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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칼럼] 당신도 투명 인간이 될 수 있다

오래전부터 우린 투명 인간이었다

  • 입력 2022.06.23 15:50
  • 기자명 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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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물은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 사물은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

투명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예전에도 그를 보았지만, 지금도 종종 만나곤 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겠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흔히 투명 인간이라 하면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보이지 않은 인간’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혹 그런 투명 인간이 되고픈 마음은 없었는가?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투명 인간이 되어 억울한 일, 못 했던 일, 당장 하고픈 일까지 남몰래 숨겨온 욕망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신개념의 투명 인간을 만나보려고 한다. 그들은 세상, 국가, 사회, 가정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소외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새로운 투명 인간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 사람은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 사람은 존재가 본질에 앞선다.

많은 사람이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그걸 목격한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사람은 존재(생명)가 본질에 앞선다’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이성의 탈을 쓰고 어찌 생명을 죽이고 욕망만 채우는가에 대한 질타였다. 강대국은 지옥에 있는 아수라 백작을 데리고 와 세상을 온통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철학자가 보는 관점에서는 인간에 대한 궁금증과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 폴 샤르트르는 사람은 사물과 다르기에 사람의 생명과 존재만큼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약자, 소수자, 이민족, 약소 국민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일명 강자들이 약자들을 생명으로 대접을 하지 않고 투명 인간으로 취급했다는 의미이다.

그 전 중세시대에는 또 어떠했는가? 신은 모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새로운 생각을 말하면, 이단으로 취급하여 생명을 앗아갔다. 혹 지동설을 주장한다든가,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이야기했을 때 교황이나 왕은 그들을 어떻게 했는가. 바로 마녀라고 칭하며 화형에 처했으니 이 또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투명 인간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현대인은 어떠한가. 주위에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중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당신은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어떤 호칭을 사용하는가? 어떤 이는 ‘이모’, 또 어떤 사람은 ‘아줌마’, ‘여기요, 저기요’까지 생각 없이 부르고 있다. 여기, 저기는 장소를 지칭할 때 쓰여야지 사람에게 사용할 단어가 아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서비스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손님이 ‘여기요, 저기요.’ 등으로 불렀을 때 34%나 불쾌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지 않았기에, 배려에서는 멀어졌고 소외와 더 가까워졌다고 했다. 이 또한 현대판 투명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제도 또 다른 투명 인간을 만났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는데 00상점에 갔던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사회 밖으로 점점 밀려나는 것 같아 소외를 느꼈다며 자신을 가리켜 투명 인간이라고 말했다.

▲ 인간은 본연의 모습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하지 않을까? 단 하나 뿐인 생명임을 기억하자.
▲ 인간은 본연의 모습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하지 않을까? 단 하나 뿐인 생명임을 기억하자.

할아버지께서는 손자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려 함께 가게에 갔는데 주문받는 사람은 없고 기계만 설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아이스크림 이름 또한 온통 영어로 쓰여 있어서 당황했을 뿐 아니라 아무거나 눌러 결제를 하려는데 신용카드 투입구를 찾지 못해 당황했다고 한다. 마침 뒤에 있는 젊은이가 도와주어서 무사히 아이스크림을 샀지만, 눈뜬 장님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했다.

앞으로 투명 인간을 자주 볼까 걱정이다. 혹여 당신이 투명 인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사물은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라는 말로 투명 인간 문제를 풀고자 한다. 사물 즉 연필이나 옷, 자동차는 그 용도나 쓰임이 다하면 당연히 버려야 한다. 그러기에 사물은 쓰임(본질)이 연필의 있음(존재)에 앞서야 한다.

우린 언제까지 사람보다 돈을 우선할 것이며, 언제까지 존재보다 본질을 앞세울 것인가?

이젠 종교의 신(神)보다 더 강력한 신(神)이 나타났으니 그가 욕망의 신이요, 돈의 신이다. 우린 물신주의(物神主義)의 곁을 떠날 수 없겠지만 그와 공존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인간은 본연의 모습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하지 않을까? 단 하나 뿐인 생명임을 기억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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