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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초에서 해방되다

'춤추는 정원' 연재(14)
끝없이 자라나는 잡초를 감당할 수 없어 원칙을 어기고 친환경 약제를 뿌리기도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이 부서질 무렵 새로운 깨달음 얻어.. 잡초는 땅이 건강하다는 증거

  • 입력 2020.02.15 09:45
  • 수정 2020.04.25 17:11
  • 기자명 환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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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가 폐교된 초등학교를 리모델링한 갤러리를 방문한 적이 있다. 갤러리를 운영하는 화가가 도중에 그가 이런 말을 했다.

“이 정원에는 천 권의 책보다 넘치는 지혜가 들어 있어요.”

과장된 표현에 그저 정원을 가꾸면서 많은 것을 배우고 있구나 라고만 생각했다. 하지만 정원을 가꾸는 지금, 그가 했던 말의 의미를 온몸으로 절절히 깨닫고 있다.

자연을 대상으로 일을 하다보니 책에서는 도저히 깨달을 수 없는, 삶에 대한 지혜를 배운다. 명상을 할 때와 유사한 직관적 앎을 활성화시키고 내면의 물음에 대한 답이 얻어지기도 한다.

잡초에 대한 통찰과 대응이 그것 중 하나다. 관점의 변화가 정원 가꾸기에 획기적인 변화를 가져다주었고, 이는 곧 삶에 대한 통찰로 이어졌다.

 

끝없이 자라나는 풀, 풀, 풀

정원을 갖기 전부터 한 가지 로망이 있었다.

우선 마당에는 최대한 넓게 잔디를 깔아 정갈하고 깔끔한 ‘젠가든’의 분위기를 내고, 나무를 심어 사시사철 과일이 주렁주렁 열리게 하고 싶었다. 텃밭도 크게 만들어 야채를 자급자족할 작정이었다.

그래서 정원 한쪽에 사과, 배, 감, 복숭아, 자두, 포도, 키위, 앵두 묘목을 열 그루씩 심었다. 채소밭에도 쌈야채를 비롯해 당근, 호박, 양파, 마늘, 수박, 오이, 양배추, 비트 등 심을 수 있는 모든 야채를 심었다. 그 종류가 얼마나 다양한지 동네 아줌마들이 단체로 구경 올 정도였다.

또한 정원에는 농약과 화학비료를 일체 사용하지 않겠다는 원칙을 세웠다. 자연주의적 삶에 화학 물질의 사용을 금한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소양이라 여겼기 때문이다. 그러나 땅을 한 평이라도 가꾸어 본 사람은 알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무지하고 순진한 생각인지.

비료나 농약을 치지 않은 과일나무는 수확할 게 없었다. 겨우 열린 열매도 익기도 전에 모두 떨어져 버렸다. 가을이 되도 감 하나 건지기 힘들었다.

텃밭도 마찬가지였다. 야채는 형편없이 비실거렸고 특히 당근 같은 뿌리식물은 성장을 못 해 크기가 너무 작았다. 무엇보다 무성해진 잡초를 손으로 뽑는 일이 너무도 힘들었다.

그렇게 한 이삼 년이 지났을까. 뽑아도 뽑아도 자라나는 잡초를 감당할 수 없어 결국 나무를 뽑아 버렸다. 비파나 무화과처럼 농약을 치지 않아도 되는 것만 남기고 나머지는 사람들에게 나누어주었다.

텃밭도 과감하게 정리했다. 노동에 비해 생산성이 떨어지는 작목 대신 쌈야채와 저장성이 좋은 양파와 마늘 위주로 가족이 먹을 정도만 심었다.

이렇게 과일나무와 텃밭을 정리한 넓은 땅에 잔디를 깔고 군데군데 나무도 심고 조그마한 연못도 만들었다. 그러자 제법 내가 꿈꾸는, 초원 같은 정원이 만들어졌다.

그러나 웬걸, 이번에는 온갖 잡초가 올라오기 시작했다. 어떻게 해서든지 정갈한 잔디밭을 유지하려 봄, 여름에는 거의 잔디밭에서 살다시피 하면서 잡초를 뽑았다. 엉덩이로 기어 다니고, 네 발 짐승처럼 무릎으로 기어 다니면서 잔디밭의 잡초를 뽑았다.

뽑다 뽑다 안 되면 동네 아줌마들을 불러와 일을 시키기도 했다. 품삯도 상당해서 돈 한푼 안 나오는 정원에 ‘거액’의 인건비를 지출하자니 속이 다 쓰라렸다. 골프장 잔디를 위해 어마어마한 농약을 뿌린다더니 정말로 그림 같은 푸른 잔디밭은 농약 없이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느 해에는 농약을 치지 않겠다는 원칙을 포기하고 친환경 약제라는 제초제를 뿌려 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것도 지속적으로 하지 않으면 효과가 없어 한두 번 하다 포기하고 말았다.

잡초도 예쁘다

아, 이 잡초를 어떻게 할 것인가. 정말로 두려웠다. 여유롭고 평화로운 삶을 위해 정원을 가꾸는 것인데 이렇게 감당하기 힘들다니. 나란 인간이 한심하기까지 했다.

주위의 반대를 무릅쓰고 시작한 일이라 불평하고 하소연할 사람도 없었다. 인내가 거의 한계에 다다른 순간, 중요한 통찰이 내게 다가왔다.

‘내가 정원에서 행복해지려면 잡초와의 관계를 재정립하지 않으면 안 되겠구나. 잡초를 증오와 두려움의 대상으로 보는 한 나는 이 정원에서 평화로울 수 없다. 누군가에게 보여주기 위한 멋진 정원을 만들기 위해 고군분투하지 말자’

잡초로 인한 고통이 한계에 이른 순간 비로소 ‘인식의 도약’을 한 것이다. 그 뒤로 잔디밭의 잡초를 일일이 뽑아내는 대신 기계로 밀어주기만 했다. 세상에, 아무렇지도 않았다. 사람들은 잔디밭인지 잡초밭인지 구별도 못 했다. 드디어 잡초에서 해방된 것이다!

채소밭처럼 잡초도 아무렇지 않게 바라보는 허용의 마음을 키워 나갔다. 잡초에 대한 생각을 바꾸자 어깨를 짓누르던 부담이 거짓말처럼 사라졌다. 지금 우리 정원은 나무와 꽃, 잡초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어떤 이들은 이런 정원의 모습이 자연스럽고 개성이 있다고 좋아하기도 한다.

잡초에 대한 생각 하나, 관점 하나 바꾼 것이 정원 가꾸기에 ‘혁명’과도 같은 결과를 불러온 것이다.

삶은 끊임없는 문제의 연속이다. 정원의 잡초가 자라듯 인생에는 계속해서 새로운 문제가 등장한다.

만약 우리가 이 문제를 없애는 데만 몰두한다면 그저 고통만이 가득할 것이다. 인생이 불행해지고 삶이 어두워진다.

내 삶이 그 동안 힘들고 괴로웠던 것도 삶의 문제를 너무나 완벽하게 제거하려는 마음 때문이었다. 남에게 내 문제를 보여주고 싶지 않아 ‘잡초’를 제거하는 데 진을 다 뺐던 것이다.

삶의 문제를 받아들이는 일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저 생각이었을 뿐 행동으로 옮길 만큼의 절실함은 없었다.

잡초가 잘 자란다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그 땅이 건강하다는 증거이기도 하다. 땅이 척박하거나 부실하면 잡초도 잘 자라지 않는다. 삶의 문제도 우리가 능동적으로 살아갈 때 발생하는 불가피한 것이다.

문제를 두려워하지 않기, 그리고 문제를 제거하는 데만 몰두하지 않고 삶을 누릴 것. 이것이 내가 정원 가꾸기에서 얻은 가장 큰 깨달음이다.

올 봄 우리 정원의 잔디밭은 환상적으로 아름다웠다. 잔디와 잡초가 거의 반반씩 섞여 있는 땅에 이름도 모르는 연분홍 잡초 꽃들이 잔디 사이로 점점이 피어나 도저히 인위적으로는 연출할 수 없는 사랑스런 잔디밭이 펼쳐졌다.

‘아, 잡초가 이제 예쁜 정원 연출에 도움이 되기도 하는구나. 살다보니 이런 일도 있구나.’

누가 알겠는가. 혹시 잡초 같은 삶의 문제도 우리 삶을 아름답게 꽃피우는 데 도움이 될지.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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