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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씨 남자는 패가망신하거나 죽거나... 묘한 섬이네

  • 입력 2013.10.11 19:25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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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양이를 닮은 섬 묘도...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무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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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이버 지도를 이용해 새로 편집한 광양만 지도. 묘도는 순천왜성에 갇혀있는 왜수군의 퇴로를 막은 요충지였다. 광양제철쪽은 진린 도독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군이, 여수수국가산업단지쪽은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퇴로를 막았다. 조명 연합수군이 임진, 정유의 7년 왜란을 끝낸 노량해전의 마지막 출전지가 묘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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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여수시와 광양시를 구분하는 경계는 광양만이다. 광양만 한 가운데에는 고양이를 닮은 섬, 묘도(猫島, 고양이 섬)가 있다. 묘도는 총면적 9.54㎢의 작은 섬으로 묘읍, 온동, 창촌, 광양포, 도독의 5개 마을이 있다. 이 곳에 처음사람이 들어온 것은기원전으로 추정되나 완전하게 마을을 형성한 것은 약 500~600년 전으로 보인다.

묘도를 소개하는 <묘도동 마을 유래>지에 의하면 묘도 인근에는 서치도, 일명 쥐섬이 있었다.또 근처에는 우순도라는 섬이 있는데 원래는‘누른밥 섬‘이라고 불렸다고 한다. 서치도에서 묘도를 바라보면 마치 고양이가 쥐를 먹기 위하여 입을 벌리고 있는 것 같은 형국이다.옛부터 전해 오는 전설에 따르면쥐의 몸(서치도)보다 열 배나 더 큰 누룽지를 가진 섬이 고양이 입(묘도) 앞에 있다고해 ‘우순도‘라 했다. 묘도는 고양이가 쥐와 누룽지를 놓고 어느 것부터 먹을까 하는 형상이어서큰 인물은 나지 않더라도 의식주만은 걱정이 없을 것이라는 이야기가 전한다.

헌데 인터넷에서 광양만을 검색하면 묘도 앞에 서치도만 나오고 우순도는 이순신대교 바로 아래에 있는 걸로나온다. 때문에 우순도와 서치도, 묘도의 위치가 불명확해 전해 내려오는 전설과는 괴리가 있다. 전설의 내용을 확인하기 위해 묘도 출신 향토사학자 심재수씨를 만났다.

"옛날 지도에는 정확히 나와 있었는데 지도가 개편이 되면서 섬 명칭이 잘못되었어요. 우순도는 소가 누워 있는 형국이라서 우순도라고 불렀고 바로 인근에 조그만 쥐섬이 있었죠. 그런데 지금은 우순도와 쥐섬이 매립이 되어 여수국가산업단지로 편입돼 없어졌어요. 일명 쥐섬이라고 부르는 서치도는 쥐섬이 아니라 황도(누룽지섬)이고 매립된 쥐섬보다 열배 정도 컸으니까 제 설명이 맞아요."

우연의 일치일까? 묘도에는 특이한 전설이 전해 내려온다. 구전에 의하면 이 섬에서 누가 살든 의식주만은 걱정 없이 살 수 있지만 이상하게도 서(鼠, 쥐)씨 성을 가진 사람은 살 수 없다고 하며 실제로 서씨 성은 한 세대도 살지 않고 있다. 이 마을로 시집온 서씨 아낙네는 살아가지만 서씨 성을 가진남자는패가망신해 다른 곳으로 이주하거나 아니면 시름시름 아파서 죽거나 아니면 갑자기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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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완성된 이순신대교 건너편에 광양제철의 모습이 보인다. 진린도독이 지휘하는 명나라 수군이 앞에 보이는 바다를 막아 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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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도의 봉화산에서 바라본 여수국가산업단지 모습.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앞에 보이는 바다를 막아 왜군의 퇴로를 차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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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이 섬의 꼬리, 남해군 쪽에 있는고양이 꼬리 부분에 유두라는 지명이 있다. 그래서 일제 시대 일본인들이 석유가 나올 것이라며 답사 작업을 했지만 허사였단다.그런데 지금은 GS칼텍스의 원유 부두가 설치돼대형 유조선이 정박한다. 선조들의 선견지명이 예사롭지 않은 대목이다.

남해섬이 남해에서 오는큰 파도를 막아주고 여수와 광양의 중간에 위치할 뿐만 아니라 남해대교 쪽을 통과해 부산까지 갈 수 있는 요충에 있는 묘도. 예나 지금이나 군사, 교통의 중심이다. 이러한 지리적 이점을 옛날 사람이라고 해서 모를 까닭이 없다.

왜군의 숨통을 틀어막은 요충... 조·명 연합수군의 마지막 출전지

정유재란(1597~1598) 시절, 이순신의 명량해전 승리와 조·명 연합군의 사로병진 작전으로 진퇴양란의 위치에 빠진 왜군은 철군의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묘도에서 북서쪽으로 12㎞떨어진 곳에는 고니시 유키나가가 왜성(예교성)을 쌓고 퇴로를 엿보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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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나라 수군장수 진린도독이 주둔하면서 왜군을 막은 도독마을. 진린도독을 기념하기 위해 붙여진 이름이다. 도독마을회관이란 글씨가 선명하게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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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이 주둔했던 선장개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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묘도에서 광양제철을 마주보는 해안가에는 도독마을이 있다. 정유재란 시절 이곳 도독마을에는 명나라 진린 도독이 일본 왜군을 치기 위해 주둔했다.도독마을은 진 도독이 주둔한 것을 기려서 지은 이름이다.진 도독은 광양제철 쪽 깊은 바다를 지켰고, 이순신 장군이 지휘하는 조선수군은 묘도의 선장개에 주둔하면서 현재 GS칼텍스 쪽 얕은 바다를 지켰다.

묘도에서 왜군이 주둔한 순천 예교성을 바라볼 수 있는 가장 높은 곳인 봉화산(246m)에는 그 옛날 위급시에 봉화를 올린 생생한 현장이있다. 하지만 접근성이 떨어져 시민들이 쉽게 접근할 수 있도록 현재 개보수 작업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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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과 왜 수군의 동정을 살피고 전투현황을 알렸을 묘도 봉수대(246m). 접근성이 떨어져 현재 개보수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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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이 끝나가던 1598년 9월부터 11월까지 조선과 명나라 연합수군은 왜교성 탈환을 위해 10여 차례 격전을 치렀지만 성을 점령하지 못했다. 하지만 일본으로 탈출할 방도가 막힌 왜군을 구하기 위해 무술년(1598년) 11월 18일과 19일, 사천과 남해 등지에 주둔 중인 왜군이 온다는 연락을 받았다. 조·명 연합군은 유키나가의 구원군이 올 경우 앞뒤에서 협공을 받을 염려가 있어 구원군을 먼저 공격하기로 작전을 세우고 묘도에서 14㎞쯤 떨어진 노량해협 근처로 함대를 이동했다.

11월 19일 새벽 2시. 양측 함대가 서로 조우하면서 시작된 전투는 19일 정오경에 연합함대의 대승으로 끝났다. 노량해전에 참전한 일본 측 함대는 500여 척에 달했는데 명나라 수군 300여 척과 조선수군 80여 척이 함께 뒤엉켜 처절한 싸움을 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대미를 승리로 장식한 역사적인 의미가 있지만 이순신 장군과 수많은 조선수군도 전사했다.

옛날에는 황금바다였으나 지금은 활기를 잃어

도독마을에는 현재 36세대가 살고 있다. 바지락과 고기가 넘쳐나는 황금바다이자 콩, 고구마, 참깨 같은 농산물이 풍부해 살기 좋은 마을이었던 이곳은현재 활기를 잃었다. 남아있는 주민 대부분이 노인들이기도 하지만 환경변화 탓이 크다.

이곳에서는 간이 상수도가 있지만 염수가 나와 물을 마시지 못한다. 그 흔하던 바지락도 시원치 않고 외항선이나 큰 배가 지나갈 때 사리의 만조시에는 도로에 물이 넘친다. 때마침 바지락 양식장에서 바지락을 채취하고 집으로 돌아가던 박성병(65)씨를 만나 마을 현황을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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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독마을 이장을 했었다는 박성병씨가 마을의 유래와 현황에 대해 설명해줬다. 뒤에 논처럼 보이는 것은 바지락 양식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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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물이 잠을 자야 하는데 광양제철과 컨테이너 부두에서 불을 환히 밝혀 식물이 결실을 못해 재배가 안 돼요. 공해로 노인들이 암에 걸려 돌아가시기도 합니다.1968년 이전에는 골짜기에 흐르는 물을 마셨죠. 당시 다슬기, 고동이 있었는데 지금은 찾아볼래야 찾아볼 수가 없어요. 옛날 곡우 때는 개구리 울음소리를 들을 수 있었는데 요즘 참새도 구경할 수 없어요."

작년 이순신 대교의 개통으로 교통은 더욱 좋아졌지만 공해로 생활환경은 나빠진 묘도. 의식주 걱정은 없다던 옛 전설은 빗나간 것인가? 묘도에서 노량해협까지는 10여㎞, 여수에서 노량해협까지는 20여㎞에 불과하다. 왜군의 숨통을 틀어쥐고 임진·정유의 7년 전쟁을 마무리하는 데 귀중한 역할을 한 묘도의 가치를 뒤돌아 볼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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