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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광호 칼럼] 삶의 시작은 배움이요 끝은 사람이다

삶은 항상 진행형이다

  • 입력 2022.08.01 10:01
  • 수정 2022.08.01 10:36
  • 기자명 김광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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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삶은 늘 진행형이다.
▲ 삶은 늘 진행형이다.

공자(孔子)하면 어떤 생각이 떠오르는가? 고리타분한 사람, 융통성이 없는 사람 아니 특별할 것도 없는 말을 강조하는 사람 등 다양하게 평가할 것이다.

그러나 그의 말씀은 씹으면 씹을수록 감칠맛이 나고 맡으면 맡을수록 향기가 난다.  지금 사는 것이 잘 살고 있는 건지 문득문득 하늘을 쳐다볼 때가 있다. 또한 지금하고 있는 일이 원해서 하는 일이며 그게 어린 시절 꿈꿔 왔던 일인가 라는 질문을 하곤 한다.

삶아! 도대체 너는 누구니? 하얀 구름이었다가 먹구름이었다가 소나기로 변했다가 매미마저 울게 하는 땡볕으로 변신하는 너는 말 그대로 자연의 모습을 닳았나보다.

그런 변신쟁이의 삶을 알기 위해서 잠시 공자를 초대할까 한다. 공자는 논어 요왈편, 마지막 3장에서 삶에 대하여 3가지 질문을 던진다. 목적 있는 삶(命), 함께하는 삶(禮), 공감하는 삶(言)으로 해석할 수 있는데, 공자는 어떻게 마지막 말씀을 하였는지 책을 펼쳐보자.

요왈편 3장 중 첫 문장이다. 명을 알지 못하면 군자가 될 수 없다고 말한다.(不知命 無以爲君子也) 여기서 명(命)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흔히 명(命)하면 목숨을 의미한다. 목숨하면 생명이고 생명은 호흡이며 움직임이다. 그 생명의 움직임을 삶의 목표, 의미, 꿈으로 바꿔 해석해도 좋을 듯하다.

나이를 불문하고 삶의 목적은 시도 때도 없이 다가온다.

청소년기에는 공부를 하면서 인격을 쌓고 직업도 탐색하며 시간을 보낸다. 중년 시절에는 가정을 돌보기 위해 직장과 사회와 끝없는 대화를 해야 하며, 노년 시절에는 동안 바쁘게 살아왔던 자아를 되돌아보며 여유와 여백의 시간을 가져야할 것이다. 그래서 우리 모두는 어느 시간과 공간을 불문하고 자신에게 사는 목적을 묻고 또 물어야 한다. 그게 공자가 말한 명(命)이다.

다음으로 요왈편 3장 두 번째 문장이다. 예를 알지 못하면 설 수 없다고 말한다.(不知禮 無以立也)

예(禮)하면 격식, 형식, 몸과 마음가짐을 뜻한다. 사람이 혼자만 산다면 무슨 격식이 필요하겠는가? 사람의 숫자가 늘어나면서 서로 간에 지켜야할 약속이 필요했을 것이다. 옷은 어떻게 입고, 말은 어떻게 하며, 생활은 어떻게 해야 한다는 조금은 부자유스러운 예(禮)가 생명력을 얻었을 것이다.

요즘은 에티켓이라는 말을 많이 사용한다. 에티켓은 프랑스어의 'ESTIPUIER(에스띠뿌이에르)'에서 왔는데, 출입금지라는 뜻이다.

과거 프랑스에는 궁전에도 화장실이 없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은 자신만의 변기를 가지고 다니면서 일을 보았는데, 베르사유 궁전에 방문자 중 생리현상을 해결하기 위해서 궁전에 있는 정원 속으로 들어가서 용변을 급하게 해결했다고 한다. 이런 이유로 궁전의 정원에는 악취가 끊이지 않았고 급기야 궁전의 정원에는 출입금지를 의미하는 'ESTIPUER(에스띠뿌이에르)'가 적힌 표지판이 세워졌다고 한다.

이렇듯 사람과의 관계를 유지하고 공동체 생활을 하기 위해서는 서로 간에 지켜야할 기본적인 약속, 예(禮)가 필요하다. 사람들은 서로가 그 예를 지켜야 함께 설 수 있으며 더불어 사는 삶을 이야기할 수 있다.

▲ 삶의 시작은 배움이요 끝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 삶의 시작은 배움이요 끝은 사람을 아는 것이다.

마지막으로 논어 요왈편 3장 세 번째 문장이다. 말을 알지 못하면 사람을 알 수 없다고 말한다.(不知言 無以知人也).

여기서 말은 상대의 말과 마음을 이해하는 것이다.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의 가치관이나 세계관으로 생각을 말하고 결정한다. 만약 그 생각하고 결정한 말이 좁은 가슴에서 나온 말이라고 한다면 자칫 독선(獨善)이나 아집(我執)으로 흐를 수 있다. 그렇게 좁고 짧은 말을 사용하면 상대와 대화를 이어갈 수 없을 것이며 상대의 마음도 읽을 수가 없을 것이다.

우리가 일상에서 사용하는 말에는 그 사람의 얼이 들어 있다. 그 얼은 부단한 성찰과 수양에 의해서 얻어진 것이다. 그런 바탕이 있어야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해보고 그 사람의 말의 꼴을 바라볼 수 있다. 그래야만 그 말의 의미를 정확히 알 수 있다.

우린 흔히 말한다. “저 사람 참 답답한 사람이야. 너 정말 말을 못 알아듣는구나. 자, 그럼 다시 이야기해 볼까, 다시는 당신과 이야기 안 할 거야” 이렇게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 있다면 모두 복창이 터질 것이다. 가슴이 얼마나 답답하겠는가?

공자는 논어 학이편에서 ‘배움과 벗 그리고 화를 내지 않음’으로 이야기를 시작하지만, 논어의 마지막 요왈편에서는 ‘명과 예절 그리고 말’로 이야기를 마친다. 즉 배움에서 시작해서 사람을 아는 것으로 끝을 맺는다. 공자는 배움이 삶에서 얼마나 중요한지를 강조하기 위해서 논어에서 첫 단어로 배움을 썼다. 배우고 그것을 익히면 나와 다른 사람의 삶을 이해할 수 있는 가슴이 생성되고 마침내 상대와 물 흐르듯 이야기를 나눌 수 있기 때문이다.

일제강점기를 살았던 윤동주는 시가 너무 쉽게 쓰여진다고 자신의 삶을 돌아보며 꾸짖는다.

그리고 그는 “등불을 밝혀 어둠을 조금 내몰고, 시대처럼 올 아침을 기다리는 최후의 나, / 나는 나에게 작은 손을 내밀어 눈물과 위안으로 잡는 최초의 악수” 이렇게 눈물까지 흘리며 자신의 삶과 화해한다.

▲ 자아와 끝없이 화해해야만 삶을 이해할 수 있다.
▲ 자아와 끝없이 화해해야만 삶을 이해할 수 있다.

만약 여러분 중에 말로 상처를 주고, 받은 경험이 있다면 공자의 말씀을 꼭 음미해보며 자신과 진솔한 대화를 가져보는 것도 좋을 듯하다.

그리고 돌아오는 주말에는 가까운 서점에 들러 책 한권을 사 읽으며 배움의 길로 다시 들어서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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