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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인생 최고의 작품, 차밭

'춤추는 정원'연재(12)
차나무 재배에 최적의 조건을 갖춘 정원,
땅 속에서 느리게 싹을 틔우고, 6월 한여름 초록의 새싹 고개 내밀어

  • 입력 2020.02.07 16:16
  • 수정 2020.04.25 17:12
  • 기자명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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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정원에서 최고의 작품은 차밭이다. 이곳은 사시사철 푸르름으로 정원을 싱그럽게 하고, 화사한 꽃밭 못지않은 풍경을 선사한다.

해마다 봄이 되면 새싹으로 향기로운 차를 만들어 사람들과 함께 나누는 기쁨까지 누리게 해주니 차밭이야말로 말 그대로 일석삼조의 보물이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차나무가 잘 자라려면 몇 가지 조건이 필요하다. 우선 습도가 높고 배수가 잘 돼야 하며 적당한 음지여야 한다. 그래서 세계적으로 유명한 차밭은 대부분 안개 자욱한 고산지대의 경사지에 자리잡고 있다.

우리 정원은 특이하게도 정원 전체가 계곡으로 빙 둘러싸여 있다 겨울에도 물이 마르지 않는 계곡 덕에 습도가 높다. 돌이 많은 땅이라 배수도 잘 되고 산자락 바로 아래 자리잡고 있어 해도 일찍 진다. 차나무가 자라는 데 중요한 삼박자가 딱 들어맞는 장소인 것이다.

언젠가 녹차 연구로 유명한 녹차 박사님이 정원을 방문한 적이 있다. 농약과 비료를 주지 않고도 건강하게 자라는 차나무를 보고 지형과 토양에 맞는 작목을 잘 선택했다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이전에도 차를 마시고 차와 관련된 책도 읽었지만 이렇게 손수 차밭을 가꾸게 될 줄은 꿈에도 생각 못했다. 단순히 넓은 정원 한쪽을 채울 특용작물로 차를 생각해냈을 뿐이다.

지금은 이 땅이 차나무가 자라기에 최적의 조건이라는 것을 알았지만 처음 작목 선택을 고심할 때는 땅의 생리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일단 ‘저지르고 보는’ 성격에 내 손으로 직접 만들어 마시자는 단순한 생각으로 차밭을 덜컥 만든 것이다.

 

10년 전 가을, 차밭을 만들기로 결정하고 계곡 옆 가시덤불이 우거진 땅에 무작정 포크레인을 들이밀었다. 그러다 공사 도중 우물을 발견하고 차밭 중앙에 연못도 하나 만들었다. 다 만들고보니 차밭 옆으로 거대한 신우대 군락지가 자리잡고 있어, 차를 수확할 때 쯤이면 더욱더 멋진 풍경이 나올 것 같았다.

차밭 터를 닦은 후엔 차 씨앗을 구하러 다녔다. 수소문 끝에 쌍계사 근처에 우리나라 최초로 차를 재배했다는 차 시배지를 알게 됐다. 알고 보니 차밭의 주인은 하동에서도 알아주는 차 명인이었고, 해마다 쌍계사 스님들에게 차를 ‘납품’하고 있는 유명 인사였다.

그해 늦가을 차 씨앗을 심었다. 도토리만한 크기에 돌 같이 단단한 씨앗을 한 움큼씩 심으면서, 과연 이 딱딱한 씨가 제대로 싹을 틔울 수 있을지, 무척이나 걱정했다.

‘제발 내년 봄에 예쁘게 싹을 틔워 주렴. 그럼 내 너희들을 엄청 사랑해 줄게.’

차 씨앗을 심으면서 간절한 염원까지 더했다.

봄이 오자 매일 차밭에 나가 새싹이 올라오는지 살피고 또 살폈다. 하지만 날이 풀리고 정원에 심겨진 나무가 싹을 틔워내도 차밭에서는 아무 소식이 없었다.

‘차 씨앗은 단단해서 좀 늦게 올라올 거야. 차분하게 기다려야지….’

조바심 나는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쓰면서 싹이 올라오기를 기다렸다. 늦어도 5월이면 싹이 올라올 것으로 기대했는데 6월이 다 되어도 차나무의 싹은 전혀 올라올 기미가 보이지 않았다.

급기야 도저히 참지 못하고 호미로 땅을 팠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씨앗은 아래로 가느다란 콩나물 같은 뿌리를 잔뜩 내리고 있었다.

아, 땅 속에서 싹을 틔우고 있었구나. 온몸에 전율이 일어났다. 다만 차 씨앗의 특성상 ‘느리게’ 그리고 ‘강하게’ 올라오는 중이었다. 장마철이 지나자 차나무의 새싹은 세상을 향하여 쑥쑥 고개를 내밀면서 씩씩하게 올라왔다. 아, 얼마나 환희로웠는지. 지금도 그해 봄의 감동을 잊지 못한다. 가시덤불 우거진 1천 평 야생의 땅이 드디어 초록의 새싹으로 뒤덮였다.

 

차밭에서 꿈꾸는 세상

완성된 차밭은 상상 이상으로 아름다웠다. 무에서 유를 창조한 것 같은 기쁨과 충족감은 아이를 낳고 난 뒤 처음 느껴본 경험이었다. 세상에 어떤 기쁨을 이 창조의 기쁨에 비교할 수 있을까. 돈으로 가치를 환산하는 세상에서 이 차밭도 따지면 별 거 아닐지 모른다.

하지만 내 손으로 직접 가시덤불로 뒤덮인 땅을 개간하여 차 씨앗을 심고, 싹을 틔우는 과정에서 나는 생명의 경이로움을 온몸으로 느꼈고 차밭을 완성한 내 자신에 자부심과 충족감을 느꼈다.

가끔 차를 ‘가르친다’는 사람들이 정원을 방문할 때가 있다. 차에 대한 온갖 지식과 예민한 혀로 맛본 차의 풍미에 대해 많은 말을 늘어놓는다. 차 씨앗 한 번 만져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차나무가 어떻게 자라는지 알지도 못하고 관심도 없는 사람들이 차 전문인으로 행세한다. 지식이 최고의 가치로 판치는 세상에 너도나도 지식에만 매달려 살아가고 있다는 사실을 정원을 가꾸면서 확연하게 느낀다.

육체 노동이 충분한 대가를 받지 못하는 세상에서 사람들은 정신 노동에만 매달려 피곤한 삶을 살아간다. 당연히 반쪽짜리 삶이다. 어찌 보면 조금은 유별나 보이는 지금의 내 삶의 방식도 사실은 나의 지식인적인 관념성을 극복해보고자 하는 나름대로 치열한 구도행의 한 방편이다.

10년이 지난 지금 차밭은 꽤 많이 성장했다. 크지도 작지도 않은 천 평 차밭에서, 봄이면 차를 만드는 일로 설레고 바쁘다. 차를 만들고 나누는 일, 그리고 차를 함께 마시는 모든 과정은 삶의 축제와 같다. 세상에 하나쯤은 있어도 좋은, 누구나 인연이 닿으면 함께 차를 마시는 평화로운 공간. 바로 이것이 차밭을 통하여 내가 꿈꾸는 세계다.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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