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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생활 5년 만에 3층짜리 집도 장만해!"

  • 입력 2014.03.23 00:03
  • 기자명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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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와서 바다에 나가지 못하고 그물 작업을 하는 알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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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에서코리안 드림 이룬 네팔 청년 알킬
봄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여수돌산의 작은 해변 마을 소율에 도착하니 직원들이 고기를 잡는 대신 어망과 그물을 수선하고 있었다. 사장은 일이 있어 시내로 출타 중이고 대신 사장 동생과 한국인 직원, 선장과 밥해주는 할머니가 있었다. 기숙사에는 네팔 출신인 알킬과. 두명의 스리랑카인, 한 명의 캄보디아인, 그리고 중국인 노동자가 일하고 있었다.

고기 잡는 일은 손이 많이 가고 힘들다. 선주들 얘기를 들어보면 일이 힘들고 월급이 적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일하려들지 않는다고 한다. "외국인 노동자들 없으면 값싼 생선을 못 먹을 것"이란 얘기도 들었다.

멀리 네팔에서 한국까지 와서 힘들고 외로운 이국생활을 성공적으로 마치고 떠나는 알킬을 만나러 자그마한 어촌인 소율에 왔다. 알킬은 5년 만기의 계약기간이 끝나는 이달 말에 네팔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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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거운 물건을 들어올릴 때 사용하는 크레인도 사용할 줄 아는 알킬이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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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킬의 원래 고향은 해발 2천미터가 넘는 고산지대에 있어 차에서 내려 걸어가도 이틀을 더 걸어가야 한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아들인 알킬과 두 딸을 키우기 위해 쿠웨이트로 돈 벌러 갔던 어머니는 병만 얻어 돌아왔다. 알킬의 어머니는 아이들의 장래를 위해 치트완으로 이사했다. 도시로 이사했지만 벌이가 신통치 않아 어려움을 겪는 어머니를 본 알킬은 휴학(포카라대학 영문학과 1년)하고 돈을 벌기로 작정했다.

특별한 산업시설이 없는 네팔에서는 취직하기가 어렵고 수입도 적어 해외취업이 대세다. 알킬은 아랍쪽을 알아봤지만 3년 일해도 100~200만원 정도 밖에 벌지 못한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으로 갈 것을 결심했다.

"당시에는 한국이 어디 있는지, 얼마를 버는지도 모른 채 돈 벌어야 한다는 일념으로 한국어 시험을 보아 합격했어요."

2009년 5월에 한국으로 갈 준비를 하라는 통보를 받고 6월 1일 밤 12시에 인천공항에 도착했다. 네팔 카트만두의 작은 공항만 보다 인천공항의 규모와 시설에 놀랐던 그는 여수 돌산의 작은 어항에서 바다를 처음 보았다. 안나푸르나의 만년설이 녹아내려 만들어진 포카라의 ‘페와‘ 호수만 보다가 툭 터진 바다를 보니 어마어마하게 규모가 컸다.

"TV에서 보았던 바다는 커다란 파도만 있었는데 대부분이 잔잔한 바다였어요. 태풍이라는 것도 처음보고 조석간만의 차이가 있다는 걸 처음 알았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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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킬이 5년 동안 탔던 배 앞에서 포즈를 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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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를 타고 고기 잡으러 나갈 때면 뱃전에 손을 내밀어 바닷물이 손바닥을 간질이는 것이 재미있었다. 추운 겨울에 물에 들어가면 배가 아프기까지 했지만 참을만 했다. 한 시간 일하고 한 시간 쉬었기 때문이다. 그가 처음 한국말을 배울 때 겪은 에피소드를 전해줬다.

"이곳 사람들이 말할 때면 반말하거나 욕을 했기 때문에 그대로 따라 배웠어요" 처음으로 여수에 나가서 전화카드를 사러갔을 때가게주인과 주고받은 내용이다. 가게 주인은 나이가 많은 노인이었다.

"카드 있어? 그랬더니 그 사람이 눈을 부릅뜨고는, 야! 임마! 네 아버지 같은 사람한테 반말해도 되냐? 말을 배우려면 좋은 말만 배워라고 했어요. 처음에 한국말을 배울 때 아무도 틀렸다고 지적해주는 사람이 없었어요."

알킬은 구두쇠처럼 살았다. 옷은 여수 아름다운가게에서 사 입고, 휴가차 네팔에 돌아갈 때도 아름다운가게에서 옷을 여러벌 사서 친척들에게 선물했다. 헌옷이지만 네팔에서 파는 새옷보다 품질이 훨씬 좋았기 때문이다.

어머니와 대학교에 다니는 두 동생이 자신만 쳐다보고 있는 것도 또 하나의 이유이다. 알킬은 여수에서 일하는 외국인 노동자 중 가장 성실한 사람 중 하나다. 휴일이면 여수이주민센터에 먹을 걸 싸들고 와 외국 친구들을 위해 음식을 만들어 먹이고 어려움이 있는 친구들을 보살핀다.

최소한의 용돈만 남기고 어머니한테 송금한 돈으로 네팔 제2도시인 포카라 외곽에 땅을 샀던 알킬은 그 땅을 판 돈과 그동안 모은 돈을 모아 수도인 카트만두에 3층짜리 집을 샀다. 네팔 수도인 카트만두 버스터미널 인근에 8천만원짜리 집을 샀다니 놀랍다. 네팔 화폐가치가 한국 돈 1/10이 안 되는 걸로 기억되니 대단하다.

더욱 놀라운 일이 있다. 집살 돈 3천만원을 사장님(안병진)한테 빌린 것이다. 떼어먹고 도망가 버리면 받을 방법이 없는데도 사람하나 믿고 빌려준 사장도 대단하고 "저를 믿을 수 있다면 돈 좀 빌려주십시오"라고 말한 알킬도 대단하다. "집을 사고 싶은데 돈 좀 빌려 달라"는 말을 꺼내기가 어렵자 이주민센터 박용환소장한테 부탁했고 사장님은 선뜻 돈을 내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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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무장인 안병두씨와 알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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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린 돈은 귀국하기 전에 다 갚을 수 있다. 다만 네팔 은행에서 빌린 돈 일부를 아직 갚지 못해 3개월 후에 디시 사장 곁으로 돌아와 돈을 벌어 갚을 계획이다. 원하는 집을 산 어머니는 너무 좋아하셨다. 동네사람들은 "잘될 나무는 어릴때부터 안다"라는 말을 했다고 한다. 한국 속담인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 본다"는 내용과 비슷하다. 5년 동안 기숙사에 있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밥을 해주는 할머니가 알킬을 보고 내린 평가다.

"말도 잘 듣고 일도 잘해서 예뻐요. 이녁 새끼들도 남의 나라가면 저렇게 고생허고 살텐디 예뻐라 해야제. 미운짓을 안해요. 이달 말에 네팔로 돌아간다고 그래서 서운해서 어쩔끄나 그랬더니 석달 있다 올께요 그래요."

다른 나라출신 외국인 노동자보다 한국말 배우기에 열심이고 붙임성이 좋은 알킬에 대해 사무장인 안병두씨가 평가해준 내용이다.

"사장님이 돈까지 빌려준 것은 본인이 잘하니까 그러죠. 책임감이 강하고 인내심도 많아요. 공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이해심도 많아요. 새로 들어오는 외국인 노동자들에게 국적을 불문하고 잘해요."

부엌에서 일하던 할머니가 설거지를 마치고 방안으로 들어와 대화에 끼어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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같은 방을 쓰는 스리랑카 친구들과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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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네 사람들은 외국애들이 오면 쟤들은 복이 있어 이집으로 왔다고 해요. 한번은 이런 일도 있었어요. 중국애가 온지 3일만에 아버지가 맹장염에 걸렸다는 소식을 듣고 밥도 안 먹고 고개를 푹 숙이고 있어 이유를 묻자 ‘아버지가 맹장염에 걸려 수술을 해야 한다‘며 ‘한달만 가불해달라‘고 해서 가불해줬어요.

어느날 다른 곳에서 일하는 친구가 돈을 더 준다고 하며 오라고 해도 ‘나는 사장님 공을 갚아야하기 때문에 안 간다‘며 더 열심히 일했어요. 양후이라는 중국애도 온지 한 달도 못돼 맹장염에 걸려 수술시켜 줬어요"

"사장님이 항상 고맙기 때문에 네팔오시면 제집에 주무시면서 구경하도록 해드리겠다"고 하는 알킬에게 "결혼은 언제할거며 애인은 있냐?"고 물었다.

"애인이요? 없어요? 하지만 내가 결혼한다고만 하면 네팔 여자들이 줄을 서요. 네팔에서는 결혼할 때 여자들이 돈과 금붙이를 준비해야하고 결혼식 음식도 전부 여자가 부담해요. 남자들은 몸만 가지고 결혼해요.힌두교를 믿는 사람들이 오죽했으면딸을 낳자마자 몰래 죽이겠어요? 지금은 변하고 있지만"

돈 벌어 한국과 네팔간에 무역을 하고 싶다는 그는 동생을 한국에서 공부시키려고 했지만 스폰서문제로 들어오지 못해 속상해한다. 자신의 진심을 믿지 못한 채 여동생이 불법노동자가 되어 버릴까 의심하는 당국이 야속하단다.

어려움을 극복하고 코리안 드림을 이룬 알킬에게 박수를 보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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