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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류 한 장의 무게

  • 입력 2020.11.29 18:41
  • 수정 2020.11.29 18:57
  • 기자명 이광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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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 이광숙 과장 (초록우산 어린이재단 전남아동보호전문기관)

학대받은 아이들을 상담하고 지원하는 일! 올해는 유독 내 직업의 무게가 크게 느껴지는 것을 경험했다. 바로 내가 답변해야 할 정보공개청구 서류 때문이었다.

15년 전 어느 여름에 만난 그 아이가 마치 어제처럼 생각났다. 참 이상도 하지. 그 아이 이름을 듣는 순간 나도 모르게 몇몇 장면이 선명하게 떠오르는 것이었다.

당시 나는 둘째 아이를 임신한 상태였고 밤 늦은시간까지 피해아동과 가족, 그 밖의 다른 사람들을 만나 상담하면서 동분서주했다. 그 때 태어난 둘째가 올해 중학교 3학년이다.

그 아이는 임신한 내 모습에 흥미를 갖고 많은 질문을 콜콜히 했다. 당시 13살 어린아이였지만 꽤나 해박하고 조숙한 아이로 기억한다.

가정에서 생활하는 것이 안전하지 않다고 판단되어 분리보호 조치 하였고, 영특하여 제법 공부를 잘 했다는 소식도 전해 들었다. 지금은 대학을 졸업하고 직장을 갖고 어쩌면 좋은 사람 만났을 나이일텐데, 15년이 지난 지금 그 아이가 자신의 상담내용을 정보공개 청구를 한 것이다.

어린이날에 자원봉사자들과 아동학대예방캠페인을 펼치는 장면. '아이들의 신호에 응답하라' 아동학대 신고 후 개입 절차 홍보에 나섰다

서류라는 게 보존기한이 있는 데다가, 몇 년전까지 보관되었던 파일들은 개인정보 보호법 시행 후 일절 파기하였기에 안타깝게도 남아있는 문서는 없었다. 그나마 남아 있는 것은 2012년 국가전산망시스템 구축에 따른 일부 상담 기록이었다.

그 아이는 제법 괜찮은 대학을 졸업했고 잘 지내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전히 치유되지 않은 아픔은 그 아이를 따라다니며 일상을 괴롭혔다. 심리치료를 꾸준히 받았지만 그때 일 때문인지 여전히 힘들다고 한다. 희미해진 어린시절의 기억 속에 상처로 짓밟힌 아이가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임에도 여전히 고통을 호소한다.

그 아이는, 아니다 어엿한 성인이니, 15년전 상담받았던 그 분은 여러 법률 자문을 얻어 가해자를 고소 하기로 결심했다고 한다. 어떤 이는 가능하다고 했고, 또 어떤 이는 어렵다고도 했지만 희미해진 기억 속 사건을 찾아보기로 결심한 것이다.

청구한 정보공개서는 구구절절 많은 사연들은 서류 한장으로 간략히 정리되어 전달이 됐다.

고작 한 장이라니……. 한 사람의 삶이 서류 한 장에 담긴다.

전남아 동보호전문기관 직원들이 아동학대 예방 캠페인 인증샷 릴레이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살면서 인생을 바꿀 서류는 참으로 많다. 나도 대학 졸업 후 자기소개서와 이력서를 여러차례 작성 했었다. 구직과정에서, 대학원 진학하면서, 모임 가입을 위해, 또한 강의를 요청하는 곳에선 의례 강사 프로필을 요청하고, 각종 신청서류에 나를 증명할 수 있는 증명서 등, 한 장 서류에 담긴 나는 곳곳으로 전해졌다. 인사기록부 서류에는 각종 이력사항과 개인정보가 편철되어 있겠지. 생각해 보니 서류 한 장으로 보여질 수 있는 내 모습과 삶의 내용은 다양했다.

그녀가 청구해서 답변으로 받은 정보공개서류 한 장은 그녀 인생에서 무엇을 담고 있는가? 15년동안 고통받은 세월이 가진 아픔의 무게와 깊이에 비해 지나치게 가벼운 서류 한 장이라는 것을 인정할 수 밖에 없었다. 단 몇 줄로 표현되는 인생이라니…….

죽고 싶을 만큼 힘겨운 시간들이었어도 지나고 나서 ‘그땐 그랬어’라는 말 한마디로 이겨낼 수 있는 힘(empowerment)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마는 폭력에 관한 문제는 그리 단순하지는 않다.

순천시 행복나눔 한마당에서 아동과 노인 학대 예방 캠페인 부스

 

2020년, 사상 유래없는 코로나 19 펜데믹으로 세계가 절규하는 순간에도 그녀의 고통은 코로나가 주는 공포보다 컸나 보다.

「귀하가 요청한 정보공개를 첨부와 같이 회신합니다.」
서류 한 장! 너무 가벼울까 봐 그녀에게 위로와 도움이 되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보냈다.

"내 생애의 최대 자랑은 한번도 실패하지 않았다는 것이 아니라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 났다는 것이다"라고 한 콜드 스미스 처럼, 그녀가 넘어질 때마다 다시 일어설 수 있기를 바란다.

"내가 만일 애타는 한 생명을 구할 수 있다면 내 삶은 정녕코 헛되지 않으리라"에밀리 디킨스의 시 한 구절을 읇조린 날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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