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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록도 한센인 1/3은 '작대기부대'였지"

일제시대 6400명→ 지금은 570명... 전남 고흥 한센인 마을

  • 입력 2014.08.10 17:49
  • 수정 2014.08.11 09:00
  • 기자명 심명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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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센병은 낫는다'

소록도 중앙공원 기원의 탑인 '구라탑(救癩塔)'에 적힌 문구다. 구라탑은 미카엘 천사가 창으로 한센균을 찌르는 모습을 형상화한 것이다. 이 탑에는 깊은 사연이 있다. 일제 강점기 소록도 병원장 중에 가장 악랄했던 원장은 4대 '수호 마사토원장'이었다. 그는 1933년 부임해 1942년 피살되기까지 9년간 재임하면서 자신의 동상을 세워 원생들에게 참배를 강요했다. 

▲ 국립 소록도 병원 중앙공원 기원의 탑인 구라탑(救癩塔)은 ‘한센병은 낫는다’는 문구가 쓰인 가운데 미카엘 천사가 창으로 한센균을 찌르는 모습을 형상화 했다.

이에 대한 한센인들의 원성은 하늘을 찔렀다. 마침내 원생 이춘상은 수호원장을 살해하고 자신도 재판을 통해 사형을 당했다. 그 후 193년이 지나 미카엘 대천사가 한센병을 박멸하는 모습을 형상화한 문구를 새긴 구라탑이 세워졌다. 

한국의 아우슈비츠 수용소...'소록도 갱생원'

▲ 소록도 자료관에는 소록도 갱생원시절 한센인의 아픈 역사가 고스란히 전시돼있다.

'고흥' 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곳이 있다. 바로 고흥 나로우주센터다. 고흥의 역사를 더 거슬러 올라가면 또 다른 명소를 빼놓을 수 없다. 소록도다. 이곳엔 일제강점기 나환자를 가둔 악명 높은 '소록도 갱생원'이 있었다. 지금이야 국립소록도 병원으로 이름이 바뀌었지만 말이다.

당시 소록도는 강제수용소나 바를 바 없었다. 그래서 한센인들은 이곳을 한국의 '아우슈비츠 수용소'라 불렸다. 그로부터 반세기가 흐른 지금 소록도는 한센인 회복자의 천국이 되었다.

고흥 도양읍과 거금도를 잇는 소록대교는 2009년 3월 개통됐다. 이후 2011년 12월 다시 거금대교가 두 번째 개통되었다. 고흥에 왔다가 이곳을 그냥 지나치면 진짜 후회한다. 특히 고흥반도의 끝자락인 소록도는 녹동항에서 1km가 안 되는 곳에 위치해 있다. 섬의 모양이 어린 사슴 닮았다 하여 소록도라 불린다. 섬의 면적은 3.68㎢로 여의도보다 2.2배 작다. 청정 자연환경과 해안절경이 빼어나다.

6일 소록도를 찾았다. 소록도 자료관 앞에 상사화가 만개했다. 푸른 입과 꽃이 평생 만나지 못해 서로가 사모하다 죽는다는 상사화는 어쩌면 나환자의 애환과 묘하게 닮았다.

▲ 소록도 자료관 앞에 상사화가 만개했다. 푸른 입과 꽃이 평생 만나지 못해 서로가 사모하는 상사화는 나환자의 애환을 묘하게 닮았다.
▲ 소록도 한센인 회복자들이 거주하는 생활 동사의 모습

증언에 따르면 일제시대 이곳에는 전국에서 수용된 6400여명의 나환자가 살았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 현재는 570여명이 남아 있다. 지금은 가장 젊은 40대 중반이 남아있으니 격세지감이다.

기자에게 소록도를 안내해준 윤아무개(69) 할머니는 19살 때 한센병에 걸렸다. 이후 여기서 남편을 만나 20살 때 결혼해 나주 현혜원에서 살다 소록도에서 여생을 보내고 있다. 그는 오래전 한센병 회복자가 되었지만 아직도 자신의 신분 노출을 꺼려했다. 그가 한센인이라는 것은 자식들 밖에 모른다. 이유는 이랬다.

"한센병이 옛날에 얼마나 무서워했나? 약이 개발돼 지금은 한센병이 없지만 밖에선 여전히 거부하니 내가 상처를 받아. 그래서 내가 한센병에 걸린 병력은 우리 아이들밖에 몰라. 낫긴 해도 내가 조심해야 제. 남에게 피해는 안 줘야지 그러잖아요?"

그는 매월 15만원의 한센인 '생활지원금'을 받는다. 하지만 정부가 한센인 회복자들에게 법적 보상을 해준 사례는 아직 한 번도 없다. 단지 일제시절 감금자 중 강제낙태나 단종을 당했던 사람들이 소송을 통해 일본으로부터 보상금을 받은 사례가 전부다. 한센병 환자들에게 무심한 국가의 맨얼굴은 여전하다.

소록도에 있는 김용덕(85) 할머니는 "소송에 승소해 일본 정부로부터 받은 돈에서 소송비용을 제외하니 4~5천만 원 남았다"고 밝혔다. 현재는 여러곳에서 정부를 상대로 강제낙태나 단종 관련 소송이 진행 중이다.

15만 원 생활지원금 주는 한국정부

▲ 국립 소록도 병원에 입구에 있는 한센인 부모와 자식이 생이별을 당해 한달에 한번 얼굴을 볼 수 있었던 수탄장의 모습.

특히 지난 4월 광주지법 순천지원 민사2부(재판장 유영근)는 한센인들이 국가를 상대로 제기한 국가배상 소송에서 '국가는 정관절제수술을 한 강아무개씨 등 9명에게 각 3000만원씩, 임신중절수술을 받은 이모씨 등 10명에게 각 4000만 원씩 배상하라'고 선고했다. 하지만 이에 불복한 정부의 항소로 2심 재판을 앞두고 있다.

국립 소록도 병원 오은정 계장은 "소록도 나환자는 현재 법적 생활지원금 15만 원을 받고 있다"면서 "소송은 병원 측에서 하지 않기 때문에 자세한 사항은 인권변호사에게 알아봐야 한다"고 전했다.

소록도 입구를 들어서면 '수탄장'이 나온다. 이곳은 나환자를 돌보는 '직원지대'와 나환자인 '병사지대'로 나눴던 경계선이다. 1950년~1970년까지 철조망이 자리 잡고 있었다. 갱생원에선 자식이 있어도 전염병을 우려해 나환자 자녀를 보육소에 격리해 생활케 했다. 부모와 자식은 한 달에 한번 면회가 허용되었다. 그래서 자녀와 부모는 도로 양 옆으로 갈라선 채 일정한 거리를 두고 눈으로만 혈육을 만나야 했던 탄식의 장소였다. 현대판 이산가족이었던 셈이다.

국립소록도병원은 1916년 일본 총독부 영에 의해 개원되었다. 일제는 1933년 소록도 섬 전체를 매수해 전국의 한센병 환자 수용계획을 세운 후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한다. 이들은 '조선나예방령'을 근거로 전국 부랑 한센병환자에 대한 강제모집을 실시해 소록도로 송치했다. 강제로 소록도에 감금된 환자들은 정당한 법적 절차는 물론 의사의 진단도 없이 끌려와야 했다.

더욱이 소록도 원장은 입원환자에 대한 막강한 '징계검속권'이 부여됐다. 그 내용을 보면 견책, 30일 이내 근신, 일주일 이내 금식, 그리고 30일 이내 감금을 시킬 수 있었다. 또 총독의 허가를 얻어 60일까지 감금을 연장할 수 도 있었으니 이로 인해 환자들은 재판을 받을 권리마저 박탈당한 채 아무런 저항도 못하고 순순히 병원 당국의 '철권통치'에 따라야 했다.

▲ 소록도 한센인들을 감금했던 감금실 모습 일제는 1933년 소록도 섬 전체를 매수해 전국의 한센병 환자 수용계획을 세운 후 대대적인 확장공사를 실시한다. 이들은 ‘조선나예방령’을 근거로 전국 부랑 한센병환자에 대한 강제모집을 실시해 소록도로 송치해 나환자들의 인권이 유린되고 짖밟혔다.
▲ 한센인 마을에서 악명 높았던 ‘검시실’은 해부실로 불린다. 이곳은 일제강점기에 일본인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정관수술과 시체해부를 했던 곳이다.

이후 1945년 해방을 맞아 원생들은 자치권을 요구했다. 하지만 이를 거부하는 자들에 의해 협상대표자 84명이 처참하게 학살당했다. 그날이 바로 8월 22이다. 이후 참사 56년 만인 지난 2001년 12월 유골를 발굴해 학살을 당했던 현장에 추모비를 세워 84명의 희생이 헛되지 않음과 지구상에 있는 한센 가족에 대한 이해와 온전한 인권회복을 소원하는 상징적인 기념비를 건립했다.

특히 한센인 마을에서 악명 높았던 '검시실'은 해부실로 불렸다. 이곳은 일제감점기에 일본인들이 한센병 환자들을 대상으로 정관수술과 시체해부를 했던 곳이다. 지금도 건물내부에 수술대와 검시대 그리고 세척시설이 그대로 보존되어 있어 당시의 소름끼치는 상황을 짐작할 수 있다.

사망자는 가족의 의사와 관계없이 우선 검시절차를 마친 뒤 장례식을 치를 수 있었다. 이후 시신은 구북리 뒤편 바닷가에 화장터에서 화장되었다. 이를 두고 소록도 환자들은 3번 죽는다고 한탄했다. 첫 번째는 한센병 발병이요, 두 번째는 죽은 후 시신해부요, 세 번째는 화장이었다. 당시 화장문화가 익숙지 않은 탓에 장례후 화장 당하는 자체는 공포로 받아들여졌다.

평양 출신 한센인 회복자 '김용덕 할머니'

▲ 소록도에서 기억력 좋고 똑똑하기로 소문난 김용덕(85세)할머니는 평화누리 동사(26-1)에 산다. 그의 고향은 이북 평양이다.1939년도 10살 때 평양에서 할머니의 손에 이끌려 소록도로 왔다. 할아버지와 결혼해 산지가 60년이 됐다.

소록도내 기억력 좋고 똑똑하기로 소문난 할머니가 있다. 26-1에 사는 평화누리 김용덕 할머니다. 그의 고향은 이북 평양이다. 1939년인 10살 때 평양에서 그의 할머니가 이곳에 데려다 주었다. 이후 소록도에서 결혼해 산 지 60년이 흘러 그 역시 할머니가 되었다. 할아버지는 파키슨병으로 걷지도 못하고 귀가 멀어 잘 듣지를 못한다.

할머니는 눈이 어둡다. 그 이유를 묻자 "당시 이곳에는 6400명 정도 살았는데 눈이 어두운 사람이 1/3정도가 있어 작대기 부대라고 했다, 영양실조로 녹내장이 왔는데 치료를 못해 눈이 어두워졌다"라고 말했다.

그는  "나같이 한 많은 세상을 산 사람도 없다"면서 "다 이남이 고향인께 편지 왕래도하고 물질적으로 동정도 받았지만 난 조실부모로 할머니 밑에 크다 이곳에 온후 아직 생사도 모른다"고 전했다.

"10살 때 여기로 와서 초등학교를 다녔어. 지금은 소록도가 좋은데 일제 때는 굶주리고 헐벗고 노동이 심했지. 그때는 1년에 한번 양력 설에 소한마리 잡아 6000여명이 먹었어. 더구나 한센병 약도 없었어. 돼지기름이 약이야..."

▲ 수탄장을 지나 국립 소록도 병원으로 가는 입구 해변길 데크목이 자연경관과 조화를 이룬다.

일본에게 보상을 받은 돈을 할아버지 친척에게 나눠줬다는 할머니는 소원이 뭐냐는 질문에 이렇게 말을 이었다.

"예수 잘 믿고 천국가면 좋고 이만큼 국가에서 잘해줬는데 더 바란다면 도둑놈이제. 내가 가장 하고 싶은 말은 해방되어 우리나라가 이만치 됐는데 서로 마음을 합해서 남북도 전쟁없이 통일됐으면 좋겠고, 국민들이 서로 합심하면 우리나라가 더 부강하지 않겠나 그 마음 뿐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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