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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해란 무엇인가

'여순항쟁'을 '반란'으로 주장하는 보수단체, 존재감 상실 우려에 대한 불안감에서 나온 행동
특혜의식이 잔존하고 이를 이용하는 세력이 잔존하는 한 화해는 어려워
여수 시민은 방관자적 태도에서 벗어나 진실과 정면으로 마주해야

  • 입력 2019.10.17 06:05
  • 수정 2019.10.17 14:22
  • 기자명 양영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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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해 예울마루 전시장에서 열린 여순항쟁 뮤직토크 모습

여수넷통 기사에 여순항쟁 71 주년 추념행사 준비를 분주히 하고 있다는 소식이 올라왔다.

해가 갈수록 여순항쟁 추념행사는 규모가 커지고 문화행사도 다양해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 같다. 작년 70주년에도 화해와 상생을 위해 여러 행사가 있었고 민간인 희생자와 군경 유족까지 추념 대상으로 하여 화해의 장이 되도록 노력했었다.

그런데 추념행사 규모가 커질수록 더욱 허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왜일까 . 작년 추념행사장에서처럼 보수단체 회원의 ‘반란’이라는 발언이 또다시 나올까봐서가 아니다. 그게 어찌 여수 보수단체회원 한 사람만의 주장일까. 대한민국에서는 여전히 ‘여순항쟁’을 ‘반란’으로 주장하는 사람들이 상당수 존재하고 있는 것이 현실이다. 존재하되 불안한 존재의식 때문에 태극기를 부적처럼 흔드는 사람들이 서울 광화문 서울역으로 모여든다.

2019년 3월 1일이었고 북미정상 하노이 회담이 결렬된 다음 날이었다. 현 문재인 정부는 서울 광화문에서는 삼일절 백주년을 맞아 행사를 하고 있는 동안 보수 태극기 단체들이 따로 행사를 가졌다. 그런데 보수집회에 대수장 (대한민국수호 예비역 장성단)회원들도 참가했다.

지난 1월 30일 열린 대수장 창단 모습

보수집회에 참석하여 태극기와 성조기를 든 대수장 회원에게 어떤 기자가 북한과 미국의 하노이 회담 결렬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예비역 장성은 잘된 일이라고 거침없이 대답했다. 왜 그렇다고 생각하는가에 대한 질문에 대답 없이 태극기와 성조기만 힘없이 흔들었다. 그 모습에서 존재의 불안감을 쉽게 읽어낼 수 있었다.

아마 남북대결 긴장상태가 완화되면 그동안 자신들이 대결 긴장으로 누려왔던 국가안보 주역으로서 존재감이 희미해지기 때문이리라. 자신을 지탱하고 있는 존재의식이 남북화해에 의해서 무너지는 것뿐만 아니라, 그동안 분단 절대반공 국가에서 사회적 인정을 통한 존재감이 허물어지기 때문이다.

그중에서 남북분단 대결로 특혜를 누려왔던 이승만과 친일잔존세력들과 새롭게 이를 자신의 입지 발판으로 삼으려는 신보수 사람들이 광화문이나 유튜브 방송을 통해서 분단과 대결긴장구조를 형성유지하려고 몸부림치고 있다.

이는 2차 대전 후 새롭게 편성되는 세계질서 속에 한국 현대사를 객관적으로 인식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승만으로부터 시작된 분단 독재정권 연장선상에서 생성 및 강화된 절대 반공이데올로기가 화석화되며 이것이 현재 민족적 진실과 충돌한 보수 태극기집회라는 괴이한 모습들으로 나타나고 있다. 민족분단과 군사적 긴장대결국면에서 사회적으로 존재감을 인정받았던 이들은 남북화해국면이 자신들의 존재감을 약화시키기 때문에 결코 받아들일 수 없는 것이다.

이런 분단 특혜존재의식이 잔존하고 세력이 형성되어 있는 이상, 이를 이용하려는 정당이 현존하는 이상, 과거 반민족적 정권유지를 위한 분단 획책으로 일어난 국가폭력 가해자와 피해자가 서로 화해하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다.

여수 보수단체 심포지움

특히 여수, 순천지역에서 화해는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화해를 하려면 먼저 해원이 선행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고 그러려면 진실이 먼저 바로 세워져야 한다.

그런데 여수 지역사회에서조차 여순항쟁이라는 명칭을 떳떳하게 부르지 못하고 주저하는데 어떻게 진정한 화해가 이루어질 수 있을지 궁금하다 .

또한 항쟁이라는 진실구축에 극구 반대하면서 두리뭉술하게 사건으로 치부하자는 사람들이 있다는 것을 안다. 이것은 역사에 대한 기만에 불과하다. 덧붙여 거친 표현을 쓰자면 역사적 죽음을 소유화하여 자신이 제례주관자임을 자임하겠다는 것이나 다름없다.

여순사건의 본질적 성격은 반란도 사건도 아닌 엄연한 ‘시민항쟁’ 이라는 것은 이제 피할 수 없는 역사적 사실이다.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된 후 반란은 두 번 있었다. 하나는 박정희에 의한 5.16쿠테타요 또 하나는 전두환에 의한 10.19쿠데타가 그것이다. 반란이라는 용어는 이런 사건을 일컬을 때 쓰는 것이다.

여순시민항쟁은 비록 항쟁의 촉발점이 제주도 학살명령을 거부한 14연대 봉기군에 있었지만, 이후 여수 순천을 민족해방구로 만든 주체는 엄연히 여순시민학생들이다. 시민항쟁을 끔찍한 방법으로 진압한 미군과 이승만 진압군의 살상행위가 학살이다. 이 3단계 성격 중 가장 중요한 시민항쟁을 퉁쳐서 모호한 단어인 ‘여순사건’이라고 칭하는 것은 여전히 진실과 성격을 가리는 기만술에 지나지 않는다.

그동안 여순항쟁을 14연대 봉기와 진압군의 학살에만 초점을 두어 이념논쟁과 해원에 매달렸다면 이제부터는 1948년 10월 여순시민항쟁에 대해 자랑스럽게 노래되어야 할 것이다.

더 이상 여수순천은 학살 트라우마를 벗어나지 못해 해원만 애처롭게 부르짖는 도시가 아니다. 반란이라는 올무도 끊어 던져버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상당수 여수 시민들은 방관자적 모습에서 암묵적 동의나 부정을 하고 있다. 골치 아픈 역사를 인정하고 싶지 않는 욕구가 방관자 지대를 형성하게 만든다. 사람들은 상상을 초월하는 끔찍한 일을 제대로 의식하기 어렵고 정면으로 맞닥뜨릴 만한 용기를 쉽게 갖기 힘들다. 따라서 아는 것과 모르는 것 사이에 어렴풋한 점이지대에 살아가는 현존세대가 방관자 지대에 놓여 있는 것이다. 방관자 중에 알고도 암묵적이라면 그건 모르는 것이다.

외면하는 방관자 지대에 놓여 있는 시민들을 일깨우려면 먼저 해원을 갈구하는 피해자 유족들의 개인적인 기억들이 모여 공적인 역사로 승화시켜야 한다. 여기에는 군경유족들도 포함되어야 한다. 그게 진실한 화해가 되는 것이지 공적 역사를 개별적 차원에서 화해상생만 부추겨서는 가능하지 않다. 진정한 화해상생이란 이런 것이다.

“정의롭지 못했던 유산을 고치기 위해 함께 노력하는 것 , 그것은 더 나은 미래를 향한 첫발”

오랫동안 백인 지배 하에서 무수한 탄압과 희생을 치러야 했던 남아프리카공화국 최초 흑인 대통령 넬슨 만델라는 화해를 이렇게 정의했다.

10월 19일 여순항쟁을 기념하지 못하고 피살과 학살로 분리된 추념식만 바라보고 있자면 진정으로 미래를 향한 첫발을 내딛고 있는 것인지, 아니면 세월에 퇴색되어 잊혀져가기만을 바라는 추념인지 아리송하다.

하긴 한국 현대사의 중요 사건이 일어난 지역 중 유일하게 기념탑 하나 없는 도시이고 일회용 합판으로 만든 제단에서 시민항쟁을 추념하니 그럴 만도 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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