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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충무사’에서 이순신 장군을 만나다

충무사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정운 장군, 송희립 장군이 배향된 곳
1598년 일어난 순천 왜성 전투는 임진왜란 3대 대첩에 버금가는 크고 처절한 전투
충무사에서는 1년에 두 번 세 명의 장군과 수많은 수군을 기리는 제사 지내
'살아있는 교육장'임에도 도로표지판 하나 설치되어 있지 않은 점은 아쉬워

  • 입력 2020.11.17 12:15
  • 수정 2020.11.20 16:43
  • 기자명 공문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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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충무사

가을을 맞이하여 전남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포) 마을에 있는 충무사(忠武祠)를 찾았다.

충무사는 전라남도 문화재자료 제48호로 지정되어 있으며(1984. 2. 28. 지정)충무사에는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충장공 정운 장군(1543-1592. 1947년 배향), 송희립 장군(1553-1623. 1949년 배향)이 배향되어 있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 영정

임진왜란 때 일어난 ‘순천 왜성 전투(일명 신성포 해전)’는 다음과 같다.

삼도수군통제사 이순신 장군의 후임인 ‘원균’의 실책으로 1597년 7월 우리 수군의 대패 이후, 같은 달 7월에 삼도수군통제사로 다시 임명된 이순신 장군은 9월(16일)에 12척의 배로 명량해전에서 크게 이겼다.

1598년 8월 18일 일본의 풍신수길(도요토미 히데요시. 1536-1598. 8. 18.)의 급사 이후 신성포의 왜성에 집결한 1만5천여 명의 소서행장 (임진왜란 당시 왜군 선봉장이었던 무장)의 일당을 섬멸하기 위해, 이순신 장군은 전남 완도군 고금도의 임시 통제영을 출발한다. 신성포에서 9월 20일부터 22일까지, 10월 2일부터 4일까지 6일간 치열한 순천 왜성 전투를 감행하여 서로간 큰 피해를 입었다.

왜성에 은거 중인 소서행장 부대를 섬멸하기 위해 신성포 앞바다의 조선과 명나라 수군과, 검단산성의 명나라 육군이 합동 작전을 하기로 하였으나 명나라 육군의 잦은 약속 위반으로 조선과 명나라 수군만 큰 피해를 입은 채 소서행장 부대를 섬멸하지 못했다.

순천 왜성 전투(신성포 해전)로 적선 11척 나포, 30여 척 불태우고 4천여 명을 섬멸했다.

조선군은 사도 참사 황세득, 군관 이청일, 안골포 만호 우수 등 지휘관 3명이 전사, 지세포 만호, 옥포 만호, 제포 만호, 사량 만호, 진도 군수, 해남 현감, 강진 현감 등 지휘관 7명이 부상을 입고 일반 수군 다수 전사 및 부상을 입었다. 또한 명나라 수군은 전선 39척을 손실, 2,360여 명의 전사자 및 부상자가 발생했다. 이로 인해 이곳 전투가 얼마나 치열했는가 알 수 있다.

이순신 장군은 소서행장 일당이 곧 탈출할 것이라는 급보를 받고 1598년 11월 9일 완도군 고금도를 출항하여 11일 장도에 진을 치고 해상 봉쇄 중 18일 전령의 급보를 받고, 밤 10시경에 출발한다. 노량 앞 바다에서 적을 만나 19일 새벽 4시부터 교전 중 8시경에 이순신 장군이 전사한다. 12시경에 상황이 종료됨으로써 7년 전쟁 임진왜란은 막이 내린다.

송희립 장군은 11월 19일 아침에 이순신 장군이 흉탄에 맞아 쓰러지자, 곡소리를 내지 못 하게 하는 등 돌아가신 사실을 은폐한 채 북을 치며 전투를 독려하여 최후의 승리를 거두는 데 큰 역할을 한다.

송희립 장군 영정

순천 충무사에서는 1년에 두 차례(충무공 탄생일과 돌아가신 날) 제사를 모신다.

대상은 이순신 장군과 충장공 정운 장군, 송희립 장군 및 수많은 무명의 수군들이다. (사)순천지구 이충무공 유적 영구보존회 성갑섭 사무국장의 말이다.

“봄 제사는 이순신 장군 탄생일인 4월 28일에 모시고, 가을 제사는 2020년부터는 이순신 장군이 명량해전에서 돌아가신 날인 1598. 11. 19.(음력)을 양력으로 환산하니까 12월 16일 이어서, 2020년부터는 가을 제사를 양력 12월 16일에 모시기로 했다”

제사는 오전 7시∼9시 사이에 모시고, 기념행사는 10시경에 한다고 한다. 기념행사의 내용은 판소리, 국악, 살풀이춤, 난타 공연 등을 한다고 한다.

충무사에 배향된 충장공 정운 장군(1543-1592)은 전남 해남군 옥천면 대산리 출생으로 녹도 만호 때 임진왜란을 맞이했다. 경상도 출전을 강력히 주장하였으며, 부산포 해전에서 전사했다.

송희립 장군(1553-1623)은 전남 고흥군 동강면 마륜리 출생으로 1591년 형 ‘대립’과 함께 이순신의 군관이 된다. 1592년 이후 이순신 장군 휘하에서 계속 종군했다.

정운 장군 영정

지역 주민들이 순천 '충무사'를 세우게 된 동기는 특이하다.

임진왜란이 끝나고 100여 년 전후에, 왜구들의 악귀가 꿈에 자주 나타나서 주민들을 몹시 괴롭혔다. 그래서 주민들이 지혜를 모아서 왜적들이 가장 무서워하는 이 충무공의 사당을 짓고(1697년경) 이순신 장군의 위패와 영정을 모시고 제사를 지냈다. 그 뒤부터는 편안한 생활을 했다고 한다.

순천 '충무사'는 지역민들의 염원으로 만들어진 후에 꾸준한 관심과 물적 지원으로 현재에 이르고 있다. 충무사를 통해서 지역민들의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정운 장군, 송희립 장군 및 이름 없이 돌아가신 수많은 수군들에 대한 무한한 감사의 마음을 알 수 있다.

영당(影堂)

순천에 살면서 충무사를 처음 찾은 서 모씨는 소감을 다음과 같이 말했다.

“평상시에 존경하는 성웅 이순신 장군을 모신 충무사를 처음 왔다. 시골 아주 조용한 곳에서 이순신 장군과 충신들의 영정을 보니, 지금도 살아서 나라를 지키시는 느낌이 들었다. 사당과 나무들이 조화롭게 어우러져 있어 마음이 치유된 것 같고, 인류와 모든 생명체를 사랑하며 살아야겠다고 마음 먹었다.”

순천 충무사는 ‘나라 사랑’의 마음을 배울 수 있는 좋은 산 교육장이다. 그런데 널리 알려져 있지 않다. 충무사는 국도 17호선 해룡면 면사무소 옆 월전교차로에서 동쪽으로 진입한다. 그런데 사거리에는 작은 돌에 ‘충무사’란 표지석만 있을 뿐이다. 순천시에서는 도로 표지판을 빨리 만들어서, 많은 국민들이 나라 사랑의 체험장으로 활용할 수 있게 해야겠다.

충무사 주위에는 순천 왜성, 검단산성, 장도(獐島) 등이 있다.

순천 왜성은 순천시 해룡면 신성리 산 1번지에 있다. 소서행장(고니시 유키나가) 부대 15,000여 명이 1598년 11월 19일 퇴각할 때까지 주둔하였고, 우리 수군의 도전을 받은 성이다.

검단산성은 해룡면 신성리 산 84번지 일대에 있으며, 왜성의 소서행장 일당을 섬멸하기 위하여 1597년 후반부터 명나라 육군 ‘유정’ 제독 부대 1만5천여 명이 주둔했다.

장도(獐島)는 여수시 율촌면에 있으며, 현재는 매립으로 육지가 되었다. 임진왜란 때 일본 수군의 군수기지 창고로 활용되었다가 1598년 신성포 해전 때 빼앗아서 우리 수군 전진 기지로 사용했다.

★ 참고 자료 : 충무사 안내판, 순천 충무사 안내 자료(순천시 발간)

충무사(忠武祠) : 외삼문(外三門. 바깥쪽에 있는 삼문)

 

< 순천 충무사의 역사 >

1697년경 마을 주민들이 충무공 사당을 짓고 제사를 지냄.

1944년 왜경들에 의해 충무사가 방화 철거됨.

1945년 광복과 더불어 순천군수(김양수)의 제의로 성금을 모아 중건 추진.

1947년 충무공 유적 경모회를 조직하여 민·관·유림·학생들까지 중건에 참여하여 사당, 영당, 내삼문, 강당 등을 신축하고 김은호 화백 작품으로 충무공 영정 봉안 후 ‘충무사’라 이름 짓다. 충장공 정운 장군을 배향하다.

1949년 송희립 장군 위패 추배. 송씨 문중에서는 논 4,000여 평을 제우 답으로 헌토함.

1964년 정문(외삼문) 등 현존 형태가 거의 갖추어짐.

1987년 승주군수(백주원 : 공적비 있음)의 전폭적인 지원으로 충무사의 사당 확장 신축, 해룡∼충무사 간 도로 확장 등 대대적인 제2 창건 사업을 전개하고 완공하여 현재에 이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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