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명 인간을 본 적이 있는가? 예전에도 그를 보았지만, 지금도 종종 만나곤 한다. 무슨 뚱딴지같은 소린가 하겠지만 곧 알게 될 것이다. 흔히 투명 인간이라 하면 영화나 소설에 나오는 ‘보이지 않은 인간’으로 알고 있을 것이다.
혹 그런 투명 인간이 되고픈 마음은 없었는가? 한 번쯤은 있었을 것이다. 투명 인간이 되어 억울한 일, 못 했던 일, 당장 하고픈 일까지 남몰래 숨겨온 욕망을 실현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지만 오늘은 신개념의 투명 인간을 만나보려고 한다. 그들은 세상, 국가, 사회, 가정으로부터 존중받지 못하고 소외당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러한 사람을 가리켜 새로운 투명 인간이라고 해석하고 싶다.
많은 사람이 1차, 2차 세계대전으로 죽거나 부상을 당하였다.
그걸 목격한 프랑스의 철학자 장 폴 사르트르는 ‘사람은 존재(생명)가 본질에 앞선다’라고 주장한다. 사람이 이성의 탈을 쓰고 어찌 생명을 죽이고 욕망만 채우는가에 대한 질타였다. 강대국은 지옥에 있는 아수라 백작을 데리고 와 세상을 온통 아비규환(阿鼻叫喚)으로 만들어 버렸으니, 철학자가 보는 관점에서는 인간에 대한 궁금증과 회의를 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장 폴 샤르트르는 사람은 사물과 다르기에 사람의 생명과 존재만큼은 소중히 여겨야 한다고 주장하며 약자, 소수자, 이민족, 약소 국민이라는 이유로 무시하거나 죽여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일명 강자들이 약자들을 생명으로 대접을 하지 않고 투명 인간으로 취급했다는 의미이다.
그 전 중세시대에는 또 어떠했는가? 신은 모든 인간의 운명을 결정할 수 있다고 믿었기에 신에게 반기를 들거나 새로운 생각을 말하면, 이단으로 취급하여 생명을 앗아갔다. 혹 지동설을 주장한다든가, 인간중심의 세계관을 이야기했을 때 교황이나 왕은 그들을 어떻게 했는가. 바로 마녀라고 칭하며 화형에 처했으니 이 또한 사람으로 존중받지 못하고 투명 인간으로 사라져야만 했다.
현대인은 어떠한가. 주위에 서비스업에서 일하는 사람들이 참 많다. 그중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을 생각해보자. 당신은 식당에서 일하는 사람에게 어떤 호칭을 사용하는가? 어떤 이는 ‘이모’, 또 어떤 사람은 ‘아줌마’, ‘여기요, 저기요’까지 생각 없이 부르고 있다. 여기, 저기는 장소를 지칭할 때 쓰여야지 사람에게 사용할 단어가 아니다.
국립국어원에서 서비스직 종사자를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했는데, 손님이 ‘여기요, 저기요.’ 등으로 불렀을 때 34%나 불쾌감이 들었다고 한다. 그리고 우리 사회는 자신의 이름을 제대로 불러 주지 않았기에, 배려에서는 멀어졌고 소외와 더 가까워졌다고 했다. 이 또한 현대판 투명 인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어제도 또 다른 투명 인간을 만났다. 나이가 지긋한 할아버지였는데 00상점에 갔던 일로 마음에 상처를 입고 있었다. 나이가 들다 보니 사회 밖으로 점점 밀려나는 것 같아 소외를 느꼈다며 자신을 가리켜 투명 인간이라고 말했다.
할아버지께서는 손자에게 아이스크림을 사주려 함께 가게에 갔는데 주문받는 사람은 없고 기계만 설치되어 있었다고 했다.
아이스크림 이름 또한 온통 영어로 쓰여 있어서 당황했을 뿐 아니라 아무거나 눌러 결제를 하려는데 신용카드 투입구를 찾지 못해 당황했다고 한다. 마침 뒤에 있는 젊은이가 도와주어서 무사히 아이스크림을 샀지만, 눈뜬 장님이 되어버린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고 했다.
앞으로 투명 인간을 자주 볼까 걱정이다. 혹여 당신이 투명 인간이 될 수도 있다. 나는 ‘사물은 본질이 존재에 앞선다’라는 말로 투명 인간 문제를 풀고자 한다. 사물 즉 연필이나 옷, 자동차는 그 용도나 쓰임이 다하면 당연히 버려야 한다. 그러기에 사물은 쓰임(본질)이 연필의 있음(존재)에 앞서야 한다.
우린 언제까지 사람보다 돈을 우선할 것이며, 언제까지 존재보다 본질을 앞세울 것인가?
이젠 종교의 신(神)보다 더 강력한 신(神)이 나타났으니 그가 욕망의 신이요, 돈의 신이다. 우린 물신주의(物神主義)의 곁을 떠날 수 없겠지만 그와 공존할 방법을 반드시 찾아야 한다.
인간은 본연의 모습으로 인정받을 때 행복하지 않을까? 단 하나 뿐인 생명임을 기억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