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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최초의 여성 CEO 김만덕

고난 딛고 일어나 어려운 이들을 도운 위대한 여성

  • 입력 2020.02.04 14:32
  • 수정 2020.02.04 15:01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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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만덕 기념관 입구에 있는 김만덕 상. 기념관에 입장할 당시 김만덕 전신상 앞에 쌀포대가 놓여 쌀을 제외한 부분부터 촬영하고 입장했으나 해설사의 설명을 듣고 나올 때 다시 촬영했다. 그녀 앞에 놓인 쌀은 흉년으로 죽어가는 제주민을 살린 나눔의 의미였다 ⓒ오문수

설을 지내고 며칠 후 제주를 방문할 기회가 있었다. 지난 1월 28일 지인이 필자의 손을 이끌고 갈 곳이 있다고 하며 간 곳은 제주특별자치도 제주시 산지로 7에 있는 김만덕 기념관이었다.

2015년 5월 개관한 김만덕 기념관은 200여년 전 제주도의 계속된 흉년으로 제주민의 굶주림이 극심할 때 자신의 모든 재산을 내어 양곡을 배로 실어와 많은 생명을 구해낸 김만덕의 나눔과 봉사의 삶을 기리는 기념관이다.

3층 구조로 된 기념관 앞에는 산지천이 흐르고 아름다운 제주 바다와 여객선제2터미널이 보인다. 산지천과 기념관 사이에 제주올레길 18코스가 들어 있는 이유가 있었다. 제주를 찾는 관광객들이 김만덕 기념관에 들러 그녀의 정신을 본받으라는 의미다.

3층 상설전시관에 들러 "김만덕 기념관에 대해 알고 싶어 왔다"고 하자 마스크를 쓴 해설사가 "마스크를 쓰고 설명해도 되겠습니까?"라며 양해를 구하고 설명하기 시작했다. 해설사의 설명을 들으며 내 삶이 부끄럽기도 하고 그녀가 살아온 삶을 생각하며 가슴 속에서 뭉클한 감동이 밀려왔다.



12살 때 양친을 잃고 18세에 기녀가 되다

김만덕은 1739년(영조 15년) 제주의 평범한 양민 김응렬의 3남매 중 막내로 태어났다. 부유하지는 않았지만 여느 소녀들처럼 가족의 사랑을 받으며 어린 시절을 보낸 그녀에게 혹독한 시련이 닥쳐왔다.

열두 살 되던 해 양친부모가 사망했다. 오갈데 없는 그녀를 받아준 사람은 기녀였다. 당시는 반상의 구분이 분명하던 시기였다. 천인은 가장 낮은 신분으로 노비나 백정, 기녀들이었다. 기녀의 잔심부름을 하며 기녀수업을 한 그녀는 18세에 기녀로 등록했고 20세에 행수기녀가 됐을 것으로 추정한다.

우여곡절 끝에 양인 신분을 회복(24세)한 그녀는 당시 제주 여성들 대부분이 선택한 해녀의 삶이 아닌 다른 길을 선택했다. 만덕은 건입포구에 객주를 차리고 상인의 길로 나섰다.

당시는 수공업과 상업이 본격적으로 발달하기 시작한 시기였다. 곳곳에 시장이 들어서면서 물건의 교역량이 늘어나고 여러 지역의 특산물이 유통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만덕이 하던 객주는 상인들에게 거처를 제공하고 생산자와 소비자를 연결해주는 역할이다. 만덕은 물산객주를 운영하면서 위탁판매를 비롯해 숙박, 금융, 도매, 창고, 운반 등의 업무를 통해 상인으로서의 능력을 확장했고 급기야 제주 제일의 거상으로 성장했다. 

장사수완이 뛰어난 김만덕은 제주 특산물인 말총을 육지에 내다 팔았다. 말총은 양반들이 상투를 틀 때 사용했던 망건을 만드는 재료였다 ⓒ오문수
김만덕은 풍부한 제주 해산물을 육지에 내다팔고 육지에서는 쌀을 사가지고 와 제주민에 팔았다 ⓒ오문수

만덕은 상술에 뛰어났다. 화산암으로 된 제주토양은 물이 잘 빠지기 때문에 쌀농사를 지을 수가 없어 쌀이 귀했지만 육지는 해산물이 귀했다. 이점을 간파한 만덕은 육지에서는 쌀을, 제주도에서는 미역과 말총을 사서 육지에 내다 팔았다. 말총은 양반들이 상투를 틀 때 사용했던 망건을 만드는 재료였다.

뛰어난 장사수완을 갖춘 만덕이 중요하게 여긴 것은 돈보다 사람과의 관계였다. 만덕은 자신의 이익보다 상인의 윤리를 더 중요하게 여겨 "싸게, 그러나 많이 판다. 알맞은 가격으로 사고판다", "정직한 믿음을 판다"라는 원칙으로 장사했다.
 


흉년으로 죽어가는 이들에게 쌀 300석 쾌척해 

당시 제주민들이 겪었던 3가지 재앙이 설명되어있다. "물의 재앙, 가뭄의 재앙, 바람의 재앙"의 3가지다 ⓒ오문수

당시 제주는 3가지 재앙에 시달리던 섬이다. 당시 척박한 제주를 표현하는 말이 있다. '산 높고 깊으니 물의 재앙이요, 돌 많고 땅이 척박하지 가뭄의 재앙이요, 사방이 큰 바다이니 바람이 재앙이다.'

1794년의 흉년은 제주에 심각한 상처를 남겼다. 이미 몇 해 동안의 흉년에 지치고 쇠약해진 상황에서 갑인년 흉년은 제주를 최악의 상황으로 몰고 갔다. 당시 제주의 상황을 살피기 위해 어사로 파견된 심낙수가 올린 장계에는 "만약 쌀로 쳐서 2만 섬을 배에 실어 보내지 않으면 백성들은 머지않아 다 죽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지독한 흉년에 나라에서도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일 때 의인이 나타났다. 김만덕이 재산을 내놓아 살 300석을 구입한 후 제주 사람들에게 나눠줬다. 영의정을 지냈던 채제공은 김만덕의 선행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갑인년(1794년) 지독한 흉년으로 1만 천여명이 죽어나가자 김만덕은 그동안 모은 돈을 풀어 육지에서 쌀 300석을 구입해 제주도민에게 나눠줬다 ⓒ오문수
김만덕 기념관 유리창에 적힌 글로 김만덕이 제주민에게 나눠 줄 쌀이 오기를 기다리며 바다를 바라보던 간절한 마음을 생각해 보라는 글귀가 적혀있다 ⓒ오문수

 

"만덕이 천금을 내어 쌀을 육지에서 사들였다. 모든 고을의 사공들이 때맞춰 이르면 만덕은 그 중 십분의 일을 취하여 그의 가족을 살리고 그 나머지는 모두 관가에 실어 날랐다."


물론 만덕 외에도 현감을 지낸 고한록이 300석, 장교 홍삼필과 유학 양성범이 각각 100석을 내놓았지만 그들은 지역의 명망가인데 반해 만덕은 천인 출신에 여성의 신분임에도 가장 많은 재산을 쾌척했다.

 


만덕의 선행에 감동한 정조대왕... 두 가지 소원 들어줘

만덕의 선행을 들은 정조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라"는 명을 내렸다. 만덕의 소원은 왕이 사는 궁궐 구경과 아름답기로 유명한 금강산을 둘러보는 것이었다. 당시 제주인들에게는 '출륙금지령'이 내려져 있었다. 그 이유는 가혹한 세금으로 견디기 힘들었기 때문에 제주 사람들이 섬을 떠나버렸기 때문이다.

제주에 유배 온 추사 김정희가 김만덕 6대손 김균에게 내렸다는 "은광연세(恩光衍世)" 라는 글귀가 기념관에 걸려있다. "은광연세"는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라는 뜻이다 ⓒ오문수
열두살에 양친을 잃고 기녀가 됐던 그녀는 우여곡절 끝에 양민이 되어 객주를 통해 제주 제1의 거상이 됐다. 하지만 흉년으로 수많은 제주민이 죽어가자 쌀 300석을 구입해 가난한 이들에게 쾌척했다. 이를 전해들은 정조는 그녀의 소원을 들어주라고 명했다. 그녀는 '의녀반수'라는 명예직을 얻어 왕을 알현하고 금강산 유람까지 했다 ⓒ오문수

'의녀반수(醫女班首)'라는 명예직을 얻은 만덕은 왕을 알현하고 금강산까지 유람했다. 30년 후 제주에 유배를 온 추사 김정희는 김만덕 가문의 6대손인 김균에게 '은광연세(恩光衍世)' 즉, '은혜의 빛이 온 세상에 퍼진다'라는 편액을 내렸다.

김만덕의 행동은 사회적 차별을 허무는 뜻깊은 행동이었다. '제주 사람이라는 차별, 여성이라는 차별, 평범한 사람은 안 된다'라는 차별이다. 한계를 극복하고 만인에게 거룩한 뜻을 펼친 그녀에게 고개가 숙여졌다.

'3층 빛을 잇는 사람들'이라는 전시관에는 김만덕처럼 나눔을 실천한 사람들의 활동상과 역대 수상자를 소개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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