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창피한 도시, 여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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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별기고] 창피한 도시, 여수
  • 양영제
  • 승인 2019.10.28 13:5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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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순항쟁 71 주년 추념식에 참석하고 나서
여수 이순신광장 추모식에 '여순사건'으로 표기되어 있다

장어탕을 먹고 있었습니다. 간장게장과 더불어 여수가 자랑하는 음식입니다. 새벽안개를 헤치고 여수로 달려오는 동안 주린 배를 장어탕으로 달래주리라고 다독이고 왔습니다. 늦은 아침이고 이른 점심이라 식당에는 주인아주머니와 식탁에 앉아 학교 숙제를 하고 있는 어린 딸만 있었습니다.

갑자기 사이렌 소리가 들려왔습니다. 나는 자동적으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 대피할 곳을 찾았습니다. 민방위훈련을 마지막으로 받은 것이 언제인지 기억이 가물거리는데도 몸은 기억하고 있었습니다. 주입되고 강요된 관념적 학습은 떨쳐 없애버리지 못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조건적 자극을 반복주입하면 나중에는 습관적 반응으로 나타나는 파블로프 개 같았습니다. 먹이를 주지 않는데도 학습된 자극 때문에 종을 울리면 침을 흘리는 개 말입니다.

“엄마 선생님이 오늘 싸이렌 울린다고 했어.”

“응 여순반란 사건 때 억울하게 죽은 사람들 달래줄라고 싸이렌 울린다고 하드라. 니 여순반란사건이 뭔지 아냐?”

“응, 학교에서 선생님이 말해줬어.”

학교 선생님이 어린 학생들에게 어떻게 설명해 주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래서 그런지 어린 딸도 사이렌 소리가 울리는데 놀라지 않고 숙제를 계속하고 있었습니다. 찢어질 듯 날카롭고 시끄러운 사이렌 소리도 저렇게 낮고 슬프게 울릴 수 있는지 예전에는 미처 몰랐습니다. 아마 여수사람들은 사이렌 소리를 죄다 들었을 것입니다.

추념식이 열린다는 이순신 광장으로 다리를 옮겼습니다. 1948년 10월 20일 여수 인민대회가 열렸던 지역입니다. 그 시절 우리나라는 유럽 근대국가를 형성하는 도시 구성원인 시민 개념보다는 단군이 고조선 나라를 세운 후 이어져오는 민족공동체 구성원을 인민이라고 하였습니다.

박금만 작 여수인민대회 그림

제주도민을 학살하라는 부당한 출동명령을 거부한 여수 신월동 주둔 14연대가 봉기를 일으킨 다음 날이었습니다. 인민대회를 마친 여수시민들은 청년학생들을 앞세우고 여수경찰서까지 행진 하였습니다. 행진대열을 보고 여수시민들은 박수를 쳤습니다. 미국을 등에 업은 민족반역자 이승만이 김구 등 민족진영이 불참한 5.10 총선거를 강압적으로 실시하여 민족분단을 시켰기 때문입니다. 친일세력을 다시 불러 모아 민중을 탄압하고 농지개혁을 미루는 것을 궐기하는 행진이었습니다.

여수사람들은 인민위원회를 통해 자치적으로 행정을 꾸렸습니다. 관공서나 역무원들도 평상시처럼 근무하였습니다. 여수 학생청년들은 치안대를 조직하였습니다. 당시 여수읍은 비로써 민족 해방구가 되었습니다. 미국의 지배에서 벗어났고 이승만과 친일부활세력도 척결된 진정한 민족해방지대가 되었습니다. 이것은 건국준비위원회 몽향 여운형 선생이 바라마지 않던 인민 스스로 나라를 꾸리는 모습 그대로였습니다.

삼팔선을 베고 죽더라도 남북분단 만은 막아야겠다고 삼팔선을 넘어갔다 왔던 김구 선생이 바라던 나라 모습이었습니다. 또한 독립운동가 출신으로 경무국 수사국장이었던 최능진 선생이 그토록 바라던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남한 만이라도 항구적으로 미국의 신식민지 상태로 두려는 미군정과 이승만을 비롯한 반민족친일세력들이 두고만 보았겠습니까. 여수 순천을 무차별 살육하는 토벌이 시작된 것이지요.

미군의 지휘를 받는 이승만 진압군들은 순천을 함락하고 여수 시내에 무차별 함포사격까지 하면서 불바다로 만들었습니다. 하지만 여수사람들은 쉽게 굴복하여 여수는 내 주지 않았습니다. 여수 청년학생 시민군들 거센 항쟁 때문이었습니다. 청년학생 시민군들은 진압군에 맞서봤자 죽을 줄 알면서도 저항하였습니다.

박금만 작 잉구부 전투 그림

결국 미군정찰기 까지 띄어 여수를 함락시킨 이승만 정부 토벌군들은 학살축제 카니발을 시작합니다. 여수 순천 사람들만 학살 카니발 잔치에 희생된 것만 아닙니다. 민족자주권을 주장한 몽양 여운형 선생, 남북분단을 저지하려던 김구 선생, 친일경찰 척결을 내세운 최능진 선생도 이승만과 친일부할 세력에 의해 암살 처형당해만 했습니다.

여수반란 배후지목 최능진 신문기사

이렇게 여수와 순천을 학살하여 다져진 것이 민족반역자 이승만 정부와 친일부활세력이고 그렇게 이어진 것이 일본 관동군 출신 박정희 독재정권입니다. 그렇게 여수사람들은 오랜 세월동안 고양이 전기판에 묶여 있었던 것입니다. 전기판에 고양이를 묶어두고 전기를 통하게 하면 고양이는 전기자극을 피하려고 양쪽 발을 번갈아 듭니다. 전기를 통하지 않아도 자동으로 발을 듭니다. 여수사람들은 반란도시라는 전기판에 묶여 있었습니다. 그러는 동안 절대반공 도그마(dogma)가 형성되고 기존 민족공동체 집단무의식을 빨갱이와 양민으로 분리대체하고 악과 선으로 분리공식화 시켜버렸습니다.

통한의 세월이 흘러왔습니다. 반란도시, 빨갱이라는 누명을 쓰고 살아왔습니다. 학살된 시신조차도 찾을 수 없었습니다. 연좌제에 걸려 취업도 제대로 할 수 없었습니다. 파시스트 박정희 정권을 위해 전국민이 국가전체주의 부속품으로 살아와야 했습니다. 그러다 도저히 견디지 못한 부산 마산 창원에서 파시스트 박정희 군사독재정권에 대항하여 항쟁이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부마항쟁입니다.

부마항쟁 당시 사진

부마항쟁은 도무지 끝나지 않을 것 같았던 파시스트 박정희 유신시대 종언을 알렸습니다. 그러나 다음 해 전두환 일당의 5.17 쿠테타를 저질러 정권을 찬탈하려고 했습니다. 이에 저항하여 5.18 광주 민주화 항쟁이 전남대 학생들부터 시작됩니다. 5월 26일 도청앞 시민 총궐기대회가 열리고 다음날 5월27일 전두환 진압군들에게 광주 도청이 빼앗기고 맙니다.

 

도청 앞 시민들

광주도청을 빼앗김, 이것이 광주가 민주화항쟁 도시였음을 역설적으로 증명하는 사실입니다. 만약 광주도청을 전두환 진압군에 스스로 내 주었다면 그건 항쟁이 아니라 투항이 되었겠지요. 투항을 하였다면 광주의 죽음은 후대에 광주학살로만 기록되었을 것입니다. 내 주는 것과 빼앗기는 것은 성격이 너무나 다릅니다. 내 주는 것은 다시 찾지 못하지만 빼앗기는 것은 다시 찾아 올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민주화이고 광주가 목숨을 바쳐 항쟁하다 민주화를 빼앗겼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촛불을 들어 민주주의를 되찾아 오지 않았습니까.

전두환 진압군에 맞서면 죽을 줄 알면서도 광주도청을 지키던 시민군들처럼 1948년 10월 여수도 그랬습니다. 미군의 지휘를 받는 이승만 진압군에 의해 죽을 줄 알면서 청년학생들을 중심으로 한 시민군들이 여수를 사수했습니다. 역사학자들이 조사한 바로는 여수와 순천 학생들 입학수와 졸업생 수에 큰 차이가 있습니다. 사살되어 암매장 당했거나 붙잡혀 사형 당했기 때문입니다.

여수중학생 사형 신문기사
여수중학생 사형 신문기사

여수 청년학생 시민군들이 목숨을 바쳐 사수하려다 빼앗기 것이 무엇 이였던가요. 진정으로 외세로부터 해방되어 통일된 나라, 친일반역자들이 척결된 세상. 민족 자주권, 민주주의 아니었던가요. 만약 여수 청년학생 시민군들이 이승만 진압군에 저항하지 않았다면 여수는 학살 당 한 것만 기억되는 통한의 도시가 되었을 것입니다. 그랬다면 여순사건 추념식이 맞겠지요. 그러나 80년 광주와 마찬가지로 여수도 죽을 줄 알면서도 항쟁했습니다. 그래서 여순항쟁인 것입니다.

이미 역사학자들은 ‘항쟁’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밝혀 왔습니다. 그러므로 이제는 관습적 추념식만 연례행사로 치룰 것이 아닙니다. 여순항쟁을 기리는 기념식이 되어야 합니다. 여순항쟁 기념식 일부로 추념이 들어가야 하는 것이지, 항쟁은 숨겨놓고 죽음 자체만 노출시킨 추념식만 요식행위로 치루면 그게 집단제사나 무엇이 다르겠습니까.

매년 추념식에서 똑같이 반복해서 나오는 말이 있습니다. 명예회복입니다. 나는 어떤 것에 대한 명예회복을 바라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억울하게 돌아가신 분들에게 붙었던 빨갱이 딱지를 떼어내고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은 건전한 시민이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인지 알 수 없습니다. 진정한 명예회복이란 반민족 반민주 친일부활세력에 저항한 명예스런 여수였다는 것을 인정받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이미 서울에서는 여순항쟁으로 기념식을 해 왔습니다.

광화문 여순항쟁 기념식

순천에서도 여순항쟁 기념식을 했습니다. 여순사건 순천 희생자 추념식이 아니라 여순항쟁 유족회가 주최하는 기념식이랍니다.

19일 순천에서 열린 여순항쟁 기념식

그런데 여수에서만 이것도 저것도 아닌 애매모호한 명칭인 여순사건으로 추념행사를 합니다. 이게 무슨 창피한 모습입니까. 순천은 항쟁이고 여수는 사건이라는 뜻인지 뭔지 모르겠습니다. 순천은 항쟁으로 빛나는 도시이고 여수는 아무저항도 하지 않은 채 학살만 당 한 피해 도시인지 그도 모르겠습니다.

그나마 같은 날 다른 장소에서는 여수지역신문사 연합으로 여순항쟁 기념 그림 전시회를 가졌습니다. 화가가 여순항쟁 유족이라고 하더군요. 유족이 항쟁이라고 합니다.

박금만 되찾은 기억 전시회 포스터

어떻게 같은 여수에서조차 성격이 다른 행사가 동시 개최되는 것인지요. 한쪽에서는 학살 당 함은 비통하지만 항쟁기억을 되찾은 항쟁행사를 하고, 한쪽에서는 학살 당 한 아픔만 기억하는 피해의식에서 벗어나지 못한 추념행사를 하는, 참 이상한 여수입니다.

여수 일각에서 항쟁으로 부르기 위해서는 담론이 필요하다는 말을 많이 들었습니다. 그러나 이미 담론은 차고 넘칩니다. 그런데도 아직까지 보수단체에서는 14연대 봉기군 주동자로 지창수 상사나 김지회 중위 등이 남로당이었느니 빨갱이었다는 따위로 부각시켜 여수를 반란 도시로 묶어두려고 합니다. 그런 농 짓거리 보다 못한 음해에 당당하지 못함은 무슨 까닭입니까. 14연대 봉기군 주동자가 사회주의 사상에 물든 남로당원이라고 반란이라고 합니다. 해방되어 신생국가로 탄생한 나라의 정체성을 박헌영처럼 사회주의로 원하는 좌익도 있고 김구처럼 자본주의를 원하는 우익도 있었겠지요. 당시 국민대다수는 사회주의를 선호했습니다.

미군정이 설문조사한 국가체제 선호도

지금 북한처럼 왕족세습전제주의 국가를 바랬던 것이 아니라 순수한 사회공동체 사회를 바랬던 것이지요.

어이되었든 여순항쟁 성격은 딱 두 가지 입니다. 제주도민을 학살 하라는 부당한 명령을 거부한 동족상잔 절대반대와 해방된 나라를 지배하고 있는 미군 즉시 철수였습니다. 여기에 무슨 사상이 있고 이념이 있습니까. 담론 자체가 불필요한 여순항쟁인 것입니다.

그러함에도 불구하고 담론 운운하는 것은 비겁한 태도입니다. 비겁한 태도를 보이는 까닭이 이승만과 오랜 세월 동안 군사파쇼 독재정권의 부당한 정권을 뒷받침하기 위해 씌운 절대반공 이데올로기 그물에 스스로 갇혀 있는 상태가 아닌지 자문해 봐야 합니다. 오래 전에 미국에서 불었던 메카시 광풍에 주눅 들어 있는 것도 아닌지 묻고 싶습니다. 메카시 광풍은 미국에서만 써먹은 것이 아니라 한국에서도 윤보선이 박정희에게 써 먹었습니다.

1963년 5대 대통령 선거에서 공화당 박정희와 맞붙은 민정당 윤보선 후보는 박정희를 좌익관련으로 무기징역을 받은 사실을 들고 나와 공격했습니다.

윤보선과 박정희 신문기사

좌익으로 몰린 박정희는 이렇게 신문광고를 내고 빨갱이 몰이를 질타했습니다.

박정희 후보 신문광고

빨갱이로 만들려는 수법에 대해 궐기하자던 박정희가 오히려 빨갱이 몰이를 정권유지 수단으로 삼은 것은 날강도 보다 더 한 짓이지만, 이제는 한심한 짓에 지나지 않게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여수는 아직도 레드 컴플렉스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모습으로 비쳐지는 것은 아마 제가 잘못 판단하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하여튼 올해 추념식에서는 피살된 경찰유가족 대표가 나와서 추념을 하더군요. 당시 여수경찰이었던 부친이 상관의 지시에 따라 직무 수행하다 피살되었으니 자식으로 얼마나 통탄스런 세월을 보내 왔겠습니까. 어떤 죽음이든 죽음은 그 자체로 위로받아야 합니다. 죽음을 두고 이념과 적이라는 천을 뒤집어 씌어서는 안 됩니다. 추념식에 참석하는 동안 시인 구상 초토(焦土)의 시 여덟 번째 적군묘지 앞이 떠올려졌습니다. 초토란 불에 타서 검어진 폐허를 말 합니다.

죽음은 이렇듯 미움보다도, 사랑보다도

더 너그러운 것이로다

살아서는 너희가 나와

미움으로 맺혔건만,

이제는 오히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도다

너희의 풀지 못한 원한이 나의 바램 속에 깃들여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적과 나의 바람이 같은 것은 무엇일까요. 화해와 상생이겠지요. 그리고 특별법에 포함시켜 달라는 당부를 합니다. 국회에서 잠자고 있는 여순항쟁 특별법에 경찰유가족도 포함되어야 하는 것이 당연합니다. 반란을 막다가 순직했기 때문이 결코 아닙니다. 일제 만주 관동군 출신으로 백범 김구 암살 배후자 김창룡처럼 민족반역자 출신이 아니라면 모르겠으나, 해방 후 평범했던 경찰이었다면 이승만의 부당한 명령을 수행하다 피살된 것이므로, 이들 역시 이승만에 희생된 여수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피살된 경찰도 특별법에 포함되어야 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전제가 있습니다. 적을 막다가 전사한 것이 아니라 상황과 명령을 따라야 하는 역할 때문에 희생되었다는 것을 이제는 인식해야 합니다. 상황이란 이승만 반민족 행위 때문에 시민들의 응축된 응어리가 터진 것이고, 명령이란 아동까지 색출해서 엄단하라고 했던 부당한 권위가 내린 부정한 지시를 말 합니다.

그러므로 14연대 반란을 막다가 피살 되었다는 잘못된 인식과 물리적 감정관계 속에 갇혀 있어서는 애꿎은 죽음을 위로받거나 배상받을 수 없습니다. 죽음에 이른 것은 14연대 봉기군에 의한 것이 아니라 바로 민족반역자 이승만과 친일부활세력에 의해 비롯된 것임을 인식할 때, 비로써 희생 유가족과 함께 같은 통곡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1948년 10월 19일 봉기가 일어나던 당시 물리적 상황에서는 한 개인으로서는 무엇이 옳고 그른지 한 개인으로서 헤아릴 수 없었을 것입니다. 이것을 독일 철학자 귄터 안더스(Günther Anders)는 오버리미널(over-liminal) 현상이라고 설명했습니다. 그러나 이제 세월이 칠십일 년이나 지나왔고 그동안 역사적 평가와 진실이 밝혀졌으므로 당시 경찰 역할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전제되었을 때 비로써 피살된 경찰 역시 부당한 반민족 권력에 의한 희생자가 되는 것입니다. 그럴 때 진정으로 화해와 상생이 이루어지는 희생자 추념이 될 것입니다.

여수에서 추념식이 있기 얼마 전 10월 16일 창원 경남대학교에서는 부마항쟁 기념식이 있었습니다. 문재인 대통령이 참석해서 부마항쟁은 유신독재를 무너뜨린 자랑스러운 민주화 항쟁이었음을 천명하였습니다.

부마항쟁 국가기념일 축하식(사진제공 노컷뉴스)

여수항쟁도 이렇게 시민항쟁으로 기념될 때 비로써 명예가 회복되고 해원이 될 것입니다.

여수는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반란이 아니라 항쟁이었다는 것을 당당히 알리기 위해 얼마나 노력해왔는지 되돌아 봐야 합니다. 담론이 필요했다면 담론을 얻기 위한 포럼이나 논의를 얼마나 치열하게 해 왔는지, 그토록 명예회복과 해원을 갈구한다면 그 방법이 무엇이고 노력은 얼마나 해왔는지 살펴봐야 합니다.

솔직히 말씀드려서 향토 진보 역사학자나 유가족의 국회 앞 피켓 시위 등 노력을 해 오는 동안 여수시나 여수시에서 보조금을 받는 곳에서는 지금까지 무얼 했는지 생각해 봐야 합니다. 심지어 담론 운운하면서 항쟁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 꺼리거나 반대하여 사건으로 치부하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래서야 어디 해원은커녕 명예회복조차 되겠습니까. 왜 순천은 항쟁이고 여수는 사건인지 여수는 스스로 자문해서 창피함을 느낄 줄 알아야 합니다.

신문에 보니 여수불꽃 축제가 열렸다고 하는군요. 관광객들은 아름다운 여수밤바다 하늘에서 펼쳐지는 불꽃축제에 흠뻑 빠져 아름다운 여행기억으로 남았겠지요. 그런데, 그런데 말입니다 여수가 장어탕 간장게장과 함께 낭만적 밤바다로만 기억되어야 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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