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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가 이겨야 풍년 들어!"

  • 입력 2014.02.16 20:34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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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보름 달집태우기 행사가 열린 전남 곡성 오곡면 금천천변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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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의 달집태우기 현장에 가다

 

음력 정월 대보름인 14일(금) 볼일이 있어 고향을 찾았다. 셀 수도 없이 많이 지나다녔던 금천교를 지나다 다리 아래를 보니 커다란 달집이 세워져 있었다. 저녁에 대보름 맞이 달집태우기 행사를 위해서다.

달집이 세워진 개울가는 친구들과 고기도 잡고 헤엄을 치기도 하고 짓궂은 장난도 치며 놀던 현장이다. 어른들로부터 "저 곳은 동네의 아픈 역사를간직한 현장"이라는 소리도 여러 번 듣고 자랐다.

잘 됐다 싶었다. 그동안 여러 동네에 얽힌 사연을 취재했는데 정작 내가 태어나고 자란 이곳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안 했으니 온 김에 동네 이야기를 하기로 작정했다. 내 고향은 전라남도 곡성군 오곡면 오지리 3구(동동)다. 지금이야 곡성역이 읍내로 이사를 갔지만 기차마을로 유명한 곡성역은 원래 우리 동네 가까이 있었다.

장난을 좋아했던 직장 후배들은 "형님! 오지리가 아니고 모지리 아니여? 아니면 얼마나 골짜기 동네였으면 오지리여?"하고 놀렸지만 곡성 평야가 펼쳐지는 평야지대에 있다. 이름만 상상하고 집에 놀러왔던 친구들은 툭 터진 평야지대를 보고 깜짝 놀라기도 했다.

한양 4대문을 본받아 4대문이 있었던 마을

곡성읍에서 구례쪽으로 1.8㎞쯤 가면 고향인 오지리가 있다. 마을 중심부에는 지방도 840호선이 지나가 위 아랫동네가 갈라져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 기실은 6개(동동, 남동, 전동, 후동, 내동, 상동) 마을이 한 곳에 모여 있어 굉장히 큰 동네라는 의미의 대리(大里)라 불렸다. 현재는 내동을 폐지하고 당산, 신동, 창동을 추가해 8개 행정구로 구분한다.

내가 다니던 오곡초등학교는 학생 수가 6백 명이 넘고 학생을 수용할 공간이 없어 2부제 수업까지했다. 하지만 그런학교가 지금은학생이 없어 폐교됐다. 동네 아이들은 읍내로 진학을 하고 있으니 마음이 착잡하다.

면사무소에 들러 마을 유래를 살며보았다. 마을 안과 주위에 산재한 고인돌의 분포와 구성 저수지 북쪽에 위치한 금성산성 유적으로 보아 마한시대와 상고시대부터 상당한 규모의 큰 마을이 형성되었을 것으로 추정하지만 기록은 없다. 다만 1446년경 진주강씨인 강우덕이 이주해 정착했다는 기록만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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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 4대문을 본따 4대문이 있었던 고향마을의 중심인 도동묘. 주자와 안향을 모시고 매년 제사도 지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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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인돌이 뭔지 전혀 모르던 시절이다.우리 동네는 평야지대라 커다란 바위가 마을 가운데 있을 리가 없는데도 몇몇 집에 가면 커다란 바위들이 있었다.친구들은 "왜 동네 한가운데 이렇게 큰 돌이 있을까? 옛날 기중기 같은 기계가 없어 그냥 그대로 두고 담벼락으로 이용했겠지" 하고 친구들과 추정했었다.

예로부터 큰마을 ‘대리(大里)‘라 불렸던 마을은 일명 ‘옷갓‘ 마을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노인들은 ‘옷갓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다. 이는 마을의 형세가 옷(衣)과 갓(冠)의 산형지세를 닮았다는 데서 연유됐다. 한편으로는 ‘의관만 번듯하게 차려입은 양반들이 많이 산다‘는 비어에서 비롯됐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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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동묘로 들어가는 도대문터에 관한 내용이 자세히 기록된 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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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지(梧枝)‘는 곡성의 진산인 동악산의 형세가 풍수지리상 봉황새가 알을 품고 있는 형국인 ‘비봉포란혈(飛鳳抱卵穴)‘이어서 죽동(竹洞), 죽곡(竹谷), 서봉(棲鳳), 유봉(留鳳) 등과 함께 ‘봉서오지(鳳棲梧枝)‘ 즉, 봉황은 대나무열매가 아니면 먹지를 않고, 오동나무가 아니면 앉지를 않고 맛좋은 물이 아니면 마시지 않는다‘ 하여 붙여진 이름이다. 이러한 연유로 곡성에는 오동나무 오(梧)자와 봉황 봉(鳳)자가 들어간 지명이 많다.

실제로 어릴 적에는 동네 곳곳에 오동나무가 많이 자랐고 오동나무 꽃이 피면 그 향기가 마을 전체에 진동했었다. 오지리 모든 마을에는 조선조 중엽부터 도둑을 방지하기 위해 동서남북에 4대문을 달아 아침저녁으로 시간을 정해 열고 닫았다. 이로써 전란에도 방범이 잘 되어 인명과 재산피해를 덜었다.

내 고향집이 있는 동동을 안내하는 표지석에는 임진왜란 시절 모함을 받아 감옥에 갇혔다가 백의종군 명령을 받아전라좌수영으로 향하던 이순신 장군이 동문으로 들어와 군인들을 모았다는 기록이 있다.

동문지기 집 외벽은 총탄을 막기 위해 두께가 1미터쯤 됐다

내가 자랐던 동동에는 이른바 ‘동문지기‘ 집이 있었다. 그 집에 들어가면 흙과 돌로 된 바깥쪽 외벽이 거의 1미터쯤 됐다. "다른 집은 별로 안 두꺼운데 이 집만 왜 이렇게두꺼울까?" 하는 궁금증은 나이를 먹어가면서 풀렸다.

1948년 여순사건이 터지고 1950년 6·25전쟁이 발발했다. 유엔군이 참전하자 여순사건 주동자와 인민군 패잔병들이 지리산으로 숨어들었다. 군경토벌대에 쫓긴 지리산빨치산들은 식량과 전쟁물자 보급을 위해 지리산 주변 산간마을을 점령해 보급품을 획득하며 군경과 싸웠다.

지리산 주변 산간마을은 낮에는 군경의 세상, 밤에는 빨치산의 세상이었다고 전한다. 그러나 아무리 날고 긴다는 빨치산도 곡성경찰서와 가까운 평야지대인 이 동네를 점령하기는 쉽지 않았을 터다.

6·25전쟁이 한창일 무렵 최전선에서는 국군과 유엔군이 북한 인민군과 중공군에 맞서물고 물리는 치열한 전쟁이 벌어졌지만 지리산 일대에서도 토벌군과 빨치산간에 혈전이 벌어지고 있었다. 빨치산 본부가 있는 피아골에서 산동을 거쳐 산 하나를 넘고 섬진강만 건너면 우리 마을이다.

1951년 9월 29일 밤 빨치산 사령관 이현상부대 병력 600명이 오곡면 소재지인 오지리에 쳐들어왔다. 제대로 된 무기가 없는 주민들은 청년단원 65명(단장 안학선)을 중심으로 똘똘 뭉쳐 밤새 싸웠지만 이튿날 마을이 점령되고 오전 9시 30분경에 10명의 단원이 전사했다. 당시 마을 주변에는 소나무로 방책을 두르고 수류탄이 날아드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대나무를 높이 꽂아놨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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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리 옆 어귀에 세워진 충혼탑. 1951년 9월 29일 이현상이 이끄는 빨치산 600여명이 동네로 쳐들어왔지만 다음날 아침 동네는 함락되고 당시 맞서 싸웠던 청년단원 10명이 전사한 것을 기려 충혼탑을 세웠다. 충혼탑에서 10미터쯤 떨어진 웅덩이에는 그날 죽은 빨치산 7명의 시신들이 나딩구는 걸 형님(당시 초등학교 4년)은 보았다고 전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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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치산에게 마을이 함락된 직후 빨치산들은 동네주민들을 선동해 곡성경찰서를 불태우자고 선동했고 참여하지 않은 사람은 그만큼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그러나 광주와 남원 구례의 세 방면에서 진압군이 들어오자 이들은 퇴각했고 이번에는 마을 주민들이 또 한 번의 대가를 치러야 했다.

진압군들은 마을의 모든 주민을 다리 아래로 모여 일렬종대로 서게 했다. 다리 위에는 기관총 두 대가 거치되어 있었고 당시 초등학교 4학년이었던 큰형님도 친구들과 모든 과정을 지켜보았다.

"나오라고 했는데 나오지 않고 집에 숨어 있었던사람들은 총살당했지. 그날 억울한 사람 많이 죽었어. 진압군 중 한 명이 대나무 끝에 가죽 채찍이 달린 채찍을 들고 사람들 사이를 걸어가며 서 있는 주민들 얼굴을 빤히 쳐다보면 죄 있는 사람은 얼굴이 빨개졌나봐. 얼굴색이 변하면 ‘너 나와!‘ 하면서 군용차에 싣고 가서 총살해버렸지."

달집태우기 행사의 의미... 주민화합과 풍년기원

달집태우기 행사 준비에 바쁜 오곡면 청년회장 조현종씨를 만났다. 오곡면 청년회원의 자격은 45세 이하라야 한다. 청년회에서는 5백~7백 명이 참여할 달집태우기 행사를 위해 돼지 10마리를 잡고 음식을 준비했다. 조현종 청년회장과 대화를 나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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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천농악대의 지신밟기 놀이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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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태우기 행사가 열리기 전 남자와 여자로 나눠 줄다리기가 열린다. 여자는 동편, 남자는 서편에 서며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전설이 있어 남자들이 져준다고 한다. 뒷편에 보이는 다리위에는 63년전 군경토벌대가 기관총 두대를 거치해놓고 빨치산 협력자 색출작업을 해 억울한 동네주민이 많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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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을 태우는 것은 주민화합과 건강, 화목, 풍년기원이죠. 행사에 참여한 사람 중 여자는 동편에 서고 남자는 서편에 서서 줄다리기를 합니다. 여자가 이겨야 풍년이 든다는 풍습에 따라 남자들이 여자들에게 져주죠."

어릴 적 시끌벅적하던 동네는 젊은이들이 떠나고 노인들만 남았다. 오곡면 전체에서 45세 이하라야 자격이 된다는 청년회원이 49명이라니 오죽할까. 노령화 공동화 현상을 겪으며 가슴앓이 하는 청년회장의 심경을 들어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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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향집에서 10미터 쯤 떨어진 마을회관 앞에는 동네 형님들과 백살이 거의 다된 친구 아버지가 햇빛을 쬐며 담소하고 있었다. 바로 옆에 있는 마을 기념비석에는 백의종군차 전라좌수영으로 내려가던 이순신 장군이 들러 모병했다는 얘기가 적혀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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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집태우기와 같은 전통놀이도 젊은이들이 있어야 하는데 자꾸 도시로 나가기만 하니 애터집니다. 교육, 문화, 일자리 등 거의 모든 것들이 도시 중심으로 이뤄지니 시골 젊은이들이 떠나죠. 시골에 사는 젊은이들은 철물점, 제과점, 개인택시, 영세자영업자와 농협 직원 아니면 공무원들이에요. 젊은이들이 농촌에 정착해 살 수 있는 기반을 마련해줘야 합니다."

달집태우기 행사가 무르익어간다. 5시부터는 금천농악터대를 선두로 고줄을 들고 동네를 한바퀴 돌고 축문낭독에 이어 폭죽점화, 달집 점화식 순으로 열렸다. 달집점화는 안행옥 면장, 조현종 청년회장, 조상래 의원, 김경자 의원, 유근창 대동회회장 등이 참여했다.

오늘의 달집태우기 행사는 63년 전 이 자리에서 억울하게 죽어간 영혼들에 대한 해원도 된다. 주민들은 종이에 ‘액 떠는 송액‘이라고 적어 달집과 함께 태웠다. ‘액과 송액‘은 나쁜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기원하는 의미다. 나도 함께 동네의 안녕과 주민의 건강을 기원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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