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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화로운 중도의 길

'춤추는 정원' 연재 (10)
‘명상의 집’이라는 간판도 달았지만, 노동 후 즐기는 맥주와 고기 한 점에 피부트러블까지
눈을 감고 자기 자신에게 들어가면서도 거기에 온전히 갇혀선 안되는 게 명상

  • 입력 2020.01.03 14:29
  • 수정 2020.04.25 17:13
  • 기자명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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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원을 가꾼 지 일 년쯤 지나서였다. 대문에 소박하게 ‘명상의 집’이라는 작은 나무 간판을 달았다. 자인과 나는 이곳을 청정하고 깨끗한 수행공간으로 만들고 싶었고 작은 간판이라도 달아야 사람들이 우리의 뜻을 존중해줄 것만 같았다. 명상을 위한 공간이기에 당연히 술과 고기도 금했다. 자인은 과거 명상센터에서 같이 공부했던 도반으로 얼마 전 나를 찾아왔다.

간판까지 달고 인도의 아쉬람 같은 명상센터를 만들겠다는 ‘포부와 이상’도 생겼고, 함께하는 도반도 있고, 모든 것이 갖추어졌으니 이젠 정원을 가꾸면서 열심히 수행만 하면 되었다.

 

전원생활의 기쁨

그런데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 일상에서 노동시간이 많아지는 만큼 우리는 명상을 게을리 하고 있었다. 명상의 ‘필요성’이 점점 줄어든 것이다. 대신 우리는 힘든 노동 뒤 달콤한 휴식시간에 맥주도 한 잔씩 하고 가끔은 삼겹살도 구워먹었다.

항상 소화가 안 되어 기름진 음식만 먹으면 끅끅거리던 내가 간식으로 먹는 불량 식품에도 끄떡없었고, 녹차 한 잔만 마셔도 저녁에 잠을 이루지 못했는데 커피를 두세 잔씩 마시고도 바닥에 등만 대면 잠에 곯아 떨어졌다.

힘든 노동 뒤에 아무렇게나 잔디밭 바닥에 주저앉아 마신 믹스커피는 얼마나 맛있던지, 지금까지 먹어본 커피 중 제일 맛있는 커피였다. 아무리 명상을 하고 마인드컨트롤 같은 심리요법을 해봐도 잘 변하지 않던 신경질적일 정도의 예민함이 노동을 통하여 비로소 무디어지고 부드러워진 것이다.

자인은 나보다 훨씬 예민했으니 말해서 무엇하랴. 어두웠던 자인의 얼굴이 점점 환해지고 밝아졌다.

대중음악이 수행에 방해가 된다고 좋아하던 기타도 치지 않던 자인은 다시 기타를 잡았다. 절대금기시 됐던 ‘음주가무’가 우리 정원에 본격적으로 도입된 것이다.

이후 손님들도 초대해 바비큐 파티도 하고 작은 음악회도 여는 등 우리는 그렇게 마음껏 전원생활이 주는 즐거움을 누렸다. 급기야 샴페인도 못 마시던 자인이 직접 술을 담그면서 창고에는 갖가지 담금주가 쌓였다.

손님들이 오면 건강에 좋은 술이라고 이 술 저 술 내놓기 바빴고 그러다보니 정원에 놀러 오는 손님들도 술 좋아하는 사람들로 재편되고 있었다. 슬며시 우리는 ‘명상의 집’ 간판을 내렸다.

 

오락가락 ‘정원 수행’

아뿔싸, 넘치는 것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던가. 정원을 가꾸던 초기, 육체 노동으로 건강했던 몸이 술과 달콤한 간식으로 조금씩 이상이 생기기 시작했다.

우리는 다시 ‘반성 모드’로 돌아가서 창고에 있는 술을 몽땅 버리고 전원생활을 재정비했다. 자인의 피부병이 다 치료되기까지 2년이 걸렸다.

지금 생각해봐도 웃음이 나올 정도로 우리의 ‘정원 수행’은 오락가락 갈지자 걸음이었다. 하지만 이 시기는 많은 것을 체험하고 깨닫는 시기이기도 했다.

무엇보다 육체 노동이 우리의 몸과 마음에 미치는 긍정적 효과가 놀라웠다. 막연한 ‘실존적’ 불안을, 정원에서의 노동은 너무나 쉽게 날려버렸다. 땅을 만지며 땅에서 일한다는 것은 우리 인간의 유전자 깊숙이 내장되어 있는 본능인 것 같았다. 이 본능이 충족되지 않으면 불안하고 충족되면 사라지는 것일까. 정원에서의 노동은 명상으로도 치유되지 않던 나의 내면 깊숙이 존재하고 있던 불안을 잠재웠다.

또 하나 깨달은 중요한 교훈으로는 영적 여정의 길에 사람들과 함께 하는 문제였다. 사실 우리는 그 어떤 조직에 의존하지 않고도 스스로 수행의 길을 갈 자신이 있었다. 자연 속에서의 적절한 육체 노동과 일상에서의 명상을 잘 결합시켜 물 흐르듯 유려하게 수행의 길을 갈 수 있을 거라 생각했다.

하지만 두 사람만으로는 부족했다. 둘은 ‘조직’이 아니었다. 아무리 노동 시간과 명상 시간을 효율적으로 배치해도 둘만으로는 잘 지켜지지 않았다.

결국 주변의 친구들과 정기적으로 명상과 요가, 춤 명상 등을 함께 하게 됐다. 바쁜 농번기에는 한 달에 한 번씩 만남을 줄이면서 지금까지 몇 년간 모임을 유지해 오고 있다.

나에겐 수행을 도와주는 소중한 모임이고 나 또한 정원으로 그들을 행복하게 해준다. 누구 하나 스승으로 자처하지도 않고, 모임에 아무런 의무와 책임도 없고, 세속적 이해관계라고는 눈곱만큼도 찾아볼 수 없는 수행모임, 내가 꿈꾸었던 모임이다.

사실 명상은 고독하고 외롭게 자기 자신과 대면을 요구하는 작업이다. 모든 외부세계에 대해서 일단 눈을 ‘감아야’ 하는 것이다. 그래야 자기 자신을 투명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자칫하면 스스로에게 갇힐 위험성이 있다. 그 ‘갇힘’은 생동하는 삶의 즐거움이나 행복과는 거리가 있다.

나 또한 나만의 정신세계에서 나만의 천국인 정원에서 아무런 스트레스 없이 놀고 싶었다. 지금도 나는 세상에서 가장 어려운 일이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하는 것이다. 가능하다면 난 이 세상에서 꼭꼭 숨어 지내고 싶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내가 가장 기쁠 때도 사람들과 함께 할 때이다. 항상 이 두 가지는 내게 긴장을 불러일으키지만 결론은 항상 같다.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 힘들어도 사람들과 함께 웃고 울고 부대끼며 살아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 속에서 자유로울 때만이 진정으로 자유롭다는 것을 안다.

‘그래, 이것 또한 중도다. 나의 내면세계의 독립성과 객관적인 외부세계와의 조화, 힘들어도 함께 성장해야 하고 앞으로 나가야 한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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