높은 곳에서 바라보는 세상은 꽤 낭만적이다. 오늘도 그는 높은 곳에 올랐다. 아파트 옥상 끝에서 낭만과는 다소 동떨어진 고단한 줄타기를 한다. 밧줄 두 가닥에 몸을 맡긴 채 아파트 외벽에 매달린다. 아파트에 페인트를 칠하기 전 외벽 갈라진 틈을 퍼티(putty)로 채워주는 기초작업 중이다.
12일 여수 문수동 원앙아파트 외벽을 타고 내려오면서 일을 하는 그를 만났다. 아무나 할 수 없는 참 힘겨운 일을 하고 있구나! 생각했는데 직접 마주한 그의 얼굴에는 미소가 가득했다. 35년 경력의 건물 외벽도장공 이정환(67)씨다.
도장공 임금... 일제강점기 10시간 노동 3원, 현재 8시간 40여만 원
자료에 의하면 우리나라의 도장공은 페인트가 처음 사용된 일제강점기(1910~1945)부터라고 한다. 당시 하루 10시간 노동에 3원의 임금을 받았다. 하지만 요즘 도장공은 8시간 노동에 하루 40여만 원의 고임금 노동자다.
그는 30년째 여수에서 시설물유지와 도장 및 방수공사를 하는 업체인 ㈜삼능기업에서 일한다. 오늘 그와 함께 작업 현장에 투입된 인력은 18명이다. 그중 러시아인이 3명이다.
현장에서 만난 ㈜삼능기업 주윤태(59) 대표는 도장업이 젊은이들이 외면하는 일이라며 인력수급에 어려움이 많다고 토로했다. 덧붙여“여수와 순천 쪽에 도장공사 하는 업체는 외국인이 작업 안 하는 현장이 없을 거예요. 다들 몇 명 정도씩은 다 있습니다.“라고 말했다.
도장공의 일당은 ”로프를 타는 분들은 하루에 한 40만 원 이상, 처음 배운 분들은 어차피 로프를 못타기 때문에 18~20만 원“이라며 로프공들의 임금이 센 편이라고 했다. 하지만 그들에게도 어려움은 있다. 동절기 3개월은 작업을 하지 못한다.
이정환 도장공, 27세 되던 해 페인트 일 시작 올해로 40년째 베테랑
현장에서 로프를 타며 작업을 하는 도장공(이정환)을 만나봤다. 27세 되던 해 페인트 일을 하던 형에게서 일을 배웠다는 그는 올해로 40년 경력을 갖춘 이 분야의 베테랑이다. 그가 가장 기쁠 때는 자신이 맡은 일이 완성되었을 때라고 했다,
여수 문수동 원앙아파트 옥상 난간에서 그에게 ‘밧줄 타는 일이 두렵지 않으냐?’는 질문에 ”그거야 처음에는 겁났죠. 근데 좀 하다 보니까 그게 이제 숙달이 되어 두려움이 없어요“라 말한다. 다음은 그와 일문일답이다.
- 어떨 때 자신이 한 일에 보람을 느끼나요?
”제품이 제대로 나왔을 때 보람 있고 좋아요, 내 집 같이 잘했다, 주민들이 그렇게 얘기해 주면 기분이 좋죠.“
- 그러면 페인트칠할 때는 어떤 마음으로 하세요?
”항시 즐거운 마음으로 내 집 일한다 생각해요.“
- 요즘 젊은이들한테 이일을 좀 권장하고 싶은 마음 없어요?
“젊은 친구들이 일을 안 하잖아요, 외국인들이 와서 일하는데도. 우리나라 젊은이들은 쉬운 일만 하려고 하지 이 일을 하려고들 안 해요. 이걸 배워놓으면 앞으로 괜찮은데...”
- 밧줄은 하루 몇 시간 타며 일당은 얼마나 받나요?
“우리가 한 7~8시간 탑니다. 일당이 좀 많죠, 40만 원입니다.”
- 주변에 동료나 같은 또래분들에 비해 고소득인데 돈은 주로 어디에 쓰세요?
“밥 먹고, 담배 피우고, 술 먹고... 손자 용돈 주는 것입니다.”
- 지금 심정이 어때요, 어떤 마음으로 달비계를 타세요?
“(잠시 망설이다)여기에 앉아 달 쳐다보고 잠자는 거예요.”
달 쳐다보고 잠자는 거라 달비계라는 이름이 붙은 것이라는 농을 던지며 그는 환한 미소를 지었다. 이어 자신의 생명을 책임지는 달비계에 앉아 일을 시작했다.
“생명줄에 턱 걸려서 살았지”라며 아찔했던 순간 회고한 주윤태 대표
15층 아파트 옥상 난간에서 아래를 내려다보니 정신이 아찔하다. 하지만 그는 오랜 세월이 지나 익숙한 일이라 대수롭지 않다고 했다. 또한, 위험한 일이라 다른 사사로운 생각을 할 겨를이 없다고 했다.
주윤태 대표는 안전을 강조했다. 첫째도 안전, 둘째도 안전이라고 했다. 로프 작업하면서 안전수칙을 준수하고 주의를 하면 크게 문제 될 것은 없다며.
그 또한 자타가 인정하는 도장공 출신이다. 현장 경험을 체득한 후 25년 전 지금의 회사를 창업했다.
“현장에 일은 한 15년 정도 했어요. 로프는 5년 탔습니다.”
회사 식구들이 많을 때는 4~50명이다. 이날 작업은 도장 전 작업으로 파인 부분을 메우고 투명 제품을 바른다. 이어 두 번의 도장작업이 이어진다. 아파트 외벽 도장작업은 여섯 번의 공정을 거쳐야 마무리된다.
끝으로 주 대표에게 수많은 현장 작업 중 아찔했던 순간을 물었다.
“작업자 본인이 밧줄을 직접 묶고 내려가야 하는데, 위에서 보조 인원이 묶어놨다고 했는데 안 묶인 거예요. 점심을 먹고 올라가 이건 당연히 묶여 있겠거니 하는 생각으로 작업자가 3층에서 그냥 타고 내려간 적이 있어요. 근데 1층에서 3층까지 사람이 그렇게 빨리 떨어져 버릴 줄 몰랐어요. 생명줄에 턱 걸려서 살았지.”
그는 당시 아찔했던 순간을 회고하며 가슴을 쓸어내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