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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정원은 나를 닮았다

'춤추는 정원' 연재 (11)
15년 넘게 가꾼 정원은 주인을 투영하고 있어
하나의 작품인 '정원' 으로 스스로를 돌아봐

  • 입력 2020.01.08 20:43
  • 수정 2020.04.25 17:13
  • 기자명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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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인생을 여러 가지에 비유한다. 한 편의 연극이나 드라마에 비유하기도 하고 ‘일장춘몽’ 이라고도 한다. 한때 나는 인생은 여행이라고 생각했다.

30대 초반 유럽여행을 간 적이 있다. 지금은 사라진 진보 월간지 《말》에서 기획한 유럽여행으로 독일에서 송두율 교수를 만난 후, 《파리의 택시운전사》를 쓴 홍세화 씨와 함께 파리를 여행하고, 스위스와 이탈리아까지 둘러보는 15일짜리 여행 프로그램이었다.

그 시기 학생 신분이던 남편은 거금을 들여 유럽여행을 간다는 게 부담스러웠지만 고민 끝에 가기로 결정했는데 이 여행에서 나는 생애 최초의 ‘영적 체험’을 했다.

 

최초의 영적 체험

스위스 취리히에서 야간열차를 타고 이탈리아로 가는 여정이 있었다. 열차를 타기 위해 일행과 취리히 중앙역 플랫폼에 모여서 이야기를 나누다 건너편 플랫폼에 눈길이 갔다. 기차가 역으로 들어오면서 바람을 일으킨 순간 긴 머리가 휘날리면서 마치 내 영혼이 몸에서 빠져나간 듯 나 자신을 비추었다. 영화의 한 장면처럼 나는 나 자신을 보고 있었다.

뒤이어 ‘아, 삶은 여행이구나’ 하는 강렬한 영감이 영화 내레이션처럼 뇌리 속에 울려 퍼졌다.

‘그래, 인생이 여행이라면 무거운 짐을 가지고 갈 필요가 없어. 난 가벼운 여행을 해야지.’

깨달음처럼 삶에 대한 의미심장한 통찰이 내면에서 솟아났다.

그 시기 나는 남편과 아이가 내 삶의 중심으로 들어오면서 주체적 인생관에 상당한 혼란을 느꼈고 무엇보다 가정의 경제를 책임지며 마음이 무거울 때였다. 아마도 이런 문제의식이 여행 내내 ‘화두’가 되었을 가능성이 높고 우주는 나의 화두에 이런 식으로 응답한 것이었으리라. 짧은 순간의 체험이었지만 여행을 갔다 온 후 주변의 많은 것을 정리했다. 그만큼 내 일상도 가벼워졌다.

 

정원, 무의식의 반영

정원을 가꾸면서 나는 인생의 모든 것을 정원에 비유했다.

누구나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어한다. 정원사가 자신이 가꾸는 정원을 아름답게 가꾸고 싶듯이. 누구나 자신의 삶이 풍성하기를 원한다. 정원사가 자신의 정원에 풍성한 꽃을 피우기 열망하듯이.

15년 넘게 가꾼 정원을 가만히 바라보고 있으면 정원이 정말 나를 많이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우선 정원의 위치부터 내 심리상태와 성향이 그대로 드러난다. 우리 정원은 시내에서 약 이십 분 정도 떨어진 비교적 가까운 거리에 있다. 내가 심리적으로 가지고 있는 ‘세상’과의 거리, 그러니까 그렇게 멀지도 않고 가깝지도 않은 딱 그만큼의 거리에 있다.

그리고 밖에서는 정원의 정체를 잘 모를 정도로 산골짜기 깊숙한 곳에 정원을 꼭꼭 숨겨 놓았다. 이것은 내 ‘폐쇄성’이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도 있다.

정원을 만들면서 어떤 형식이나 이론에 얽매이지 않고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 마음 가는 대로 만들었다. 여건이 허락하는 한도 안에서 자유롭게 만들다보니 딱히 전통적인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서양적인 것도 아닌, 동양과 서양이 적당히 혼합된 정원이 만들어졌다.

언젠가 정원전문 잡지사 기자가 취재하러 온 적이 있는데 정원을 보면 대충 주인의 성격을 알 수 있다고 했다. 정원이 너저분할수록 주인의 성격이 넉넉하고 정이 많고, 정원이 깔끔하고 단정할수록 주인의 성격이 깐깐하고 쌀쌀맞다는 것이다.

흥미로운 이야기였다. 정원을 가꾸면서 새롭게 알게 된 내 성격의 하나가 좋게 표현하면 ‘단호하다’는 것이고, 나쁘게 표현하면 ‘쌀쌀맞다’는 것이다.

정원 가꾸기는 끊임없이 여러 가지 선택을 요구한다. 새로운 꽃밭을 만들기 위해서는 이미 자리잡고 있던 식물을 퇴출시켜야 하고, 나무들이 자라 나무 사이 간격이 좁아지면 그 사이에 있는 나무도 뽑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나는 과감하다. 멋진 정원을 위해서는 기존에 자리잡고 있는 식물들도 과감히 처리한다. 문제는 이 식물들이 ‘생명’이라는 데 있다. 생명이 아니라면 과감한 퇴출에 무슨 문제가 되겠는가.

생명에 대한 이러한 쌀쌀맞음은 주변의 인간관계에도 그대로 투영된다. 피를 나눈 가족이나 정을 나눈 친구들에게도 나는 나 자신을 쉽게 ‘주지’ 않는다. 쉽게 내주면 내 자유가 구속당할까봐 늘 최소한의 정만 준다. 수행을 한답시고 이런 성향은 더욱더 견고해져 마치 천성처럼 되어가는 것 같다.

그러나 우리 정원을 눈여겨보면 정원 여기저기 곳곳에 벤치와 의자가 유난히 많이 놓여 있음을 알 수 있다. 이것은 사람을 기다리는 내 무의식의 심리상태가 그대로 반영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꼭꼭 숨어 아무에게도 방해 받지 않고 자유를 누리고 싶은 욕구와 사람들과 함께 뭔가를 공유하고 나누고 싶은 상반된 두 욕구가 늘 내면에서 긴장을 불러일으키는 것이다.

어쩌면 우리는 자신이 만든 작품과 일 속에서 자기 자신을 더 잘 볼 수 있는지도 모른다. 아무리 자신에 대한 확신이 강해도 객관적으로 자신을 보고 자기 통찰을 하지 않으면 우물 안 개구리가 될 가능성이 크다. 내가 정원을 ‘깨달음이 자라는 정원’이라 부르는 것도 내 작품인 정원을 통해서 나 자신을 돌이켜보고 많은 것을 깨닫고자 하기 때문이다. 여하튼 지금의 내 정원은 꼭 그만큼 내 인생을 표현하고 있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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