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깃발이 이루지 못한 삶이여!

나만의 철학으로 살 수 있는 큰 산을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 입력 2021.01.05 12:21
  • 기자명 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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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만의 태양을 향해 걸어가자.

신축년 새해가 벌써 다섯 걸음을 내딛었습니다. 그는 때 묻지 않은 아이처럼 한 걸음 한 걸음 아장아장 앞으로 향하고 있습니다.

무색무취의 모습으로 걸어가는 그와 함께 하기 위해서 옆으로 다가서 그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덕담(德談)을 부탁했더니 그는 기꺼이 화답해주었습니다. 공자의 말씀을 인용한 쉽지 않은 화두(話頭)였습니다.

‘다른 사람이 자신을 알아주지 않아도 화를 내지 아니하면 또한 군자가 아니겠는가?(人不知不溫不亦君子) - 논어, 학이편’

그가 던진 화두를 해석하기 위하여 종일 진땀을 흘렸지만 그래도 깊은 사색의 시간을 갖는 동안 기쁨의 향기가 온몸에 가득했습니다.

누구를 위해 사는 것이 아니라 나를 위해 살아야 한다는 엄숙한 화두를 곱씹으면서 혹여 동안 다른 사람의 눈과 귀 그리고 말에 휘둘리는 삶을 살지 않았나 성찰의 시간을 가져봅니다.

보통 사람의 입장에서 다른 사람이 자신의 언행을 알아주지 않았을 때 아무렇지 않게 받아들인다는 것이 쉽지 않을 것입니다. 그렇지만 신축년 그가 그것을 말했다는 것은 우리도 충분히 일상에서 생활화할 수 있다는 의미가 숨어 있지 않았을까요?

오답이 정답에게 말한다. " 이제야 세상이 바르게 보인다"

한편 나를 위해 산다는 것이 마치 이기적인 삶처럼 들릴 수 있습니다. 하지만 많은 사람은 어릴 때부터 부모나 사회에서 원하는 사람으로 길들여집니다. 그러다 보니 주위에 자신의 삶을 찾지 못하고 타인의 눈과 말에 얽매여 사는 사람이 참 많습니다.

새해부터는 나만의 길을 우직하게 걸어가면 어떨까요? 작은 일부터 스스로 계획하고 몸소 부대끼며 삶과 직면해 보는 것입니다. 비록 그 길이 아프고 시릴지라도 그 길 또한 자신만의 삶의 조각이기에 가치가 있을 것입니다.

로버트 프로스트의‘가지 않는 길’처럼 인생은 결코 다시 걸을 수 없는 길이기에 다른 사람이 가지 않은 길을 걸어가면서 삶을 새롭게 써보는 것도 의미가 있을 듯합니다.

“노란 숲 속에 길이 두 갈래로 났었습니다. 나는 두 길을 다 가지 못하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면서, 오랫동안 서서 한 길이 굽어 꺾여 내려간 데까지, 바라다볼 수 있는 데까지 멀리 바라다보았습니다.

그리고, 똑같이 아름다운 다른 길을 택했습니다. 그 길에는 풀이 더 있고 사람이 걸은 자취가 적어, 아마 더 걸어야 될 길이라고 나는 생각했었던 게지요. 그 길을 걸으므로, 그 길도 거의 같아질 것이지만.

그 날 아침 두 길에는 낙엽을 밟은 자취는 없었습니다. 아, 나는 다음 날을 위하여 한 길은 남겨 두었습니다. 길은 길에 연하여 끝없으므로 내가 다시 돌아올 것을 의심하면서…….

훗날에 훗날에 나는 어디선가 한숨을 쉬며 이야기할 것입니다. 숲 속에 두 갈래 길이 있었다고, 나는 사람이 적게 간 길을 택하였다고, 그리고 그것 때문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고.”

프로스트는 또 다른 길을 선택하길 바라며 인생을 조망하였습니다. 즉 한 사람이 가을날 숲속을 걷다 두 갈래 길을 마주하다가 고민 끝에 사람이 적게 지나간 길을 택했으며, 이 때문에 이후의 모든 삶이 달라졌다는 것입니다.

​이 시에서 말하고 있는 것처럼 새로운 길을 경험해보지 못하면 새로운 삶을 알지도 못하고 달라지지도 않을 것입니다. 타인을 의식하며 살기보다는 자신의 시선으로 세상을 바라보면서 나만의 길을 사뿐히 걸어갔을 때 모든 것은 달라질 것입니다.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문득 니체가 대화에 끼어들며 화두를 다시 분해하더니 홀연히 사라져버렸습니다.

“그래요. 내가 삶의 주인이 되어야 합니다. 죽음은 삶의 종착역이기에 자신만의 열차를 타고 이곳저곳을 달려봐야죠. 저는 100년 전에 ‘신은 죽었다’는 말을 해서 사회에 큰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이 또한 다른 사람의 이목에 신경을 쓰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죠. 신이 죽어야 사람이 주인이 된다는 의미인데 왜 그런 길을 걸으면 안 됩니까?

저는 사람이 신을 죽여야 삶의 주인으로 우뚝 설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우리 주위에서 서성이는 인습과 정답에 반기를 들어 보는 것도 새로운 길을 여는 용기가 아닐까요?”

바람에 맞서 휘날리는 깃발을 보셨습니까? 그는 소리 아우성을 치며 먼 해원을 향해 달리고 또 달리고 싶어 했기에 삼백육십오일을 쉬지 않고 울었던 것입니다. 그렇지만 깃발은 아쉽게도 깃대에 꽁꽁 묶여 결국 그곳에서 생을 마감하고 말았습니다.

지금까지 타인의 모습으로 살았던 작은 산을 넘어 나만의 철학으로 살 수 있는 큰 산을 대면할 수 있겠습니까?

과연 우린 깃발이 이루지 못한 삶을 향한 용기가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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