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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짜 공부'는 무엇일까

공부가 학생들의 호기심의 싹을 죽이는 이유를 아시나요?
누구나 휴대폰으로 지식을 '검색'할 수 있는 사회,
지식을 '기억'하는 것보다 '융합'하는 게 더 중요해

  • 입력 2021.01.12 11:01
  • 수정 2021.01.12 14:19
  • 기자명 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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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교육의 종착점을 아시나요?

어느덧 내가 교직에 몸담은 지 30년이 다 되어간다.

그동안 수많은 제자를 사회로 보냈지만 아쉬움은 많이 남는다. 교직에 막 입문했을 때는 무조건 인지도 높은 대학에 제자들을 많이 보내면 좋은 교사라고 생각하였다. 초등, 중등학교에서 만났던 옛 은사님들이 제자들을 상급학교에 보내려고 애를 쓰는 모습을 보고 자랐기 때문이다.

그러다 교직 생활이 15년이 넘을 즈음 교육과 공부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학생들에게 지식을 전수하고 대학을 보내는 것이 훌륭한 교육자이며 좋은 선생님일까' 하는 의문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하여 다른 선생님들이 걸어가지 않은 인문학 분야를 수업 및 행사에 접목하여 교육 방법과 내용에 대하여 끝없이 탐구하였다. 그 길이 쉽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인문학을 학교로 끌어들여 제자들과 틈틈이 삶에 대하여 질문을 던져보았다.

처음 교편을 잡았을 때 학생들에게 획일적인 지식을 일방적으로 전달했을 때보다는 후반부에 시도했던 교육내용과 방법이 제자들에게 큰 호응을 얻었으며 교사로서 보람을 느꼈다.

우리나라 사람은 ‘공부’를 잘한다는 의미에 대하여 좁게 해석하는 경향이 있다.

즉, 공부란 지식을 배워 익히는 과정으로써 오로지 제도교육 안에서 배우는 것만을 지칭하고 있다. 또한 ‘공부를 잘한다’라는 문장을 정말 좋아한다. 조금만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얼마나 공부라는 단어에 종속되어 살고 있는지 알 수 있다.

공부를 잘하면 좋아하고, 못하면 고통을 받는 이러한 현상을 어떻게 생각하는가? 공부에 대한 올바른 정의가 전제되지 않은 상태에서 그저 공부라는 도그마에 빠져 나날이 고통지수를 높이며 살고 있을 뿐이다.

결국 사회구조가 공부라는 귀공자를 낳았기 때문에 공부 또한 사회구조를 따를 수밖에 없는 함정에 빠져버렸다.

생사의 보릿고개를 넘어야 했던 70년 전후만 해도 배움을 접한다는 것은 곧 성공을 기약하는 행운증서였다. 전문가, 즉 ‘일꾼’이 많지 않았던 시대였기에 지식을 익혀 희소가치가 있는 자격증과 학위만 취득하면 사회에서 인정해주었기 때문이다.

과연 학생들은 존재가 본질에 앞설까?

지금은 세태는 어떠한가? 산업화 시대가 점점 막을 내리고 정보와 인공지능이 우리 곁에 성큼 다가와 있다. 아니 이미 그런 시대에 살고 있다.

따라서 단순 자격증과 학위로는 요즘 시대를 살아나기가 쉽지 않다. 누구나 휴대폰을 꺼내 '지식'을 검색하여 찾아낼 수 있기 때문이다. 

즉, 책과 인터넷에 있는 수많은 지식을 기억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그 지식을 어떻게 융합하고 결합하여 엉뚱한 사고를 하느냐가 관건이며 그 누구도 생각하지 못하는 ‘Diffrent Think’를 해야 한다.

바로 그 '엉뚱이'와 '다른이'가 창의력이요, 독창력이기에 IT시대를 살아가는 세대에게는 반드시 필요한 공부의 알맹이이다.

아직도 학교에서 성적이 높은 학생이 정말 ‘진짜 공부’를 잘한다고 생각하는가?

'공부 잘하는 사람들의 일곱 가지 습관' 이라는 책의 저자 이한은 우리나라의 공부를 '정해진 기간에 정해진 책으로 문제 풀이에 대비한 외우기를 중심으로 머리 쓰는 노역(勞役)' 이라고 정의했다.

그는 공부를 '노역의 습관'이라고 말한다. 그러면서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의 표준화된 습관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먼저, 주어진 노역을 얼마나 잘 해내느냐에 따라 장래의 사회 계층이 결정된다는 사실을 명확하게 또는 더욱 과장되게 인식하고 틈틈이 이를 상기하여 자신을 채찍질한다.

다음으로, 공부를 삶의 가장 우선 순위에 놓는다. 공부를 잘하는 사람들은 봉사활동이나 친구를 만나는 일은 시험공부와 숙제를 다 하고 난 뒤에 시간이 남으면 하는 일로 생각한다.

셋째, 이성 친구를 사귀지 않거나 사귄다고 해도 공부에 방해되지 않는 방식으로 사귄다. 사랑은 노역을 위한 충전기요, 발전기다. 그렇기에 생활 방식이 단조롭다.

넷째, 자신의 지적 활동을 주어진 노역에 맞춘다. 쓸데없이 생기는 의문은 싹부터 자른다. 단순 암기보다는 이해를 바탕으로 한 암기를 중시하지만, 여기서 말하는‘이해’란 문제를 푸는 데 꼭 필요한 만큼의 이해를 뜻할 뿐이다.

다섯째, 노역을 아주 능동적으로 한다. 도움이 되는지 안 되는지 칼날같이 파악해서 행동하며 시험 전의 압박을 잘 견딜 줄 안다. 천천히 시간의 고문을 견디면서 시험공부라는 노역을 해낸다.

저자 이한은 이러한 습관을 두루 갖춘 실력자들(?)이 지금 우리 사회를 이끌어가고 있다고 말한다. 그러다보니 좋은 본보기를 보여주는 리더도 있지만, 이기적인 자아로 대의(大義)를 망치는 리더가 훨씬 더 많다는 것이다.

이젠 나만의 색으로 세상을 디자인하고 싶다.

그럼 진짜 '공부'의 의미는 무엇일까? 학교에 갇힌 공부, 시험에 갇힌 공부, 제도에 갇힌 공부, 기성세대의 사고에 갇힌 공부는 좁은 공부임이 분명하다.

굳이 공부를 재해석하라면 “공부는 자신의 삶을 설계하기 위해 다양한 이야기를 엮어가는 과정이다. 그 이색적인 경험을 바탕으로 본질적인 자아를 찾고 세계관을 확립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더 나아가 삶의 종착역에 이르렀을 때 원래 꿈꾸었던 바람과는 전혀 다른 꿈길을 걷을 수도 있다는 점을 깨닫는 과정이다.

결국 공부란 뜻밖의 사실을 경험하며 죽는 날까지 또 다른 꿈을 꿀 수 있는 자양분을 축적하는 행위일 뿐이다.

용기를 내어 현실적 자아에게 준엄하게 묻고 싶다.

“그대 삶에서 넓은 공부를 지향할 수 있겠는가? 더불어 죽기 전까지 진짜 공부를 할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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