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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물지 않는 상처, 이야포 미군폭격 희생자 명예회복은 언제쯤

25일 여수시의회 소회의실서 토론회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 생존자 이춘혁 씨 참여.. "희생자 위령탑 세워주길"
8월 3일 이야포 폭격사건 현장에서 2차 토론 예정

  • 입력 2020.06.25 19:47
  • 수정 2020.06.26 15:40
  • 기자명 전시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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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5일 오후 3시 여수시의회 소회의실에서 ‘한국전쟁기(이야포, 두룩여, 여자만) 미군폭격 민간인 학살 명예회복 토론회’가 열렸다.

여수시의회 박성미 의원이 주최한 이번 토론회는 한국전쟁기 미군폭격에 의한 민간인 학살 성격과 명예회복을 위한 지역사회 역할을 제고하고 관련 조례 제정을 위해 마련됐다.

이날 토론회에는 TCS여수국제학교 학생 10여명도 참여했다.

양영제 소설가는 국가 역시 이야포 학살의 피의자라며 특별법을 제정하여 피해자들의 한을 풀어야 한다고 말했다

‘여수역’ 저자 양영제 소설가가 ‘미군기에 의한 안도 이야포 피난민 폭살 성격과 치유에 관해 주제발표를 했다.

여수에서 나고 자란 양 작가는 여수는 한국현대사를 결정짓는 일이 일어난 엄청난 도시임에도 그동안 역사를 도외시한 여수행정을 지적했다.

그는 여순사건의 성격을 14연대 봉기, 여수시민 항쟁, 이승만 진압군에 의한 학살 총 3가지로 규정했다. 이야포학살은 마지막 학살 성격에 해당한다.

양 작가는 당시 미군에 의한 폭격 사건은 여수 뿐 아니라 노근리 등 여러 지역에서 벌어졌지만 이야포의 학살은 성격이 조금 다르다며 이는 여순사건과 결부되었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그의 말에 따르면 여순학살이 가장 먼저 일어난 곳이 바로 이곳 안도다. 당시 진압군 소속 김종원 대위가 중앙초등학교(현재 종포해양공원 구역)에 상륙하려다 시민들의 항쟁에 가로막혀 불가능해지자 배에서 박격포를 쏴서 시내를 불바다로 만들었다. 김 대위는 미군 작전에 배제되자 여수 안도서 1차 학살을 벌인다.

양 작가는 “이춘혁 어르신의 얘기를 들으니 이 비극적 이야기를 단순히 한 인간의 기억으로 치부할 수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여수시의회는 이춘혁 어르신의 사적 기억을 공적 기억으로 포섭하여 피해자들의 죽음이 가져온 의미를 찾아야 한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얼마전 여수시에서 기획한 여순사건 화해의 장면이 진심이라면 국가폭력임을 인정하는 게 우선이다. 여순항쟁의 본질을 그려내지 않고 단순히 화해만을 부각한다면 이는 국가가 책임을 지지 않고 어물쩍 넘어가려는 행위다”라고 말했다.

양 작가는 "미군은 한반도 패권을 소련에게 빼앗기지 않으려 무차별 융단폭격을 일으켰고 그 과정에서 노근리와 이야포가 피해를 입었다. 그러나 이야포에는 여순학살과 한국경찰이 개입되있다는 점이 다르다. 경찰은 학살이 일어나자 피난선 선장이 빨갱이라는 소문을 퍼뜨려 안도 주민들을 고립시켰기 때문이다"며 국가 역시 이 사건의 피의자임을 상기시켰다.

양 작가는 “안도 주민들에게는 아직도 당시의 트라우마가 남아 있다”며 “여수시가 관련 조례와 평화공원 만들 때 바로 이런 부분도 고려하여 안도 주민들도 위로하는 방향으로 가야 한다”고 말했다.

또한 “소멸시효가 끝나서 국가의 배상을 받을 수 없는 유족들을 위해 여수시는 조례를 만들어 유족들이 보상을 받을 수 있어야 한다. 그래야만 국회 특별법 제정도 가능하다”고 말했다.

김병호 여수마음학교 교장이 이야포 폭격사건 특별법 제정을 촉구했다

다음으로 김병호 여수마음학교 교장과 엄길수 여수넷통 이사장의 지정토론이 이어졌다.

김병호 교장은 ’잊혀진 미군폭격 민간인 희생자 사건을 주제‘로 발언했다.

김 교장은 두룩여 어민 집단학살사건과 여자만 사건을 위주로 발제했다. 두룩여는 남면 횡간도와 금오도 사이를 말하는데, 두룩여 사건은 1950년 8월 이곳에서 미군 제트기가 쏜 총에 맞아 14명의 어민들이 사망한 사건을 말한다.

당시 현장에 있던 김병호 교장의 할아버지는 김병호 교장에게 그날의 사건을 들려줬다. 김 교장은 “현장에서 즉사한 사망자는 14명이고 후유증으로 고통 받다 돌아가신 분과 평생 불구로 살아간 분까지 합하면 그 수가 더욱 많다”고 말했다.

4일 뒤 여자만에서도 새우를 잡던 어민들이 기총사격을 맞아 사망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두 사건은 날짜만 차이가 있을 뿐 같은 성격을 띤다.

김 교장은 “같은 날 미군은 여자만 어민들을 폭격하고 남면으로 내려갔다는 증언을 들었다”며

“당시 미군은 그들에게 이익이 되는 방향으로 작전을 수행하여 전국에서 너무 많은 피해자들이 발생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증언을 채록해야 하지만 살아계신 분이 많지 않다. 늦었지만 지금이라도 특별법을 만들어 전수조사를 실시해 진실을 밝혀야 한다”고 말했다.

여수넷통 신문사 엄길수 이사장이 언론이 나서서 이야포 사건의 진실을 밝힐 것을 촉구하고 있다

여수넷통 신문사 엄길수 이사장은 ’이야포사건 보도경위 및 지역언론의 역할‘을 주제로 발언했다

엄 이사장은 “이야포 미군폭격 사건은 대표적인 민간인 집단학살 사건”이라며 “그동안 정부의 축소와 은폐, 반공이데올로기로 진실이 왜곡돼 아직까지 종결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노근리 양민학살 사건은 1999년 AP통신에 의해 세상에 알려졌고 이후 한국 정부와 미국 정부가 진상조사반을 꾸려 결국 빌 클린턴 대통령의 사과를 받았다”며 “이야포 사건 역시 언론이 나서서 진실을 파헤쳐야 희생자들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질 수 있다“고 말했다.

엄 이사장은 이야포 사건의 진실을 밝히려면 여수시의 역할이 중요하다고 강조하면서 이야포 해변에 피해자 추모평화공원을 세우고 조례 제정과 기념사업을 실시해야 한다고 말했다.

주제발표와 지정토론이 끝나고 유족 증언 및 질의, 응답이 이어졌다.

이야포 폭격 사건 피해자 350명 중 유일한 생존자 이춘혁 씨도 이날 토론회에 참석해 70년 전의 그날을 생생히 전달했다. 부산에 거주하는 이 씨는 토론회에 참석하기 위해 아침 일찍 여수행 버스에 탑승했다.

이야포 미군폭격사건 생존자 이춘혁 씨는 여수시가 희생자를 위한 위령탑을 설립해줄 것을 간절히 호소했다

당시 16살이던 이 씨는 누나와 함께 배를 탔고, 저녁 늦게 여수앞바다에 도착했다. 아침 9시 경 비행기 4대가 상공에서 맴돌더니 이 씨가 탄 배를 향해 사격을 하기 시작했다. 수영을 할줄 알았던 이씨는 150명의 희생자가 발생한 배안에서 살아남아 바닷가에 자리한 집에 숨었다. 그는 맨발로 산속으로 숨어들었고 그 과정에서 아버지를 잃었다. 죽을 끓여먹으며 살아남은 그들은 다른 피난민들과 배를 타고 거제도를 거쳐 부산에 도착했다. 대한민국 국군이 서울을 점령하자 그 역시 서울로 향했고 최종적으로 부산에 도착했다. 그후 지금까지 부산에서 살고 있다.

그는 그 과정에서 가족 네 명을 잃었다. 그의 소망은 매우 소박하다 이야포 희생자들의 위령탑을 세우는 것.

아직도 이춘혁씨와 당시 마을 사람들은 매년 8월 3일이면 이야포를 방문해 산소 없는 무덤으로 향한다. 이 씨는 여수시장과 시의원에게 위령탑을 세워주기를 간절히 호소하며 발언을 마무리했다.

박성미 위원장이 이춘혁 생존자의 발언을 듣고 있다

토론회는 좌장을 맡은 박성미 기획행정위원장의 발언으로 마무리됐다.

박 위원장은 “특별법을 통해 생존자 지원과 평화공원 조성이 이뤄지고 있다지만 아직도 유가족들에게 매월 10만원 씩 지급되는 것이 보상의 전부다. 이춘혁 어르신과 피해자들은 백악관에 앞에서 진상규명을 촉구하는 집회를 여는 등 외로운 싸움을 계속하고 있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으로 이들이 희망을 잃지 않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편 토론회에는 TCS국제학교 학생 11명과 인솔교사 1명이 참여했다. 이들 학생은 이야포 생존자 이춘혁 씨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전달했다.

‘한국전쟁기 미군폭격 민간인 학살 명예회복 2차 토론회'는 8월 3일 열린다.

TCS국제학교 김서현 학생이 이야포 생존자 이춘혁 씨에게 장미꽃 한 송이를 전달했다
여수넷통 심명남 이사기자가 사회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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