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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라는 이름으로 파편화해야 한다

나는 나요 우리는 그 다음이다

  • 입력 2020.05.29 11:06
  • 기자명 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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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양은 현모양처요 요조숙녀이지만 행복하지 않다

 

오늘도 K양은 힘들게 하루를 마감한다. K양은 미소를 잃어버린 오래다. 이유는 단순하다. 팔딱팔딱 살아있는 생활을 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보편성에 얽매인 삶을 살기 때문이다. 개별성을 발현할 없기 때문이다.

 

도대체 K양에게 무슨 일이 있었을까. K양은 금수저 집안에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좋은 환경에서 공부를 했고 예절 또한 몸에 익혔다. 집안이 여유가 있다 보니 악기며 운동까지 체화하였다.

 

이팔청춘이 되어 남자를 만났다. 그것도 집안 좋고 돈 많다는 갑부집 자제였다. 물론 집안에서 점지해 만남이었다. 자의적인 만남보다 인위적인 만남이었다.

 

축복받은 혼례를 마치고 시아버지 집에서 신혼생활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상했다. K양은 전혀 행복하지 않았다. 왜일까. 그녀는 개별적인 삶을 살지 못했기 때문이다. 시댁이 돈이 많다 보니 K양은 남편과 집안 챙기는 일을 도 맡다보니 시댁의 틀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그렇다면 보편적인 삶과 개별적인 삶은 어떤 의미일까? 어떤 제도나 힘이 작용하여 범주 안에서 생활하는 것을 보편적인 삶이라 있다. 반대로 제도나 힘의 작용에서 벗어나 창의적으로 일상을 사는 것을 개별적인 삶이라 말할 있다. 안타깝게도 K양은 여성의 삶을 강요받았을 여자의 가치를 인정받지 못한 삶을 살았다.

 

그녀는 엄친 아래에서 성장하면서 어린 시절부터 얌전하고 고요한 숙녀(요조숙녀) 길들여졌다. 결혼 이후에는 현명한 어머니와 착한 아내(현모양처)로고착화된 삶을 살았다. 특히 결혼 이후의 가정생활이 문제였다.

 

이른바 그녀는 집안을 잇는 ()이었으며, 남편에게 쾌락을 주는 성적 도구였다. 시종일관 남편과 그 집안에 복종하는 삶만 살았다. 삼종지도(三從之道 - 결혼 전에는 아버지에게 복종, 결혼 후에는 남편에게 복종, 남편과 사별 후에는 아들에게 복종) 같은 보편적이고 획일화된 삶을 살았다.

 

K양에게는 삶의 의미가 없었으며 오직 규격화된 삶만 있었을 뿐이다. 그녀 또한 고귀한 생명을 지니고 태어났다. 그녀 또한 개별적인 삶을 노래한 권리를 가졌다. 문제는 권위주의와 가부장제도가 지배하는 환경에서 살았으며, 보편성이 개별성을 지배하는 사회에서 생활했다는 것이다.

 

어찌 개별적인 삶을 살 수 없는 그녀에게 행복이 있겠는가? 어찌 자유로운 삶이 없는 그녀에게 희망이 있겠는가? 어찌 강요받은 삶의 현장에서 사랑의노래를 부를 수 있겠는가?

 

나는 나일 뿐이다

 

 

그런 사회는 오직 억압과 강요만 있을 뿐이다. 그런 사회에는 질문은 없고 대답만 있을 뿐이다. 그런 가정에는 개인은 없고 체면만 있을 뿐이다.

 

늦었지만 우린 K양에게 그만의 생활을 돌려주어야 한다. 그녀가 시댁의 줄을 이어주는 여성성을 지닌 존재이지만, () 남성만 위한 성이 아니라 자신을 위한 ()임과 동시에 양성(兩性) 위한 성이라 사실이다.

 

이젠 우리에게 자리를 돌려주어야 한다. 우리라는 이름으로 보편화되고 경직화된 개념을라는 이름으로 개별화하고 파편화해야 한다.

그랬을 K양은 행복과 희망 그리고 자유와 사랑을 뜨거운 가슴으로 노래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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