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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구한 운명의 한 남자... "가족 7명 중에 나만 살아남았어요"

[인터뷰] 70년전 벌어졌던 이야포 피난선 폭격사건에서 살아남은 이춘혁

  • 입력 2020.08.04 16:25
  • 수정 2020.08.05 08:34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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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전인 1950년 8월 3일, 미군기의 공습으로 부모와 두 동생을 잃은 이야포로 가기 위해 여수여객선터미널에서 안도행 배를 기다리는 이춘혁(86세)씨 모습. 당시 미군기가 350여명이 탄 피난민선을 공습해 150여명이 희생됐다 ⓒ오문수

"이제 피난선을 탔던 일곱 가족 중 나만 살아남았어요. 폭격 당시 살아남은 동생과 함께 몇 번 이야포를 방문했었지만, 아무런 말도 못 하고 조용히 제사만 지냈어요. 세상이 좋아진 지금에서야 억울하게 죽어간 이들을 위한 말을 꺼내기 시작했어요. 죽기 전에 명예회복을 하고 싶습니다."

여수 안도리 이야포에서 벌어진 '피난선 폭격 사건 70주년'을 맞이해 여수를 방문한 이춘혁(86)씨의 말이다. 그는 <여수넷통뉴스>와 <여수뉴스타임즈>, 해양환경인명구조단, 박성미 여수시의원이 주관하는 '이야포 피난선 미군폭격 피해자 추모식'에 참석하기 위해 하루 전인 8월 2일 여수를 방문했다.

 

여수 이야포 피난선 폭격 사건과의 인연 

70년 전인 1950년 8월 3일 오전 9시경 미군기의 민간인 피난선 폭격으로 350여명 중 150여명이 사망했던 이야포 모습. 뒤쪽에 희미하게 보이는 섬이 연도이다 ⓒ 심명남

이야포 미군 폭격 사건(이하 이야포 사건)은 1950년 8월 3일 당시 여수시 남면 안도리 이야포에서 미군 전투기가 피난민을 태운 배를 북한군 선박으로 오인해 폭격하면서 민간인이 희생된 사건이다.

필자와 이야포 사건은 인연이 깊다. 2006년 10월 여수지역사회연구소 회원과 함께 금오열도 끝에 위치한 안도 일대를 탐방하던 중 미군기에 의한 이야포 피난선 폭격 사건을 들었다. 자세한 이야기를 들은 후 포구 인근에 사는 할아버지로부터 폭격 당시 상황과 전마선을 타고 부상자를 구했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배를 타고 집으로 돌아오던 중 '제2의 노근리 사건'이라는 생각이 들어 마음이 착잡했다. 집으로 돌아와 여수지역사회연구소에 저장된 기록과 녹취록을 읽고 난 후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송고했다. 반향은 컸다. (오마이뉴스 관련기사 바로가기)

KBS와 MBC, 연합뉴스 및 여러 언론에서 취재를 시작했다. 영어 교사인 필자는 내친김에 사건 내용을 영어로 번역해 <오마이뉴스> 구글판에도 송고했다. 사건을 이슈화하기 위해서는 좀 더 심층적인 자료가 필요했다. 미국에 사는 친구에게 편지를 보냈다.

'미국방성 자료실에 가서 1950년 8월 3일 오전 9시경 미극동군사령부 제25 전투비행단에 속한 F80 슈팅기 비행일지 자료를 복사해 보내달라.'
  
친구로부터 연락이 왔다. "그런 자료를 구할 만큼의 능력이 안 된다." 하는 수 없었다. 당시 부산에 살고 계시는 증언자 이춘송(이춘혁의 동생)씨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러나 돌아온 답변은 완곡한 거절이었다.
      
필자는 거의 매년 이야포를 방문한다. 이야포를 방문할 때마다 서고지 방향 이끼 낀 바위를 바라보며 가슴앓이를 했다. 바위를 뒤덮고 있는 이끼들을 볼 때마다 "폭격 맞아 죽어가던 피난민들의 영혼이 이끼가 되어 바닷가 바위에 올라선 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들의 영면을 기도하며 언젠가 당시 살아남은 이들 중 몇 분이라도 만나보고 싶었다. 그런데 최근 <여수넷통뉴스>가 중심이 되어 추모식과 기념행사를 매년 진행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특히 안도가 고향인 심명남 기자는 불행했던 과거를 반복하지 말자며 추모 행사에 헌신했다.



350여 명 승선한 피난선, 미군기 폭격으로 150여 명 사망

이야포 피난선 미군폭격사건 70주년 추모위원회가 건립한 평화탑 옆에선 이춘혁씨 모습. 돌탑 맨위의 새를 닮은 돌은 억울하게 희생된 이들의 넋이 하늘로 올라가기를 기원하는 의미다. ⓒ 심명남

이춘혁씨는 안도행 배가 출발하기 2시간 전 필자에게 자신의 이야기를 털어놓았다. 다음은 이씨가 눈물을 그렁그렁하며 증언해준 내용이다.

"당시 살아남은 사람 중에서 이야포 사건에 대해 증언해줄 수 있는 사람은 나밖에 없을 거요. 미국에 한 분이 계시는데 사업을 하기 때문에 미국 정부의 눈치를 보느라 증언할 상황이 안 될 겁니다."

이춘혁씨의 운명은 기구했다. 이념전쟁만 아니었더라면 평안북도 용천에서 평안한 삶을 살았을지도 모른다. 허나 전쟁은 이춘혁씨 가족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다.

해방이 되자 이춘혁씨 가족은 1946년 평안북도 용천에서 서울로 월남했다. '공산주의가 싫어 월남했다'는 그의 삶은 6.25 전쟁 전후로 완전히 뒤바뀐다. 전쟁이 발발하자 가족은 서울에서 부산으로 이주했고 부산 성남초등학교에 수용됐다. 하지만 후퇴하던 군인들이 "학교를 비워주라"고 요구하면서, 피난선을 타고 통영초등학교 피난민 시설에 살다가 다시 한번 배를 타고 욕지도로 갔다.

피난 당시 이씨의 가족은 7명이었다. 아버지 이신태(44세), 어머니 최춘자(37세), 누나 이경애(18세), 본인 이춘혁(16세), 남동생 이춘송(13세), 여동생 이경순(6세), 막내 이춘기(3세)까지.

일주일 동안 욕지도에 머물던 그들은 어느 날 피난선을 타고 이름 모를 섬 포구에 도착해 닻을 내리고 배에서 나눠준 주먹밥을 먹고 있었다. 그가 이름 모를 섬이라고 했던 곳이 안도였고, 피난선이 닻을 내린 곳은 이야포였다.

1950년 8월 3일 오전 9시쯤으로 추정한 그가 당시 상황을 자세히 말하기 시작했다.

자세한 전말을 들은 조카가 이야포사건을 형상화해 그린 그림이다. 필자의 조카는 만화창작을 전공했다 ⓒ오진영

"당시 날씨는 구름 한 점 없이 맑고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날씨였어요. 일본 쪽에서 날아온 제트기 4대가 피난선 주위로 날아왔고 선두에 선 제트기가 피난선 주위를 맴돌았어요. 마침 선장 옆에서 주먹밥을 먹으며 비행기를 바라본 나와 조종사의 눈이 마주쳤어요. 배는 하얀 백기를 달고 있었고 피난민들이 입은 옷을 보면 피난선인 줄 짐작했을 텐데, 곧바로 기총소사가 시작됐어요. 총알을 맞은 피난민들은 아우성치기 시작했죠. 뛰어서 기관실로 도망쳐오자 아버지가 총을 맞아 죽어가고 있었어요."

전투기는 2번에 걸쳐 기총소사를 하고 날아갔다. 이춘혁씨는 "너는 헤엄을 잘 치니 너라도 살라"며 바다로 뛰어들라는 어머니의 말에, 배에서 뛰어내려 해안가로 헤엄쳐갔다. 그는 바닷가 오두막 뒤에 숨었다.

미군기가 날아가 버리자 포구 옆 마을 사람들이 피난민들을 구하기 위해 전마선을 타고 배로 다가와 사람들을 구해줬다. 얼마 지나지 않아 전마선을 타고 온 누나와 바로 밑 남동생이 합류해 함께 산자락에 숨어있는데, 피난민 중 한 분이 "너희 엄마 물에 빠져 죽었다"고 전해줬다. 막내를 업은 엄마는 전마선이 전복돼 막내와 함께 목숨을 잃었다. 전마선이 뒤집힌 이유는 한꺼번에 많은 사람이 탔기 때문이었다. 여동생 사망원인은 모른다.

살아남은 셋은 엄마를 물에서 건져 바닷가 집 옆으로 이동하려는 데 문제가 생겼다. 마을 청년들이 "송장을 마을로 들이지 말라"며 위협했기 때문이다.

살아남은 세 식구가 다른 피난민들과 함께 서고지 쪽 산자락에 숨어있는데, 비행기가 또다시 날아와 인근에서 고기잡이하던 어선을 공격했다. 그들은 산자락에서 일주일 정도 살았다. 연고가 없는 그들이 어떻게 살았는지가 궁금해 '그동안 그곳에서 어떻게 살았어요'라고 물었다.

"누나가 예뻤어요. 당시 누나가 차고 있던 시계를 안도 주민에게 2천 원에 팔아 식량을 구했어요. 식량을 구하러 마을에 갔더니 마을 주민 한 분이 '우리 집에 시집오면 동생들까지 키워주겠다'고 말했지만, 누나는 거절하고 돌아왔어요.

헤엄을 잘 치는 제가 배로 돌아가 밥해 먹을 도구와 이불 보따리 및 살림 도구를 가지고 왔어요. 누나는 '이 쌀마저 떨어지면 죽는다'며 점심은 건너뛰고, 아침저녁은 홍합을 따다 죽을 끓여줬어요.

일주일 후 해군선이 와 피난민들을 태우고 이웃에 있는 연도로 건너가던 중 이야포 쪽에서 불이나 이유를 물었더니 '시체를 배에 싣고 기름을 부어 불 질러버렸다'고 했어요."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

헌화하는 이춘혁씨 모습 ⓒ심명남

피난선이 연도에 잠시 머물 동안 누나는 엄마가 입던 비단옷은 1천 원에, 헌 옷은 5백 원을 받고 팔아 생활비를 구했다. 그 후 해군 군함을 타고 부산으로 간 그들의 삶은 비참했다.

깡통 들고 밥 얻어먹기, 구두닦이, 신문장수, 얼음과자 장수 등. 부산에서 어렵게 살던 그들에게 한 해병대 사병이 나타났다. 그는 "너 나한테 시집오면 네 동생들이 살 수 있도록 집 한 채 마련해줄게"라는 말과 함께 누나를 데려갔다. 그러나 누나에게선 도통 연락이 없었다.

알고 보니 해병대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구박받고 있었다. 부모와 동생들을 눈앞에서 잃은 트라우마와 힘든 시집살이로 고통받은 누나는 결국 27살에 세상을 떠났다. 둘만 남아 서로 의지하며 살던 동생(이춘송)도 5년 전 세상을 떠났다.

이춘혁씨는 35년 정도 택시운전을 하고 살며 행복한 가정을 꾸렸다. 이제 세상을 떠날 때가 가까워졌다고 생각한 이춘혁씨의 소원은 죽기 전에 꼭 명예회복을 하는 것이다. 15년 전, 6.25 당시 노근리, 거창, 창령 등지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희생자 유가족 80여 명과 함께 미국을 방문해 명예회복을 위해 노력했지만 허사였다. 이날 그가 안도행 배를 타기 위해 부산에서 가지고 온 짐은 세 개였다. 하얀 국화꽃과 조그만 손가방 그리고 필자가 들기도 힘들 정도의 배낭.

'뭐가 들었길래 이렇게 무거워요'하고 묻자 그는 "피난민들이 죽어갈 때 도와줬던 노인들에게 나눠줄 과자에요. 그분들이 아직도 살아있거든요. 당시 피난민들을 도와줬던 안도 주민들이 정말 고마워요"라고 웃으며 말했다.

안도를 떠나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세상에 남기고 싶은 말이 있다고 했다.

"이땅에 다시는 전쟁이 없어야 합니다. 평화통일해야 합니다."

※ 2006년 기사에 나온 이대혁씨와 이춘혁씨는 동일인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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