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민과 함께 걷는 '여순항쟁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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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민과 함께 걷는 '여순항쟁의 길'
  • 전시은
  • 승인 2019.10.27 20: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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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연대 주둔지와 서교동, 충무지서, 중앙동, 여수경찰서, 여수역, 마래터널, 위령비, 형제묘 순으로 답사
여순항쟁의 경로는 봉기군 진출 경로, 토벌군 진입경로, 민간인 학살지 3가지로 구분.
이날 주철희 박사 안내 답사는 봉기군 진출 경로 중심으로
주철희 박사 "저항의 벼리로 일컬어지는 여순항쟁을 지역 역사로 국한해선 안돼,, 민간인 학살지 중심의 기행에서 벗어나 다양한 관점에서 접근해야"
신월동 수상활주로에서 설명을 듣고 있다. 답사 당일 만조로 물이 들어차 보이지 않는 수상활주로

여순항쟁 시민모임이 주최하는 ‘여순항쟁 71주년, 항쟁의 길을 걷다’ 답사가 26일 오후 1시에 열렸다.

웅천 이순신공원에 모인 사람들은 주철희 역사학자의 안내에 따라 국군 14연대 봉기 노선 9키로를 따라 걸으며 당시의 모습을 상상했다. 이날 답사 참가자 중에는 목포에서 온 사람들도 일곱 명 있었다.

제14연대 주둔지 신월동

답사 첫 번째 장소는 1948년 여순항쟁을 일으킨 14연대 병영이 있었던 신월동이다.

가막만이 보이는 도로에는 ‘14연대 주둔지’ 안내판이 있었다. 안내판 앞에서 첫 답사 설명이 있었다. 돌산도와 화양반도로 둘러싸인 가막만에는 일제강점기 수상활주로가 있었다. 수상활주로는 구봉산의 제14연대 주둔지로 연결되었다고 한다. 우리가 서 있는 곳도 활주로였으나, 지금은 도로로 매립되었다고 한다.

도로 건너편으로 보이는 신월동 산(정자가 있는 산) 밑에는 일제가 만든 격납고가 아직도 남아있다. 그래서 활주로에 비행기가 내리면 격납고로 들어간다. 신월동 수상활주로는 현재 국내에 남은 일제강점기 유일한 수상활주로로, 근대문화유산으로 등록해야 할 정도로 보존가치가 높지만, 여수시가 등록하지 않아 현재 많이 파괴되어 있다.

그 길 건너편은 모두 14연대가 있던 곳이다.

한화공장 근처 콘크리트와 녹색 굴뚝 2개 중 콘크리트색 굴뚝은 일제강점기 때 만들어진 것,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해군202부대 주둔하였다. 그래서 부대 주둔 때문에 수상활주로가 만들어졌다. 부대에 왜 굴뚝이 있었을까. 일제강점기에 여기는 해군부대도 주둔했지만, 일본이 1941년 태평양전쟁을 일으킨 후 이곳에서 군수품을 만들었다고 한다. 이 군수품을 가지고 일제는 전쟁을 했다. 그리고 이곳에 해방 이후 1948년 5월 이곳에 14연대가 들어선다.

여순항쟁 시민모임이 제작한 자료집에 실린 14연대 사진
여순항쟁 시민모임이 제작한 자료집에 실린 사진. 아래 사진과 산 능선 모양이 같다

 

이 능선을 넘어 여수시내로 나갔다

4연대 군인들은 10월 19일에 봉기를 하고 20일 새벽에 여수로 나갔다. 나갈 때 신월동 큰길도 이용했지만 바로 이 산을 넘어 나갔다. 산을 넘으면 바로 여수시내가 나오기 때문에 돌아서 갈 필요 없이 산을 넘었다. 당시는 모병제였기 때문에 군인들은 이곳 지리를 꿰뚫고 있었다. 또하나 순천으로 가는 팀들은 능선을 넘어 미평역으로 가서 순천으로 갔다.

옛 14연대 지하벙커

이후 다시 차량을 타고 무기고로 사용했던 곳으로 갔다. 이곳에는 일제강점기에는 지하벙커였으나, 여순항쟁 당시에는 무기고 엿다. 이곳은 네 개은 문이 모두 연결되어 있다. 참가자들은 두 번째 지하벙커로 들어갔다.

이 벙커는 1942년부터 43년까지 만들어졌다.

일본은 전투시설을 만들 때 항상 적의 공격을 대비한 공간을 준비해뒀다. 이 지하벙커는 그 중 하나로 당시 중학생들이 만들었다. 전남의 각 학교 중학생들이 모여 두 달씩 근로보국대라는 이름 하에 여기서 숙식을 하며 공사를 했다. 그외 탄광노동자, 형무소 재소자들이 일했는데 재소자에는 독립운동가들도 있었다.

그러면서 주 박사는 “5월 1일은 노동절, 근로자의 날인데 근로라는 단어는 부지런히 일하라는 뜻, 즉 천황을 위해 열심히 일하라는 뜻을 담고 있다”며 노동이라는 단어로 대체할 것을 권했다.

지하벙커

여수에는 이와 같이 일제강점기 군사시설이 꽤 많이 남아 있다. 일제는 이런 시설을 만들 때 적의 공격을 받을 경우를 대비한 시설을 꼭 함께 만들었다. 덕양삼거리 근처 여천초등학교 뒤로 가면 이보다 좀 더 크고 당시가 완벽히 남아 있는 시설이 있다고 주 박사는 말했다.

신월동은 해군202부대가 주둔한 곳인 만큼 군수품을 만들던 곳이 많은데, 바로 이런 이유로 이곳은 연합군의 주요 타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그 공격을 대비해 신월동 벙커에서 북쪽으로 3km 떨어진 곳에 지하벙커를 또 만들었다. 이 역시 아직 남아있다.

참가자들이 방문한 이곳 신월동 벙커는 1948년 10월 19일 14연대 군인들이 봉기할 때 무기고로 사용됐다. 14연대 군인들이 제주도 출동명령과 동시에 보급받은 신식무기 M1, 칼빈 등으로, 99식 소총이 이곳 무기고에 보관되었다. 이렇게 보관된 소총을 여수시민들이 나중에 가지고 나와 전투를 벌였다. 벙커 천장에는 애자도 보이는데 이는 일제가 이 시설을 만들 시기 이미 전기시설을 다 갖췄음을 말해준다.

지하벙커
에자(insulator - 전선의 누전과 지락을 예방하는 이격거리를 갖추려고 건물 바닥에 설치하는 것)가 보이는 벙커 천장

지하벙커는 반원형으로 만들어졌는데, 박격포 등의 공격을 대비하기 위해서이다. 그리고 중간에 문을 만들어 대비한다.

거푸집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부을 때 무너지지 않도록 기둥으로 지탱하는데 그 기둥을 만든 흔적이 사진 왼쪽 벽에 보인다.

거푸집을 만들고 콘크리트를 부을 때 무너지지 않도록 기둥으로 지탱하는데 그 기둥을 만든 흔적이 사진 왼쪽 벽에 보인다

14연대에는 3개의 대대가 있었다. 광주에서 4연대가 기간병력 300명정도 여수로 내려오고, 그 기간병력을 중심으로 전남동부지역에서 모병을 했다. 이렇게 14연대가 창설됐다. 14연대는 1948년 5월에 창설됐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은 그해 8월 15일이다. 남한 단독선거를 하기 전에 UN의 합의사항이 있었는데 그게 미군철수다. 1948년 5월 전까지는 남한에는 9개 연대밖에 없었다.

경기도 1연대(현 서울시 노원구), 충청남도 2연대(대전), 전라북도3연대(이리), 전라남도 4연대(광주), 경상남도 5연대(부산), 경상북도 6연대(대구), 충청북도 7연대(청주), 강원도 8연대(원주), 제주도 9연대. 이렇게 단독선거를 하기 전까지는 남한에 9개 연대뿐이었다.

그런데 단독선거로 대한민국 정부가 수립하게 되면 미군을 철수한다는 약속을 한 상태였다. 그렇게되면 9개 연대밖에 없어서 국방력이 약해질 거라는 판단 하에 만든 게 1948년 5월 10~15연대이다. 즉 미군철수로 6개의 연대가 새로 만들어진 것이다. 즉 14연대는 늦게 만들어진 부대고 주요 병력들은 광주 4연대 출신들이다.

현 월호동주민자치센터는 과거 봉산지서자리였다. 현재 우익단체와 국가가 저술한 많은 서적에서 봉산지서가 공격을 받아 불이 나고 경찰이 죽었다고 쓰고 있지만 이곳은 불이 나지도 않았을 뿐더러 경찰관 단 한명도 죽지 않았다.

당시 봉산지서 주임 신영길이 2015년까지 살아 있었는데 그가 쓴 책 ‘신영길의 역사의 현장’에 자신이 봉산지서에서 본 14연대의 모습과 봉산지서 주임으로 오게 된 과정을 모두 기록했다. 그러나 많은 국가와 정부단체에서는 14연대 군인이 반란이고 빨갱이임을 인식시키기 위해 “(그들이)모든 경찰서를 불태우고 경찰을 보면 전부 죽였다”라고 썼다.

하지만 당시 여수에서 불이 난 곳은 서정지서와 쌍봉지서 뿐이었다. 이마저도 서정지서는 14연대 군인들이 불을 지른 게 아니라 박격포 때문에 불이 난 거였다. 그리고 쌍봉지서는 여순사건 이후 좌익활동들이 강화되며 불이 난 것이다. 즉 “여순사건으로 시내의 모든 지서가 불탔다”는 말들은 모두 거짓이다.

인민유격투쟁을 벌일 지리산으로 가는 게 목적이었던 14연대는 기차를 탈 수밖에 없었다. 14연대가 위치한 서쪽 끝에서 동쪽 끝으로 가려면 여수의 중심부를 관통해야 했다. 즉 14연대는 지리산으로 가려는 것 뿐, 도시를 장악하려는 게 목적이 아니었다.

주 박사는 “역사오류는 지리적 한계를 이해하지 못해 벌어지는 경우가 많은데 탁상공론으로 자료만 보고 결론을 내리기 때문이다”고 지적했다.

현재는 봉산동을 거쳐 서교동에서 직진하면 중앙동으로 가지만 당시는 바다였다. 즉 이곳은 1960년대에 매립된 곳이다. 14연대는 서교동에서 한재사거리 쪽으로 올라와서 충무동을 통해 시내로 향했다. 다

답사 일정은 14연대에서 잉구부전투지까지 버스를 타고 가서 다시 서교동으로 돌아와 걸어서 답사했다.

지리지형을 꿰뚫고 있던 시민군, 잉구부전투 승리

다음 코스는 잉구부전투지다.

이 길은 조선시대부터 여수에서 북쪽으로 갈 수 있는 유일한 길이었다. 사진으로 볼 수 있듯이 길이 산능선을 따라 왼쪽으로 구부러져있기 때문에 붙은 이름이다. 길 밑은 연등천(하천), 위는 종고산이니 매복하기 좋은 곳이다.

교통 접근로가 많은 순천과 달리, 여수는 육상의 유일한 길이었던 이곳 잉구부에서 시민들은 전투에서 승리한다. 토벌대는 송호성 최고사령관이 선두로 나섰으나 매복하던 시민군에게 기습을 당하여 사령관이 다치고 함께 있던 미국인 종군기자 두 명은 사망했다.

한국의 군대를 장악하던 미국 종군기자가두 명이나 죽었으니 난리가 날 수밖에, 결국 송호성은 전투에서 지고 순천으로 후퇴한다.

잉구부전투가 벌어진 길

이 후퇴과정에서 미평동을 지나치는데 마을 사람들이 처음 본 장갑차에 놀라 도망을 가고, 이들은 도망간 사람들을 잡아서 즉결처형했다. 결국 여수는 10월 24일 첫 전투도 승리하지만 동시에 미평에서 약 마흔 명의 시민이 죽게 된다.

잉구부전투에서 패한 미군은 다른 전략을 쓴다. 이미 한번 패한 길을 다시 올 수 없으니 26일 전투에서 미군은 여수의 주요 산(구봉산, 장군산, 종고산, 마래산)을 넘어 시내로 진격한다.

현재 여수시내에는 일제강점기 시설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은데, 이는 26일과 27일 시내 한 가운데에 집중포격을 받아 불바다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집중포격의 이유는 바로 24일 잉구부전투다. 여순항쟁에서 5차례 전투가 있었고 네 차례는 시민들이 막아내고 마지막 전투에서 패배한다. 패배 이유는 국내 15개 연대 중 7개 연대 병력이 여수를 공격했기 때문이다.

공군이 없던 당시 국내 몇 대 없는 육군비행정찰대와 해군 함대가 여수로 출동하여 포격한다. 그러니 여수에는 일제강점기의 시설 남아있지 않은 것이다. 잉구부전투에서 패하자 미군은 산능선을 넘어 여수로 간다. 산능선을 넘어가며 산 곳곳과 여수시내를 집중포격하면서 여수는 불바다가 된다.

그렇다면 여수시민들은 어떻게 다섯 차례 전투 중 네 차례를 극렬하게 막아냈을까. 바로 인민위원회 때문이다. 인민위원회는 이후 방문한 여순군 인민대회 장소에서 주 박사가 자세히 설명했다.

진남초등학교 앞 길은 당시 기차길이었다

 

참가자들은 다음 장소인 서교동으로 갔다. 태평선식 사이 작은 길이 군수품을 나르던 과거 철도길이다

과거 서교동에 있던 전신전화국 뒤 건물은 식량영단창고였다. 여수인민대회를 10월 20일에 진행하고 제일 먼저 식량창고를 점령하였다. 당시는 식량을 배급하는 제도가 있었는데, 관료들은 쌀이 없어서 배급을 못한다고 하였다. 그런데 창고 문을 열었더니 쌀은 썩고 있었다고 한다. 전신전화국 넘어 현재 교동시장이 있는 곳은 지금은 매립되어 도로지만 이곳은 당시에는 바다였다. 그래서 14연대 군인들은 한재사거리 쪽으로 올라와서 여수역으로 향했다고 한다. 일행은 바로 그 길을 따라 걸었다.

 

일제강점기 고무신공장 '천일공장' , 그리고 민족반열자 김영준

현재 여수강남요양병원 옆 파란천으로 씌인, 건물을 올리고 있는 곳이 천일고무공장 자리가 있던 곳이다

 

14연대가 여수역으로 가던 길

천일고무공장 김영준은 일제강점기에 매우 유명한 인물이었다. 해방이후 여순항쟁 당시에는 한민당 지부장도 역임했다. 천일고무공장은 현재 서시장 주차장에서부터 여수시민회관까지 였다고 하니, 그 규모가 매우 컸음을 알 수 있다. 여수 어르신들이 “김영준이 죽지 않았다면 삼성이 여수에서 탄생했을 것이다”고 말할 정도였다.

일제강점기 미평초등학교 설립 등에 앞장선 공헌으로, 미평초등학교 정문 앞에는 김영준 선생 기념비가 있으며, 여수시에서도 그에게 ‘시민의 상’을 수여했다. 그러나 동시에 김영준은 일제시기에 일본에 비행기를 헌납한 민족반역자다. 여기서 역사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여수시의 문제점이 발견된다. 김영준이 큰 공장을 운영할 수 있었던 것 역시 친일파였기 때문이라고 주 박사는 말했다. 일제강점기, 국내 93%의 산업시설을 일본인이 갖고 있었다. 조선인이 이러한 공장시설을 갖는 것은 친일파가 아니고는 불가능하였다.

여순항쟁이 펼쳐지던 10월 20일 인민위원회는 천일고무공장의 고무신을 시민들에게 무료로 배급하고 이후 공장을 노동자들에게 돌려준다.

원금당과 휴대폰매장 사이의 길 넓이가 1948년 당시 길 넓이다. 윗길은(원금당 왼쪽)은 2000년대에 만들었다

이곳 충무동로터리에는 당시 서정지서(훗날 충무동파출소)가 있었다. 서정지서 경찰과 여수경찰에서 응원 경찰이 이곳에서 14연대 군인들을 1차 저지에 나섰다. 하지만 병력이나 무기에서 상대가 될 수 없었던 경찰은 1차 저지에 실패한다.

당시 교전으로 경찰이 몇 명이나 사망했는지는 정확하게 파악할 수 없다. 공훈록에는 ‘10월 20일 전투 중 사망’ 이라고만 기록했기 때문이다. 이후 14연대는 별무리없이 현 원금당 사이길로 접어들어 교동오거리를 지나 여수역으로 향했다.

당시 서정지서 인근에는 ‘계림당한약방’이 있었다. 현재 원금당이라는 금은방이 위치한 정도라고 한다. 칼 마이더스의 사진에는 계림당한약방 근처서 학살된 사람들의 사진이 찍혀 있다.

충무동 주차장

 충무동로터리에서 진남관을 향해 걸었다. 현재 원금당 좁은 사잇길이다. 이 길이 당시 여수시내의 가장 주요한 도로였다.

큰샘골로 유명한 곳에서 잠시 걸음을 멈췄다. 이곳의 골목은 칼 마이더스 사진에서 젊은 청년들이 체포되어 손들고 내려온 현장이다. 이 청년들 중에는 유지창이란 사람이 있다.

유지창은 당시 여수군청 토목직공무원으로 인민위원회가 여수를 장악할 때 쌀을 배급하는 역할을 했다가 무기징역을 선고받았다. 유지창은 이후 대구형무소에 수감되었다가 6.25전쟁 발발로 사망한다. 이후 칼 마이더스의 사진을 보고 유지창의 유족이 ‘아버지’라고 알아보면서 알려지게 됐다. 칼 마이더스는 이곳 큰샘골 입구에서 여수시내의 불타는 장면을 많이 촬영했다.

교동시내는 모두 바다였으나 일제시대에 매립하여 주택지를 만들어 도시를 넓혔다. 그리고 매립된 좋은 곳은 모두 일본인 상인이 들어와 살았다. 이곳에 처음 들어온 사람은 이 근처서 큰 건물을 가진 박윤수라는 사람이었다

10월 20일 여수인민대회가 끝나고 10월 24일 여수인민보라는 신문을 발행했다. 이 신문을 발행한 곳이 교동 통만두집과 좌우 건물을 포함한 자리다. 네일쌀롱과 그 주변 건물 서너개를 합한 크기가 당시 우체국이었다. 우체국은 통신을 담당하였기에 여수일보와 통신사가 같이 사용했다. 이 여수일보를 여수인민보로 개정하고, 10월 24일 신문을 발행했다.

조선식산은행, 현 제일은행 여수지점. 현재 조선식산은행 건물은 개인이 건물을 매입해 리모델링중이었으나 시에서 문화유산이라며이 중단요청한 상태다. 답사차 방문한 26일에는 한 작가가 건물주와 상의하여 이곳에서 작품전시를 준비중이었다

이곳에서 당시 여수극장 등 주요 건물들 설명을 듣고 이동한 장소는 조선식산은행이다. 이 건물은 제일은행 여수지점으로 일제강점기 건물이라고 여겨져 등록문화재로 지정되어 있다.

여순항쟁 당시 여수시내는 불이 나서 일제강점기 건물이 모두 불에 타 없어졌음을 감안하면 이는 앞뒤가 맞지 않는다. 즉 이 건물은 일제강점기에 지어진 건물이 아니다. 조선식산은행이라는 명칭이 새겨져 있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일제강점기 건물이라 생각하지만, 주철희 박사는 “조선식산은행이라는 명칭은 1954년까지 쓰였고 1954년 이후 식산은행은 산업은행으로 이름이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현재 제일은행 건물은 1949년 12월에 준공하여 1950년에 완성된 건물이다. 여수에는 일제강점기 건물이 하나도 남아있지 않다. 또한 식산은행이란 명칭은 1954년 산업은행으로 바뀌기 전까지 오랜 기간 사용됐는데 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않고 섣불리 일제강점기 건물이라 판단한 것이다.

해방 이후 민족적 과제를 실행한 유일한 도시, 여수

인민대회 연설장소였던 현 진남통증의학과 의원. 여수는 10월 20일 인민대회를 통해 일주일동안 유일하게 민족적 과제인 친일파척결과 자주독립국가, 토지무상분배 이 세 가지를 실현한 도시다. 그러니 이승만정부 입장에서는 ‘문제 도시’일 수밖에.

진남관에 도달했다. 어느덧 2시 반을 넘어서고 있다. 진남관으로 오르는 계단에 서서 맞은편 도로 2층에 위치한 진남통증의학과 건물을 바라봤다. 이곳이 1948년 10월 20일 여수인민대회에서 연설자들이 연설을 한 곳이다. 일제강점기엔 2층 건물인 이곳은 발코니가 앞으로 나와 있어 연설 장소로 이용됐다. 주 박사는 “많은 기록에 인민대회가 중앙동 로터리에서 있었다고 나와 있는데, 당시는 로터리가 없었고 그곳은 모두 바다였다”고 설명했다.

이어 “인민대회 기록을 보면 여수시민 8만명이 모였다고 하는데 이곳 도로는 1987년 6월항쟁에 3천명이 모여 꽉 찰 정도로 좁은 곳이니 8만명이 불가능하다“고 설명했다.

주 박사의 말에 따르면 “이 인민대회가 여수시민들에게 끼친 영향은 엄청났다“. 여수군 인민위원회는 인민대회 결의사항을 실천, 즉 친일파 척결, 토지무상분배, 식량 배급 등이 실행됐다. 여수는 해방 이후 민족적 과제를 실행한 유일한 도시이다.

막연하게 생각했던 14연대의 봉기. 이곳 진남관까지 걸으면서 지금껏 인식했던 부분에 많은 오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즉 14연대에서 서교동까지 차로 이동했지만, 그 길을 따라 14연대 군인은 시내로 나왔고, 이윽고 서교동에서 이곳 진남관까지 노선으로 이동했다.

이처럼 14연대는 지리산을 가려면 여수 시내 한가운데를 관통할 수밖에 없었는데 이를 ‘14연대가 시내를 장악했다’고 표현한 것이다. 지리산은 일제강점기부터 징용 등에 저항한 사람들이 선택한 장소였다.

진남관에서 여수경찰서와 당시 인민위원회 사령부가 있었던 여수읍사무소를 거쳐 여수역에 도착하였다. 여수역은 현재 여수세계박람회 정문이 위치한 곳이다. 여수역은 전라선 종착역으로 역 주변에는 창고가 많았고 이 창고부터 오동도 주변이 주된 학살지였다.

1948년 당시 공설운동장도 이곳 여수역 근처에 있었고 많은 시민들이 부역자로 체포되어 이 공설운동장에서 학살됐다. 여수에서 학살 집결지는 크게 다섯 곳인데 서초등학교, 동초등학교, 종산초등학교, 진남관, 그리고 이곳 공설운동장이다.

마래터널

여수역에서 마래터널 입구까지는 버스로 이동했다. 마래터널은 1930년 12월 완공된 철도다. 몇몇 기록에 1926년 군사도로로 개설되었다고 하는데, 사실 오류라고 주 박사는 지적했다. 마래터널 입구는 매우 좁다. 기찻길이었기에 그렇다.

마래터널은 1930년대 나주, 화순, 장흥, 보성 등에서 생산된 면화와 쌀을 수탈하여, 여수역으로 이동하기 위해 만들어졌다. 원래 여수보다 큰 목포항을 이용해 수탈하려 했으나 조수간만의 차가 커서 정기연락선을 띄우기 어려워 수심이 깊고 큰 배가 들어오기 쉬운 여수신항이 개발지가 되었다.

여수신항은 일제가 경제수탈지로 이용하기 위해 개발된 항이다. 광주에서 출발하여 나주 남평, 화순, 보성, 벌교, 순천, 여수를 잇는 광려선은 1930년 12월 25일 개통한다. 이 개통과 함께 여수에서 시모노세키를 오가는 정기연락선이 뜨게 된다.

마래터널 위(오)와 아래(왼). 아래는 레일바이크가 다닌다

마래터널은 위와 아래 두 개가 있는데 아래굴은 현재 레일바이크로 이용되고 있다. 1930년에 일본이 수탈을 위해 윗굴을 만들고 보니 경사가 심해 기차가 올라오기 힘들었다. 결국 1936년 12월 아래굴을 완성한다. 이 아래굴이 전라선이다.

레일바이크를 즐기는 사람들. 바다 건너 남해 애기섬이 보인다

마래터널을 뚫는 과정에는 조선인, 특히 함경도 평안도에서 온 노동자도 있었고, 만주에서 온 중국인 노동자도 있었다. 중국인 노동자를 꾸리(苦里)라고 하는데, 이들이 강제징용되어 마래터널은 완성했다.

레일바이크 건너로 경남 남해 애기섬이 보인다. 여수와 남해는 굉장히 각별한 지역이다. 일제강점기에 남해 사람들이 여수로 많이 이주해 율촌에 남해촌이 있을 정도다.

여순항쟁, 희생자 뿐 아니라 남아있는 유족들도 헤아려야

마지막 장소인 여순사건 희생자 위령비와 형제묘로 이동했다.

희생자 위령비 아래 바닥에는 박금만 작가가 그린 소녀와 ‘아 여순이여’ 글귀가 그려져 있다

희생자위령비가 있던 곳은 과거 웅덩이였다. 이곳 도로를 따라 쭉 가면 만성리해수욕장이 나온다. 여순항쟁이 특히 안타까운 까닭은 여순항쟁 이후 지역 사람들이 스스로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해야했기 때문이다. 빨갱이로 몰려 죽임을 당한 것도 억울한데, 지역 주민 스스로가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려고 했으니, 당시의 처참한 학살을 누구도 말할 수 없었다.

이들은 학살터를 가게 되면 이곳에 돌을 던졌고 위령비 주변엔 돌탑이 많다. 주 박사는 “국가에 의해 학살된 자들이 살던 곳에서 여전히 삶을 살아가야 했던 사람들은 스스로가 빨갱이가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오히려 국가의 부조리한 명령에도 순응하고 살아야 했다”며 안타까워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금지곡 ‘여수야화’는 잿더미로 변한 여수를 묘사한 노래로, 이승만정부가 노래가 널리 알려지면 민심의 악영향을 초래한다고 판매를 금지하였다. 아마도 그동안 국가가 저지른 일이 만천하에 알려질 거라 생각했기 때문이다.

형제묘

마지막 장소는 형제묘다.

형제묘라는 명칭은 ‘죽어서라도 형제처럼 살아라’는 의미이다. 현재 여순항쟁 학살지인 여수, 구례, 순천 중 중 가장 원형이 잘 남아 있는 곳이다. 형제묘에는 여수군 인민위원회 의장 중에 한 명이며 여수인민보 발행인이었던 박채영과도 연관이 있다.

또한 이 묘는 잉구부전투에서 사망한 여학생 정기덕의 가족과도 관련이 있다. 형제묘 옆에는 한 구에 무덤이 있다. 정기덕의 두 오빠의 묘다.

형제묘 비를 잘 보면 두 겹으로 덧씌워져있음을 알 수 있다. 묘비 뒤에 적힌 글을 지우기 위함인데, 박채영의 가족이 더 이상 과거를 지우기 위해서 그랬다.

박채영의 아들은 평생을 살면서 ‘여순반란사건’과 ‘박채영’ 즉 자기 아버지 이름에 치를 떨었다고 말한다. 아버지의 이름이 남아있는 한 자신은 평생 ‘빨갱이의 아들’이기 때문이다. 박채영의 아들은 ‘빨갱이의 아들’이 아님을 입증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다했다고 한다. 그에게 아버지 이름은 평생 지울 수 없는 낙인이었다. 주 박사는 여순항쟁 때 죽은 사람뿐만 아니라 그 후의 삶을 살아야 했던 유족들의 삶도 되돌아볼 것을 권했다.

현재 진실화해위원회에서 형제묘를 발굴하려 하지만, 주변에 반대가 있었다. 주 박사 역시 발굴을 무조건 찬성하지 않는다고 하였다. 현재 6.25전쟁 중 전사한 국군의 경우, 시신이 발견되면 국립묘지로 이송한다. 하지만 민간인 학살자는 시신을 안치할 곳이 없다. 즉 국가에 의해 희생된 사람들은 갈 곳이 없다.

유일하게 세종시에는 안치소가 있지만, 그 마저도 플라스틱에 담아 보관하고 있다. 주 박사가 무조건적인 발굴을 반대하는 이유다. 주 박사는 형제묘 근처가 모두 국유지이고 바로 옆에 위치한 군부대도 2023년에 이전한다고 하니 묘 주변에 기념관을 세워 발굴했으면 하는 바람을 말했다.

주 박사는 답사를 마무리하며 무조건적인 기념탑을 세우는 것을 지양할 것을 권했다. 서울 동작구에 기념탑이 세워지며 광주 5.18도 따라서 기념탑을 세웠는데 주 박사는 이들이 ‘국가를 위해 헌신한 자’가 아닌 ‘국가에 의해 죽임을 당한 자’임을 명확히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고 말했다.

이날 답사는 형제묘를 마지막으로 종료됐다. 어느덧 날은 어둑어둑했다.

답사에 참가한 박은경 씨는 현재 소호동에서 아트센터를 운영하고 있다. 그는 “얼마전 여수로 이사오고 나서 여순항쟁을 알게 됐다. 민주평화통일위원회에서 제주4,3을 배우는데 그때 여순항쟁이 있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그날 이후 여순항쟁을 공부하고 싶은 마음을 항상 갖고 있었는데 이번 답사 소식을 듣고 재빨리 참가신청을 했다. 여수가 고향인 내 아이들에게 설명할 수 있으려면 내가 먼저 여수를 이해해야 한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충무고 2학년 이경현 군은 꿈이 경찰이다. “여순사건은 이름만 숱하게 들었을 뿐 그 내막은 이해하지 못했다”며 “마래터널과 여수경찰서도 자주 지나다녔는데 이런 사연이 있을 줄은 몰랐다”고 말했다.

옆에 있던 문현기 학생은 “벙커에 들어갈 때 이곳을 중학생들이 만들었다고 생각하니 가슴이 아팠다. 마래터널의 긴 길을 뚫었을 모습을 상상하니 씁쓸하다. 1학년 한국사 수업에 여순항쟁을 짧게 배우고 넘어가서 자세한 과정은 오늘 처음 들었다”고 말했다.

광주에서 온 이재석 씨는 “그동안 여수에 오면 밤바다로 유명한 종포해양공원 주변만 구경했기 때문에 좀더 자세히 여수를 이해하자는 생각에 답사를 신청했다” 고 말했다.

MBC 방송에서 토론자로 나온 주철희 박사를 보고 여순항쟁을 처음 알게 된 그는 얼마전 갤러리에 전시된 박금만 작가의 그림도 감상했다. 이후 갤러리 팸플릿에 적힌 답사 정보를 알게 됐다고 설명했다.

이 씨는 “여순항쟁을 단순히 군인들이 도시를 장악한 사건으로만 교육받았는데 오늘 답사를 통해 그게 아니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또 함포 사격까지 해서 도시를 불바다로 만들었다는 점에서 충격을 받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날 답사 참가자들은 답사를 마친 감상문을 모아 책으로 만들어낼 계획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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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마스테 2019-10-28 09:27:47
뜻깊은 일을 하셨네요. 모두 수고 많으셨습니다. 짝짝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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