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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사건 71주년 기념식 열려... "20대 국회에서 특별법 제정해야"

희생자 가족들 증언 이어져...

  • 입력 2019.10.21 14:03
  • 수정 2019.10.22 09:41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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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일 오전 11시, 여순사건 제71주년 희생자합동추념식이 유족과 시민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이순신 광장에서 열렸다 ⓒ오문수

19일(토) 오전 11시, 여수시 중앙동 소재 이순신광장에서는 유족과 시민 500여명이 참석한 가운데 71주년 여순사건 희생자 합동 추념식이 열렸다.

추념식은 문화공연에 이어 추념사와 헌화 순으로 진행됐으며 이날은 특별히 여수시 전역에 사이렌이 울려 희생자들을 추모했다. 여순사건은 1948년 10월 19일 전남 여수 신월리에 주둔한 국방경비대 제14연대 소속 군인들이 제주 4·3사건 진압을 거부하며 촉발된 사건이다.

이후 1950년 10월까지 약 2년여간 전라남도와 전라북도, 경상남도 일부 지역에서 비무장한 민간인들과 군인, 경찰들이 많은 피해를 입었다. 당시 여수를 포함한 7개지역(여수, 순천, 광양, 곡성, 구례, 고흥, 보성)에서 1만여명이 희생된 것으로 파악됐다.

해방정국이란 시대적 상황에서 발생한 여순사건은 71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진실규명과 희생자 명예회복이 미해결 상태로 남아있다. 이에 반해 역사적 배경이 유사한 제주 4·3사건은 1999년 12월 '제주 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이 제정된 이후 11년 동안 7차례에 걸쳐 추가 조사가 이뤄졌다.

유족들이 헌화하고 있다 ⓒ오문수

2000년 8월부터는 '제주4·3사건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위원회'를 통해 희생자 및 유족을 심의 결정하고 있다. 연단에 오른 여순사건 여수유족회장 황순경씨가 주먹을 불끈 쥐고 여순사건 특별법 제정을 촉구하며 한 말이다.

"오늘 이 자리에는 연로하신 유족분들이 마지막일지도 모를 어려운 걸음을 함께 해 주셨습니다. 이분들이 한 분이라도 살아계실 때 특별법이 빨리 제정되어 명예회복과 진실규명이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소망합니다. 이 나라 정부와 국회는 누구를 위해 존재하는 건지 통탄을 금치 못합니다. 20대 국회 임기 내에 여순사건 특별법을 제정할 것을 강력히 촉구합니다"

 

주승용의원...'치유와 상생을 위한 여순사건특별법' 통과되도록 최선 다하겠다

여순사건특별법 통과를 바라는 유족들의 간절한 소망에 대해 여수 지역의원인 주승용 국회부의장이 답변에 나섰다.

"저는 지난해 11월 300명 국회의원 중에서 106명의 서명을 받아 여순사건특별법을 대표발의했습니다.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에 중점을 두면서도 이제 이념갈등을 떠나 정말 진실로 화합하자는 차원에서 법안명칭도 '치유와 상생을 위한 여순사건특별법'으로 했습니다. 여러 가지 이유로 아직도 국회에 계류 중이지만 통과되도록 최선을 다하겠습니다"


송순진...여순사건 당시 양가 작은아버지들이 희생됐다

유족들이 모인 추념식장에는 고흥이 고향인 송순진(69세)씨가 있었다. 그녀는 여순사건으로 시댁과 친정의 작은 아버지들을 잃었다. 그녀가 남편(신치수)의 작은 아버지를 잃은 사연을 이야기했다. 고인이 된 작은아버지 사망 이야기는 시어머니가 여러 번 들려준 이야기다.

"서울에서 대학교 다니던 신상호(희생자)씨는 생일을 쇠러 순천역에서 내려 고흥으로 가기 위해 순천역에 내렸대요. 때마침 경찰의 불심검문에 걸려 주머니에서 나온 삐라가 발견돼 그 자리에서 총살당했다고 합니다. 주머니에 있던 삐라는 열차에서 주은 것이랍니다"

송순진씨는 남편의 작은 아버지 호적을 옮겨와 지금도 제사를 지내고 있다. 고흥 두원면 성두리가 고향인 송순진씨는 돌아가신 작은아버지를 지금도 아쉬워한다. 똑똑하고 주위 사람들에게 신망받는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그녀가 들려준 친정 작은아버지 이야기다.

여순사건 당시 시댁과 친정의 작은아버지 두 분을 잃은 송순진씨 모습 ⓒ오문수

"여순사건 당시 순천 농업학교에 재학 중이던 송인현(희생자)씨는 순천에서 하숙 중이었습니다. 그는 경찰과 진압군에 쫒기다 잡혀가 군트럭에 실려 어디론가 끌려가 총살당했대요. 총살당한 장소와 시신을 찾지 못하자 목격한 사람들의 얘기를 들은 대소가 사람들이 총살당했다는 지역을 찾아가 흙만 한 줌 가져다 흙무덤을 썼습니다"

늦둥이를 낳아 막내를 몹시 사랑한 그녀의 할머니는 돌아가실 때까지 눈물로 살았다.

대한민국 근현대사 중 대량학살이 일어났던 제주와 거창, 광주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위한 진전이 이뤄져 추모공원이 세워졌다. 하지만 여수는 세 지역과 달리 아직도 특별법이 통과되지 않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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