 세웠다. 그곳에는 매바위전망대가 있었다.

매바위 모습. 대청도는 송골매의 일종인 '해동청' 채집지였다. 고려시대 귀족층에서는 매사냥이 성행했었고 매사육 및 매사냥을 담당하는 '응방'이 있었다 ⓒ오문수

매바위전망대에 올라 경관을 바라보면 새가 날개를 펼치고 날아가는 형상을 한 매바위가 보인다. 대청도는 예부터 송골매의 일종인 '해동청'의 채집지였다고 한다. 대청도 서내동에는 '매막골'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어 예부터 매를 기르고 훈련시키는 '매막'이 있었음을 추측할 수 있다.

고려시대 귀족층에서는 매 사냥이 성행했다. 고려 충렬왕은 매 사육과 매사냥을 담당하는 '응방'이라는 관청을 두기도 했다. 몽골의 매사냥 전통이 이 섬에까지 흘러들어왔음을 알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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