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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봉산 줄기에 버려진 유물

구봉산이야기㉔
4백년전 이순신 장군이 웅천으로 노모 문안인사 다니던 길목
일제강점기와 14연대 창설 시기 두 번의 병사주둔지 설립 시도 실패
구봉산 넘너리 줄기에는 아직도 당시 사용한 참호가 남아있어

  • 입력 2021.01.27 14:01
  • 수정 2021.01.28 11:44
  • 기자명 김배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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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화사업장 장벽과 구봉산정산 줄기

여수구봉산의 서편에는 국가방위산업인 한국화약을 꼭 껴안고 둔병의 역사가 서린 신월동을 해안까지 감싸내린 커다란 골짜기가 있다.

이 골짜기를 형성하는 좌우 산줄기에는 한때 호국에 젊음을 바쳤던 분들의 피와 땀이 배어있지만 시간이 흐르며 그 자취들만 남아 있다.

정상에서 해안까지 내려가는 넘너리 줄기에는 빛바랜 전투훈련의 표식들과 참호들이 줄지어 있고 한국화약의 후문 긴 등줄기에는 한때 병사(兵舍)였던 시멘트건물이 폐허로 내버려있다.

현재 이 두 줄기는 모두 등산로로 변했다. 오가는 사람들은 그 내막은 모른 채 무심하게 지나다닐 뿐이다.

그러나 평화로운 해변마을 신월리(동)를 일제가 둔병지로 만들려던 살벌한 기운 때문인지, 세월이 흘러도 총소리(사격장)와 화약 냄새나는 골짜기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

이번 연재글에서는 버려진 호국의 자취들이 갖는 의미를 둔병의 역사와 함께 되새겨보려 한다.

 

신월동의 둔병(屯兵)의 역사

예비군훈련참호

일제강점기였던 한 세기 전만 해도 둔병이란 상상도 못했던 평화롭기 짝이 없는 구봉산자락의 해변이 넓은 살기 좋은 마을이었다.

430여년 전, 이순신장군이 말을 타고 해안을 따라 순찰을 돌며 곰쳉이(웅천)에 사시는 노모님께 문안인사 드리러 다니던 길목이었다. 그런 이 땅에 처음 둔병의 살기를 심은 것은 일제망령들의 몸부림이다.

1940년, 왜구는 패망의 시간이 다가오는 줄도 모르고 가미카제 도꼬다이, 죽으러 나갈 해군 수상비행장 활주로를 만들겠다고 해안의 개펄을 파뒤집어 횟가루를 이겨 넣었다. 또한 근처 여기저기 땅굴 파서 부대시설 만드는 등 병사주둔지를 완성하려는 첫번째 시도가 벌어진 곳이 이곳 신월동이다.

다행히도, 5년 뒤 일본이 항복하며 반쪽짜리 둔병에 그쳤지만 한스러운 그때의 자취는 아직도 남아있다. 이곳은 일본이 물러간 후 미군정 시기에 잠깐 병영으로 쓰이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 악한 기운 때문인지 해방 3년이 지난 1948년 5월, 천추에 한을 남긴 14연대가 창설되며 두번째 둔병이 시작됐다. 그래도 14연대 역시 5개월 만에 제주 동포의 학살출병을 거부한 여순사건(항쟁)으로 장막을 거두었으니 신월리는 둔병지가 아님을 알리는 계시였는지도 모른다.

이후 6.25전쟁 중에는 15연대의 육군병원이 들어서며 한때 ‘선한 둔병’ 구실을 하기도 했다. 그러나 한번 스민 기운은 쉽사리 흩어지지 않았고 30여년 후 이곳에는 총을 들고 건설하던 1978년 한국화약과 뒤이어 예비군훈련장까지 들어섰다. 이것이 화약 냄새와 사격장의 총소리가 울리던 새로운 형태의 세 번째 둔병이다.

그로부터 약 사반세기, 시대가 변하며 집총을 한 병정들의 살벌한 눈초리와 어제의 용사들은 사라지고 훈련장 흔적만 남았다.

예비군훈련참호가 위치한 곳

그러고도 어언 20년에 가까운 시간이 흐른 지금 아직도 철책으로 닫혀 있는 신월동은 하루빨리 둔병의 땅기운이 걷혀 고향을 비워주고 떠난 땅의 주인들이 후손의 손을 잡고 되돌아오기를 간절히 바라고 있다.

 

버려진 작은 역사

예훈호

오천년 역사를 자랑하는 이 나라는 끊임없는 외침(外侵)에 전 국토 어느 한곳 전장이 아닌 곳이 없다.

그래서 우리의 산천과 바다는 백성들의 땀과 피, 통곡과 환희가 점철된 역사의 현장들로 빼곡하다.

그중에도 왜침 방어의 중심지였던 여수는 바다,섬,내륙 모두가 방어기지였기에 곳곳이 피의 현장들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선소나 고락산성, 종고산 봉수대처럼 복원되어 안내판이 설치된 곳은 소수에 불과하고 장군도 해저성이나 쌍봉성처럼 복원이 어렵거나 기록이 미흡한 곳은 아직도 연구가 계속되고 있다. 그마저 가치판단에 따라 단편적인 기록이나 구전의 수준에서 묻히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역사현장의 기록과 보전이 중요한 이유다.

총포가 전쟁 무기로 등장한 근대 이후, 방호시설도 현대에 필요한 양상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우리나라는 70년이 지나도록 전쟁을 끝맺지 못하고 당시의 실전으로부터 이어지고 있는데 비정규전 방비의 현장들이 시국의 변화에 따라 우리의 주변에서 서서히 변모해가고 있다.

구봉산의 두 줄기에 남아 있는 시대의 자취들도 그중의 하나이다.

 

넘너리 줄기의 예비군 실전훈련장

예비군들이 공격과 방어 훈련 시 사용되던 참호

넘너리 줄기를 신월금호아파트 뒤로 돌아가는 둘레길에서 정상을 향해 올라가다보면 중간봉우리(봉알봉) 아래 80여미터 떨어진 거리에는 사진처럼 '-#5 유기물발견시' '-#7 적이먼저' '아군발견시 -???? 도주시 등 납작한 돌에 페인트를 칠하여 쓴 글씨의 표기물이 보인다.

그리고 그 사이에는 지름 1.5m 남짓한 구덩이를 파서 만든 참호들이 있다

예비군 훈련 당시 사용되던 표식. 아군과 적군으로 나뉘어 훈련하면서 해당 군인들의 위치를 지정해놓았다

'#(넘버)' 표기로 보아서 더 많은 표기물이 있을 것으로 보인다.

이 표식들과 구덩이들은 유사시 소집되면 군 편성대상인 전역 1~4년차 동원 예비군들이 아군과 적군으로 나누어 공격과 방어의 훈련을 하는 동안 해당된 자들의 위치를 지정해 놓은 것이다.

신월동훈련장에 남아있는 그때의 모습

그래서 훈련도 실전을 방불케하였다. 그랬던 신월동훈련장이 폐쇄된지도 20여년, 한때는 전투훈련장에서 눈을 부릅떴던 상징물들이 제 모습을 잃어가고 있다.

 

긴등줄기의 폐기된 병사

구봉산 외곽경계초소에 근무하는 군인들이 교대근무하던 분초

한국화약의 후문에서 정상으로 이어지는 긴등줄기의 둘레길로부터 70여 미터 더 올라가면 버려진 작은 시멘트건물 하나가 있다.

한국화약의 구봉산 측 외곽경계초소 근무 군인들의 분초건물이다. 이는 1978년 여름, 한국화약이 신월동에 들어서자 경비군 1개 소대가 파견되어 앞산 등 세 곳에 배치한 분초 중의 하나였다.

초소 군인들이 머물던 병사 내부

이천년대 중반에 병력이 철수되기 전까지 경비병들의 교대근무를 지휘했던 이 분초는 규모는 작지만 대기 숙소와 화장실 초소 등 갖출 것은 다 갖춰져 있다.

취사장(식당)과 숙소인 본건물 내부는 텅 비어있고 높이랄 것도 없는 옥상은 일선 병사의 기본인 철망과 엄폐둑이 흉물처럼 남아 엄중했던 시대상을 보여주고 있다. 이런 건물의 관리는 국방부일까? 여수시일까? 

화장실

이와 같은 흔적들은 우리 주변에서 소멸해버린 역사의 현장들이 처음부터 하잘 것 없는 것들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일깨운다.

어느 것 하나 무관심할 수 없는 이유다. 구봉산줄기 버려진 흔적들도 박물관에 전시된 여느 유물들처럼 시대를 상징하는 미래의 유물이 되기에 충분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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