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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동도 오동나무와 이순신 이야기

  • 입력 2013.09.30 09:13
  • 기자명 yosu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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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와 성리학] ⑩ 오동나무와 평천하(平天下)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

1594년(선조 27) 이순신은 전라남도 여수시 수정동에 딸린 오동도로 배를 몰았다. 파도가 잔잔했다. 이순신은 기분이 참 좋았다. 지난해인 1593년(선조 26) 부산과 웅천에 주둔한 일본군을 격파함으로써 남해안 일대의 일본 수군을 완전히 일소한 뒤 한산도로 진영을 옮겨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었기 때문이었다. 그가 오동도로 배를 몰고 가는 것은 명나라 수군이 합세하자 진영을 이곳으로 옮겨 장문포 해전에서 육군과 합동작전으로 일본군을 격파하기 위해서였다.

배가 경상남도 통영 한산도에서 오동도에 가까워지자 이순신은 뱃머리에 나갔다. 앞을 바라보니 섬이 조금씩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오랜만에 여유를 만끽하는 순간이었다. 처음으로 찾는 오동도는 마음의 여유 덕분인지 무척 아름다웠다. 오동도는 아주 작은 섬이지만, 여수 8경 중 제1경에 꼽힐 만큼 아름다운 섬이다. 이순신의 눈에는 섬 전체가 마치 오동잎으로 덮은 모습으로 보였다. 섬의 앞쪽이 오동잎의 앞부분을 닮았고, 섬의 뒤쪽이 심장 모양의 오동잎 뒷부분을 닮았다. 섬 입구 오른편 언덕에 올라가면 오동도가 오동잎을 닮았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오동도에 도착한 이순신은 숙소에서 짐을 풀자마자 군사 장비를 걱정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래서 그는 섬 전체를 둘러보았다. 아무리 섬 전체를 샅샅이 둘러봐도 이순신의 눈에는 왜군을 물리칠 만한 재료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지금의 해양관측소 옆에 살고 있는 벼과의 이대가 그의 눈에 들어왔다. 이순신이 오동도의 이대에 주목한 것은 화살을 만들고 적을 방어하기 위해서였다. 현재 오동도에는 이순신이 사용한 이대 숲이 장관이다.

오동도오동나무

지금의 오동도를 상징하는 나무는 동백나무이다. 그래서 오동도에 도착하자마자 맞이하는 나무도 동백나무이다. 섬에는 동백나무를 소개하는 안내문과 찬미하는 시를 만날 수 있지만, 오동나무를 소개하는 안내문은 그 어디에도 찾아볼 수 없다.

이순신은 오동도에 도착한 후 저녁을 먹고 혼자 갯바위로 가는 길에 오동나무를 만났다. 참 오랜만에 보는 오동나무였다. 지금 오동도에는 오동나무가 세 그루 살고 있지만, 다른 나무들과의 경쟁에 밀려 벅찬 하루하루를 살고 있다. 이순신은 오동나무 앞에 앉아 콧노래를 불렀다. 그는 경상북도 고령군 가야천에서 우륵이 오동나무로 만든 가야금 소리를 듣고 싶었다. 우륵이 가야금을 오동나무로 만든 것은 이 나무가 다른 나무보다 가볍고 나뭇결이 아름다울 뿐 아니라 갈라지거나 뒤틀리지 않고, 속이 비어 있는 덕분에 소리 전달이 아주 좋기 때문이다.

이순신은 가야금을 생각하면서 좋지 않은 기억을 떠올렸다. 1580년(선조 13) 7월 발포(현재 전라남도 고흥군) 수군만호 시절, 직속상관인 전라좌수사 성박이 거문고를 만들려고 발포 객사의 오동나무를 베려 하자 관청 물건이라고 제지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당시 이순신은 오동나무로 악기 만드는 것 자체를 싫어한 것은 아니었다. 이순신도 누구 못지않게 오동나무로 만든 가야금과 거문고 음악을 좋아했다. 그러나 이순신은 나라가 위급한 상황에서 한가하게 악기를 만들기 위해 오동나무를 베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라 생각했다. 그는 악기보다 국가의 위급한 상황에 사용할 오동나무를 보호하는 것이 한층 국가의 안위에 중요하다고 생각했다. 그는 오동나무의 열매에서 추출한 기름이 화살의 중요한 원료라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다음날 이순신은 군영에 만반의 준비를 지시한 후, 시간을 내서 어머니가 계신 지금의 여수시 웅천동 송현마을로 갔다. 이순신은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충청도 고향에 계신 어머니를 모셔왔다. 31살 때 그를 낳은 어머니의 나이가 당시 78살이어서 자신이 돌보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안해서 전쟁을 수행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노모를 모신 곳은 부하 장수 정철의 집이었다. 지금은 정철의 사촌조카 정대수의 후손들이 살고 있다. 여수시에서는 이곳 주변을 문화관광지로 만들기 위해 공사를 벌이고 있다. 이순신이 이곳에 노모를 모신 것은 여수 본영과 거리가 멀지 않고, 특히 거북선과 전함을 만든 시전마을과 가까웠기 때문이다.

이순신이 어머니가 계신 곳에 도착하자, 어머니는 아들의 손을 잡고 기뻐했다. 어머니는 자식의 손을 놓지 않고 이런저런 얘기를 늘어놓았다. 이순신은 하루종일 자신만 기다리던 어머니라는 것을 잘 알기에 계속 얘기를 듣고 있었다. 그런데 갑자기 어머니가 이전에 하지 않았던 말씀을 들려주었다.

“순신아, 너 고향 마당에 살고 있는 오동나무를 기억하니.”

“네, 어머니.”

“너, 그 나무를 왜 심었는지 아느냐?”

“글쎄요.”

“아버지는 네가 나라를 위해 큰일을 할 수 있길 원했거든. 오동나무는 옛날부터 천하의 태평성대를 위해 일할 사람이 탄생하길 바라면서 심었어.




2 전라남도 여수시 오동도의 전경. 오동도의 섬 전체는 오동잎 모양을 하고 있다. 강판권 교수 제공

순신아, 고향 마당에 살고 있는
오동나무를 기억하니
천하의 태평성대를 위해 일할
사람이 탄생하길 바라며 심었어

화투 11을 ‘똥’이라 부르지만
오동의 ‘동’을 세게 불러 생긴 말이다
화투 11중 광에는 한 마리 봉이 있다

어머니는 오동나무로 만든 관으로
장례를 치르라고 유언했다
자식이 청렴정신을 잃을까 봐
보잘것없는 동관(桐棺)을 고집했다

어머니는 아들이 마주하는 시간이 아쉬운 듯 밤이 깊었는데도 잠자리에 드실 생각을 하지 않고 얘길 계속했다. 이순신은 팔순을 앞둔 어머니의 건강이 염려스러웠지만 오랜만에 모자간에 회포를 풀 수 있는 기회라 생각해서 주무시길 재촉하지 않았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말씀을 듣고서야 <시경> ‘대아(大雅)’편에 나오는 “저 높은 산봉우리에서 봉황이 울고, 오동나무는 저 조양 땅에서 자라네(鳳凰鳴矣, 于彼高岡, 梧桐生兮, 于彼朝陽)”를 기억할 수 있었다.

이순신은 돌아갈 시간이 훨씬 넘었지만 차마 어머니의 말씀을 막을 수 없었다. 어머니는 자식이 돌아가야 하는지에 대해서는 전혀 관심이 없었다. 이순신은 오늘따라 어머님의 행동이 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내색할 수 없었다. 어머니는 이순신에게 다음과 같은 얘길 들려주고서야 잠자리에 누웠다.

“순신아, 오동나무에는 봉황이 앉아. 봉황은 오동나무에 앉아 대나무의 열매만 먹어. 그런데 대나무는 뿌리번식이 불가능할 때 열매를 맺고 죽기 때문에 길게는 백년을 기다려야 하지. 그래서 봉황은 큰 뜻을 기다리는 사람을 뜻하지. 너도 그런 사람이야. 순신아 어미 말에 놀라지 마라. 넌 충분히 그런 자질을 갖추고 있어. 큰 인물은 하루아침에 만들어지지 않는 법이다. <맹자>에서 하늘이 큰 인물을 보낼 때는 반드시 큰 시련을 준다고 하지 않았니. 네가 지금까지 겪은 어려운 일도 모두 큰 인물로 성장하기 위한 과정이라는 것을 명심해. 봉황이 평생 한번 열리는 대나무의 열매를 기다리듯 끝까지 큰 뜻을 품고 기다려야 한다. 알았지.”

봉황은 상상의 새지만 사람들은 성인 혹은 성군을 상징하는 존재로 생각했다. 그래서 임금이 앉는 자리에 봉황을 새긴 문양이 등장한다. 화투 중 11에 봉새와 오동나무가 등장한다. 사람들은 화투 11을 ‘똥’이라 부르지만 사실은 오동의 ‘동’을 강하게 불러서 생긴 이름이다. 화투 11 중 광에는 나머지 3장과 달리 새 한 마리가 있다. 그 새는 얼핏 보면 닭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봉이다. 사람들은 봉황이라 말하지만 봉황의 ‘봉’은 수컷, ‘황’은 암컷이다. 화투 11은 수탉처럼 생겼으니 당연히 수컷 봉새이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말씀을 끝까지 듣고서야 자리에서 일어나 군영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오늘따라 어머님의 태도가 마음에 걸렸다. 그는 머지않아 돌아가시지나 않을까 불안했다. 그는 만약 어머니가 돌아가시면 어머니의 유언대로 오동나무로 만든 관, 즉 동관(桐棺)으로 장례를 치르기로 다짐했다. 혹 집안사람들이 3촌(寸) 두께로 만든 동관이 가장 보잘것없는 관을 의미하기 때문에 반대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했지만 워낙 어머니의 뜻이 간곡해서 받아들이기로 했다. 어머니가 굳이 소나무나 느티나무로 만든 관을 마다하고 오동나무 관을 고집한 것은 오로지 자식에 대한 사랑 때문이었다.

이순신은 왜 당신께서 세상에서 가장 좋은 나무로 만든 관 대신 오동나무로 만든 관을 고집했는지 잘 알고 있었다. 어머니는 혹 자식이 청렴정신을 잃을까 봐 세상에서 가장 보잘것없는 오동나무 관을 고집했던 것이다. 이순신은 어머니의 상례에 동장(桐杖), 즉 오동나무로 만든 지팡이로 문상객을 맞기로 했다.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 오동나무 지팡이를 사용하는 것은 이 나무가 부드러워 여성을 상징하기 때문이다.


강판권 계명대 사학과 교수

한겨레신문 9월 30일 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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